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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의 여명-471화 (471/1,277)

##  471화

파티엔 당연히 파티 게임이 빠질 수 없다.

스터디룸이라는 이름과 목적을 지닌 이 방엔 그 이름에 맞지 않게 몇 종류의 보드게임들이 늘 준비되어 있었다. 가끔 모여서 공부를 하다가 싫증이 나면 꺼내서 하곤 했었는데, 하나씩 가져와 모아 놓다 보니 벌써 종류가 꽤 되었다. 아나스타샤가 그중 몇 가지를 꺼내 왔다.

인원이 아홉 명이나 되다 보니 어떤 게임을 해도 시끌벅적했다. 블랙잭으로 카드놀이를 할 때도 내기거리를 돈으로 걸 순 없어서 소소한 벌칙 등을 내기로 하는 정도였는데, 그럼에도 굉장히 열광적인 분위기였다. 아나톨리는 목소리를 높이다가 결국 목이 아프다고 콜록거리기까지 했다.

“아나톨리. 사샤랑 같이 쉬려고?”

“예, 너무 떠들었나 봐요.”

“괜찮아. 쉬고 있어. 우리도 이것까지만 할 것 같으니까.”

에르네스트는 슬쩍 시계를 보며 말했다. 언제까지고 계속 파티를 즐길 순 없었다. 슬슬 이번 게임을 마지막으로 마무리할 때였다.

그렇게 파티의 마지막을 장식하게 된 게임의 이름은 위대한 달무티였다.

“저는 처음 해 봐요. 어렵나요?”

“별로 어렵진 않아.”

눈을 빛내는 타티아나에게 에르네스트가 간단히 룰을 설명해 주었다.

게임에 참가한 인원들에게 공평하게 카드가 돌아가고, 각각 나누어 받은 카드들을 규칙에 따라 전부 내려놓으면 이기게 되는 간단한 게임이다.

그러나 그게 전부라면 너무 단순하고 심심하다. 때문에 이 게임엔 특수한 규칙이 한 가지 있었다. 그건 바로 승패에 따라 계급이 정해지며 그 계급에 따라 위에서 아래로 내리는 명령엔 절대적으로 따라야 한다는 규칙이었다.

사실상 이 게임의 핵심 규칙이라고 할 수 있는 룰이었는데, 이 규칙을 어떻게 즐기느냐에 따라 게임에 몰입할 수 있는 정도가 달라지곤 한다.

“내가 달무티로다!”

첫 달무티를 정하는 게임에서 이기자마자 발렌티나가 일어나며 당당히 선언했다. 지금 이 순간부터 발렌티나는 달무티, 이 게임의 왕이었다.

그리고 이 게임의 가장 낮은 계급인 농노엔 리처드가 당첨되었다.

“…….”

리처드는 끔찍하다는 얼굴로 일어나 발렌티나의 오른편에 가서 앉았다. 농노의 자리였다.

자기 옆에 리처드가 오자마자 발렌티나는 다짜고짜 윽박질렀다.

“세금을 내놓거라 네 이놈.”

“…….”

“어허?”

“죄송합니다. 폐하.”

리처드는 약간 저항해 보려 하긴 했지만, 발렌티나가 달무티로서의 권력을 마음대로 휘두를 작정을 하고 있다는 걸 확실히 깨닫곤 빠르게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자신의 카드 중 가장 높은 카드 두 장을 발렌티나에게 주고, 발렌티나는 별로 쓸모없는 카드 두 장을 리처드에게 넘겼다. 이 게임의 악랄한 규칙 중 하나였다.

그리고 농노가 견뎌야 할 건 이런 불합리한 카드 교환뿐만이 아니다. 그 후로 한 명씩 카드를 내려놓거나 패스하며 게임이 진행되는 내내 발렌티나는 리처드를 괴롭혔다.

“여봐라, 목이 마르구나.”

“여기 있습니다.”

“콜라? 지금 짐에게 이 거무죽죽한 음료를 마시라고 하는 것이냐? 그건 당장 네 녀석이 원샷으로 마시거라.”

“…….”

해도 해도 너무한 거 아닌가 싶기도 했지만 달무티의 명령은 거부할 수 없다. 리처드는 눈을 감고 콜라를 들이켰다. 그러다가 탄산에 사레가 들렸는지 목을 부여잡고 기침을 해 댔다.

솔직히 웃겼다. 늘 시니컬하게 무게 잡고 있는 리처드가 이렇게 내기만 했다 하면 지면서 망가지는 걸 보면 웃기지 않을 수가 없었으니까. 하지만 에르네스트는 살다 살다 처음으로 그가 안쓰러워 보일 줄은 몰랐다.

리처드를 고문한 뒤엔 조금 불쌍했는지 발렌티나도 적당히 해 주긴 했다. 리처드는 거기에 더 열 받아 하는 것 같았지만.

하지만 아무리 기를 쓰고 달무티의 자리를 찬탈하려고 한들, 결국 운에 영향을 받는 게임인 이상 리처드의 마음대로 할 순 없었다. 그다음으로 달무티의 자리에 오른 건 운 좋게 카드를 몽땅 내려놓은 한승우였다.

그리고 농노는 타티아나.

“…….”

타티아나는 쭈뼛거리며 옆자리에 가 앉았다. 방금 전 리처드가 당하는 걸 똑똑히 지켜본지라 약간 긴장하고 있는 듯 했다.

하지만 그렇게 걱정할 건 없어 보였다.

평소엔 드러내 놓고 있지 않지만, 한승우는 종종 타티아나에게 갚아야 할 것이 많다는 말을 하곤 했다. 그게 단순히 말뿐만이 아니라는 건 이미 음악으로 증명하기도 했었고.

에르네스트는 조금 낙관적으로 상황을 지켜보았다. 게임은 게임일 뿐이고, 아무리 그래도 저 자식이 미치지 않고서야 타티아나를 막 대하진 못하겠지.

“세금…… 여기 있습니다.”

“…….”

타티아나가 알아서 세금으로 카드 두 장을 넘길 때까지도 한승우는 입을 열지 않고 있었다. 에르네스트는 속으로 자신의 예상이 맞았다고 생각하며 피식 웃었다.

하지만 그 웃음은 채 1초도 가지 못했다. 갑자기 한승우가 책상을 쾅 내리쳤기 때문이었다.

“세금이 겨우 이것밖에 안 된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 더 내놓아라!”

아, 저놈은 원래 미친놈이었지.

아련히 스쳐 지나가는 지난 마피아의 추억을 떠올리며 에르네스트는 한승우를 쳐다보았다. 얼빠진 표정을 짓고 있는 건 비단 에르네스트뿐만이 아니었다. 류보비는 눈을 휘둥그레 뜨고 있었고, 아나스타샤와 발렌티나는 기겁했다.

그 와중에 가장 침착한 건 타티아나였다. 그녀는 멀거니 한승우를 바라보더니 한마디 툭 내뱉었다.

“와.”

“와?”

“아, 아닙니다…… 폐하.”

드디어 게임의 본질을 완전히 이해했다는 듯 타티아나가 고개를 숙였다.

그 후로도 한승우의 폭정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리처드에게 창문을 열라고 시켰다가 다시 아나스타샤에게 닫으라고 시키고, 에르네스트에겐 턴마다 카드 뭉치를 똑바로 관리하지 않는다고 역정을 냈다. 타티아나도 바로 옆에서 시달렸지만 얌전히 따랐다.

에르네스트는 저놈을 기필코 죽이고 말겠다는 생각을 하며 게임에 몰입했다.

물론 에르네스트가 아무리 머리를 잘 써도 결국 달무티의 자리에 앉는 건 운 좋은 류보비였다.

게임을 너무 잘 배운 탓인지, 류보비도 왕좌에 앉자마자 모두를 너무나 잘 부려먹었다. 그녀는 특히 에르네스트를 마음대로 부릴 수 있다는 것이 마음에 드는 듯했다.

그러다가, 타티아나에게도 기회가 찾아왔다.

“이젠 제가 달무티예요.”

타티아나가 카드들을 내려놓으며 선언했다. 가신들은 빠르게 타티아나 쪽으로 관심을 돌렸다. 물론 그녀는 이전까지의 폭군들보다 훨씬 자비로울 테지만, 그래도 잘 보여서 나쁠 건 없었다.

아나스타샤가 옆에서 빠르게 속닥거렸다.

“폐하, 이젠 저희에게 막 대하심이…….”

“알고 있어.”

타티아나가 기다렸다는 듯 짧게 대꾸했고, 아나스타샤가 놀라서 눈을 깜빡였다. 에르네스트는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타티아나에겐 언제나 그녀만의 규칙이 존재했지만, 게임을 할 땐 게임의 규칙이 역시 우선인 모양이다. 에르네스트는 그녀의 그런 점도 성실함의 일면이라 생각했다.

달무티가 정해지고, 게임을 이어 나가 다른 계급들도 정해졌다.

한승우는 마지막까지 카드를 들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불과 몇 분 전까지만 해도 달무티였던 그는 농노가 되었다.

“…….”

테이블의 가장 상석인 달무티의 자리에 가서 앉은 타티아나는 살짝 내리깐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렇게 저 자리에 잘 어울렸던 사람이 있었나? 그냥 연기인데도 왠지 모를 위엄이 느껴져서 에르네스트는 자기도 모르게 목에 힘을 주었다.

타티아나가 손을 들었다.

“우선…… 여봐라. 첫 명령이다.”

평소와 전혀 다른 엄숙한 목소리로 타티아나가 말했다. 어떤 명령일지 에르네스트는 조금 기대되기도 했다. 만약 특정인에게 향하지 않는 명령이 내려진다면 지금 제2계급인 귀족을 맡고 있는 에르네스트가 진두지휘하여 수행하게 될 확률이 높았다.

그렇게 근엄하게 내려진 타티아나의 명령은 짧고 명료했다.

“이자의 목을 쳐서 효수하라.”

“예?”

타티아나가 엄지손가락으로 우측의 한승우를 가리키며 말했다. 발렌티나가 깜짝 놀라 되물을 정도로 살벌한 명령이었다.

다짜고짜 목을 치라고? 하지만 타티아나의 냉정한 표정엔 일절 흔들림이 없었다. 에르네스트는 적잖이 당황했다. 성군이 되리라 믿었던 타티아나가 갑자기 이런 명령을 내릴 줄은 상상도 못 한 탓이었다.

믿을 수 없다는 듯 에르네스트가 중얼거렸다.

“갑자기?”

“말이 짧구나. 그 혀도 짧게 만들어 주겠다. 여봐라, 당장…….”

“아닙니다, 폐하!”

냉기가 풀풀 날리는 목소리로 다시 명령하려는 걸 간신히 막았다. 중간에 말을 끊고도 아차 했지만, 살짝 눈치를 보니 타티아나가 이 정돈 대충 넘어가 줄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한승우에게 내려진 명령은 지켜져야 했다. 진짜로 단두대를 가지고 올 순 없으니 뭐라도 하는 시늉을 해야겠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골치가 아파진 에르네스트는 리처드에게 물었다.

“야, 어떻게 해.”

“몰라.”

“내 목에다가 뭘 어떻게 하겠다는 거야?”

그 와중에 효수라는 단어를 못 알아들은 한승우가 어리둥절해하며 물었다.

“아하하핫, 하하하…….”

그 모습을 지켜보던 타티아나가 즐거운 웃음을 터뜨렸다. 피의 복수는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만족한 것 같아 보인다.

달무티가 헤실헤실 웃으니 게임 전체의 분위기도 부드러워졌다. 에르네스트는 타티아나가 다시 분위기를 뒤집을 일이 없도록 심기를 건드리지 않게 조심했다. 물론 타티아나는 어지간해선 그러는 일이 없다.

그렇게 한참이나 더 놀면서 모두들 한 번씩은 권력자가 되고 나서야 게임이 마무리될 수 있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할까.”

“응.”

“재미있었어.”

꽤 치열한 대결이 많았는데도 만족스러운 웃음들이 오간다. 승패를 떠나 이 시간 자체를 즐길 수 있다는 건 굉장히 좋은 일이다.

그리고 기분 좋게 놀았다면 이젠 뒷정리를 할 시간이었다. 모두들 너 나 할 것 없이 각자 눈에 보이는 것들을 치우기 시작했다.

에르네스트는 테이블을 치우다가 문득 고개를 들어 타티아나를 찾았다. 그녀는 벽면에 붙은 종이들을 어떻게 하지도 못하고 만지작거리다가 옆에 있는 아나스타샤에게 말했다.

“이 장식들은 버리기에 너무 아까운데요.”

“신경 쓰지 마. 그냥 종이잖아?”

“그래도…… 정말 예쁘네요.”

종잇조각 하나도 소중하게 생각해 주는 모습을 보니, 열심히 만들길 잘 했다는 생각이 든다. 중간에 잠깐 타티아나가 별로 좋아하지 않을지도 모르겠단 생각을 했지만 그저 기우일 뿐이었다.

에르네스트는 조금 더 빠르게 테이블을 정리했고, 머잖아 스터디룸은 다시 그 이름에 걸맞은 공간으로 되돌아올 수 있었다.

“다 치웠다.”

“모두들 수고했어.”

성공적인 파티를 축하하는 친구들 사이로 타티아나가 말했다.

“오늘 너무 즐거웠어요. 고마워요.”

그녀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는 건 의심할 필요도 없었다. 다들 미소로 화답했다.

왁자지껄했던 분위기도 가라앉고, 살짝 어수선한 가운데 아나스타샤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튼…… 이제 연습이나 하러 갈 생각인데, 타티아나 넌?”

“아, 전 선생님을 뵈어야 해서요.”

“그러니? 알겠어.”

오후 일정이 남아 있는 친구들은 각자 해야 할 일들이 있었다. 그건 바쁜 9학년뿐만이 아니라 2, 3학년들에게도 해당되었다.

“저도 갈게요.”

“잘 가요. 류보비. 아나톨리도요.”

류보비는 아쉽다는 듯 타티아나와 포옹했지만 아까처럼 오래토록 끌어안고 있진 않았다. 이젠 보고 싶으면 볼 수 있다는 확신이 생겼기 때문인 것 같다.

에르네스트는 타티아나가 친구들과 이별 인사를 하는 걸 조용히 지켜보다가, 마지막으로 가방을 들었다.

“나도 레슨 받으러 가야겠네.”

“레슨이요?”

타티아나는 레슨이란 말에 반응했다. 그녀는 잠시 무언가 생각하더니 에르네스트를 따라나서려 했다.

“같이 가요, 에르네스트.”

“……레슨이라니까?”

에르네스트가 묻자 타티아나가 이유를 설명했다.

“구세프 선생님에게 가 봐야 해서요. 레슨 전에 5분 정도만…… 인사만 드릴 생각이에요.”

뵈어야 한다는 선생님이 구세프 선생님이었나 보다.

에르네스트는 괜히 타티아나에게 이러쿵저러쿵 캐묻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가자.”

두 사람은 외투를 챙겨 들고 스터디룸 밖으로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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