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473화 (473/1,277)

##  473화

내 연주를 듣고 난 구세프 선생님은 간결하게 상황을 정리했다.

“당분간은 내 레슨이 필요하지 않을 것 같다. 타티아나.”

난데없이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다. 저번에 분명 계속 레슨을 해 주시겠다고 말씀하셨으면서?

하지만 마땅한 이유도 없이 이러실 리가 없다. 난 다시 한 번 말씀을 떠올리다가, 당분간이라는 전제가 붙었다는 걸 깨달았다.

“…….”

“그렇게 보지 말고. 내가 그만두겠다고 말하는 게 아니잖나.”

설명을 요구하는 눈으로 물끄러미 바라보니 구세프 선생님이 손을 저었다. 난 그것만으로도 안도했다.

선생님은 손으로 허공에 무언가를 그리며 말씀하셨다.

“네 수준에 맞춰 다음 목표를 세우려면 시간이 조금 필요하다. 그러니 당분간만이다.”

“그렇다면 괜찮아요.”

난 지금까지 목표라고 생각했던 것을 확실하게 깨뜨리고 여기에 섰다. 하지만 이제 막 이룬 참이라서 다음 목표랄 것이 전무했다. 그저 막연하게 주변 사람들에게 잘하고, 피아노를 치고 싶다는 생각뿐이다.

지금은 적응에만 집중해도 여념이 없어서 별생각이 들지 않지만, 곧 우왕좌왕하게 될지도 모른다.

구세프 선생님은 그걸 정확히 꿰뚫어 보시곤 내가 다음 계단을 찾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실 생각이었다. 난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

선생님은 한참을 날 바라보시더니 손가락을 까딱였다.

“아무튼…… 오늘 잘 들었다. 이제야 나도 두 발 뻗고 자겠다 싶군.”

“제가 그 정도로 말썽이었나요?”

“알면서 묻지 마라. 딱히 말하지 않고 있었는데…… 혼나고 싶은 게냐?”

짐짓 눈을 부라리는 구세프 선생님을 보니 뜨끔해졌다. 선생님은 내가 지난주 혼수상태에 빠졌던 일로 아무 말도 하지 않으셨지만, 그건 할 말이 없으셔서 가만 계시는 게 아닐 테다.

난 괜히 선생님을 자극하지 않고 있는 게 이득일 거란 생각에 입을 꾹 다물었다. 선생님은 한 소리 하실지 마실지 고민하는 얼굴로 팔걸이를 툭툭 치시더니, 결국 짧게 혀를 차며 말씀하셨다.

“쯧, 됐다. 이만 가 봐라. 에르네스트의 레슨 시간이니까.”

시간도 많이 뺏었으니 정말 가 보는 게 맞다는 건 아는데, 에르네스트의 레슨이라는 말을 들으니 갑자기 그의 피아노가 듣고 싶어졌다.

“아, 저도 견학하면 안 될까요?”

“무슨 놈의 견학이냐. 가서 쉬어라.”

“쉬면 피아노 실력이 늘지 않잖아요.”

“……여기 있으면 늘어나나?”

“그럴 거예요.”

마지막으로 그의 연주를 들어 본 게 벌써 열흘 전이었다. 그리고 그때 들었던 것과 지금 연주가 분명 다를 거라고, 나는 확신하고 있었다.

내가 고개를 끄덕끄덕하자 구세프 선생님은 에르네스트를 돌아보았다. 그에게 동의를 구하는 시선이었다.

에르네스트는 곧장 대답하진 않았다. 그는 자존심이 굉장히 강한 편이었고, 레슨은커녕 연습도 다른 사람과 쉽게 공유하지 않는 편이었다. 난 여태껏 그와 지내면서도 레슨을 받는 걸 딱 한 번, 연습은 두어 번 본 게 전부였다.

싫다고 한다면 어쩔 수 없이 돌아가려고 하는데, 에르네스트는 피식 웃으며 내 견학을 승낙했다.

“그렇게 해. 나도 네 연주 들었으니까. 답례가 있어야지.”

“공정하시네요.”

“그런가? 글쎄. 그건 잘 모르겠고.”

이제 와서 조금 머쓱해졌는지 중얼거리지만 난 그가 기호에 대한 로열티를 지불하겠다며 아무거나 말해 보라고 했던 걸 기억한다. 어지간해선 그렇게까지 하지 않는다.

난 레슨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최대한 구석에 가서 앉았다. 이대로 숨 쉬는 소리도 크게 내지 않고 가만히 있을 생각이었다.

에르네스트와 구세프 선생님은 각각 피아노 앞에 앉았다.

“연습해 온 거 치면 되겠습니까?”

“그래. 해 봐라.”

허락이 떨어지자 에르네스트는 내 쪽을 힐끗 돌아보더니, 주저 없이 건반을 내리눌렀다.

***

연습하는 내내 에르네스트는 타티아나가 신경쓰였다.

그녀가 같은 연습실에서 자신의 피아노를 듣고 있다는 것도 계속 느껴지고, 무엇보다 방금 전 타티아나가 연주했었던 소나타가 계속 머릿속에 맴돌았다. 에르네스트는 그 소리가 언제라도 움켜쥘 수 있는 거리에서 약간 더 멀리 떨어져 있다는 걸 느꼈다.

“…….”

약간은 자존심이 상한다. 재작년 타티아나의 프로코피에프에 엉망으로 깨졌을 때도 이런 기분은 아니었는데, 이번엔 확실하게 밀렸다는 느낌이 들었다. 객관적으로 보자면 에르네스트의 커리어가 타티아나의 열 배는 앞서지만, 그런 건 지금 의미가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영영 손에 닿지 않을 것 같은 절망감이 느껴지는 건 아니었다. 지금만 해도 1시간 정도 레슨을 받으면서 에르네스트는 서서히 감각을 느끼고 있었다.

곡을 반복할 때마다 어떻게 해야 할지 알 것 같다. 타티아나의 연주와 존재 그 자체가 에르네스트를 빠르게 다음 계단으로 밀어 올리는 기분이었다.

물론, 모든 걸 한나절에 해결할 수 있는 건 아니다.

“그만, 오늘은 여기까지.”

구세프가 레슨을 중단시켰다. 약간 아쉽긴 하지만 오늘은 이 정도가 적절했다. 혼자 생각하고 연구할 시간도 주어져야 실력을 다듬고 키워 낼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오늘 레슨받은 것들을 다시 한 번 곱씹고 있는데, 갑자기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 깜짝 놀라 고개를 드니 타티아나가 박수를 치고 있었다.

구세프가 황당하다는 듯 물었다.

“레슨일 뿐인데 웬 박수냐? 타티아나.”

“박수를 치고 싶을 정도의 레슨이었어요.”

“…….”

레슨의 수준이 뛰어나서 박수를 치고 싶어졌다는데, 할 말이 없었다. 천하의 구세프도 무어라 하려다가 결국 피식 웃고 말았다.

“공부가 되었으면 좋겠군.”

타티아나도 내 레슨에서 정말 무언가 배워 간 걸까? 견학 또한 공부라는 걸 정말 실천하는 사람은 드물겠지만, 타티아나는 분명 그 드문 사람 중 하나일 테니 충분히 가능할 것 같았다.

그리고 에르네스트 역시 보는 것만으로도 금방 모든 것을 습득해 내는 보기 드문 사람이었다.

에르네스트는 손목을 흔들며 말했다.

“오늘 가장 많이 공부한 건 저일 것 같은데요.”

“그렇게 생각하나?”

“예. 확신합니다.”

지금은 타티아나가 조금 앞서 있지만 그 정도 차이는 따라잡을 자신이 있었다. 에르네스트는 분명한 자신감을 가지고 대답했다.

구세프는 마음에 든다는 듯 웃었다.

“그럼 넌 괜찮다.”

단단한 믿음이 느껴졌다. 에르네스트는 마주 웃으며 오랫동안 자신을 믿어 준 스승을 바라보았다.

작곡을 하겠다고 했더니 요즈음 조금 머리 아파하시는 것 같긴 하지만, 그래도 오래된 신뢰는 분명하게 존재했다.

구세프는 에르네스트가 과거 클래식 음악가들처럼 작곡도 하고 연주회도 하겠다고 말한 것을 분명히 이룰 수 있으리라 믿고 있었다. 에르네스트는 그 믿음에 부응할 생각이었다.

“다음에 올 때까지 뭘 준비해 와야 하는진 말 안 해도 알겠지.”

“지적해 주신 부분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좋다.”

레슨을 다시 되새길 필요도 없었다. 에르네스트는 이번 시간에 머릿속에 새긴 것들을 다시 혼자서 정리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고, 구세프도 별말 하지 않았다.

구세프는 피아노 앞에서 일어나 책상 옆 의자에 털썩 앉더니 피곤하다는 듯 손을 들었다.

“그럼 가 보고…… 다음에 보자, 에르네스트.”

그리고 구세프는 손을 내렸다가, 다시 흔들었다.

“타티아나도.”

“……예!”

조용히 돌아가려던 타티아나는 구세프의 다음에 보잔 말에 활기차게 대답했다. 갑자기 기분이 좋아진 것 같았다.

레슨실을 나오자마자 타티아나가 말했다.

“같이 돌아갈까요?”

“그럴까.”

원래 오늘은 파티만 하고 각자 오후 일정을 보낼 생각이었는데, 어쩌다 보니 이렇게 함께 돌아가게 되었다.

당연히 싫은 건 아니지만 에르네스트는 타티아나가 차로 태워다 주겠다고 할 때마다 그 반대는 할 수 없다는 게 미안했다.

하지만 자동차 면허를 따려면 열여덟 살이 되어야 하니 최소 2년은 있어야 했다. 그리고 차를 살 돈도 문제다. 모아 놓은 건 꽤 많았지만 방탄 벤츠 같은 건 못해도 5천만 루블은 할 것 같…….

“에르네스트.”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에르네스트는 갑자기 타티아나의 부름에 놀라 옆을 내려다보았다. 타티아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스스럼없이 제안했다.

“혹시 괜찮으시다면 저녁 식사라도 함께하시겠어요? 어떠신가요?”

시간을 보니 슬슬 해가 지고 저녁나절이었다. 식사 정도는 얼마든지 살 수 있으니 그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타티아나와 시간을 함께하는 건 늘 즐겁기도 했고.

하지만 오늘은 타티아나가 한동안 아팠다가 학교에 나온 첫날이었다. 타티아나 본인은 별로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지만, 분명 베르체노프가 사람들은 오늘 타티아나가 언제 돌아오나 걱정하고 있을 게 분명했다. 아무리 괜찮다고 해도 밖에 오래 있는 건 그리 좋은 생각이 아닌 것 같았다.

잠시 생각한 에르네스트는 이만 집에 가라고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고 살짝 돌려 이야기했다.

“아니, 오늘은 집에 일이 있어서.”

“아…… 그런가요. 어쩔 수 없네요.”

타티아나는 크게 의문을 가지지 않고 수긍했다.

그 모습을 보니 미안해질 일이 아닌데도 미안해졌다. 에르네스트는 좋은 방법이 없을까 궁리하다가 가방을 들었다.

“가만…… 있어 봐. 줄 게 있어.”

“……?”

가방 안엔 온통 종이들이 가득했다. 에르네스트는 책과 악보, 공책 등 수많은 종이들 사이에서 낱장으로 된 몇 장의 종이 묶음을 꺼냈다.

“이거. 저번에 주기로 했던 거.”

“아.”

에르네스트가 작곡하고, 타티아나에게 헌정하기로 했던 곡의 악보였다.

사실 몇 주 전 헌정하겠다고 한 응접실에서 바로 주기로 했었지만, 타티아나는 구세프에게 이 곡으로 제대로 테스트를 보고 합격을 받은 후에 받겠다고 했었다.

그 기억을 떠올리는지 타티아나가 급히 물었다.

“테스트는 어떻게 되었나요?”

“당연히 통과했지. 내 마음대로 배워 보래.”

구세프는 이 악보를 한 번 보자마자 마음대로 하라고 했다. 타티아나에게 말을 안 해서 그렇지 통과한 건 한참 전이었다.

타티아나는 진심으로 기뻐하며 말했다.

“잘됐네요. 축하드려요. 조금 늦은 것 같지만요.”

“안 늦었어. 고마워.”

자기 일도 아닌데 이렇게까지 기뻐해 주니 고맙기도 하고 조금은 쑥스럽기도 했다. 에르네스트는 괜히 악보 뭉치를 팔락거리며 제대로 순서대로 정리되어 있는지 확인하고는, 타티아나에게 건네주었다.

“자.”

타티아나는 악보 뭉치를 받아 들고 잠시 보더니 조심스레 시선을 들어 올렸다.

“……사실 조금 억지였는데, 아시죠?”

“알지.”

“그래도 저에게 헌정하시나요?”

이제 와서 그런 말을 하는 거야?

에르네스트는 순간 웃어 버릴 뻔했지만, 타티아나가 다시 진지하게 묻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아까 스터디룸에서도 그녀는 자신이 제대로 연주를 하지 못했다면 이 곡을 받을 수 있었을지 궁금해하기도 했다. 에르네스트의 생각 이상으로 타티아나는 이 곡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더더욱 기쁘고, 아쉬움이 없다. 에르네스트는 가볍게 웃었다.

“내가 주고 싶어졌어. 그리고 지금 나보단 네가 더 그 곡을 잘 연주할 수 있을 것 같아.”

“……예? 그럴 리가요?”

“그런 생각이 들어서.”

작곡가 본인이 꼭 자신의 곡을 세계에서 제일 잘 연주하란 법은 없었다. 수많은 작곡가들이 자신보다 더 나은 연주를 하는 연주자들에게 곡을 헌정했고, 또 인정하기도 했다.

에르네스트는 이 곡은 아예 타티아나에게 주는 것으로 결정 내린 지 오래였다.

“어쨌든…… 쳐 보고 제목도 지어 줘. 그때 약속했던 거 알지?”

“알고는 있지만…….”

“그냥 대충 지어도 돼. 상관없잖아? 어차피 연습실에서나 치지 무대에 올리거나 할 건 아니니까.”

“…….”

부담가지지 말고, 그냥 작곡가 지망생 친구가 쓴 곡이라 생각하고 가지고 있어 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한 말이었다. 그런데 타티아나는 가볍게 받아들이지 않고 상당히 진지한 표정으로 악보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타티아나?”

“아? 아니에요. 잠시 생각할 게 있어서요.”

“무슨 생각?”

“그게…… 결정이 나면 말씀드릴게요.”

“?”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만 타티아나가 이렇게 이야기할 땐 항상 놀랄 만한 상황이 따라오곤 했다. 에르네스트는 은근한 긴장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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