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69화
9학년 피아노과 앞에 서서 잠시 심호흡을 했다. 열흘 만에 반에 들어가려니 나 혼자서 방학을 했다가 온 기분이었다.
마음의 준비는 오늘 아침부터 충분히 하긴 했지만, 그래도 난 갑자기 벌컥 문을 열고 들어갈 정도로 강심장이 아니었다.
두어 번 정도 숨을 고르고, 조심스레 문을 열었다.
대여섯 명의 친구들이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이쪽을 보고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타티아나?”
믿을 수 없다는 듯 더듬거리면서 한두 명씩 일어나더니, 모두 내 쪽으로 다가왔다.
다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하는 모습이었다. 그런데 라리사가 아무 말 없이 날 껴안았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말이 아니었다.
난 라리사에 이어 다른 친구들과도 한 번씩 포옹했다. 그제야 말문이 터진 듯 질문들이 쏟아졌다.
“어떻게 된 거야?”
“세상에, 괜찮아?”
예상했던 질문들이기도 해서 난 가볍게 웃으며 답했다.
“괜찮아졌어요.”
“정말?”
“이렇게 금방 나올 일이 아니지 않나.”
“일주일이나…….”
내가 쓰러져 혼수상태에 빠졌던 일은 이 아이들에게도 충격적이고 비관적인 생각만을 안겨 준 모양이다. 다들 내가 며칠 전 일어났다는 소식은 들었겠지만, 이렇게 학교에 나올 수 있을 줄은 상상도 못했다는 얼굴이었다.
바르바라가 걱정하며 말했다.
“이렇게 나오지 말고 조금 더 쉬…… 그런데 괜찮아 보인다?”
뭔가 수척해졌다거나 피로해 보인다는 말을 하려던 바르바라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녀가 의아해할 만도 했다. 난 저번 학기만 하더라도 거의 유령처럼 학교를 돌아다녔기 때문이다. 사실 친구들이 아는 나는 보통 그런 인상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난 내가 처해 있던 상황 등을 설명해 줄 순 없어서 대수롭지 않은 척 넘기기로 했다.
“충분히 쉬었거든요.”
“그래……? 일어난 것도 얼마 안 되었다고 들었는데.”
바르바라는 그래도 조금 묘하다는 듯 이리저리 얼굴을 돌려 가며 날 관찰했지만 그런다고 갑자기 없던 문제가 생기는 것도 아니다. 난 그냥 웃기만 했다. 결국 바르바라도 건강하면 좋지 않냐는 식으로 내 쾌유를 축하해 주었다.
라리사가 다시 살짝 다가오더니 내 손을 잡았다.
“다시 이렇게 학교에서 보니 너무 좋다. 타티아나.”
“라리사.”
“저번에 병문안 갔었을 땐 정말 걱정되었는데…… 다행이야.”
난 내가 누워 있는 모습을 되도록 많이 보지 않았으면 했고, 또 아버지나 오빠의 생각도 비슷했다.
때문에 그사이 병문안을 온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는데 우리 반 친구들 몇 명은 대표격인 아나스타샤를 따라서 병문안을 오기도 했었다. 라리사도 그중 한 사람이었다.
손에 힘을 주어 그녀의 손을 조금 더 세게 쥐었다. 라리사는 손을 내려다보고는 다시 고개를 들고 환하게 웃었다. 밤색 머리가 흔들렸다.
“앞으로는 조심해야 해? 타티아나.”
친구들에게서 축하 인사들을 받고 나서도 이야기는 계속해서 이어졌다.
“아무튼 연습 좀 적당히 해. 과로가 쌓여서 그런 거잖아.”
“송년 연주회 같은 큰 무대도 문제없이 해냈던 네가 학교 위클리 무대에 그렇게 큰 부담을 느낄 줄은 상상도 못 했어.”
모두들 내가 왜 쓰러질 정도로 무리해야만 했는지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상식적으론 있을 수 없는 일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때문에 다들 나름대로 추측을 하던 것이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그 추측은 한 지점을 향하고 있었다.
“스크리아빈 때문인 거 아니야?”
“그럴 만하지.”
웅성웅성하면서 내 눈치를 보는 시선들이 느껴졌다. 내가 스크리아빈의 곡 때문에 쓰러졌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위클리 무대에서 스크리아빈을 연주했던 건 사실이었으니 그렇게 생각할 만도 했지만…… 지금 거의 무슨 내가 연주한 곡을 저주받은 곡처럼 여기는 분위기였다. 이 상황을 본다면 스크리아빈께서 억울해하실 것이다.
원인을 꼽자면 스크리아빈이 아니라 쇼팽에 있었다. 다만 그걸 아는 건 나와 가까운 몇 명밖에 없었으니 어쩔 수 없었다. 이제 와서 설명하기도 늦었고.
스크리아빈의 누명을 어떻게 벗겨 드려야 하나 싶어 골똘히 생각하고 있는데, 그런 내 모습을 본 친구들은 점점 더 공동의 추측에 믿음을 더해 갔다.
“그래, 타티아나가 쳤던 스크리아빈의 비극적 시곡. 그만큼 저…… 아니, 강렬한 곡이긴 했지.”
“내가 듣기론 선배들 중에 스크리아빈 연습하던 선배들도 영향 꽤나 받았다던데.”
“사실 이곳저곳에서 거론되는 걸 보면 재작년 슈만 때와 비슷했어.”
“정말로.”
재작년 위클리 연주회에서 내가 슈만의 소나타를 연주했던 일은 아직도 이렇게 회자되고 있었다. 그때 우후죽순 생겨났던 연구회들은 대부분 사라졌지만, 아직도 몇몇 개는 살아 있기도 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내 연주가 긍정적인 영향을 끼쳤다는 게 약간 기쁘기도 했다.
그런데 슈만 때와는 달리 이번엔 분위기가 달랐다. 아무리 봐도 내 연주를 듣고 스크리아빈에 흥미와 관심이 생겼다는 표정들이 아니었다.
난 슬슬 예감이 현실로 다가오는 걸 느끼며, 약간 어색하게 물어보았다.
“모두들 스크리아빈은 연습하지 않으시나요……?”
“전혀?”
“못하지.”
“…….”
예상했던 반응이긴 한데 이 정도로 단호하게 기피할 줄은 미처 몰랐다.
당황스럽기도 하고, 약간 무서워지기도 해서 멀거니 바라보자, 친구들이 앞다투어 설명했다.
“네가 쓰러졌었잖아. 타티아나.”
“물론 연주 자체는 최고였지만…… 네가 그걸 연주하고 쓰러졌다는 소식을 듣고 나니까 스크리아빈에 도전할 생각은 별로 안 들더라.”
“별 이야기가 많이 돌았었어.”
“선생님들도 언급을 조금 피하는 것 같고.”
처음 느꼈던 스크리아빈에 대한 분위기는 그저 분위기뿐이 아니었다.
이미 학교에는 내가 위클리 무대에서 스크리아빈을 연주한 뒤 쓰러져서 일어나지 못한 것으로 소문이 나 있었고, 때문에 자연스레 스크리아빈에 대한 평가는 조금 꺼림칙하게 되었던 것이다.
스크리아빈은 러시아의 위대한 작곡가 중 한 명이었으니 정말 저주라고 생각하진 않을 테고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레 사라졌겠지만, 사실 이 학교엔 그런 소문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
밤새도록 베토벤 소나타를 연주하다가 활로 자기 목을 여러 번 그은 바이올린 연주자의 망령이 현악 연습실에 떠돈다거나, 선생님에게 너무 가혹한 레슨을 받은 나머지 스트레스로 미쳐 버린 한 학생의 비명 소리가 종종 레슨실에서 들린다거나. 언뜻 들은 것만 열 개도 넘었다.
물론 대부분 수십 년 전 그런 일이 있었다는 식의 괴담에 불과했지만, 바로 같은 반 학생이 괴담의 주인공이 되지 말란 법도 없었다.
난 내가 스크리아빈 괴담의 주인공이 되었다는 사실에 약간 충격이었지만, 가까스로 평상심을 되찾았다. 지금은 건강하게 일어나서 걸어 다니니까 그런 괴담은 있을 수 없다.
진짜로 스크리아빈을 변호해야겠는데…… 어쩐다.
그런데 갑자기 안드레이가 불쑥 나서며 말했다.
“난 해 봤었지. 그 곡은 짧으니까. 그런데 그만한 완성도 뽑아내려면 무대에 올리기도 전에 쓰러지겠던데.”
스크리아빈 괴담에 지지 않았다는 의미로 하는 말인 것 같은데, 주변의 학생들은 그냥 그렇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온화한 성격인 라리사조차 참지 못하고 힐난했다.
“안드레이, 너 지금 그게 할 말이야?”
난 별로 신경 쓰지 않고 있는데, 안드레이는 주변의 반응에 찔끔했는지 내게 사과했다.
“어…… 그만큼 인상 깊었거든……. 미안해 타티아나.”
“칭찬으로 들을게요. 안드레이.”
“그러면 고맙고.”
나야말로 타이밍 좋게 안드레이가 나서 줘서 고마웠다. 이때다 싶어서 난 이어 말했다.
“스크리아빈은 계속 연구해 주세요. 까다로워 보일진 모르겠지만 연구하면 할수록 그 깊이가 상당한 작곡가라고 생각해요.”
“뭐…… 사실 지금이 아니라도 언젠간 해야 할 거야.”
러시아 연주자로 교육받으면서 꼭 스크리아빈을 배워야 한다는 법은 없었지만, 그래도 어지간한 이유가 있지 않고선 스크리아빈을 피해 가긴 쉽지 않을 테지.
스크리아빈의 곡들을 과제곡으로 내 준 지도 선생님에게 괴담 이야기 같은 걸 했다간 하루 종일 야단을 맞을지도 모른다. 모두들 그 정도 현실 감각은 지니고 있었다.
약간 찜찜했던 부분도 내가 건강한 모습으로 스크리아빈을 연구하자고 말하니 괜찮아진 듯했다. 막연한 불길함 같은 건 작곡가를 연구하고자 하는 열정 아래에서 금방 사라졌다.
그렇게 예상치 못했던 스크리아빈 괴담 문제도 해결하고, 학교 과정에 대한 이야기들도 많이 들었다.
“진도는 그리 많이 안 나갔으니까 괜찮을 거야.”
“노트 정리한 거 필요하면 말해. 빌려줄게.”
친구들은 내가 학교 성적에도 꽤 신경을 쓴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때문에 일주일 넘게 쉰 것으로 굉장히 우울해하리라 생각하고 조금이라도 더 도와주려 하는 것 같았다.
물론 난 성적도 중요하게 생각하긴 하지만…… 그래도 우울한 정도는 아니었다. 그리고 조금 늦어진 건 열심히 따라잡으면 된다고 생각하고 있고.
그래도 도와준다는 건 정말 고마웠다. 난 웃으며 도움은 감사히 받겠다고 답했다.
“……?”
이렇게 한참 이야기하고 있는데, 난 약간의 위화감을 느꼈다.
우리 9학년 피아노과는 총 열세 명. 여기에 여섯 명이 있는데 다른 일곱 명은 아직 안 보인다. 조금 늦게 등교할 수도 있으니 상관없는 일이긴 하다.
그런데 아나스타샤나 발렌티나, 그리고 에르네스트, 리처드, 한승우 중 한 명도 안 보인다는 건 약간 이상했다.
한 명쯤은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오늘 그 애들에겐 학교에 오겠다고 말하기까지 해 놨는데.
그런데 그렇게 조금 궁금해하기가 무섭게 문이 벌컥 열리며 아나스타샤와 발렌티나가 들어왔다.
“뭐…… 어, 타티아나. 왔니?”
“좋은 아침이에요.”
손을 살짝 흔들자 아나스타샤도 웃으며 화답했다. 이제 등교한 모양이다.
두 사람도 반갑게 다가와선 날 끌어안았다.
“이젠 괜찮은 거지?”
“예.”
“그러면 됐어. 다른 건 다 상관없어.”
아나스타샤는 그렇게 말하더니 날 휙 놓아주고는 미소를 지었다.
난 그녀와 함께 늘 앉는 자리에 가서 앉았다. 나무로 된 책상을 손으로 짚으니 익숙한 촉감이 느껴졌다. 딱딱한 책상인데도 뭔가 아늑하다.
첫 수업인 음악이론 교과서를 꺼내자 아나스타샤가 이번 수업 시간에 봐야 할 부분을 가르쳐 주었다. 간밤에도 살짝 예습한 부분이라서 그리 어렵게 보이진 않았다. 그래도 난 다시 교과서를 훑어보았다.
그렇게 아침 공부를 하길 얼마나 지났을까. 한승우와 리처드도 와서 안부 인사를 나누었고, 에르네스트도 어느새 와서 자리에 앉아 있었다. 왔으면 인사라도 하지 왜 저러고 있대? 나도 괜히 말을 걸지 않고 교과서에만 집중했다.
조금 더 지나니 수업종이 울리고 류드밀라 선생님이 들어오셨다.
선생님은 들어오자마자 나와 눈이 마주치고는 환하게 웃었다.
“오늘은 등교할 거라고 미하일이 그러더군요. 그래도 조금 더 쉬어야 하지 않을까 했는데…… 건강한 모습으로 등교했네요. 타티아나?”
“예, 류드밀라 선생님.”
“좋아요. 수업을 받는데 지장이 없으리라 스스로 판단했으니 여기에 있는 거라 믿겠어요. 그래도 되겠죠?”
“물론이에요.”
한 번도 머뭇거리지 않고 고개를 끄덕이자 류드밀라 선생님은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수업을 시작했다.
***
오전 수업을 마치고 난 친구들과 식당으로 내려갔다. 아나스타샤는 오늘이야말로 학교 밖으로 나가지 않겠냐고 말하기도 했지만, 난 단 한 번도 학교에서 급식을 먹지 않은 적이 없었다. 오늘이라고 특별하게 보낼 생각은 별로 없었다.
그런데 막 급식을 받으려는데, 앞서가는 발렌티나의 상태가 약간 이상했다. 블린도 몇 개밖에 안 가지고 오고, 영 식욕이 없어 보였다.
“발렌티나, 괜찮으시나요?”
“응? 나? 어, 그냥. 입맛이 없네.”
저렇게 안 먹어도 되나 싶을 정도였다.
발렌티나가 걱정되어서 덩달아 나도 입맛이 별로 없어졌다. 난 평소보다 조금 더 적게 양을 조절했다.
그렇게 아나스타샤까지 세 명이 받아 온 음식의 양은 다들 엇비슷했다. 발렌티나뿐만 아니라 아나스타샤도 별로 생각이 없어 보였다.
“…….”
다들 깨작거리기만 하고 제대로 식사를 하지 않았다. 난 그런 그녀들의 눈치를 보다가, 순간 뇌리를 스쳐 지나가는 생각을 탁 낚아챘다.
“저기, 발렌티나.”
“응?”
“식사 뒤에 예정이 어떻게 되시나요?”
살짝 물어보았더니 발렌티나가 고민도 않고 대답했다.
“오늘은 레슨도 없으니 스터디룸에 가서 공부나 하려고.”
“아.”
“너도 갈래? 타티아나. 레슨 없잖아.”
난 포크를 쥔 채로 물끄러미 발렌티나와 아나스타샤를 바라보았다. 두 사람 다 별일 아니라는 듯 말하고 있지만 난 어쩐지 모든 상황을 알 것 같았다.
막 새어 나오려는 웃음을 참으며 난 무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어차피 류보비와 약속한 것도 있으니까, 그냥 가 보면 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