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74화
에르네스트와 헤어져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난 계속 악보만 바라보았다.
“…….”
상당히 복잡했다. 그래도 난 초견과 시창에 강한 편이라 이렇게 읽는 것만으로도 음악의 형태를 거의 떠올릴 수 있었다.
정말 첫 작품이라고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멋진 작품이었다. 저번에 한 번 봤을 때도 연주해 보고 싶었는데, 이렇게 제대로 읽어 보니 기다리기 힘들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본관에 발을 들여놓지도 않고 곧장 별관으로 향했다. 외투와 모자를 걸어 놓고 가방은 테이블 위에 대충 내려놓았다.
“……후우.”
바쁘게 움직이느라 조금 숨이 찼다. 피아노 앞에 앉아서 길게 심호흡을 하며 악보를 보면대 위에 올려놓았다.
생각해 보면 처음이었다. 이렇게 어려운 작품을 연습하는데 어느 레퍼런스도 한 번 들어 보지 않고 이렇게 바로 건반부터 눌러 보는 건.
정말 미지의 세계에 손을 뻗는 기분으로, 건반 위에 손을 올렸다.
“…….”
시작부터 드러나는 화려한 화성의 폭포수. 에르네스트가 지닌 음악성을 여실하게 드러내는 압도적인 도입부가 펼쳐졌다.
복잡한 화음들이 교차되고, 다시 세 개의 선율로 분리되어 흩어졌다. 바흐, 조금 더 나아가선 리스트의 영향이 보이는 방식이었다.
한눈에 읽기엔 조금 까다로웠고 또 손가락을 완벽하게 독립하여 연주하기에도 그리 쉽지 않았다. 내가 아무리 초견 연주에 강해도 이 정도로 수준 높은 곡을 한 번에 연주하는 건 힘든 일이었다.
솔직히, 이렇게 빠른 아르페지오는 도대체 어떻게 연주하라고 써넣은 건지 모르겠다.
난 가까스로 템포에 늦어 절거나 틀리는 일 없이 선율을 따라잡으며 속으로 투덜거렸다.
그래도 정신없으면서도 즐거운 시간이었다. 난 눈으로 악보의 음표와 기호들을 읽어 내어 그대로 손으로 쏟아 내었다. 미리 읽어 두었던 시창으로 떠올린 음색을 가미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난 최고는 아니지만 최선을 다해 연주했고, 다음에 고쳐 나갈 부분들을 정확하게 기억했다. 두 번째 연주 땐 이보다 훨씬 더 잘할 수 있으리라 자신했다.
그대로 음악은 서정적인 선율을 따라 흐르다가, 다시 강렬해지고, 그다음은 경쾌하게 뛰놀고, 호수의 물결처럼 잔잔해졌다가, 피날레에 이르러 화려하게 모든 주제들을 아울렀다.
마지막 하강 옥타브 연타는 미묘하게 계속 화성이 바뀌어서 살짝 절뚝거렸다. 마지막 10도 화음도 그랬다.
손이 한참이나 큰 에르네스트라면 여유롭게 닿을지 모르겠지만 내 손은 9도 정도밖에 안 닿기 때문에 처리하기에 버겁다. 인체 공학이라곤 전혀 고려하지 않은 악랄한 작곡법이다.
“…….”
그래도 정말 아름다운 음악이었다. 이것도 겨우 몇 주 만에 작곡한 걸로 알고 있는데…… 역시 구세프 선생님이 작곡을 허락하신 데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내가 제대로 연주하지 못한 부분이 거의 대부분인데도 화성의 구조만으로 이 정도의 아름다움을 뽑아냈으니, 에르네스트의 작곡가로서의 재능이 얼마나 높은지 이 한 곡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제대로 연주한다면 도대체 얼마나 수준 높은 작품이 되어 줄지 상상도 잘 안 간다.
“아하하…….”
대단하다. 난 평생을 피아노에만 매달려서 작곡을 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이렇게 벌써부터 자신의 곡을 쓸 수 있는 에르네스트가 정말 존경스러웠다.
앞으로도 아마 난 피아노만 파고들 것 같아서 작곡은 하지 못할 것 같지만, 이런 친구가 있다는 건 정말 큰 행운일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 애는 내가 이 곡을 잘 연주해 줄 거라고 말해 줬었으니까…… 난 이 행운을 제대로 누리려면 정말 잘 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
저녁 식사 때까지 시간은 아직 꽤 남아 있었다. 난 그 전까지 이 곡을 더 연습해 보기로 했다.
연습해야 할 과제곡은 많지만 앞으로 며칠간 이 곡도 꾸준히 연습해서 어느 정도 만들어 놓을 생각이다.
제대로 연주해서 이 곡의 진정한 가치를 드러낼 수 있을 정도의 완성도까진 만들어 놔야, 선생님을 설득하기 쉬울 테니까.
***
며칠간 정말 정신없이 보냈다.
그간 하지 못했던 학교 일반 교과 진도를 따라잡으면서 과제들을 해내는 데에도 한참이나 시간이 걸렸고, 또 과제곡들도 먼저 받은 두 곡에서 어느새 세 곡이 되어 있었다.
“나 기절할 것 같아…….”
여기저기에서 차라리 죽여 달라는 소리가 나오지만, 난 정확하게 스케줄을 나누어 평가 날짜에 맞춰 완성할 수 있도록 곡을 분배하고, 거기에다가 한 곡을 더 더하기까지 했다. 바로 에르네스트에게 받은 곡이었다.
어느 하나도 놓칠 생각 없었다. 난 시간을 쪼개고 쪼개어 최대한 효율적으로 사용했다.
그리고 나만큼이나 시간을 쪼개어 쓰는 사람이 여기 또 한 사람 있었다.
“아나스타샤.”
“응? 응…….”
턱을 괸 채로 졸던 아나스타샤가 내 부름에 간신히 눈을 떴다. 그렇게 자다가 삐끗할까 싶어 차라리 엎드려 자라고 말하려는데, 차마 바로 그 말이 나오지 않았다.
“괜찮으세요?”
“괜찮아 보이니?”
“아뇨, 전혀요.”
그녀의 평소 반짝이던 눈빛엔 초점이 없고 흐릿해져 있었다. 무척 걱정이다.
양호실에 보내는 게 나을까?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안절부절못하고 있는데, 아나스타샤가 걱정 말라는 듯 키득거리더니 말했다.
“잠을 조금 설쳤어. 어제 밤새 곡들을 연습하다 보니 밤에 유령이 튀어나와서 심장 떨어질 뻔했거든.”
“유, 유령요?”
“응. 타티아나, 유령 무서워하지?”
“갑자기 튀어나오는 건 뭐든지 싫어요.”
아나스타샤는 내 반응이 재미있는지 조금 더 유령 이야기를 하려다가, 생각해 보니 김이 샜는지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래도 작곡가의 유령이어서 조언이나 좀 해 주려나 했는데…… 아무 말도 안 하고 잠만 설치게 하고 없어지더라고.”
심각한 이야기인데도 난 웃을 뻔했다. 나도 비슷한 경험이 있었던 까닭이다.
그리고 꿈에서 위대한 음악가들을 만나는 경험은 사실 음악에 미친 사람들 사이에선 생각보다 흔한 이야기이기도 했다. 눈 뜨고도 환영을 보고 환청을 듣기도 하는데 꿈에서 유령을 만나는 것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다.
피곤해하는 아나스타샤는 가엾지만, 그래도 연주자라면 겪어야 할 일이라 생각하며 가볍게 이야기했다.
“손해 봤네요.”
“응. 다음엔 붙잡아서 탈탈 흔들어 보려고. 어차피 내 머릿속 환영에 불과할지도 모르겠지만.”
“그래도 해 보세요.”
“……어?”
“해답은…… 이미 머릿속에 있을지도 모르니까요.”
“그랬으면 좋겠네.”
그 환영들은 사실 형상이 없는 선율의 흐름들이었을 거라 생각한다. 하지만 어느 순간 명확한 이해와 해석 아래에서 구조를 가지고 꿈에서 나타난다면, 그 곡이 말하는 한 마디는 사실 타인이 말하는 수백 수천 마디에 버금가는 한 마디일지도 모른다.
긍정적으로 받아들여 보란 뜻으로 이야기했더니 아나스타샤도 조금 진지하게 생각해 주었다. 이윽고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리고 그 답이 맞았는지 틀렸는진 이번 콩쿠르에서 알 수 있겠지.”
자기 자신의 대답도 중요하지만 콩쿠르 등에서 얻을 수 있는 순위도 굉장히 중요하다. 난 그녀를 응원해 주었다.
“아나스타샤라면 분명 입상하실 수 있을 거예요.”
“글쎄…… 정말?”
“물론이죠. 실력 발휘만 충분히 하신다면요.”
알캉을 연주하는 열여섯 살 연주자라면 청소년 콩쿠르 어디에다가 던져 놓아도 대상 트로피를 받아 나올 수 있었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세상엔 천재들이 정말 많았고, 컨디션은 상황을 따지지 않고 나빠지기도 한다.
난 아나스타샤가 잘 실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곁에서 지켜봐 주고 싶었지만 그녀는 여전히 어떤 콩쿠르인지 말해 주지 않고 있었다.
상을 받아 오기 전까진 말하지 않겠다는 고집을 왜 부리는 것인지 잘 알 순 없어도, 그녀가 진심이라는 건 이해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더 캐묻거나 귀찮게 하는 것도 실례였다.
난 그녀를 믿으니까, 기다릴 뿐이다.
“잘 하실 수 있으시죠?”
“잘 해야겠네?”
아나스타샤가 걱정 말라는 듯 말했다. 정말 좋은 결과가 따라왔으면 좋겠다.
그녀는 팔을 쭉 펴 기지개를 켜더니 헤죽 웃으며 물었다.
“아무튼, 오늘 오후엔? 레슨?”
“예.”
“잘 받고 와. 아, 저녁에 잠깐 시간 돼? 발렌티나가 같이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던데.”
“맛있는 거요? 뭔데요?”
“나도 몰라. 일단 가 보고 맛없으면 책임지라 하면 되겠네.”
그녀는 킥킥 웃었고, 나 역시 따라 웃었다. 발렌티나의 추천은 늘 틀린 적이 없었지만…… 틀리면 틀리는 대로 즐거운 법이다.
아나스타샤와 이야기를 나누기도 잠시, 오후 수업 시간이 찾아왔다.
내가 가방을 챙겨 일어나자 그녀가 손을 살랑 흔들며 배웅했다.
“이따 봐.”
“메시지 할게요.”
교실을 나온 난 곧장 미하일 선생님의 레슨실로 향했다. 복도의 차가운 공기가 날 기분 좋게 진정시켜 주었다.
레슨실 문을 노크하고, 선생님의 부름에 따라 안으로 들어섰다.
“어서 오렴.”
선생님은 벌써 포트기에 물을 끓여 놓고 날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자리에 앉자마자 선생님은 따뜻한 허브차를 가져다주셨다.
“감사합니다.”
조심스레 받아 한 모금 마셔 보니 어쩐지 평소 마시던 것과는 맛이 조금 달랐다.
“찻잎이 바뀌었나요?”
“알아보는구나. 저번에 선물 받은 좋은 차가 있어서 가지고 왔단다.”
“정말 좋은 차 같아요.”
난 솔직히 차의 맛을 잘 모르고 그냥 따뜻하고 좋아서 잘 마시곤 했지만 이젠 조금씩 알 것 같기도 했다. 자주 마셔서 그런 걸까? 아니면 이젠 알 수 있게 된 걸까. 잘 모르겠지만 조금 더 향긋하고 오래 남는 향기가 좋았다.
“난 허브차는 잘 마시지 않지만, 네가 좋다고 하니 다행이구나.”
미하일 선생님은 웃으며 선생님의 차도 한 모금 마시곤, 내게 물었다.
“요즘은 어떻니? 타티아나.”
이틀만이라 무어라 할 것도 없는데…… 이렇게 상냥하게 물어보실 때마다 약간 목이 메어 울컥했다. 난 실수로라도 목메인 소리가 나오지 않도록 경쾌하게 대답했다.
“아무런 문제도 없어요. 과제곡들은 스케줄에 맞춰서 거의 다 준비되어 있고…… 저번에 읽어 보라고 추천해 주셨던 책도 거의 다 봤어요. 아, 과제도 물론 다 했고요.”
“무리하지 말라고 했던 것 같은데.”
“체력 관리도 틈틈이 하고 있어요. 날씨도 많이 따뜻해져서…….”
“알겠다, 알겠어. 하하.”
마구 이야기하다 보니 약간 변명같이 되어 버리기도 했지만, 다행히 미하일 선생님은 아무렇지 않게 넘어가 주셨다.
따뜻한 차와 대화가 오간다. 난 레슨 전의 이 시간이 정말 좋았다.
물론 이 이후에 있을 레슨도 기대하고 있다.
“난 네가 건강하기만 해도 좋지만…… 사실 선생으로서 욕심도 상당히 많아서 말이다. 알고 있지? 타티아나.”
레슨을 기대하고 있는 건 나뿐만이 아닌 듯하다. 난 고개를 끄덕였다.
“예. 물론이죠.”
“그렇다면 슬슬 레슨을 시작하도록 할까.”
미하일 선생님이 찻잔을 내려놓고 피아노 앞으로 향했고, 나도 뒤따랐다.
레슨은 과제곡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모두 세 곡이나 되어서 처음부터 끝까지 한 번 연주하고, 세세하게 레슨을 받는 것만으로도 1시간 정도는 순식간에 지나가 버렸다.
짧다면 짧다고 할 수 있는 레슨이었지만, 모든 에너지와 집중력을 쏟아붓는 1시간은 굉장히 힘들다.
잠시 쉬는 사이, 미하일 선생님이 물었다.
“타티아나, 저번에 독주회에 대해 말했던 건 혹시 어떻게 생각하니.”
내 레슨곡들을 봐 주시다가 문득 생각나신 모양이다. 난 그간 생각해 두었던 대답을 꺼냈다.
“괜찮다고 생각해요. 가능하다면 이번 학기 안에…… 늦어도 여름방학 안에 하고 난 뒤에 내년 콩쿠르를 준비하면 되지 않을까요.”
“나도 그렇게 생각한단다. 적어도 10학년이 되기 전엔 마무리 짓는 게 좋겠지. 그럼 큰 문제 없을 것 같구나.”
반년 넘게 준비하는 것으로도 모자랄지 모르겠지만, 그 정도 스케줄이라면 충분히 소화해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대충 일정이 정해졌고, 난 조금 더 세세한 이야기를 꺼내기로 했다.
“그런데 선생님, 약간 큰 문제가 될 수도 있는 일이 있어서…… 상담드리고 싶어요.”
“……큰 문제?”
난데없이 문제라는 단어가 나와서 그런지 미하일 선생님이 심각한 표정으로 돌아보았다. 사실 이런 문제는 나도 처음이라서 진지해야 할지 가볍게 봐야 할지 잘 모르겠다.
일단 가장 가까이에 도움을 구할 수 있는 건 미하일 선생님뿐이었다.
“제가 헌정받은 곡이 있는데…… 독주회에서 연주해도 될까요?”
미하일 선생님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날 바라보셨다. 난 제대로 설명을 해야 할 필요를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