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65화
나제즈다가 따뜻한 허브티를 가져다주었다. 난 조심스레 찻잔을 들어 목을 축였다. 어쩔 줄 몰라 하고 있던 기분도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미하일 선생님은 가만히 날 지켜보시더니 빙그레 웃었다.
“몸은…… 생각보다 괜찮아 보이는구나.”
“예, 빨리 회복하고 있어요.”
방금 계단을 뛰어올라오기까지 했으니 지금 내가 얼마나 좋아졌는지 더 말할 필요도 없었다.
난 곧바로 선생님이 듣고 싶어 하실 복귀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오래 쉬진 않을게요. 내일 당장 월요일이니까…… 적어도 수요일쯤엔 나갈 수 있도록…… 그렇게…….”
“아니, 너무 내게 그럴 필욘 없다. 타티아나.”
“선생님께요……?”
약간 횡설수설하고 있는데 미하일 선생님은 엉뚱한 반응을 보이셨다.
무슨 말씀이신지 몰라 고개를 갸웃하자 선생님이 미안하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당장 내일이라 하지 않고 수요일을 말하는 것을 보니 나름대로 여유 있게 휴식 스케줄을 생각해 두고 있는 것 같은데, 괜히 급해질 필요 없단다.”
“…….”
내가 죄송함을 느끼고 있다는 걸 분명히 느끼셨나 보다. 그러니 괜히 여유를 잃지 말라는 말씀이다.
솔직히 미하일 선생님에게 어떻게 죄송하단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는 건 사실이었다. 그 때문에 빨리 복귀 이야기로 넘어가려고 했던 것 같다. 나도 모르게 한 것이긴 하지만, 이래선 안 될 일이었다.
조금 더 진지한 표정으로 테이블을 내려다보자, 미하일 선생님은 그럴 건 없다는 듯 경쾌하게 웃었다.
“하하, 내가 오늘 온 이유도 사실 네가 급하게 내일 등교하겠다고 할 것 같아서였는데…… 오늘 보니 그럴 필요는 없겠구나.”
갑자기 무슨 일로 찾아오셨나 했더니 역시 내가 급하게 움직일까 봐 걱정하셨던 것이다. 성급하게 굴지 않은 건 정말 잘한 선택이었다.
다시 고개를 드니 미하일 선생님이 따뜻한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다행이구나. 타티아나.”
“……죄송해요.”
“이제 와서 그럴 건 없단다.”
한 달 전에 제자를 잃으시고, 난 얼마 전에도 쓰러졌었다. 그런데 이번엔 일주일간 혼수상태까지……. 저렇게 편히 말씀하시고 계시긴 하지만 미하일 선생님이 얼마나 걱정하셨을지 상상도 안 간다.
그래도 선생님은 날 믿어 주신다. 이번에도 찬찬히, 동요하거나 서두름 없이 내게 도움이 되어 주려 하셨다.
“여유 있게, 그리고 충실하게 회복하는 데에만 전념하거라. 넌 그전에도 한 번 쓰러진 적이 있어. 기억하지?”
“예…….”
“너도 모르는 사이 몸 안에 누적된 피로가 많을지도 모른단다.”
난 고개를 끄덕였다. 필요하다면 조금 더 쉬더라도 이번에 확실하게 건강을 되찾아야 했다.
미하일 선생님은 내가 잘 알아들었다고 생각하시는지 잠시 지켜보시다가, 다음 이야기를 꺼냈다.
“그런데…… 그간 누적되어 있던 다른 피로는 해결했는지 모르겠구나.”
이번에 말씀하시는 피로는 육체적인 피로가 아니었다.
그동안 내가 집착해 왔던 것들, 그리고 거기에서 쌓이는 정신적인 피로.
미하일 선생님은 바로 그것이야말로 근본적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고 계셨다. 여태껏 모르셔서 아무 말도 하지 않으셨던 게 아니다.
선생님은 잠시 찻잔을 들었다가, 다시 놓으면서 말씀하셨다.
“네 친구들에게 들었단다. 네가 쓰러지기 직전에 어떤 연주를 했었는지.”
“…….”
“누가 어떤 말을 했는지 자세히 말해 줄 필요는 없겠지. 하지만 어떤 아이는 네가 도발을 무너뜨렸다고 했고, 어떤 아이는 자기 자신을 증명하는 연주를 했다고 말했다.”
도발은 한승우의 연주를 말하는 것일까. 아마 그렇겠지. 그리고 내 자신을 증명했다는 것도 비슷했다.
다른 친구들이 보기에도 그렇게 보였구나. 저번에 친구들이 찾아왔을 땐 미처 물어보지 못했던 감상이 선생님의 입에서 이렇게 나오니 색다른 기분이 들었다. 아마 이 감상들이야말로 내게 직접 말하는 것보다 훨씬 직접적인 감상들이겠지.
그중엔 조금 관념적인 감상도 있었다.
“그리고 어떤 아이는 네 손이 어떤 초월적인 부분에 닿았고, 그 때문에 잠든 것이라 했지. 그걸 이해할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에.”
“초월적인…… 부분이요?”
“피아니스트로서의 한계를 말한 게 아니었을까 싶구나.”
그리고 그 감상은 관념적이었지만, 내가 체험한 느낌을 굉장히 직접적으로 묘사하고 있었다.
그때, 난 눈을 감은 상태에서도 정확하게 모든 건반과 해머를 느낄 수 있었다. 감각을 제대로 느낄 수 없는 상태에서도 피아노만큼은 내 몸인 것처럼 다룰 수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일반적인 체험은 아니었다. 난 피아노라는 악기에 매달리면서 몇 번이나 실력이 계단을 오르는 느낌을 받아 본 적이 있지만, 이 정도로 강렬하고 완전해지는 기분은 느낀 적 없었다.
미하일 선생님이 재차 물었다.
“어떻게 생각하는지 듣고 싶구나. 그 친구의 의견에 대해.”
굳이 말하자면 한계를 뛰어넘은 게 맞겠지. 자유롭게 피아노를 다룰 수 있는 영역에 난 손끝을 대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게 초월적인 부분이라고 말하자니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아무래도 조금 부끄럽다.
프란츠 리스트의 초절기교 에튀드transcendental etude를 연주할 수 있다고 해서 정말 인간을 초월할 수 있는 건 아니다. 그 곡은 인간이 쓴 인간에게 주어진 곡일 뿐이고 초월이란 그저 감각적으로 쓴 단어일 뿐이다.
나는 제대로 된 연주자가 되려면 거쳐야 하는 부분에 이제 간신히 올라선 것 같다는 정도면 충분했다.
그 후로 아직 피아노를 쳐 본 적도 없었고.
“아직은 잘 모르겠어요.”
“글쎄, 내가 생각하기엔 네가 구세프와 계속 노력했던 것이 결국 결과를 내지 않았나 싶은데.”
미하일 선생님은 무언가 기대하는 듯한 눈빛이었다. 그러실 만도 했다. 난 2주 넘게 매달렸던 구세프 선생님과의 레슨을 떠올렸다.
도움이 된 건 확실했다. 그 레슨은 다시 한 번 소나타의 형태를 분명하게 연습시켜 주었고, 덕분에 난 한승우의 연주를 듣자마자 더 나은 해석을 떠올리고 그대로 피아노로 옮겨 연주할 수 있었다. 눈을 감고도 문제없이 연주할 수 있었던 건 레슨의 도움이 컸다.
“예,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레슨이 없었다면 곡을 그렇게 연주할 수도 없었겠지요.”
잠시 무언가 생각하시던 선생님은 조심스레 내게 물었다.
“곡에 대해 이젠 알겠구나. 그렇다면…… 나나 구세프를 만나기 전, 그러니까 기억을 잃기 전에 널 가르친 선생도 이젠 기억할 수 있겠지?”
“…….”
“이름이 기억난다면 말해 주면 좋겠구나.”
놀라진 않았다.
선생님은 4시간이나 기다리셨고, 내가 응접실에 왔을 땐 아버지와 이야기 중이셨다. 당연히 내 상태에 대한 이야기가 오갔을 테니 내 기억에 대해 알고 계신 미하일 선생님에게 기억을 되찾았단 이야기가 전해지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내가 되찾으려 했던 해석에 대해 물어보시는 건 바로 답하기 조금 어려웠다.
“제 기억에 대해 들으셨나요?”
“그래. 유리 알렉세예비치가 말해 주었지. 네가 모든 기억을 되찾았다고.”
미하일 선생님은 순수한 축하의 미소와 함께 그런 말씀을 하셨다.
“난 네 연주가 네 정신을 완전하게 했으리라 짐작하고 있지만…….”
말을 이어 나가던 선생님은 약간 멋쩍다는 듯 목을 뒤로 빼시며 웃었다.
“피아노 선생이 그런 말을 한다는 건 솔직히 너무 교만한 일인 것 같구나. 하하하.”
피아노 덕분에 기억을 찾았다는 말은 그렇게 들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난 피아노가 아니었으면 절대 이렇게 되진 않았으리라 생각한다.
그녀는 내가 어떻게 살고자 하는지 믿지 못하기에 계속 지켜보았을 테고, 난 과거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 채 그저 그녀가 바라는 삶을 살아 나가야만 했겠지.
그녀가 날 완전히 믿을 수 있었던 건 내가 과거를 똑바로 마주하고도 거기에 집착하고 치우쳐지지 않고 보다 나아지려 노력했기 때문이다.
말로는 절대 온전히 전할 수 없었던 것들을, 음악은 가능케 했다.
“전…… 선생님 말씀이 옳다고 생각해요.”
“그렇게 생각한다면 다행이구나. 그래서, 기억해 낸 곡에 대해선?”
잠시 고민했다.
난 과거의 해석을 훨씬 더 발전시켰다. 신체적으로 정말 불리함이 많았지만 쇼팽 소나타 1번는 내 테크닉으로 모자람이 없어 거의 자유롭게 연주할 수 있기도 했다.
박 교수님에게 이 연주를 들려 드리고 싶다는 마음이 없진 않다. 순수한 음악가로서 자랑스럽게 이야기하고 싶다.
하지만 아무리 그런 충동이 들더라도 해선 안 된다. 그건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 내 죄는 그런 식으로 씻을 수 있는 게 아니었고, 대체 몇 명을 혼란에 빠뜨리게 할지 모른다.
그리고 반대로 그 해석을 어디에서 사사했는지 미하일 선생님에게 말씀드리는 것도, 내가 넘어선 안 될 마지막 선이기도 했다.
난 지금 보라색으로 남아 있었다.
“절 가르친 분의 성함은…… 말씀드려도 아마 모르실 거예요.”
“……그래.”
약간 회피하듯 말하니, 미하일 선생님은 두 번 묻지 않았다. 선생님 입장에서 깊게 캐묻기 어려운 부분이긴 했다.
대신, 선생님은 현재 내 지도 선생님으로서 하셔야 할 질문을 던졌다.
“타티아나.”
“예. 선생님.”
“네 꿈은 변하지 않았다고 생각하니.”
난 선생님들 앞에서 세계를 위한 최고의 피아노 연주자가 되고 싶다고 말한 적 있었다.
선생님은 기억이 돌아왔는데도 거기엔 변함이 없는지 묻고 계신다.
약간 변하긴 했다. 조금 더 확실하게.
“전 그것이 이제 꿈이 아니라 운명이라고 생각해요.”
“…….”
“전 운명에 다가가고 있어요.”
이제 그건 불안하고 두루뭉술한 꿈 같은 것이 아니라, 내게 주어진 운명이다. 난 그렇게 생각했다.
이전엔 운명이라는 것이 내 위에 존재하고 있다고 생각하며 체념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이젠 운명이 분명 닿을 수 있는 저 앞에 있다는 걸 안다. 난 그곳을 향해 가겠지.
선생님의 질문에 대한 대답이라기엔 쓸데없이 신학적인 무게가 실린 대답이었는데도, 미하일 선생님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셨다.
“좋은 대답이구나.”
아마 내가 그리 말할 거라 예상하신 것 같기도 하다.
“내가 보기에 넌 변하지 않았구나. 아니, 그게 당연한 걸까.”
“당연한 일이라 생각해요.”
“하지만, 약간의 색은 변할 수밖에 없겠지.”
난 내 자아를 분명하게 유지하고 있으니 변하지 않았다. 하지만 자아가 그대로라 하더라도 변하는 것들은 있었다.
미하일 선생님은 그 부분들을 말로 듣고자 하지 않았다. 선생님은 손을 뻗어 응접실 옆에 있는 그랜드 피아노를 가리켰다.
“타티아나, 연주할 수 있겠니.”
“지금이요……?”
“그래. 지금.”
약간 주저했다. 난 쓰러졌다가 일어난 후로 아직 한 번도 피아노를 연습하지 않았다. 갑자기 선생님 앞에서 제대로 연주할 수 있을지 걱정이 든다.
그러나 음악가의 대답을 듣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다면, 가만히 있을 순 없다.
“…….”
2년 전이 생각난다. 그때도 난 엉망진창으로 제대로 피아노 연습도 하지 않은 채 미하일 선생님의 요청에 따라 피아노 앞에 앉았지. 그리고 있는 그대로의 내 혼란스러움과 필사적인 마음을 드러냈고, 선생님은 날 중앙음악학교로 데리고 갔다.
그때서야 비로소 난 제대로 피아노와 마주할 수 있었다.
마음의 준비는 금방 완료되었다. 하지만 손이 준비되지 않았다.
“잠시만요. 손톱이 너무 길어서…….”
“손톱깎이라면 나한테 있단다.”
방에 가서 손톱을 정리할 도구들을 가지고 오려는데, 미하일 선생님이 안주머니에서 작은 케이스를 꺼냈다. 거기엔 손톱깎이와 손톱 정리용 줄이 들어 있었다.
생각해 보니, 가짜 깁스를 풀었던 날에도 이랬었지. 웃음이 나왔다.
“자. 여기.”
“…….”
“내가 해 주련?”
그때 추억을 기억하는지 미하일 선생님도 웃음기가 실린 목소리로 물었고, 난 고개를 끄덕였다. 선생님에게 과한 어리광을 부리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지금은 부탁드리고 싶었다.
선생님의 옆자리에 가서 손을 내밀었다. 조심스레 손을 잡는 감각과, 곧이어 또각또각 하는 소리가 들렸다.
간질간질하다. 하지만 그 소리와 함께 난 피아노 연주자로서 준비되어 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어떤 곡이든 할 수 있을 것 같다.
알맞게 손톱을 잘라 내고, 줄로 매끈하게 정리도 마쳤다. 이런 일을 부탁드린 게 정말 죄송하지만, 죄송한 만큼 연주로 보답해 드리면 될 일.
난 손톱을 한 번 슥 매만져 보고는 소파에서 일어섰다.
“바로 시작할게요.”
“그래.”
“어떤 곡이 좋을까요?”
“네 마음대로 하려무나.”
손을 휘휘 젓는 선생님을 보며 난 싱긋 웃었다.
그리고 난 열흘 만에 피아노 앞에 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