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72화
3월의 복도는 아직 춥다. 차가운 냉기가 내려앉아 있었다. 난 외투 앞섶을 살짝 여미며 복도를 걸었다.
또각거리는 구두 소리는 하나가 아니었다.
반걸음 정도 앞서 나가는 에르네스트는 너무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게 걷고 있었다. 적당히 내게 맞춰 주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난 발걸음을 확 빨리하며 에르네스트의 앞으로 나섰다.
“아까는 너무했어요, 에르네스트.”
“뭐가?”
“달무티가 되셨을 때 말이에요. 곤란한 명령만 내리시고.”
레슨실까지 그냥 조용히 가는 건 심심해서 말을 걸어 보았다. 아까 스터디룸에서 했었던 파티 게임에 대한 이야기였다.
에르네스트는 게임의 권력자인 달무티가 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아나스타샤와 리처드를 괴롭혔다. 물론 발렌티나와 한승우도 그 마수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유일하게 나만 거기에서 조금 벗어날 수 있었다. 내가 오늘 파티의 주인공이라 봐줬던 걸까?
그런데 날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에르네스트의 대답은 예상외였다.
“나야말로 타티아나 네가 갑자기 옆에 있는 녀석 목을 치라고 했을 때 얼마나 황당했는 줄 알아?”
단순히 보복이 두려웠던 것 같다. 난 어이가 없어서 되받아쳤다.
“농담이었잖아요.”
“농담인 걸 알아도 무섭더라고.”
“무서웠나요?”
“어…… 약간?”
내가 조금 무게를 잡긴 했지만 무섭다고 한 건 말실수라고 생각했는지 에르네스트는 대충 그렇게 말을 얼버무렸다.
웃으며 바라보니 내 시선을 피한다. 그거 살짝 투덜거리는 투로 말했다.
“왜 웃는데?”
“그냥요.”
“…….”
그냥 웃음이 나온다. 정말 다른 이유는 없었다.
난 방금 전 있었던 일들을 떠올리며 천천히 말했다.
“즐거웠어요……. 정말 학교에 빨리 오길 잘 했어요.”
학교에 다니지 않고 조금 더 재활을 한다 하더라도 지금처럼 빠르게 회복할 수 있었을까? 절대 아니라고 생각한다.
에르네스트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잠시 말없이 몇 걸음 걷더니 이야기했다.
“넌 우리 학교를, 그리고 다른 애들을 정말 좋아하는 것 같아.”
“……그렇게 보이시나요?”
“그렇잖아?”
그는 당연하지 않냐는 듯 물었다. 물론 그 말이 맞다. 학교와 친구들. 모두 내게 정말 중요한 부분들이었으니까.
하지만 왜 다른 아이들이라고 하면서 자기는 쏙 빠지는 듯 말하는지 잘 모르겠다.
난 그에게 다시 정확하게 이야기해 주려다가, 살짝 말을 비틀었다.
“에르네스트도 저와 같으신 거죠?”
몇 년 전부터 모스크바 음악원의 스카우트 제의를 받으면서도 그가 중앙음악학교에 남아 있는 이유는 성급하게 결정을 내리지 않고 자신의 진로를 스스로 멋지게 결정하기 위함도 있었지만, 사실 이곳 자체에 대한 애정도 상당히 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저와 같지 않나요?
에르네스트는 가만히 날 바라보더니, 결국 웃음을 흘리며 대답했다.
“같아.”
“후후.”
“왜?”
“그냥요.”
“아까도 그냥이라고 했잖아.”
“이번에도 그냥이에요. 안 되나요?”
우린 그렇게 서로 실없는 소리들을 이어 나가며 복도를 거닐었다. 레슨실까지의 몇 분은 정말 짧게만 느껴졌다.
그리하여 구세프 선생님의 레슨실 앞에 섰다.
나도 에르네스트도 혹시나 복장에 흐트러짐이 없는지 점검했다. 넥타이가 조금 틀어진 것 정도는 별로 신경 쓰지 않으실지도 모르겠지만, 지도 선생님을 마주하는 일은 늘 있다고 해서 방심하면 안 된다.
정돈을 마친 우리는 마지막으로 서로 눈을 마주했다. 문제는 없었다. 그가 정중하게 레슨실 문을 노크했다.
“에르네스트입니다.”
“들어와라.”
에르네스트가 먼저 들어섰고 난 그 뒤를 따랐다.
신문을 보고 있던 구세프 선생님은 한쪽 눈으로만 우리 쪽을 보시더니, 나와 눈이 마주치고는 똑바로 고개를 돌려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언제나 그렇듯 퉁명스러운 말투로 묻는다.
“뒤에 있는 녀석은 왜 이야기도 안 한 거냐?”
“안녕하세요. 구세프 선생님.”
아랑곳 않고 밝게 인사했더니 선생님은 살짝 삐딱하던 눈초리를 지우고, 신문을 접어 내려놓았다.
“그래……. 나야 안녕하지. 이제 몸은 괜찮나? 타티아나.”
“예. 덕분에요. 그래서 인사를 따로 드려야 할 것 같아서…….”
“인사는 무슨, 됐다. 네 이야기는 미하일에게서 조금 듣기도 했고…….”
구세프 선생님은 시선을 살짝 늘어뜨리며 그렇게 말씀하셨다. 미하일 선생님에게 이야기를 듣지 않았다면 결코 이렇게 나오지 않으셨을 것 같단 예감이 들었다.
아마 쓰러진 것에 대해 한바탕 혼이 나고 이야기가 시작되지 않았을까? 사실 오늘도 거기에 대한 각오는 어느 정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미 미하일 선생님에게 이야기를 전해 들은 구세프 선생님의 관심은 다른 쪽으로 향해 있는 듯하다.
“……그런데, 이야기만 들어선 부족하기도 했지. 잘 왔다.”
사실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선생님이 단도직입적으로 물어오셨다.
“정말이냐?”
“어떤 것 말씀이신가요?”
“쇼팽의 소나타와 마주르카를 연주했다는 것.”
그간 내게 쇼팽의 소나타 1번을 레슨하신 선생님은 내가 그 곡을 제대로 완성하지 못했고, 무대에 올리지도 못했다는 걸 잘 아신다. 난 직접 선생님에게 그 곡을 그만두겠다고 말한 적도 있었으니까.
그런데 어느 날 선생님이 보지 못한 곳에서 내가 그 레슨의 결실을 만들어 냈다는 걸 전해 듣고도 신경 쓰지 않으실 리 없었다.
먼저 이야기를 드렸어야 했다는 후회도 살짝 하면서, 난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갑자기 할 수 있게 된 거냐?”
“갑자기는 아니에요. 선생님의 레슨과…… 정말 많은 이해와 도움을 받았지요.”
이렇게 이야기로 한들 소용없었다. 구세프 선생님은 아무리 들어도 부족하다는 얼굴을 하시더니, 내 옆에 서 있는 에르네스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는 여태껏 한 마디도 않고 가만히 있었다.
“에르네스트.”
“예.”
“네 시간은 나중에라도 조금 더 내줄 테니 지금은 잠깐 쉬고 있어라.”
계속 방치해 두다가 하시는 말씀은 조금 더 기다리라는 말씀이었지만, 에르네스트는 불만을 토로하지 않고 웃었다.
“나가라고 하지만 않으신다면 상관없어요.”
“저 녀석이 들어도 되겠나? 타티아나.”
그의 레슨 시간을 빼앗는 건 내 쪽이었다. 여기서 나가 달라고 할 수 있을 리 없었다.
“괜찮아요. 그런데 듣는다 하심은…….”
구세프 선생님은 찰나의 고민도 없이 말씀하셨다.
“소나타를 들어 보고 싶군. 네가 어떤 곡을 연주하는지 듣고 싶어졌다.”
“……소나타 1번 말씀이시죠.”
“바로 되겠나?”
곧바로 요청하셨던 것과는 달리 약간 조심스러워진 물음. 난 잠시 고개를 내려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살짝 구부려 보니, 손아귀엔 제대로 음악이 들어차 있었다. 분명한 감각이 여기에 존재했다.
“꿈속에서도 가능했었어요.”
핫 하고 웃음을 터뜨리는 선생님을 보고, 난 곧장 피아노 앞에 앉았다.
***
구세프는 이젠 그만두겠다고 말하던 타티아나의 모습을 떠올렸다.
정신적 한계에 다다라 레슨실 앞에서 쓰러진 후, 그녀는 구세프에 대한 죄스러움과 스스로에 대한 분노 그리고 체념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곡을 놔 버렸다.
선생으로선 그냥 두고 볼 수 없는 일이다. 연주자가 곡을 마주하면서 끔찍할 정도로 힘들고 어려운 건 당연한 일이니 정 버겁다면 잠시 쉬었다가 도전하는 식으로 얼마든지 노력을 이어 나갈 수 있다.
그렇게 평생에 걸쳐 이뤄 나가는 것이 연주자의 업이라 생각하는 구세프는 학생이 벽에 부딪혀 포기해 버리는 걸 가만히 지켜본 적이 없었다. 종용하고 부추기기도 하며, 심하게는 윽박질러서라도 다시 피아노 앞에 앉히는 것이 그의 일이자 사명이었다.
하지만 타티아나에겐 그렇게 말하지 못했다.
힘없이 고개를 젓는 그녀를 보며 너무 죄책감을 혼자 떠안지 말라고 말해 줄 수밖에 없었다. 왜 이 정도로 그만두겠다는 말을 하냐고 호통을 칠 수 없었다.
구세프는 타티아나에게 필요한 것이 피아노에 앉아야 할 강박이 아니라 어떠한 근본적인 깨달음임을 느꼈다. 때문에 그는 미하일과 함께 타티아나가 추구하는 곡의 방향성에 대해 조언을 조금 해 주었다. 예술은 늘 최선을 갱신해 나간다. 그게 전부였다.
그런데 그 조언이 이렇게나 명확한 형태를 갖추고 다시 되돌아올 줄은 미처 상상도 못 했다.
“…….”
타티아나가 연주하는 쇼팽 소나타 1번의 첫 소절은 이전과 그리 다를 바 없었다.
중후하면서도 약간 산만한, 그런데도 사람의 집중력을 남김없이 빼앗아 가는 마력을 지닌 선율. 타티아나는 음악에 호소력을 실어 사람을 움직이는 데에 매우 능숙했다.
그런데 구세프도 그런 그녀를 반절밖에 몰랐다.
선율이 한 번 반복되자마자 음악은 그 수준 자체를 달리했다.
피아니스트의 해석은 개성이자 정체성으로서 분명히 중요하다. 하지만 거기에 너무 매몰되어 버리면 결국 서서히 침몰하게 된다.
타티아나는 지금까지 그것을 결코 인정하고 싶지 않아 했지만, 어느 순간 깨달아 버린 그녀는 피아니스트 개인을 넘어선 무언가가 되어 있었다.
구세프가 늘 말하던 음악 자체에 대한 존중. 작곡가의 의도가 그림으로 드러나 있는 악보를 현실 세계에 최선의 형태로 재창조하는 데에 집중해야 하는 피아니스트의 역할.
타티아나의 음악엔 그 모든 것이 집약되어 있었다.
한없이 약해 보이는 가느다란 손이 살짝 떠올랐다가 건반을 짚었다. 검은 피아노는 그 손놀림에 따라 모양이 자유자재로 변하는 듯 느껴지기까지 했다. 길쭉한 요트처럼 변해 느긋하게 움직이다가, 어느 순간은 바람개비처럼 빙글빙글 돌기도 한다.
곡의 전체적인 해석은 타티아나가 오르고 싶어 하던 거대한 산의 형태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옴짝달싹 않고 딱딱한 바위산 같던 모습은 이제 없었다. 나무가 울창하게 우거지기도 하고, 어떨 땐 화산이 폭발하기도 한다. 산이라는 형태를 유지한 채 너무나 자유자재로 움직였다.
구세프는 그녀의 연주를 들으며 마음 속으로 찬사를 보냈다.
단순히 테크닉이나 표현력의 향상 정도가 아니다. 이건 타티아나가 피아니스트로서의 수준을 한층 끌어 올린 결과물이었다.
지금 피아니스트의 격만 놓고 보자면, 타티아나는 에르네스트를 상회하고 있었다. 구세프는 그 점을 분명하게 느꼈다. 그리고 지금 옆에서 듣고 있는 에르네스트가 그 사실을 알아주길 바랐다.
‘……역시.’
슬쩍 본 에르네스트의 표정은 복잡 미묘했다. 기뻐하기도 하지만, 그 밑에는 뜨겁게 끓고 있는 무언가가 분명히 존재하고 있었다. 이 연주가 지닌 가치가 어느 정도인지 바로 알아본 얼굴이다.
알아봤다면 괜찮다. 그건 에르네스트도 저 지점에 매우 가깝다는 증거였다.
구세프는 에르네스트가 성인 콩쿠르에 출전할 수 있는 내년이 되기 전에 지금의 수준에서 한 단계 더 확실하게 올라설 수 있길 기대했지만 마땅한 계기가 없어서 조금 지켜보고 있는 상태였다.
안 그래도 난데없이 작곡이 하고 싶다고 하기도 했고, 구세프로서도 조금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
그런데 지금 보니, 피아니스트로서 수준을 걱정할 필요는 전혀 없을 것 같았다.
에르네스트의 음악에서 타티아나는 영향을 받아 자신의 벽을 깨뜨리고, 타티아나가 저렇게 한 발자국만 앞서가도 에르네스트는 바로 알아보고 따라가려 한다. 그리고 거기에서 또 영감을 얻어 곡을 써 내려가겠지.
음악을 할 수 있는 사람들만이 할 수 있는 호혜의 주고받음. 그렇게 커져 나간 긍정적인 영향들이 진가를 드러내고 있었다.
구세프는 저 두 사람이라면 분명 러시아에 또 다른 광풍을 불러일으킬 수 있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
25분 정도 길이의 연주가 끝나고, 구세프는 짧게 박수를 세 번 쳤다.
“브라바.”
“감사합니다.”
타티아나가 우아하게 목례했다. 한 소절만 연주해도 잔뜩 지쳐 버리던 전과 다르게 힘든 기색도 전혀 보이지 않았다. 확실하게 이 곡을 손에 쥐게 된 것 같았다.
구세프는 농담을 해도 될 것 같다고 생각하며 말했다.
“네가 악보에 그려 준 해석과는 조금 다른 것 같은데.”
타티아나는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몇 줄 더 그었을 뿐이에요.”
그녀의 대답은 결코 손쉬웠다는 말이 아니었다. 겸손도 아니다.
굉장히 어려운 과정 끝에 얻어 낸 몇 줄이 이 음악을 이루어 냈다는 진솔한 대답이었다.
구세프는 그 대답이 매우 마음에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