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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의 여명-467화 (467/1,277)

##  467화

이해했다는 말은 쉽게 사용하기 힘든 말이다.

내가 무언가를 이해했다고 생각하고 있어도, 그게 혼자만의 착각인 경우도 굉장히 많은 까닭이다.

난 그녀와 나름대로 서로를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지금도 최소한의 객관화와 경계는 늦추지 않고 있었다.

그런 내게 미하일 선생님의 한마디는 따뜻한 격려로 다가왔다.

선생님은 나와 악수한 채로 웃었다.

“널 학교로 데려가려 했었던 때가 기억나는구나.”

“저도 기억하고 있어요.”

“하하, 그때 유리 알렉세예비치가 날 죽이진 않을까 싶었는데.”

“아하하하…….”

난 어색하게 따라 웃었다. 아버지와 선생님 사이에서 무슨 말들이 오갔는지 잘 알진 못하지만, 그때 아버지가 얼마나 무서웠는지 생각하면…… 미하일 선생님이 얼마나 대단한 분인지 새삼 느껴진다.

그리고 미하일 선생님은 그때 그랬던 것처럼, 이번에도 분명하게 말씀하셨다.

“며칠 푹 쉬고, 다시 내 학생이 되어 주러 오려무나.”

실수로라도 눈물을 보이지 않도록 웃으면서, 난 손아귀에 힘을 주었다. 이젠 나도 똑바로 대답할 수 있었다.

“이미 전 선생님의 학생이잖아요.”

“그래, 그렇지.”

악수하고 있는 손아귀에서 정말 많은 것들이 느껴진다. 연주자로서 감탄하고, 선생님으로서 자랑스러워하는 눈빛, 그리고 어른으로서 다행이라 생각하시는 그 모든 것들이 감사하다.

난 지금 이 순간을 평생토록 잊지 못할 것 같았다.

손을 놓고 나서도 난 그냥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런데 미하일 선생님은 짧게 웃더니 일어나며 말씀하셨다.

“건강한 모습 봐서 좋았고, 연주도 훌륭했다. 와 보길 잘 했구나.

“……선생님?”

“그럼…… 이만 가 보마. 몸조리 잘 하렴. 타티아나.”

갑자기 무슨 말씀이신가 싶어 어리둥절해하고 있는데, 미하일 선생님은 정말 바로 가시려는 듯 외투와 모자가 걸린 옷걸이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난 급히 말했다.

“저, 저녁 식사라도 하고 가셨으면 좋겠어요…….”

“잠깐 보러 온 거니 괜찮단다.”

“잠깐이 아니었지 않나요?”

4시간이나 기다리셨는데 갑자기 이럴 순 없었다. 난 아예 선생님 앞으로 가서 가로막고 비켜 주지 않았다. 선생님은 난처하다는 듯 웃었다.

“너무 신경 쓸 건 없는데.”

“어떻게 그럴 수 있겠어요. 잠시만요, 제가 말씀드리고 올게요. 가지 말아 주세요.”

“아니…….”

선생님은 선생님 나름대로 사정이 있으실지 모르겠지만, 난 조금 억지를 부렸다. 이대로 아버지에게 가서 미하일 선생님을 저녁 식사 자리에 초대하고 싶다고 말씀드릴 생각이었다.

선생님은 다시 무어라 하시려다가 피식 웃어 버렸다. 난 다른 말이 나오기 전에 재빨리 뒤돌아 응접실 입구로 향했다.

그리고 문을 열자마자 눈앞에 있는 두 사람을 보고는 기절할 뻔했다.

“!!”

심장이 떨어질 정도로 놀라서 비명도 못 지르고 양손을 움켜쥐고 있는데, 문 앞에 기대어 서 있던 나제즈다와 올가도 눈을 크게 뜨고 날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갑자기 나올 줄은 상상도 못 한 것 같다.

간신히 조금 진정된 후에야 난 말을 꺼낼 수 있었다.

“깜짝 놀랐어요, 나제즈다…….”

“죄송해요 아가씨, 피아노 소리가 들려서.”

문을 열자니 연주를 방해할까 그러지도 못하고 이렇게 있었던 모양이다. 고맙기도 하고 조금 미안하기도 했다.

아예 나제즈다를 위해 한 곡 연주해 줄까 생각하고 있는데, 그녀가 이참에 말하겠다는 듯 조심스레 말했다.

“많이 걱정했었거든요.”

“걱정이요?”

“재작년엔 일어나시자마자 피아노 앞에 앉으시던 분이 이번엔 그러지 않으시길래…… 하기 싫어지신 건가 싶어서…….”

나제즈다 역시 다른 사람들이 하는 걱정과 비슷한 걱정을 하고 있었다.

내가 평소 얼마나 피아노에 미쳐 있는지 잘 아는 그녀로선 일어나자마자 피아노를 치지 않는 내가 조금 낯설게 보였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갑자기 피아노 소리가 나서 분명 아가씨겠구나 싶었는데……. 잠깐 듣고 가려고 했는데 듣기에 너무 좋아서 꼼짝도 못하고 이러고 있었네요.”

“그래요. 5분 정도여서 다행이지, 30분짜리 연주였으면 저희 아무것도 못 했을걸요?”

올가도 맞장구를 쳤다. 피아노 소리가 발을 붙잡아 놓았다는 말을 들으니 기뻤다.

“앞으로도 자주 연주할게요. 듣기 편한 곡으로요.”

“어머나, 정말요?”

“정말이에요.”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올가는 늘 기대하고 있겠다며 웃었다.

잠시 그렇게 이야기를 주고받고, 나제즈다가 문득 생각난 듯 물었다.

“아가씨, 그런데 미하일 표도로비치께선 가신 건가요?”

“예?”

“어…… 그래서 아가씨가 지금 나오신 거 아닌가요. 유리 님께선 미하일 표도로비치를 식사에 초대하고 싶어 하셨는데…….”

그제야 지금 무엇을 하려고 했는지 생각났다. 난 살짝 옆으로 비켜서는 것으로 응접실 안쪽을 볼 수 있도록 하면서 이야기했다.

“아뇨, 저도 선생님을 식사 자리에 초대 드리고 싶어서요. 아버지에게 말씀드리러 가려는 참이었어요.”

나제즈다가 고개를 기울이며 빙그레 웃었다.

“그럴 필요는 없으시겠는데요?”

“그러네요.”

나지막한 웃음소리가 그녀와 나 사이에서 흘렀다. 저녁 식사 자리에 대해 그녀와 긴 이야기를 나눌 필요는 없었다.

나제즈다가 명쾌하게 말했다.

“이야기 나누고 계세요. 아가씨 의사는 제가 대신 전해 드릴 테니. 이따가 시간이 되면 말씀드릴게요.”

“고마워요, 나제즈다.”

“저야말로 감사하죠.”

나제즈다가 뒤돌고, 올가도 그녀를 따라 가려다가 고개를 돌리곤 내게 말했다.

“저도 일하러 가 볼게요, 아가씨. 오랜만에 피아노 소리를 들으니 기분이 좋네요.”

올가는 작게 콧노래를 부르며 떠나갔다. 그건 분명 마주르카였다. 내 음악이 그녀에게 닿아서 활력이 되어 주었다는 사실이 이보다 분명할 순 없었다.

난 두 사람의 뒷모습을 잠시 지켜보다가, 다시 응접실로 돌아갔다.

“문 앞에만 잠시 서 있다가 다시 돌아오니 어디 갈래야 갈 수가 있겠니.”

“죄송해요, 선생님. 그래도…… 괜찮으시죠?”

선생님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양손을 살짝 들어 올리며 말했다.

“괜찮고말고.”

난 기분 좋게 다시 선생님의 맞은편에 가 앉았고, 선생님 역시 미소로 날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선생님은 곧 사무적인 모습으로 안경을 치켜올렸다.

“아무튼…… 그럼 시간이 조금 있을 테니 그사이 이후의 이야기나 조금 할까.”

이후의 이야기?

순간적으로 무슨 말씀이신지 이해를 잘 못 했는데, 현실감만큼은 확 다가왔다. 멍하니 바라보자 선생님이 웃었다.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그런 눈으로 날 보지 말려무나. 어쨌거나 난 네 선생으로서 할 일이 있으니까.”

“아…… 물론이죠.”

“……일단 2학기 일정에 대해서 말인데. 우선 9학년들에게 주어진 과제곡 목록 중 두 곡을 택하면 된단다. 보여 주마.”

그리고 선생님은 스마트폰 화면으로 표를 하나 보여 주셨다. 9학년들이 연습해야 할 곡들 빼곡하게 나열되어 있었다.

전부 아는 곡이었고, 대부분 레퍼토리에 들어 있기도 했지만 그래도 과제곡이라고 하니 절로 긴장이 된다.

한동안 학교에 안 가서 잊고 있었는데, 난 아직 학생이었다.

아무것도 끝나지 않았다.

“며칠 후 등교할 때까진 정해 오려무나.”

“알겠습니다.”

난 빠릿빠릿하게 대답하며 스마트폰 화면을 읽어 내려갔다. 어떤 곡들을 선택해야 할지 빠르게 머리가 회전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난 선생님과 앞으로의 학교생활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중앙음악학교 9학년은 하루 24시간이 부족할 정도로 해야 할 공부도 많고 연습해야 할 곡도 많았다. 어떻게 하면 학생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연습시킬 수 있을까에 대해 모든 선생님들이 머리를 맞대고 연구해 완성시킨 이 커리큘럼엔 빈틈이 없었다.

같은 반 친구들은 이런 학교의 방식에 치를 떨곤 했다. 하지만 난 이 체계적인 커리큘럼을 보면서 행복해졌다.

빨리 학교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뿐이다.

“그리고…… 타티아나, 네게 제안할 것이 한 가지 있는데.”

“제안이요?”

넌지시 이야기를 꺼내는 미하일 선생님을 보며 반문했더니 선생님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할 생각이 있다면 작은 독주회를 해 보는 게 어떨까 싶구나.”

학교생활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때와는 또 다른 긴장감이 어깨를 탁 붙잡았다.

그간 많은 연주회를 했었고, 음악으로 무대를 채우는 데엔 자신이 있다. 하지만 그래도 독주회라는 단어가 가져오는 무게는 선뜻 붙잡기에 조금 무겁게 들렸다.

“그건…….”

“부담스럽게 생각하진 않았으면 좋겠구나.”

“…….”

내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자 선생님이 천천히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9학년 학생에게 독주회를 권하는 선생은 많지 않겠지. 일반적으론 마지막으로 청소년 콩쿠르에 더 나가 보길 권하는 게 적절할 테니까.”

그 말대로였다. 이제 내년이면 난 일반 국제 콩쿠르를 노려야 하는 나이가 된다. 청소년 콩쿠르에서 조금이라도 수상 커리어를 만들어 놓을 수 있을 때 그렇게 하는 것이 유리하다.

미하일 선생님은 낮게 웃었다.

“그런데 넌 이미 작년에 청소년 콩쿠르엔 더 이상 나가지 않겠다고 했었지. 나 역시 거기에 동감이란다.”

미하일 선생님은 내가 그런 커리어에 큰 가치를 두지 않는다는 걸 이해해 주셨다. 그리고 내가 다른 가치를 추구할 수 있도록 전적으로 도와주려 하신다.

그리고 난 지금 미하일 선생님의 독주회 제안이 그냥 하시는 말씀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선생님의 지도에 따라서 나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으니까.

난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을 조금 해 보아도 될까요.”

“그럼.”

내가 잘 생각해서 받아들일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걸 알아보셨는지, 선생님은 조금 더 가볍게 말씀하셨다.

“2학기 기말 실기 시험을 대체하는 식으로 해도 될 테고, 아니면 10학년이 되어서도 괜찮으니까. 천천히 생각해 보렴. 다만 난 네가 다른 누군가와 피아노로 경쟁하기 전에 무대에 한 번 설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구나.”

지금 내가 구사할 수 있는 음악엔 나름대로 확신이 있다. 하지만 무대에선 어떻게 될지 서 봐야 알 수 있는 일이기도 하다. 선생님의 말씀이 옳았다.

난 생각하지 않고 있었던 독주회를 올해 일정에 끼워 넣는 것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했다.

홀을 대관하는 것 자체는 그리 어렵지 않을 것 같다. 물론 열여섯 살짜리의 독주회를 보러 사람들이 티켓을 많이 구매할 것 같진 않으니 홀은 적당한 크기로 구해야 했다. 200석에서 300석 정도라면 괜찮지 않을까. 잘 모르겠지만 그 정도는 채울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아직 내가 속하진 않았지만, 친분이 있는 에이전트인 베르너 위넬의 도움을 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는 내게 꽤 호의적이었고 앞으로도 좋은 관계로 도움이 필요하다면 연락해 달라는 말도 했었다. 리사이틀은 혼자 하는 거니까 협연 때처럼 일이 복잡할 것 같진 않고, 어쩌면 베르너도 흔쾌히 도와주려 할지도 모르겠다.

“…….”

지금 내가 독주회를 한다고 해서 현실적인 문제는 없다. 나머지는 모두 내 마음과 자신감에 달려 있었다.

그간 여러 문제들을 안고 있으면서도 나는 연주자로서 무대에 섰다. 그리고 수많은 배역들을 소화해 내면서 과분할 정도로 큰 무대에도 섰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늘 가슴 한구석엔 반쪽짜리인 스스로에 대한 불안이 깃들어 있었다.

피아노 앞에서 최선을 다할 땐 신경을 달리 쏟을 여력도 없이 음악에만 몰두했지만, 늘 허락받은 음악만을 할 수밖에 없다는, 받아들여야 하는 현실이 날 종종 갈증 나게 했다.

그렇다면 이번엔?

무대에 선다면 다른 기분을 느낄 수 있을까?

“…….”

그저 상상만 해 봤는데도 불구하고 다른 생각은 들지 않았다.

하고 싶었다. 현실적으로 가능하고 내겐 충분히 그럴 의지가 있었다.

물론 중요한 결정이니 쉽게 내려선 안 된다. 시간은 아직 있으니 난 천천히 생각해서 미하일 선생님에게 분명하게 내 결정을 전달하기로 마음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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