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475화 (475/1,277)

##  475화

예상컨대, 미하일 선생님은 지금까지 중앙음악학교의 교사로 있으시면서 이런 소리는 처음 들어 보신 게 아닐까.

성공 여부가 확실치 않은 독주회를 준비하면서 최고의 클래식 음악으로만 프로그램을 준비해도 모자랄 상황에, 갑자기 헌정받은 곡이 있다면서 끼워 넣어도 되겠냐고 묻는다면 나라도 어이가 없을 것 같았다.

그래도 선생님께 아예 말도 안 해 보고 포기하긴 싫었다.

“7분가량의 소나타인데…… 적당한 길이의 강렬한 곡이에요. 앙코르……보다는 프로그램 중간에 분위기를 변화시키기 위한 곡으로 넣으면 어떨지 생각하고 있어요. 독주회 프로그램으로도 괜찮은 곡이라 생각하고 있어서요.”

논리적으로 이야기하고 싶었는데 말을 하다 보니 뭔가 장황해졌다. 그냥 가볍게 앙코르로 하겠다고 할 걸 그랬나?

어떻게 말해야 선생님이 진지하게 들어 주실까 싶어 머리를 굴리고 있는데, 선생님은 그럴 필요 없다는 듯 입을 열었다.

“타티아나.”

“예?”

“네 마음 속에는 이미 결정이 난 것 같은데.”

혹시 떼를 쓰는 것처럼 보였나……?

순간적으로 마음이 뜨끔해지기도 했다. 혹시 바보처럼 보였을까 싶어 난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아뇨, 그렇진 않아요……. 아직 검증되지 않은 연주자인 제가 검증되지 않은 곡을 독주회에서 초연한다는 건 제 독단으로 결정할 일이 아닌…….”

“하하하, 하하.”

내 말을 가만히 듣던 미하일 선생님은 난데없이 웃음을 터뜨리셨다. 선생님을 어떻게 설득할지에만 신경을 쏟고 있던 나는 그 웃음소리에 순간 정신이 멍해졌다.

미하일 선생님은 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네가 뭘 원하는진 알겠다. 그러니 한 가지만 말하마. 타티아나.”

난 선생님이 언제나 진지하게 내 이야기를 들어 주시는 분이라는 걸 다시금 느꼈다.

“네 마음대로 해도 된단다.”

“……마음대로요?”

“그래. 네게 독주회를 제안한 것도 그 때문이었으니까.”

내 이름을 건 독주회이니 마음대로 해도 된다. 선생님은 내가 원하는 곡을 마음껏 무대에 올리길 바라시는 것 같다.

하지만 난 클래식 음악 연주자였다. 정말 내 마음대로 고를 수 있다 하더라도 할 수 있는 건 쇼팽이냐 라흐마니노프냐 정도였다. 그 범주를 벗어나는 건 쉽게 멋대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미하일 선생님은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말라는 듯 들어 올린 손가락을 좌우로 흔들며 말씀하셨다.

“일반적으로 연주되는 클래식 음악이 아닌 곡을 초연한다? 굉장히 실험적이고 흥행을 알 수 없는 도전이 되겠지.”

최악의 경우엔 야유를 당하는 것도 각오해야 한다. 연주자란 늘 무대에 올라 멋대로 하고 박수만을 받아 챙기는 직업이 아니다. 티켓을 사서 좌석에 앉은 사람들은 열정적인 청중이면서 동시에 신랄한 비평가이기도 하다.

하물며 처음 연주하는 곡이라면, 청중들이 어떤 평가를 내릴지 전혀 예상할 수 없다.

“…….”

그렇게 생각해 보면 조금 두렵기도 하다.

하지만 그 두려움은 희뿌연 안개처럼 미약하다. 모든 걸 각오하더라도 해 보고 싶다는 강렬한 고양감은 그 안개를 가볍게 날려 버린다.

나와 눈을 마주한 미하일 선생님은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손을 내렸다.

“그리고 타티아나. 난 네가 그러한 도전을 충분히 감당해 낼 수 있는, 검증된 연주자라 생각한단다.”

내 눈엔 여전히 갈 길이 멀게만 보여서, 검증된 연주자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는다 생각했다.

하지만 미하일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나니 약간 다른 시선으로 볼 수 있게 되었다.

완성된 연주자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저 매번 도전에 자기 자신을 밀어 넣을 수 있는 의지를 지닌 연주자가 있을 뿐이고, 그런 연주자에게 사람들은 음악을 맡긴다.

불과 얼마 전에 과거의 박제를 깨뜨리면서 스스로를 갱신해 나가야 함을 느꼈던 나는, 지금 선생님이 전하고자 하는 의미를 이해할 수 있었다.

“네게 곡을 헌정한 작곡가도 그걸 알기에 그리했겠지.”

“…….”

“그리고 그 곡은 형편없진 않겠구나.”

선생님은 어떤 곡인이 제대로 물어보지도 않고 그리 말씀하셨다.

그 따뜻한 신뢰에 무작정 기대고 싶으면서도, 정신을 차려야 한다고 생각하며 물었다.

“그렇게 생각하시나요.”

“그래, 난 널 믿는다. 무대 준비에 늘 심혈을 기울이는 네가 누군가에게 헌정받았다는 이유로 초연을 결심하진 않았을 것 같단 생각이 든다.”

그 말대로였다. 난 결코 인정에 기대어 이 곡을 초연할 생각을 하고 있는 게 아니었다.

“예, 그런 이유는 아니에요. 좋은 곡이에요. 물론 제 주관적인 평가이긴 하지만요.”

지난 며칠간 혼자 계속 연구한 결과는 합격점이었다. 내가 연주할 다른 클래식 음악들에 비하면 조금 미흡하겠지만, 무대에 올려 다른 청중들에게 들려주고 싶다는 마음이 들게 하는 곡이었다.

그렇지만 이 또한 내 독단에 불과하다. 난 미하일 선생님이 어떻게 생각하실지 조금 불안해졌다.

그리고 선생님은 그 불안을 곧바로 끌어내어 피아노 앞에 내려놓았다.

“그래? 그럼 객관적인 평도 더해지면 되겠군.”

“예?”

나도 모르게 되묻자 미하일 선생님이 숨길 생각 말라는 듯 웃었다.

“네 성격에…… 오늘 그 말을 꺼낸 걸 보면 분명 철저히 연습해 왔겠지. 내가 언제 요청하더라도 바로 보일 수 있도록. 그렇지 않니, 타티아나.”

딱히 숨기거나 할 생각은 없었지만 완벽하게 생각을 읽힌 건 분명했다. 난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맞아요.”

“기회를 주마, 네가 자신감을 얻을 기회를.”

그 한마디엔 정말 많은 의미가 함축되어 있었다.

내 결정을 존중하시겠다는 의미, 날 믿겠다는 의미, 그리고 내 지도 선생님으로서 할 수 있는 것을 해 주시겠단 의미.

그 모든 것들을 느끼면서 건반을 내려다보았다.

손을 대지 않았는데도 생각만으로 건반을 움직일 수 있을 것 같은 착각마저 들었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자 미하일 선생님이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그런데 작곡가는 누구지?”

나는 슥 고개를 돌렸다.

말씀드려도 큰 문제가 되진 않겠지만, 지금은 무엇이 옳은지 분명했다. 난 선생님께 양해를 구했다.

“객관성을 위해 연주 후에 말씀드려도 될까요.”

“편견이 생길 수도 있단 건가? 하하핫. 그래, 내가 잘못했구나. 그대로 연주해 보련.”

미하일 선생님은 유쾌하게 웃으며 손가락을 튕겼다.

난 진심으로 감사를 표했다.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한 번의 귀한 기회를 위해 며칠 동안 연습해 왔다.

제대로 보여 드려야 했다. 연주회 전체의 퀄리티를 저하시키는 곡은 없으니만 못하다. 난 그런 평가를 받고 싶지 않았다.

그러한 긴장과 약간의 희열을 느끼면서, 나는 건반으로 손가락을 뻗었다.

“…….”

강렬하게, 하지만 서두르지 않고 침착하게. 난 이 곡이 가지고 있는 주제를 나름대로 해석하여 피아노로 그려 냈다.

에르네스트에게 해석을 묻거나 하진 않았다. 음악으로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을 구태여 묻는 건 제목 없이 순수 음악으로 내게 이 곡을 헌정한 에르네스트에 대한 실례이기도 했다. 그가 할 말은 이미 악보 위에 모두 드러나 있었으니, 잘 읽어 내면 될 일이다.

그렇게 난 연주자로서의 일에 충실했다. 잘 읽고, 잘 연주한다. 가장 기초적이면서도 가장 중요한 일을 제대로 하려 노력했다.

그리고 그렇게 잘 잡힌 기초 위에 올라간 곡은 약간의 변화를 주더라도 쉽게 흔들리지 않고 균형을 잘 유지했다.

난 이 곡이 가진 아름다움과 가능성을 최대한 어필하기 위해 집중했다.

7분은 순식간에 지나갔고, 평가의 시간이 다가왔다.

“…….”

미하일 선생님은 쉽게 입을 열지 않으셨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난 이런 시간을 기다리는 것에 익숙했지만 지금만큼은 굉장히 떨렸다. 선생님을 똑바로 바라보는 것도 쉽지 않아서 피아노를 보고 있는데, 예상하지 못한 말이 먼저 날아들었다.

“이 곡…… 에르네스트가 작곡한 것 맞지?”

난 깜짝 놀라 물었다.

“어떻게 아셨나요?”

“어떻게 알긴. 아까 묻긴 했지만, 듣지 않아도 일찌감치 알았지.”

“?”

곡에서 무언가 에르네스트가 지닌 특정한 기류 등을 감지하셨나 싶었는데, 듣기도 전에 아셨다니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다.

영문을 모르겠단 얼굴로 바라보자 미하일 선생님이 쿡 웃었다.

“난 자세한 내막은 모르지만 에르네스트가 작곡을 배우겠다고 건 안다. 구세프가 골치 아프다고 머리를 싸매고 있기도 하고.”

에르네스트에 관한 건 송년 연주회에서 에르네스트가 폭탄선언을 했을 때 미하일 선생님도 그 자리에 계셨으니 당연히 알고 계시는 일이었다.

그다음은 그냥 유추하신 것 같다. 내가 곡을 받을 만한 사람이라곤 몇 없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제가 곡을 헌정받았다고 말씀드리자마자 아셨나요?”

“그래.”

선선히 수긍하는 선생님을 보며 난 조금 걱정스러워졌다. 하지만 선생님은 그런 내 걱정도 꿰뚫어 보셨다.

“걱정하지 말려무나. 평가에 영향은 전혀 가지 않았으니까.”

“아.”

“긴장되니?”

시험을 칠 때도, 콩쿠르에서 결과를 기다릴 때도 긴장되지만 지금 느끼는 감정과는 약간 다른 것 같았다. 심장이 두근거리는 느낌은 비슷했지만 차분하게 말할 수 있었다.

“선생님은 제 마음대로 해도 된다 하셨지만…… 선생님께서 안 되겠다 하시면 무리해서 무대에 올리지 않을 생각이에요.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그 책임은 저 혼자서 질 수 있는 게 아니니까요.”

난 이 곡이 훌륭하다고 생각하지만, 혹평을 당할 수도 있다. 세상이 어떠한 평가를 내릴진 아무도 모른다. 그리고 그렇게 된다면 그 책임은 당연히 에르네스트에게도 향한다.

내가 연주를 어떻게 했느냐에 관계없이 작곡가인 에르네스트에게 영향이 가는 것이다. 그건 그의 첫 작곡가 커리어에 흠집이 될지도 모른다. 난 그런 상황은 되도록 피하고 싶었다.

물론 그런 것만 따진다면 내가 괜한 위험을 감수할 이유가 없다.

“하지만 해도 되겠다고 하신다면…….”

내 연주회도 걸고 에르네스트의 첫 커리어도 거는, 이 위험해 보이는 일을 하려는 이유는 단 하나였다.

“반드시 무대 위에서 성공시켜 보이겠어요.”

이 곡의 가치를 믿고 누군가 해야 한다면, 다른 누가 아닌 내가 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한 명만 허락해 주신다면 난 뒤를 돌아보지 않을 작정이었다.

미하일 선생님은 물끄러미 날 바라보시더니 턱을 괴며 말씀하셨다.

“큰일이군.”

“예?”

“난 네가 무대에서 어떤 곡을 연주해도 성공시킬 수 있을 것 같단 믿음밖에 없는데 말이다. 서로 믿음밖에 없으니 원.”

약간은 농담조였지만 난 그게 정말 큰일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서로를 믿는다는 건 좋지만 약간은 비판적인 시선도 있어야 하는 거 아닐까?

“어…… 어떡하죠?”

멍하니 물었더니 미하일 선생님이 피식 웃었다.

“구세프의 심정을 조금 알 것 같군.”

갑자기 무슨 말씀이신가 싶어 눈만 깜빡거리고 있자, 선생님은 턱을 괴고 있던 손을 내리며 진지하게 말씀하셨다.

“타티아나.”

그 목소리는 중앙음악학교의 엄격한 선생님의 목소리였다.

“우리는 수백 년간 쌓인 음악들을 무대에 올리는 데에 거리낌이 없지. 왜 그렇다고 생각하니?”

취향에 따른 호불호가 있긴 하지만 대다수 연주자들은 자신이 연주하는 곡 자체에 불안감을 느끼거나 하지 않는다.

왜일까. 단순히 좋아서?

그렇진 않다. 왜냐하면 그 시대엔 실패해서 인정받지 못하고 묻혀 있다가 추후에 다시 연구되어 불후의 역작으로 여겨지는 곡들도 정말 많기 때문이다.

난 여러 가지 이유를 떠올렸으나, 가장 클래식 연주자다운 대답을 맨 앞에 세웠다.

“불변의 가치가 있어서라고 말씀드리면 웃으실 건가요.”

“아니, 그것 역시 사실이니까. 하지만 불변의 가치로 세월을 이겨 내었다고 여겨지는 것들엔 그만한 권위가 주어지기도 하지.”

나는 그 말이 어느 정도 옳다고 생각했다.

미하일 선생님은 부정하지 않는 날 보며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당대에도 그러했을까?”

“아니라 생각해요.”

“그렇다면 연주자들은 어떤 마음으로 곡을 들고 무대에 올랐을까.”

대중들 앞에서 처음 연주하는 악보를 손에 쥐고, 어떤 기분이었을까.

지금 난 그 기분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믿음이란다.”

곡에 대한 믿음, 안목에 대한 믿음, 실력에 대한 믿음. 그러한 믿음들이 연주자를 무대에 서게 한다.

“우리들은 그 믿음을 가지고 있지.”

때론 배신당하기도 하지만, 결국 곡을 쥐고 무대에 서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알 수 없다.

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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