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468화 (468/1,277)

##  468화

아침을 알리는 스마트폰 알람이 울렸다. 두 번 울기도 전에 난 팔을 뻗어 스마트폰을 쥐었다.

“…….”

새벽 5시 30분. 창밖으로 어슴푸레한 여명이 밝아 온다.

난 부스스한 머리를 대충 쓸어내리며 목을 기울였다. 살짝 남아 있던 잠기운이 사라졌다.

아직 이른 시간이긴 하지만 이전엔 새벽 3시면 일어나서 움직이곤 했었다. 지금 시간이면 충분히 자다 못해 넘치는 시각이다.

그리고 오늘은 등교일이기도 했다. 난 학교에 가기 전에 일찍 해야 할 일이 많았으므로 더 잘 생각이 없었다.

늘 하던 스트레칭과 준비를 마친 뒤 곧바로 향한 곳은 별관의 연습실이었다.

“흐흥…….”

아침 연습을 다시 시작하게 된 지 이틀째. 난 비로소 연주자로서 정상 궤도로 돌아온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아마 지금 세상엔 나처럼 아침 연습을 시작하려는 연주자가 많겠지. 그런 생각을 하면 절로 웃음이 나고, 전혀 귀찮지 않다.

의자에 앉아 건반 덮개를 열고 자세를 정돈했다. 연습을 할 때도 흐트러지는 일 없이 해야 실전에서도 흐트러지지 않는다. 난 그러한 믿음으로 건반에 손을 뻗었다.

하농 연습곡으로 간단하게 시작해서, 사장조부터 내림가단조까지의 모든 반음계 스케일을 연습했다. 느리게 했다가, 빠르게 했다가, 부점을 넣어 통통 튀게 리듬을 바꾸어 연습하기도 했다. 테크닉 연습의 기초였다.

조성을 바꾸어 가며 반음계 아르페지오를 연습하고, 옥타브로 건반을 오르내리기도 했다. 그 모든 것이 피아노와 나를 조금 더 가깝게 결속시켜 주었다.

다음으론 바흐의 평균율과 쇼팽의 연습곡이 이어졌다. 지금까지 몇 만 번이나 연주했을지 모르는 곡들. 그러나 지금도 연주를 계속할 때마다 조금씩 나아짐이 느낀다.

“…….”

분명 이 몸의 한계는 거의 가까이 와 있다. 물론 잠재력을 모두 다 완벽하게 끌어낸 것은 아니니 바닥은 조금 더 깊은 곳에 있겠지만, 작은 키와 약한 인대는 극복하고 싶다고 극복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 점은 분명히 자각하고 있다.

하지만 연주자로서 한계가 있다 하여 음악가로서 한계가 있는 건 아니었다. 난 신체적 한계를 무시할 수 있을 정도로 발전해 나갈 수 있는 부분에 집중했다.

조금 더 섬세하게 터치를 가다듬고 페달과 조화를 맞춘다. 내가 연주하는 음악이 조금 더 분명한 형체를 가지고 전달될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음악가로서의 능력들.

적어도 이 부분에 있어서 나는 한계를 거의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나도 어디까지 갈 수 있을지 모르겠다. 분명 연주자로서 평생을 파고들어도 끝을 보지 못하리란 예감이 든다.

그리고 그 예감에 나는 희열을 느꼈다.

끝이 없다는 건 얼마나 즐거운 일인지.

“…….”

끝이 없는 것처럼 느껴지는 건 수백 년간 쌓인 클래식 음악 역시 마찬가지였다. 난 쇼팽의 연습곡 op.25의 9번째 곡을 마무리 짓고는 슈만으로 넘어갔다. 환상 소품 op.12 중 몇 곡을 연주하고 다음은 라흐마니노프, 스크리아빈까지.

아나스타샤가 알캉의 곡들을 연주하기 시작한 것처럼, 나도 레퍼토리의 범위를 조금씩 넓혀 나갈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알캉도 연주해 봤지만 신체적 한계가 있는지 살짝 버겁다. 이럴 때면 아나스타샤가 조금 부럽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무조건 그녀를 따라 알캉을 연주해야 한다는 법은 없었다.

대신, 난 그전에 생각해 두었던 곡들을 이것저것 연주해 보는 중이었다.

한참을 그렇게 시대를 넘나들며 음악을 연주하고 있다 보면 1시간 정도는 눈 깜빡할 사이에 지나간다.

연습을 그쳤을 땐 이미 해가 떠서 밝아져 있었다.

조금 아쉽기도 하지만, 새벽 3시에 일어나 연습하는 것보다 능률도 더 좋은 것 같고 상쾌했다.

난 마지막으로 아르페지오로 건반을 쭉 올라갔다가, 깔끔하게 멈추고는 의자에서 일어섰다. 기분 좋은 연습이었다.

그다음으로 향한 곳은 주방이었다.

“드미트리, 좋은 아침이에요.”

“오셨습니까? 아가씨. 좋은 아침입니다.”

미리 나와 있던 드미트리가 쾌활하게 인사했다.

안쪽으로 들어서자 막 도마를 씻던 드미트리가 다 안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연습하시더군요. 소리 들었습니다.”

“아, 그런가요?”

“그렇게 열심히 하시니 늘 최고의 실력을 보여 주시는 것이겠죠.”

난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다.

“열심히 해야죠.”

그러고는 곧바로 내 앞치마를 찾아 맸다. 피아노 연습을 열심히 하는 만큼 요리 연습도 열심히 해야 했다.

난 머리를 틀어 올려 묶으면서 드미트리를 돌아보았다.

“오늘은 어제 배웠던 오믈렛을 직접 제가 만들어 볼게요. 괜찮을까요?”

“하하, 그러시죠.”

그는 두말 않고 내가 마음대로 할 수 있게 해 주었다.

그런데 마음대로 할 조건이 된다고 해서 정말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내 오믈렛은 좀처럼 예쁜 모양이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분명 어제 만들었던 것보단 나았다.

그리고 그 외에도 난 드미트리에게 요리에 대해 배웠다.

모든 것은 서서히 나아져 간다. 오믈렛 모양도, 다른 요리 실력도 연습하면 더 좋아질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난 열성적으로 아침 식사를 도우며 그에게 많은 것을 배워 나갔다.

준비를 거의 마치자 아버지와 루슬란 오빠가 식당으로 나왔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아버지, 오빠.”

“좋은 아침이구나.”

“아침부터 바쁘네.”

오빠는 하품을 하며 말했다. 언뜻 장난치는 것처럼 들리기도 했지만, 난 곧이곧대로 받아쳤다.

“아침이니 바빠야 하지 않겠어요?”

“그래, 네 동생 말이 맞다. 루슬란.”

“무슨 말을 못 하겠네…….”

아버지가 한마디 거들자 오빠는 투덜거리며 스마트폰을 들었다.

난 잠시 후 완성된 요리들을 식탁으로 내갔다. 앞치마를 풀고 자리에 앉자 아버지가 손을 모았다. 짧은 기도 후에, 식사가 시작되었다.

“들려무나.”

잠깐 동안은 식기를 움직이는 소리밖에 나지 않았다. 처음으로 음식을 먹기 위해서가 아니라 말을 하기 위해 입을 연 건 루슬란 오빠였다.

“이 오믈렛…… 네가 만든 거야? 타티아나.”

“알아봐 주시네요?”

“음…….”

“어떤가요? 맛있으신가요?”

약간 기대감을 가지고 물어보았다. 그런데 오빠는 기묘한 표정으로 고개를 까딱였다.

“맛보다는, 모양이 구겨져 있어서.”

“구겨……져요?”

“봐 봐.”

“…….”

굳이 보라고 하지 않아도 나도 알아.

그래도 그렇지 구겨졌다고 표현하는 건 너무했다. 그 정돈 아닌데.

난 싱글싱글 웃으며 포크를 움직이는 오빠를 보며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내일부턴 제가 오믈렛 말고도 여러 가지를 못생기게 만들 수 있다는 걸 알려 드릴게요.”

“잠깐만…… 무슨 소리야 그게?”

“알아봐 주실 거죠?”

절대 못 알아볼 수가 없게 할 생각이다.

그렇게 틱틱거리며 이야기를 나누고, 결국 오빠가 잘못했다고 사과할 때까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다음으로 식탁 위에 던져진 주제는 내 학교에 대한 이야기였다.

“오늘은 학교에 등교하는 날이지? 타티아나.”

난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아버지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씀하시고 계시지만 내심 약간 걱정하고 있으시다는 게 느껴졌다.

최근 두 번이나 쓰러졌던 게 여전히 불안하신 것 같다.

걱정을 지워 드리기 위해 난 가능한 대로 경쾌하게 대답했다.

“예. 어제 미리 준비는 마쳐 놨어요.”

“어디 아픈 곳은 없고?”

“물론이죠. 그동안 오래 쉬었잖아요?”

“……네가 잘 하리라 믿는다.”

걱정은 하시지만 그래도 날 가로막거나 강제하시지 않는다. 어떤 마음에서 그러시는지 알 것 같아서, 난 가넷 목걸이를 살짝 쓰다듬었다.

아버지는 가만히 날 바라보시더니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씀하셨다.

“기뻐 보이니 나도 안심이구나.”

아버지의 미소를 본 나 역시 안도되는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

빅토르가 깍듯하게 경례했다.

“다녀오십시오.”

그는 가끔 이런 식으로 장난치는 걸 좋아했다. 나 역시 경례로 맞받으며 말했다.

“다녀오겠습니다. 빅토르.”

“하하.”

올려붙인 손을 그대로 내리지 않고 그대로 흔들며 웃는 빅토르에게 나 역시 웃어 주고, 학교로 발길을 옮겼다.

“…….”

난 잠시 걷다가 학교를 올려다보았다.

3월이 지나면서 날씨는 정말 많이 따뜻해졌고 학교의 분위기도 조금 바뀐 것 같았다.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건 온통 눈으로 뒤덮인 풍경이었는데, 그 눈이 녹아 사라진 학교는 건물 자체에서 에너지가 넘치는 것처럼 보였다.

오랜만이라 어색할 줄 알았는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

그대로 정문을 열고 수위 아저씨와 인사하려는데, 갑자기 뒤에서 꺅 하는 비명 소리가 들렸다.

깜짝 놀라 뒤돌아보니 소리를 치는 것과 동시에 달렸음이 분명한 류보비가 벌써 내 바로 앞에 도달해 있었다.

“타티아나 언니!”

“아하하, 류보비.”

인정사정없이 달려든 류보비 탓에 까딱하면 넘어질 뻔 했다. 난 재빨리 균형을 유지하며 그녀를 안아 주었다.

류보비는 마구 말을 쏟아 냈다.

“어떻게 된 거예요? 예? 조금 더 쉬어야 한다고 했었잖아요?”

“잠시만요, 잠시만요.”

“괜찮은 거예요? 학교 와도 돼요?”

잔뜩 흥분한 채로 연달아 퍼붓는데, 하필이면 학교 정문이라 보는 사람도 많았다. 그중 몇몇 학생들은 날 알아보고는 웅성거리기도 했다.

물론 쓰러졌었단 소문은 이미 다 퍼졌을 테니 이렇게 시선을 끌 것이란 걸 예상하긴 했다. 하지만 지금 이런 상황에선 싫었다.

난 류보비를 데리고 1층 복도를 조금 걸었다. 류보비는 자꾸만 뭐라 하려 했지만 난 사람이 별로 없는 곳에 도착하고 나서야 무릎을 굽혀 눈을 마주했다.

가까이서 보니 류보비의 얼굴엔 놀라움과 기쁨, 그리고 서러움이 함께 섞여 있었다. 난 살짝 흐트러진 그녀의 머리칼을 정돈해 주며 말했다.

“미안해요, 미리 메시지 보냈어야 했는데.”

“그건 괜찮아요. 어…… 언니오빠들이 저 빼놓고 병문안 갔을 땐 조금 삐쳤었지만요.”

이쪽에서 연락도 안 보냈다고 들었다. 수척해져 있는 모습을 많은 사람들에게 보이기 싫었던 내겐 잘된 일이었지만, 류보비의 입장에선 약간 배신감을 느꼈을지도 모르겠다.

난 류보비를 달랬다.

“류보비가 걱정할까 봐 그랬을 거예요.”

“이미 걱정은 하고 있었거든요?”

“그랬나요?”

“그랬어요!”

당연한 걸 묻지 말라는 듯 바락 소리를 치는데, 성악과 아니랄까 봐…… 그 소리가 복도를 쩌렁쩌렁하게 울려 귀가 아플 정도였다.

전신을 울리는 류보비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나 역시 진심으로 말할 수밖에 없었다.

“고마워요, 류보비.”

갑자기 류보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무언가 참으려고 하더니 결국 참지 못하고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으흑…….”

“아…….”

안심하자마자 울어 버릴 줄은 몰라서 약간 당황했지만, 그래도 난 얼른 안아 주며 토닥였다. 눈물엔 전염성이 있어서 나도 약간 눈물이 날 것 같았지만 간신히 참았다.

그렇게 한참이나 어르고 달래서 류보비를 진정시켰다.

그러고 나서야 류보비는 조금 창피해진 모양이었다.

“그런데…… 왜 오신 거예요?”

“……예?”

“학교요. 저라면 이번 주는 그냥 쉴 텐데.”

새침하게 그렇게 물어보면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난 그냥 있는 그대로 말했다.

“류보비 보러 왔지요. 이렇게 학교에서 보게 되어 기쁘네요.”

“…….”

류보비는 미심쩍어하는 눈빛을 했지만 난 정말 진심을 말하고 있었다. 친구들이 아니었으면 내가 굳이 이렇게 학교에 빨리 나오려 했을까? 그렇지 않았을 테다.

류보비는 잠시 후 어깨를 축 늘어뜨리더니 중얼거렸다.

“아무튼…… 아무튼, 양호실 같은 데 가 있을 거 아니죠? 수업 듣고? 그렇죠?”

“예. 물론이죠.”

“그럼…… 오후에도 조퇴하지 않고 스터디 꼭 나오셔야 해요. 아셨죠?”

아무래도 할 말이 많은 것 같다. 난 싱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약속이에요.”

“그래요, 약속.”

그제야 류보비는 다시 씩씩하게 고개를 들더니 걸어 나갔다.

아마 이대로 자기 반으로 가려나 싶어 지켜보고 있는데, 몇 걸음 가던 류보비가 휙 돌더니 말했다.

“저도 너무 기뻐요.”

류보비가 가고 나면, 나야말로 조금 울어 버릴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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