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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의 여명-464화 (464/1,277)

##  464화

돌아오는 길은 고요했다.

빅토르와 소로킨은 말이 없었고, 오빠도 스마트폰으로 무언가 보고 있었다. 내가 조용히 생각할 시간을 주려는 것 같았다.

난 가지고 온 액자를 내려다보았다. 검은 새의 그림을 보면서도 달리 생각나는 건 없었다. 아무 생각 없이 붓을 움직였던 기억뿐이다.

다만, 이렇게 가만 보고 있자니 한 가지 알 수 있는 게 있었다.

미술에도 그리 재능은 없는 게 확실해.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타티아나.”

액자를 보며 실실 웃고 있자 오빠가 넌지시 불렀다. 이젠 말을 걸어도 되겠다 생각한 모양이다.

웃음 띤 얼굴로 돌아보니 오빠가 물었다.

“그 그림 뭔지 물어봐도 돼?”

새를 그렸다는 건 보면 알 수 있을 테니, 그걸 묻는 건 아닐 테지. 난 이 그림을 그린 미술 시간의 주제를 그대로 이야기했다.

“제가 되고 싶은 모습이었어요.”

“그 새가?”

“안 어울리나요?”

그렇게까지 이상하게 느껴지진 않는데, 오빠가 약간 황당해하는 것 같아서 이미지에 맞지 않는지 물어보았다.

오빠의 황당함은 당혹스러움으로 화했다. 그러더니 잠시 주저하고는 중얼거리듯 자기 의견을 말했다.

“솔직히…… 잘 모르겠네. 동물로 따지자면 너는…… 고양이 같은 게 아닐까 싶은데.”

“…….”

“아닌가?”

“스스로 생각해도 말도 안 되는 거 알죠?”

뭔가 틀에 박힌 정답을 말하고 싶었나 본데, 아무리 생각해 봐도 고양이는 오답이다.

난 스스로 되고 싶은 것을 고를 수 있다면 피아노의 재료인 스프루스 나무가 되고 싶었다.

음악학교 옆에 심어져 몇 십 년 동안 음악을 듣다가, 나중에 피아노가 될 수 있다면 그보다 더 바랄 것이 있을까.

하지만 이런 이야기를 지금 했다간 정말 이상한 애처럼 보일 게 분명했다. 안 그래도 카세트테이프에서 나온 노래 때문에 약간 불안해하고 있을 오빠에게 괜한 소리를 할 맘은 없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싱긋 웃자 오빠가 헛기침을 하더니 다시 이야기를 되돌렸다.

“아무튼 새라……. 지금도 새가 되고 싶어?”

“아뇨.”

“지금은 싫은 거야?”

“그것도 아니에요.”

“?”

오빠는 이해가 안 간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해할 수 없겠지. 난 전부 이야기해 줄 수는 없지만, 그래도 그녀에 대한 예우를 담아 말했다.

“새가 된 제 모습도 기억하고 싶을 뿐이에요.”

아직도 내가 여기에 있을 수 있는 게 어떤 기적의 발로인지, 나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그녀가 피해자가 아니라는 사실, 그리고 내가 그녀의 노래를 이해한 것처럼 그녀 또한 내 음악을 이해했으리란 믿음. 그러한 생각들이 모여서 내게 확신을 가져다주었다.

덕분에 난 이 그림을 보면서도 웃을 수 있었다. 그녀 역시 내가 웃길 바랐기에 이 기억을 넘겨주었을 테니까.

액자 유리를 슥슥 쓰다듬다가, 문득 생각이 나서 목걸이를 만져 보았다. 곁에서 날 바라보던 루슬란 오빠가 갑자기 생각났는지 중얼거렸다.

“사실 어머니는 그 목걸이를 네게 일찍 물려주려고 하셨어.”

내가 손을 멈칫하자 오빠가 이어 말했다.

“어머니도 건강이 좋지 않으시면서 왜 수호와 건강의 보석을 네게 주려고 하려는지 난 이해하지 못했어. 그런데 미리 줬다면 적어도 너는…….”

말끝이 서서히 흐려졌다. 난 물끄러미 루슬란 오빠를 올려다보았다.

집을 떠났던 내가 코시기나에서 혼수상태로 발견되고, 길게 지나지 않아 어머니도 돌아가셨다.

심적인 충격 등이 건강에 영향을 끼쳤을 확률도 다분하니 내 탓을 하고자 한다면 얼마든지 할 수도 있을 텐데, 아버지도 오빠도 그렇게 하지 않았다.

비록 이 가넷 목걸이를 놓고 한 번 오빠가 폭발한 적이 있긴 했지만, 그것도 내게 책임을 묻는 건 아니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난 지금은 조금이라도 빨리 내게 이 목걸이를 주었다면 내가 혼수상태에 빠지는 일도 없었을 거라 후회하고 있었다.

“…….”

무슨 말을 해야 할까.

목걸이와 관계없이 어차피 난 그 폐허로 떠났을 거라 말해야 하나.

하지만 그녀가 했던 행동을 이해하는 내가 후회하거나 사과할 수 없다고 하여 그 행동을 떳떳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그건 분명히 아버지와 오빠에게 상처가 될 행동이었다.

그렇다고 입에 발린 말들로 오빠를 안심시킬 수도 없다. 장난처럼 이젠 상관없는 일이라고 하는 건 모두를 기만하는 행위다.

난 후회가 목에 막힌 것처럼 인상을 찡그리고 있는 오빠를 바라보다가, 가만히 손을 뻗어 손등을 감싸 주었다.

따뜻한 온기가 합쳐지면서, 루슬란 오빠는 조금 편안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난 부드럽게 물었다.

“괜찮으시나요.”

“……괜찮아.”

오빠는 천천히 대답하며 미소를 지었다.

“새삼스럽지만…… 타티아나 네가 돌아와 줘서 기뻤어.”

“…….”

“네가 스스로 믿는 삶이 어디로 향할지 모르겠지만, 지금은 이곳이라고 해 줘서 고마워.”

어제 오빠가 문득 방에 찾아와서 내게 떠날 거냐고 물었던 건, 상상 이상으로 많은 고민 끝에 나온 물음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나도, 저렇게 말해 주는 루슬란 오빠에게 감사함을 느낀다. 내가 여기에 있을 수 있는 건 이렇게 있어 주길 바라는 사람들 덕분이었다.

어떻게 이야기할까 고민하다가, 약간 농담조로 말했다.

“제가 어딜 가겠어요. 굶어 죽을 거예요.”

열여섯에 집을 나와 봐야 고생밖에 더하겠는가? 난 이미 더 어렸을 때 해 본 기억도 있기 때문에 그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잘 안다.

그런데 루슬란 오빠는 그렇게 생각하지도 않는 것 같다.

“무슨 소리야. 연주회나 콩쿠르, 그리고 음반 판매로 번 돈이 있잖아. 개인 돈으로만 놓고 따지면 네가 나보다 부자일걸? 난 아직 그만한 돈을 벌어 본 적이 없어.”

오빠는 내가 경제적으로 독립이 가능할 거라 생각하는 것 같다. 내가 여차하면 떠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건 그 때문이었나?

난 가볍게 웃으며 양손을 들어 보였다.

“그 돈 거의 다 썼어요.”

“뭐? 진짜?”

“예. 향초 사느라.”

“……초를 대체 얼마나 산 건데?”

루슬란 오빠는 황당하다는 듯 되물었고 난 그냥 웃었다.

베르체노프 콘체른의 후계자이지만 아직 학생이라 돈을 벌어 본 적이 없을 오빠보다 내가 많은 돈을 번 건 사실이었다.

그리고 돈을 마구 써서 지갑이 비어 있지도 않았다. 내 씀씀이는 꽤 헤퍼져서 상트페테르부르크 콩쿠르의 상금으로 받았던 15,000유로는 거의 다 썼지만, 음반 판매 수익도 있었고 저번 연말 연주회로 받은 출연료도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렇지만 하나도 없다고 했다. 있으나 없으나 똑같았다. 내가 떠날지 말지를 결정하는 데에 돈은 아무런 영향도 안 주는 가치였으니까.

오빠는 빠르게 무언가 계산을 해 보는가 싶더니, 더 따져 묻지 않았다. 내가 왜 이런 말을 하는지 이해한 듯하다.

이제 진지한 이야기는 이쯤하면 된 것 같다. 난 배시시 웃으며 물었다.

“배고프지 않나요?”

“네가 그런 말 하는 걸 보니 정말 배고픈가 보네.”

“우리 점심 안 먹었잖아요?”

“그래…… 밖에서 뭐라도 먹고 들어갈까?”

오후 1시. 적당한 시간이긴 했다.

나와 루슬란 오빠는 같이 스마트폰을 들고 가까운 곳에 무언가 먹을 만한 것이 있는지 검색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서로 찾아낸 메뉴들을 보여 주고 의견을 모아 보기도 했다.

멀리 교외로 나온지라 가장 가까운 레스토랑도 1시간은 가야 등장하지만, 1시간 내내 메뉴를 고민해 봐도 즐거울 것 같았다.

그런데 즐거운 메뉴선정의 시간이 10분도 채 지나기도 전에, 빅토르가 우리 좌석 쪽을 돌아보더니 작게 말했다.

“아가씨. 죄송하지만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죄송할 건 또 뭐람? 죄송하다면 괜찮은 레스토랑이나 추천해 주었으면 좋겠는데요.

“무엇인가요?”

“미하일 표도로비치께서 기다리고 계신다는 연락이 왔습니다.”

“기다리신다니요?”

“방금 전 찾아오셨다고 합니다.”

머릿속에 떠다니던 파스타나 오믈렛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미하일 선생님이 찾아오실 줄은 알고 있었다. 깨어나자마자 연락을 드렸더니 내 몸이 좀 괜찮아지면 한 번 찾아오겠다고 하셨으니까. 그런데 그게 오늘일 줄은 미처 몰랐다.

살짝 급해졌다. 오늘은 밖에 나와 있으니 돌아가 달라고 말할 순 없었다. 난 내 걱정 때문에 찾아오신 미하일 선생님에게 절대 그렇게 못 한다.

빨리 돌아가야 할 텐데 그래도 4시간은 걸린다. 소로킨에게 과속을 하라 할 수도 없고, 그렇다면 내가 포기할 수 있는 건 느긋하게 점심을 먹을 시간 정도뿐이었다.

난 오빠에게 말했다.

“미안해요, 집으로 바로 가야겠어요.”

루슬란 오빠는 내 심정을 이해한다는 듯 키득거리며 웃더니 간식 바구니에서 젤리를 하나 꺼내 주었다.

“그러자. 이거 먹을래.”

결국 점심식사는 간식으로 바뀌었지만 이미 배고픔은 하나도 느껴지지 않았다.

***

집에 도착하니 오후 5시경이었다.

미하일 선생님에게 전화로 사정을 설명드렸더니 선생님은 응접실에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 천천히 와도 좋다고 말씀하셨다. 시간에 맞춰 도착만 하면 될 일이지만 난 선생님이 오래 기다리신다는 게 죄스러웠다.

차가 서자마자 빠르게 문을 박차고 나갔다. 물론 고생해 준 소로킨과 빅토르에게 감사 인사는 잊지 않았다.

“고마워요! 소로킨, 빅토르.”

“별말씀을. 그리고 뛰진 마십시오. 다치십니다.”

“가끔은 뛰시는 것도 좋죠.”

이렇게 극과극의 반응이 있을까. 소로킨이 막 빅토르에게 한소리 하는 걸 들으며 난 오빠에게도 말했다.

“다음에 더 이야기해요.”

“그래, 얼른 가 봐.”

시원하게 미소를 짓는 오빠를 두고 난 바로 저택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아직 몸이 완전히 괜찮아진 건 아니라서 몇 계단 안 되는데도 힘들다. 그래도 강도 높은 재활훈련을 한다고 생각하니 견딜 만했다.

“…….”

문을 열고 들어서자 네 개의 눈동자가 내 쪽으로 향했다.

“방금 발소리…… 설마 네가 뛴 게냐?”

아버지는 상상도 못한 광경을 봤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타티아나.”

그리고 안경을 쓴 미하일 선생님은 언제나 그랬듯 옅은 미소를 지으며 내 이름을 불렀다.

2년 전, 여기에 와서 다시 나와 피아노를 연결시켜 주셨던 분. 그 후로도 계속 날 지도하고 또 피아노 외적으로도 인격적으로 많은 도움을 주셨던 분.

일주일이나 걱정을 시켜 드렸다가 이렇게 마주하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타티아나. 괜찮으냐?”

“예…… 괜찮……아요.”

“심호흡하거라.”

시키는 대로 심호흡을 했더니 거칠었던 호흡이 서서히 차분해졌다.

호흡과 함께 제정신을 차리고 나서야 난 걱정 가득한 두 분께 이런 모습을 보여 부끄러워졌다. 미쳤나 정말, 왜 안 하던 짓을 하고 그래?

아버지가 약간 나무라셨다.

“어딜 갔다 오나 했더니…… 천천히 오라 하지 않았느냐? 위험하게 계단을 뛰다니.”

“죄송해요, 너무 늦어서.”

이미 4시간이나 걸렸으니 몇 초 더 늦는 건 아무것도 아닐지 모르겠지만, 내게 있어선 그렇지 않았다.

어쩔 수 없었다는 건 아버지도 안다. 그리고 내가 뛸 수 있다는 것 자체를 긍정적으로 봐 주신 것 같았다.

“아무튼…… 네 체력이 꽤 돌아왔다는 건 알겠구나. 어떻소? 선생.”

“그리 보이는군요. 다행입니다.”

미하일 선생님도 웃으며 답하셨다.

아버지는 앞에 놓인 찻잔을 들고 한 번에 다 마시고는, 자리에서 일어나셨다.

“난 이만 자리를 피해 주도록 하지. 이야기 나누시오.”

“고맙습니다.”

잠시 후 아버지가 응접실에서 나가시고, 이곳엔 선생님과 나 둘만 남았다.

난 멀찌감치에서 오도카니 서 있었다.

미하일 선생님이 오셨다는 연락을 받았을 땐 1초라도 빨리 갈 생각뿐이었고, 그 때문에 뛰기까지 했다. 하지만 정작 도착해선 이렇게 망설이는 마음은 대체 어디서 나오는 건지 모르겠다.

괜히 숨을 몰아쉬지 않도록 짧게 끊어 쉬면서 생각을 정리하길 몇 초, 결국 선생님이 웃으며 손짓했다.

“이리 앉으렴.”

“예…….”

난 그 손짓에 이끌리듯 선생님의 맞은편 소파에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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