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66화
미하일은 타티아나의 피아노를 기억한다.
처음 이 응접실에서 만났을 때 쳤었던 차이코프스키부터 시작하여 쇼팽, 이후 하이든과 슈만 등 그녀의 레퍼토리는 무궁무진하게 넓었고 미하일은 그 모든 것들을 거의 다 들어 보았다. 모든 음악이 뇌리에 선명했다.
그래서 미하일은 타티아나가 무엇을 원했는지, 또 무엇을 포기했는지 어렴풋하게 이해하고 있었다.
“…….”
늘 걱정이었다.
타티아나는 모범적인 연주자였다. 늘 자신의 음악을 찾아 고민했고, 때론 목표를 위해 기다릴 줄 아는 신중함까지 갖췄다. 좋은 연주자가 지녀야 할 정신적 강인함이 거의 완성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하지만 사람의 일에 완전함이란 있을 수 없었고, 타티아나 역시 사람이니만큼 시간이 흐르면서 지쳐 갔다.
겉으론 드러내지 않고 씩씩하게 피아노 앞에 앉지만, 미하일은 그녀가 서서히 체념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길은 바로 들었다. 미하일은 그 끝에 정상이 위치하고 있음을 직감했다. 하지만 정상은 너무 높고 험했다.
미하일은 타티아나가 험로를 오르는 모습을 걱정스레 지켜보면서 잘 하고 있다고 응원을 할 수도 없었다.
혹시라도 그 소리를 듣고 타티아나가 뒤를 돌아보다가 다리에 힘이 풀리기라도 할까 봐.
피아노 선생으로서 조언을 해 주고 싶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미하일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게 후회스럽고 미안했다.
타티아나가 쓰러져 혼수상태에 빠지고 난 뒤 미하일이 사흘가량 교편을 잡지 못했던 건 그런 후회가 너무 무거웠기 때문이었다.
“…….”
그런데 이렇게 손 놓고 있으면 안 되겠다 싶어서 타티아나의 친구들에게 마지막 연주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 그 친구들의 평은 예상했던 바와는 사뭇 달랐다.
모든 이야기를 종합해 보자면, 타티아나는 피로와 불가능의 벽에 짓눌려 쓰러지지 않았다. 그녀는 마지막 건반을 누를 때까지 완전한 확신과 지배로 음악을 다루었다.
미하일은 음악에 대한 평들을 믿고 기다렸다. 타티아나의 친구들 역시 수재들이다. 다 같이 잘못 들었을 리는 없었다.
그리고 일주일 만에 타티아나는 다시 고개를 들었다.
혹시나 염려했던 우울함이나 자기혐오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타티아나는 지금까지의 불안함을 걷어 버린 맑은 눈으로 앞을 직시했다.
‘……힘내거라.’
원래 연주를 시킬 생각은 없었다. 피아노 선생에 앞서 어른으로서, 겨우 이틀 전에 혼수상태에서 깨어난 아이에게 할 말은 푹 쉬라는 말뿐이다.
하지만 미하일은 이제 피아노가 운명이라고 말하는 연주자를 앞에 두고 이야기만 나눌 수 없었다.
지금 타티아나가 어디까지 올랐는진 잘 모르겠다. 하지만 미하일은 그걸 확인해야만 했다.
“아하하, 스케일 연습도 한 번 안 해 봤는데…….”
타티아나는 피아노 앞에 앉더니 그제야 중얼거렸다. 손톱을 보아하니 정말 열흘 만의 연주인 것 같은데, 바로 하려니 살짝 자신이 없는 모양이다.
하지만 타티아나는 미하일과 눈을 마주치고는 스스럼없이 웃었다.
“그래도 지금 이 그대로…… 보여 드릴게요.”
혼자서 연습하는 시간을 가져서 완벽성을 기하기보다는 있는 그대로, 자신이 무엇을 보았고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들려주겠다는 태도.
미하일은 2년 전을 떠올렸다. 그때도 타티아나는 완벽하게 준비되지 않은 상태로 피아노 앞에 앉아 연주를 선보였다.
한 번은 미하일을 설득하기 위해, 그리고 또 한 번은 자신의 아버지에게 자신의 레종 데트르를 증명하기 위해.
“들어 주세요.”
그 말을 끝으로, 넓디넓은 응접실에 순간적으로 정적이 내려앉았다.
환한 샹들리에가 약간 어두워진 것 같다는 착각마저 들었다. 시야 주변이 멀어지고 타티아나와 그녀 앞의 그랜드 피아노만이 보였다.
타티아나가 피아노 앞에 앉은 순간, 이 응접실은 연주회용 홀이 되었다. 실제로 그런 용도로 지어지기도 했을 터.
그녀는 머뭇거림 없이 손가락을 건반 위로 내렸다.
“…….”
감미롭게 흐르는 단선율. 그 밑으로 은은한 리듬이 둥실 떠오른다.
쇼팽의 마주르카 op.33의 4번째 곡. 나단조.
미하일은 타티아나의 선곡에 조금 놀랐다. 계속 곁에서 레슨을 하며 레퍼토리를 봐 온 미하일은 타티아나가 마주르카를 잘 연주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간간이 연습으로라도 연주할 만했는데, 타티아나는 쇼팽을 그토록 좋아하면서도 쇼팽의 곡들을 마음껏 연주하지 못하고 어렵게 여기는 듯했다. 타티아나가 기억하고 있는 과거의 해석들은 유독 쇼팽을 연주할 때면 그녀를 괴롭히곤 했다.
그런데 지금 타티아나는 언제 자신이 마주르카를 피했냐는 것처럼 여유롭게 연주에 임했다.
그렇게 선곡에 놀란 미하일은 연주를 몇 초 정도 듣고는 이번엔 거의 경악했다.
그녀의 연주는 한층 더 깊이 있고 명료해져 있었다.
정말 열흘 만에 병상에서 일어난 연주자의 소리인가 싶었다. 직접 손톱을 다듬어 주었는데도 믿을 수 없을 정도였다.
그래도 선생으로서 감탄만 하고 있으면 안 된다. 미하일은 조금 더 집중해서 타티아나의 음악에 빠져들었다.
“……음.”
타티아나의 손이 건반을 쿡 찍으며 떨어졌다가, 다시 좌우로 까딱였다.
마주르카는 단선율과 함께 단순한 리듬으로 이루어진 곡이지만 그 때문에 더더욱 제대로 된 음악성을 끌어내기 어렵다. 숙련된 연주자들도 까딱하면 아마추어들과 격차를 별로 벌리지 못하게 되는 게 바로 마주르카다.
하지만 타티아나는 너무나 가볍게 숙련자의 반열에 발을 디뎠다.
건반 하나를 눌러도 그 음색이 놀랄 정도로 감미롭다. 그리고 연달아 건반을 누르니 음표들이 춤추기 시작했다.
원래 그녀는 이런 리듬을 다루는 데에 굉장한 재능을 지니고 있었다. 단지 이 리듬에 음색을 입히는 데 애를 먹고 있었고, 나중엔 연주 자체에 상처를 입기도 했었다.
그러나 이젠 그 어떤 부분도 힘들어하지 않았다.
“…….”
바로 저번 위클리 연주회 때 스크리아빈만 하더라도 타티아나의 음악은 서서히 침잠하고 있었다.
음산한 노랫소리. 차가운 물속으로 빠져드는 피아노를 끌어안고, 그러면서도 놓지 않는 연주자의 심정을 미하일은 완전히 이해한다고 말할 수 없었다. 그저 그 어둡고 강렬한 선율에서 불길함을 느꼈을 뿐이다.
하지만 이제 그 불길함은 찾아볼 수 없었다.
‘색이…… 바뀌었군.’
보다 자유로워진 색채감. 타티아나는 편안하게 연주를 이어 나갔다.
본래 그녀는 필사적으로 따라 하고자 하는 음색이 있었고, 구세프에게 레슨을 받은 뒤엔 자신의 목소리에서 음색을 가져와 모사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타티아나가 아름답게 그리는 음색은 그 어떤 것도 아니었다. 미하일은 그녀가 그 누구도 따라 하고 있지 않음을 느꼈다.
마주르카는 춤곡이었다. 그리고 이를 더더욱 선명한 이미지로 다가오게끔, 연주자는 다른 등장인물들을 등장시켜 곡에 맞추어 춤을 추도록 할 필요가 있었다. 마치 소설을 써 내려가듯, 타티아나는 그러한 이미지화에 굉장히 능숙한 연주자였다.
하지만 지금 그녀의 연주엔 다른 그 누구도 등장하지 않았다. 19세기 시절의 남녀는 필요 없었다. 다른 누가 아닌 타티아나 본인이 홀에서 춤을 추는 주인공이다.
타티아나의 연주는 허구의 소설에서 벗어나 있었다. 음악가가 아니라면 이 또한 허구가 아니냐고 묻겠지, 하지만 미하일은 당당하게 말할 수 있었다. 이 정도의 실존에 다다른 음악은 결코 허구 같은 것이 아니라고.
‘저 아이가 원래 이런 연주를 했었던가.’
미하일은 기억을 돌이켜 보았다. 구세프에게 레슨을 받기 전엔 그랬던가? 하지만 그때도 타티아나의 피아노 소리엔 간절함과 필사적인 감정들이 들어가 있어서 이렇게 자유롭지 못했다.
지금 이 연주는 타티아나가 찾아낸 길이자 동시에 과실이었다.
가벼우면서도 무거움을 잃지 않는 신묘한 아티큘레이션. 거기엔 미하일이 가르친 터치와 구세프의 객관성, 그리고 타티아나가 지니고 있던 특유의 리듬 감각, 그 모든 것이 드러나 있었다.
미하일은 며칠 전 에르네스트와 나누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타티아나의 손끝은 초월적인 부분에 닿았습니다. 그 촉감을 이해하려면 시간이 필요하겠죠. 이런 말 죄송하지만…… 전 그 애가 부럽습니다. 미하일 선생님.’
쓰러진 친구를 보고 어떻게 부럽다고 말할 수 있을까. 미하일은 당시 에르네스트의 평을 믿으면서도 사실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진 못했다.
하지만 타티아나의 연주를 직접 듣게 된 지금, 미하일은 에르네스트가 정말 진심을 말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부럽다고 생각할 만도 했다.
점잖게 내려앉는 루바토에서 타티아나는 사색을 지어내지 않고 정말로 사색한다. 산뜻해야 하는 꾸밈음에선 웃음소리를 터뜨리지 않고 작게 눈웃음만 짓는다.
단순히 테크닉이 어느 한계를 초월했다고 해서 이 정도로 음악이 고급스러워지진 않는다. 타티아나는 다른 누가 가르쳐 주어선 결코 터득할 수 없는, 음악 자체에 대한 이해를 직접 체득한 것 같았다.
이 정도로 수준 높은 음악을 저 나이 대에 구사하는 건 정말 대단한 일이다.
“…….”
첫 주제를 반복하며 홀을 두 바퀴 돌고 서서히 잦아들던 음악은 사단조로 변화하며 조금 더 강렬하게 뛰놀았다.
타티아나는 페달을 아낌없이 사용했고 음악에 자신 있게 양감을 부여했다.
미하일은 경탄했다. 음악의 수준뿐만 아니라 테크닉도 더 좋아져 있었다.
타티아나는 훨씬 가볍게 건반을 터치하면서도 피아노 전체에서 음을 뽑아내고 있었다.
프랑스에선 현을 끊어 놓기도 했다고 했었는데, 이젠 정말 손가락 하나로 피아노 전체를 무너뜨려 버릴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럴 일은 없겠지.’
그땐 사정이 있었을 뿐이고, 타티아나는 늘 피아노를 소중하게 다루니까.
다시 나단조, 사단조로 변화했던 음악은 응접실 전체를 꽉 채우다가, 일순간 피아노로 빨려 들어가며 작은 새처럼 지저귄다.
나장조의 피아니시모. 피아노를 살짝 어루만지던 무언가가 그대로 귓가에 스치고 지나가는 듯하다. 미하일은 자신도 모르게 힘이 들어가 있던 목 근처에서 힘이 풀리는 것을 느끼며 의자에 조금 더 대충 걸터앉았다.
그간의 불길함과 걱정 등은 이 음악 앞에서 깨끗하게 사라졌다. 앞으로도 타티아나에게 물어볼 것들이 많겠지만, 오늘 건강한 모습을 확인하고 이 음악을 듣는 것만으로도 만족했다.
우아한 춤곡이 팔랑거리며 날아드는 걸 다시 느끼며 미하일은 눈을 감았다. 이 마주르카의 흐름을 알고 있어도, 앞서나가지 않고 그저 음악 자체에 귀를 맡겼다. 시간의 흐름조차 느낄 수 없었다.
“…….”
“선생님?”
“아.”
연주가 끝나고도 한참 동안이나 그 여운에 잠겨 있던 미하일은 타티아나의 목소리를 듣고 나서야 음악에서 빠져나와 눈을 뜰 수 있었다.
고개를 드니 타티아나는 묘한 시선으로 머뭇거리고 있었다.
혹시 주무셨냐고 묻고 싶은데, 그랬다간 실례일까 봐 차마 묻지 못하는 표정이었다.
미하일은 나지막이 웃으며 안경을 고쳐썼다.
“네 연주가 귓가에 길게 남더구나.”
막연하던 표정에 미소가 깃든다. 하지만 그래도 약간 바라는 것이 있는 기색이었다. 타티아나는 미하일로부터 평가를 받고 싶어 했다.
사실 음악 자체에 대한 평가엔 그리 예민하게 굴지 않는 성격이면서도, 타티아나는 이렇게 종종 자신의 선생에게 이야기를 듣길 바라곤 했다. 그것만으로도 어떠한 위안과 동기를 얻는 것 같았다.
미하일은 방금 전 연주를 되새기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2년.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이다. 그동안 미하일은 처음부터 타티아나의 연주를 들어 왔었고, 그 후로도 그녀가 어떤 길을 걸었는지 똑똑히 봐 왔다.
아직 어리고 학생이지만, 훌륭한 연주자이자 구도자인 타티아나에게 해 줄 말은 하나뿐이었다.
“이해하려 노력하고, 또 이해를 구하려 노력한 끝에 네 해석을 찾아냈구나. 좋은 연주였다. 타티아나.”
타티아나의 눈에 놀라움이 깃들었다가, 다시 호선을 그리며 휘어졌다.
미하일이 손을 내밀자 타티아나가 그 손을 맞잡았다. 두 사람은 그렇게 악수하며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