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470화 (470/1,277)

##  470화

에르네스트는 가위를 들었다.

싹둑싹둑. 색종이를 자르고는 줄에다가 풀로 붙였다. 종이로 만든 깃발들이다.

무념무상으로 작업을 하던 에르네스트는 어느 순간 지금 밥도 못 먹고 뭐 하는 짓인가, 하는 근본적인 의문을 느꼈다.

그는 옆을 바라보았다. 거기엔 같은 신세인 친구 둘이 앉아 있었다.

“야, 이거 꼭 해야 하냐?”

리처드는 대꾸도 없었고, 막 풍선을 불던 한승우는 진지하게 딱 잘라 말했다.

“하기로 한 거잖아.”

“유치하잖아. 타티아나가 무슨 여섯 살짜리 애냐?”

에르네스트는 벽면을 가리켰다. 거기엔 타티아나의 쾌유를 축하하는 보드와 장식들이 막 준비되어 가고 있었다. 에르네스트의 임무는 저기에다가 종이로 더더욱 장식을 더하는 일이었다.

이렇게 축하 파티를 열자는 건 아침에 류보비가 낸 의견이었고 모두가 동조했다. 에르네스트도 그땐 괜찮은 의견이라 생각했었다.

그러나 막상 어느 정도 준비를 해 놓고 이렇게 보니까 어린애들 생일파티 같은 느낌이 물씬 풍겼다. 테이블엔 케이크까지 있었다.

이 파티의 기획자인 류보비의 나이를 간과한 탓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타티아나가 이런 걸 좋아할 것 같진 않은데.

조금 더 현실적으로 봐야 하는 게 아닌가 싶어 말을 이어 나가려는데, 리처드가 툭 내뱉었다.

“류보비한테 이른다.”

“아니…… 너 그걸 지금 협박이라고 하는 거냐?”

“해?”

리처드 이 자식도 맛이 갔네.

한참이나 어린 꼬맹이한테 뭘 이르겠다는 건지 이해가 안 간다. 에르네스트는 기가 막혀서 눈을 가늘게 떴지만, 그래도 마음대로 하라고 말하진 못했다.

어떻게 꾸미는 게 좋을지 이런저런 아이디어를 내던 류보비가 얼마나 기뻐했는지 기억났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말을 하려면 그때 했어야지, 가만히 있다가 이제 와서 투덜거리듯 말하는 건 할 짓이 아니었다.

결국 어쩔 수 없었다. 에르네스트는 하던 작업을 계속했다. 리처드가 거봐라는 듯 비아냥거렸다.

“자꾸 맥 빠지는 소리 하지 말고 하던 거나 똑바로 해.”

“……시끄러워. 하잖아.”

에르네스트는 다시 가위를 쥐고 종이를 오리기 시작했다.

그냥 작업을 하는 것이 아니라 기하학적 예술품을 만드는 일을 한다고 생각하니 조금은 할 만해졌다.

이 색종이 삼각형들을 최적의 비율로 나열하려면 어떻게 잘라야 할까.

평소 한 번도 궁금해하지 않았던 것들을 생각하며 에르네스트는 가위를 움직였다. 사실 그는 이런 단순 작업에 의미를 부여하는 데에 도가 터 있기도 했다.

옆에서 보던 한승우가 약간 위로하듯 말했다.

“그래도 잘 만드네, 에르네스트.”

“그럼 대충 하냐?”

“말은 대충 할 것처럼 하니까.”

“그건 그냥 말이고.”

하면 하고 말면 말았지 대충하는 일은 있을 수 없었다. 에르네스트는 신경질적으로 대답하며 조금 더 신경 써서 종이를 오렸다.

한승우는 가만히 지켜보더니, 들고 있던 풍선을 들고 한 번에 후욱 불어서 크게 만들었다.

도대체 폐활량이 어떻게 되길래 저걸 한 번에 부는 거야? 숨 안 차나?

에르네스트가 거의 외계인 보는 눈으로 보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한승우는 다시 풍선을 하나 잡고 훅 불고는 끝을 묶으며 말했다.

“난 그래도 이러고 있는 게 좋아.”

“……뭐?”

“저번 주엔 못 했었잖아.”

“…….”

에르네스트는 침묵했다.

타티아나가 없었던 저번 주, 그녀 없이도 친구들은 몇 번 이 스터디룸에 모이긴 했지만 아주 음울한 분위기였다.

조금 긍정적인 이야기를 하려다가도 곧 그만둬 버리게 되고, 모두들 쓰러져 있는 타티아나에 대한 걱정 때문에 아무것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에르네스트는 그녀가 곧 일어날 것이라 직감하고 있긴 했지만, 그 이야기를 해 봐야 다른 친구들에게 이해시킬 수 없을 거라 생각했다. 때문에 스터디룸에 나와서 그 음울한 분위기를 공유하기보단 아예 따로 개인 연습 시간을 가지는 쪽을 택했다.

자연스레 한승우와 리처드도 개인 연습을 하는 쪽으로 향했고 스터디룸엔 곧 사람이 별로 모이지 않게 되었다. 에르네스트는 저번 일주일 동안 정말 이 애들과 이야기 한 번 제대로 나눈 적이 없었던 걸 떠올렸다.

리처드 역시 비슷한 생각을 하는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 애가 없으면 어떻게 되는진 다들 이제 알겠지.”

“자꾸 이상한 소리 할래.”

“아니, 그냥 사실을 말하는 거야.”

에르네스트는 리처드를 노려보았다. 그 애가 없어진다는 소리를 하는 것 자체가 거슬렸다. 지금은 건강하게 등교했으니 상관없긴 하지만, 불길한 소리는 아예 듣고 싶지 않았다.

리처드는 어깨를 으쓱해 보이곤 자기가 맡은, 끈을 묶는 일에 집중했다. 에르네스트는 더 따지고 들지 않았다. 그냥 하던 일이나 열심히 할 생각이었다.

그렇게 종이로 작품 활동을 한 지 몇 분이나 지났을까, 에르네스트의 스마트폰이 울었다. 아나스타샤의 메시지였다.

[5분 후 갈게.]

어이가 없었다.

에르네스트는 자기 스마트폰을 들어 리처드와 한승우에게 보여 주었다. 리처드도 어이가 없다는 투로 말했다.

“그 애들 밥을 왜 그렇게 빨리 먹냐?”

“나도 몰라.”

밥 먹고 온다고 우리한테 이거 마무리하라 시켜 놨으면 적어도 30분은 벌어 줘야 하는 거 아닌가? 10분 정도밖에 못 했는데.

약간 불만이긴 하지만, 더 알록달록하게 꾸미진 않아도 될 것 같다는 건 다행이었다. 에르네스트는 가위를 놓고 일어섰다.

“아무튼 빨리 정리해 놓자.”

“꼬맹이들도 오라고 해.”

“응.”

한승우가 연락하자 류보비와 아나톨리, 사샤도 찾아왔다. 류보비는 오자마자 스터디룸의 상태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하며 진두지휘하기 시작했다. 뭔가 확고한 미학이 있는 것 같다.

그렇게 바쁘게 정리하고는 커튼을 치고 불을 껐다. 원래는 폭죽을 준비했지만 타티아나를 너무 놀라게 하는 건 그리 좋지 않을 것 같아 불만 갑자기 켜는 쪽으로 정했다.

준비를 마치고 나니 정확하게 5분 정도가 흘렀다. 에르네스트는 문 너머 복도에서 또각거리는 구두 소리를 포착했다. 교차로 들리는 걸 보니 최소 두 명에서 세 명 정도였다. 분명 타티아나와 다른 두 명일 것 같다.

“…….”

모두들 숨죽이고 기다리길 몇 초가 흘렀고, 소리 없이 문이 열렸다.

그 문이 완전히 열리고 타티아나가 막 한 걸음을 들어서기 직전, 리처드가 불을 탁 켰다.

“쾌유 축하해!”

“축하해요!”

사방에서 큰소리를 쳐 대는지라 다 알고 있던 에르네스트조차 깜짝 놀랐다.

문간에 서 있던 타티아나도 역시 놀랐는지 눈을 크게 뜨고 있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그 표정은 약간 평온했다.

타티아나는 주변을 죽 둘러보더니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고마워요 여러분. 와…… 어떻게 준비하신 건가요? 상상도 못 했어요.”

정말 상상도 못 한 게 맞긴 해?

에르네스트는 약간 미심쩍은 눈빛으로 아나스타샤와 발렌티나를 돌아보았다. 정보가 샜다면 저 두 사람에게서 샜겠지. 하지만 두 사람을 보아하니 그런 것 같진 않았다.

아무튼, 타티아나를 위한 축하 파티이니 사소한 건 어찌 되든 상관없었다.

류보비가 타티아나에게 안겨 매달렸다.

“제가 아침에 그랬잖아요? 꼭 약속이라고. 그래서 바로 준비했어요. 어때요?”

“류보비 작품이었나요? 아하하, 고마워요.”

“헤헤.”

행복해하는 웃음이 오가고, 아침에 인사를 이미 했었던 다른 친구들 역시 타티아나에게 다시 제대로 축하 메시지를 건넸다.

아침에 일부러 모른 척을 조금 했었던 에르네스트도 이젠 타티아나에게 제대로 말할 수 있었다.

“축하해, 타티아나.”

아침에 무시했던 거 아니냐고 한 소리 할 줄 알았는데, 타티아나는 장난스럽게 웃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작은 파티가 시작되었다. 테이블엔 과자와 케이크 그리고 주스 정도가 준비되어 있었다. 학교에서 하기엔 이 정도가 한계였다.

타티아나에게 어울릴지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그녀는 이렇게 준비해 준 것만으로도 감사하다는 듯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 이렇게 보니 뒤편에 종이를 오려 장식해 놓은 것도 은근히 괜찮아 보였다.

아나스타샤가 케이크 칼을 쥐었다.

“자, 케이크 잘라 줄게……. 그런데 타티아나, 케이크 먹어도 되니?”

“그럼요.”

혹시나 생크림 같은걸 먹으면 안 되나 싶었는데 그렇진 않은 모양이다.

케이크도 조각내어 각자 가지고 가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아무 이야기나 해도 되는 분위기가 마련되자, 아나톨리는 약간 주저하더니 타티아나에게 가서 말했다.

“많이 걱정했어요. 가 보고 싶었는데…… 기다리는 게 맞다고 해서.”

침대에 누워 있는 모습을 아이들에게 보여 주는 건 그리 좋은 생각이 아닐 것 같아서 이후에도 병문안은 삼가도록 했다. 이 애들이 타티아나를 얼마나 좋아하는진 알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막아야만 했다.

그래도 아이들은 조금 우울해져 있었다. 상황을 이해한 그녀가 아나톨리를 달랬다.

“저도 보고 싶었어요. 그래서 최대한 빨리 왔지요.”

“그러면 아직…….”

“아뇨, 괜찮아요. 정말 걱정하지 않으셔도 되어요.”

그제야 아나톨리는 조금 안심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럴게요. 사실 그간 연습도 잘 못 했거든요.”

가만히 이야기를 듣던 에르네스트는 아나톨리가 순간 말실수를 했음을 깨달았다. 본인은 아무 생각도 없겠지만, 타티아나에게 있어서 저 말은 상당히 신경 쓰이는 말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타티아나는 잠시 고민하더니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아나톨리, 절 걱정해 주신 건 감사하지만, 다른 누구 때문에라도 연습에 지장을 받으시면 안 돼요.”

“……네?”

“자기 역량은 스스로 지켜 나가야죠. 제가 할 말은 아니라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요…….”

결국 아나톨리가 연습을 제대로 하지 못한 건 자기 때문이라는 듯 그녀가 말끝을 흐렸고, 아나톨리는 어쩔 줄 몰라 했다.

지켜보던 에르네스트는 참지 못하고 웃고 말았다.

“그렇게 말할 것 같더라. 타티아나.”

“……?”

타티아나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런데 타티아나가 그렇게 말할 거라 예상했던 건 비단 에르네스트뿐만이 아니었다.

한승우도 한마디 거들었다.

“나도 너한테 혼나지 않으려고 연습만 했어. 지난 일주일 사이 얼마나 좋아졌는지 나중에 한번 봐 줘.”

한승우는 심지어 타티아나가 없는 사이 연습을 해야 한다고 말하기까지 했었다. 화가 난 발렌티나가 그를 거의 죽이려고 했었지만 에르네스트는 한승우야말로 상황을 꽤 잘 파악하고 있었다고 생각했다.

아나스타샤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

“넌 정말 변한 게 없구나…….”

“그런가요……?”

타티아나는 막연한 목소리로 말하더니, 타고난 성격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었다. 죽고 사는 문제보다 연습이 중요하다는 그 태도는 가끔 황당하기도 했지만, 어느 날 갑자기 타티아나가 연습을 등한시한다면 그것만큼 믿을 수 없는 일도 없을 것이다.

세상 모든 연주자들이 타티아나만큼만 성실하면 어떨까. 그런 생각을 하며 에르네스트는 케이크를 잘라 입에 넣었다.

잠시 타티아나는 그렇게 다른 친구들과 이야기꽃을 피웠다. 그러더니 문득 생각났다는 듯 에르네스트를 찾았다.

“에르네스트.”

“응.”

에르네스트가 고개를 돌리자 그녀는 잠시 머뭇거렸다. 하지만 아무 말이나 해도 상관없다는 눈빛을 이해했는지 곧 입을 열었다.

“저번에 하셨던 말과…… 미하일 선생님에게 저번 제 연주에 대해 평하셨던 것 있잖아요. 기억하시나요?”

그는 타티아나에게 직접 연주에서 얻어낸 것들을 잘 갈무리 했느냐고 물어보았고, 미하일에겐 타티아나가 초월적인 부분에 도달했을 것 같다고 말했었다.

“기억나.”

“어째서 그런 말씀을 하셨나요?”

타티아나는 진지하게 물었다.

그럴 만도 했다. 에르네스트가 한 평가는 듣기에 따라 조금 교만한 느낌이 있었다. 특히 겸손한 성격의 타티아나는 그리 좋아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무를 생각은 없었다.

“난 그렇게 들었으니까.”

미하일 선생님도 듣는 귀가 탁월하신 분이니까 타티아나의 연주를 듣는다면 분명 알아보시겠지. 에르네스트는 그렇게 믿었다.

타티아나는 물끄러미 에르네스트를 바라보더니 갑자기 툭 이야기했다.

“저번에 제게 곡을 헌정해 주겠다 하셨죠.”

“그래.”

“제가 위클리 후에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도…… 그 약속 지키셨을까요?”

위클리 연주회 후에 타티아나가 쇼팽 소나타를 연주하지 않고 혼절하는 일도 없었다면, 아무것도 초월하지 못했다면?

그런 타티아나 역시 에르네스트가 존중하는 타티아나였지만, 잠시 생각해 본 에르네스트는 짧게 답했다.

“글쎄.”

상당히 기분 나쁘게 들을 수도 있다. 멋대로 그녀를 가늠하고 있다고 오해할지도 모른다.

그래도 진심 그대로 전했고, 타티아나는 기쁘게 웃었다.

“에르네스트가 약속을 지킬 수 있도록 힘내야겠어요.”

“…….”

어떤 연주자에게 곡을 헌정하는 건 결코 일방적인 행위가 아니었다는 걸, 에르네스트는 새삼 깨달았다.

그리고 타티아나도 그걸 당연하게 여기고 있다는 점이 기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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