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478화 (478/1,277)

##  478화

보아하니 에르네스트는 적극적으로 알아본 것 같지도 않았다. 그냥 모레가 콩쿠르 일이라는 걸 듣자마자 어떤 콩쿠르인지 바로 알아차린 모양새다.

아나스타샤는 거기까진 이해했다. 에르네스트가 특출한 모습을 보여 주는 게 하루 이틀 일은 아니었으니까. 그런데 유리하다는 건 또 무슨 이야기인지 모르겠다.

“유리하다니, 무슨 말이야?”

“연주 스타일에 대한 이야기야. 미국은 조금 현대적이고 자유로운 풍조가 있거든. 우리랑은 약간 다르지.”

그 말대로였다. 미국이라는 나라의 분위기는 러시아는 물론이고 유럽 그 어떤 나라와도 비슷하지 않았다. 그건 음악에도 그대로 묻어나는 바, 콩쿠르 심사위원들의 전체적인 평가 기준에도 영향을 주기도 했다.

그리고 에르네스트는 그 본질을 꿰뚫어 보고, 정확하게 판단하고 있었다.

“그런데 네 피아노에서 난 약간 그런 기류를 느껴.”

흠칫할 정도의 예리함이었다.

아나스타샤는 자신의 피아노 스타일이 미국의 것과 닮아 있다곤 생각하지 않았지만, 어느 정도 좋아하고 동경하고 있다는 걸 완전히 부정할 순 없었다.

이 애는 저번에 타티아나에게도 콩쿠르에 올릴 곡들을 가지고 코칭을 해 줬었지. 그때도 얼마나 예리한 안목으로 봐 주었는지 모른다.

아마 이 애는 교수를 해도 잘할 거야.

피아니스트와 작곡가에 이어 도대체 얼마나 많은 재능을 지니고 있는지 모르겠다. 아나스타샤는 새삼 대단하다 생각하며 에르네스트를 바라보았다. 늘 이 애를 이기고 싶다고 생각했었는데. 그게 가능하긴 할까.

에르네스트는 그러한 아나스타샤의 생각까진 읽지 못하고 웃으며 말했다.

“아무튼…… 아나스타샤, 잘 갔다 와. 응원할게.”

갑자기 보인 순수한 응원에 아나스타샤는 일순간 당황했다. 나쁜 생각을 들킨 기분이었다.

그녀는 일부러 둘러대듯 말했다.

“네가 나한테 그런 말 해 준 건 처음인 것 같은데?”

“잘 하라 해 준 것도 문제야?”

“아니 그냥…… 조금 별일이다 싶어서.”

“별게 참 별일이네.”

에르네스트는 투덜거리면서도 늘 있는 일처럼 받아들이며 이야기했다.

“잘 하고 오기나 해. 거기에 가서 누구랑 붙을진 모르겠지만…… 너라면 우리 또래 누가 올라오더라도 다 이길 수 있겠지.”

자신감을 불어넣어 주는 가벼운 응원. 하지만 아나스타샤는 지금 에르네스트가 아무 근거 없이 이런 말을 하고 있지 않다는 걸 직감적으로 느꼈다.

“누구라도 다 이길 수 있다고?”

“그렇지 않겠어?”

에르네스트의 말엔 어느 정도 확신이 서려 있었다.

어려서부터 국제 콩쿠르들을 휩쓸며 전 세계의 수많은 천재들과 각축전을 벌여 온 그의 시각은 굉장히 넓고 고르게 퍼져 있다. 그런 그가 우리 또래에선 누구라도 괜찮을 거라 말한다면 그건 그냥 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아나스타샤는 이렇게 태연하게 연주자로서 인정받는 것에 대해 부끄럽기도 하고, 거기에 대한 반동으로 왠지 모르게 화가 나기도 해서 어쩔 줄 몰라 입을 다물었다.

그런데 에르네스트가 한마디 덧붙였다.

“물론 난 빼고.”

“…….”

여기 정말 부끄러운 사람이 있었네?

아나스타샤는 이런저런 고민을 하던 스스로가 바보같이 느껴졌다.

“넌 왜 빼는데?”

“난 만만찮을 거거든.”

“어이가 없네.”

에르네스트는 그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불만이라면 당장 연습실에서 가볍게 손이라도 풀어 보겠냐는 듯한 제스처였다.

아나스타샤는 기가 막혀 웃다가도, 이렇게 당연하다는 듯 말하는 에르네스트가 부럽기도 했다.

그리고, 언젠가 한 번쯤 이 아이와 피아노 연주자로서 마주하고 최소한 어깨를 나란히 해야 한다는 사실을 다시금 되새겼다.

“됐어.”

아나스타샤는 짧게 말했다.

하지만 그 말과 달리 시선은 정확하게 에르네스트를 향하고 있었다.

“지금은.”

“…….”

에르네스트는 가만히 아나스타샤와 시선을 마주쳤다. 피하기는커녕 한 번 깜빡거리지도 않는다. 푸른 눈동자엔 승부욕과 자신감이 가득했다. 이런 사소한 기 싸움에서도 만만찮다는 게 분명하게 느껴졌다.

아나스타샤는 일단 지금은 이럴 때가 아니라고 생각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에르네스트가 싱긋 웃었다.

“내년이 되면 재미있을 것 같지 않아? 아나스타샤.”

“재미?”

“그래. 나도, 타티아나도 내년엔 국제 콩쿠르에 나갈 테고…….”

그는 낮게 깔린, 하지만 굉장히 기대감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정말 큰물에서 놀 수 있게 되는 거지.”

지금까진 작은물이었니?

순간 정말 에르네스트는 그렇게 느끼고 있을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작년 송년 연주회에서 보여 주었던 에르네스트의 연주는 학교에서의 그의 모습과 완전히 달랐으니까.

그리고 타티아나도.

“…….”

아나스타샤는 그 무대에 함께 서고 싶다고 생각하고 잠까지 줄여 가며 연습에 몰입했다.

그렇게 오래 연습하진 못했지만, 이젠 더 늦출 수 없다. 그 결과가 나타나 줘야 할 때다.

에르네스트는 간접적으로나마 그 점을 다시 한 번 강조했다.

“이번에 꼭 입상해. 아나스타샤.”

“……말 안 해도 그럴 거야.”

“그래, 내가 말하지 않아도 잘 하겠지. 난 네가 잘 할 것 같아.”

그는 진심으로 아나스타샤가 바로 옆까지 와 주길 기대하고 있다. 그 기대는 너무나 순수하고 올곧아서 그대로 부응해 주고 싶었다.

그리고 아나스타샤는 기대에 부응하는 수준에서 그치지 않고, 넘어서고 싶기도 했다.

일단 이번에 제대로 결과를 내 줘야겠지.

“사 왔어요. 어떤가요?”

잠시 에르네스트와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음료수를 사러 갔던 타티아나가 돌아왔다. 갈 땐 침울해져 있더니 올 땐 그래도 기분이 좋아졌는지 싱글벙글 웃고 있다.

“자, 건배하도록 해요.”

아까 에르네스트가 말했던 건배에 큰 의미를 느낀 것 같다. 타티아나의 재촉에 아나스타샤와 에르네스트도 각자 음료수 병을 들었다.

건배사는 에르네스트가 했다.

“아나스타샤의 콩쿠르 우승을 위하여.”

“아하핫, 그래요. 우승해 주셔야죠.”

에르네스트의 말을 타티아나가 받아 주었다. 아나스타샤는 두 친구와 병을 마주하며 호기롭게 답할 수밖에 없었다.

“어쩌지, 집에 트로피 놓을 데 없는데.”

그 말에 타티아나는 물론 에르네스트도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

비행기가 착륙했다는 기내 방송을 들으며 아나스타샤는 잠에서 깼다.

“흐암…….”

지구 반대편까지 날아오느라 한참이나 잤다. 기지개를 켜고 싶은데 옆에 있는 남자가 불편해할까 봐 그러지도 못하고, 아나스타샤는 깍지를 낀 양손을 앞으로 펴면서 대충 답답함을 풀어냈다.

그녀는 여행을 좋아하지만 비행기는 답답해서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비행기에서 내린 후에도 귀찮은 일투성이였다. 입국심사도 거쳐야 하고 수하물도 찾아야 하고 세관도 통과해야 하고……

게다가 러시아에서 콩쿠르 때문에 왔다고 방문 목적을 설명해도 꼬치꼬치 캐묻는 심사관 때문에 돌아 버릴 뻔했다. 아나스타샤는 간신히 화를 추스르며 모든 질문에 유창한 영어로 답했고, 곧 혹시 미국에서 살았던 적 없냐는 질문을 마지막으로 심사대에서 풀려날 수 있었다.

“죽겠네…….”

일련의 모든 과정을 마치고 나서야 아나스타샤는 캐리어 하나를 끌고 공항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따사로운 햇살이 그녀를 반겼다. 같은 북반구의 3월 말 날씨인데도 족히 10도는 차이 나는 것 같다. 일부러 가벼운 옷을 입고 오길 잘했다.

아나스타샤는 방금 나온 공항을 돌아보았다.

댈러스 포트워스 국제공항. 미국 텍사스 주 북부 댈러스에 위치한 공항이다.

“시설은 괜찮은데 서비스가 별로네.”

괜히 한 번 투덜거려 준 아나스타샤는 그제야 햇빛을 받으며 기분 좋게 기지개를 켰다. 마음 같아선 가볍게 스트레칭이라도 하고 싶은데 주위에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그렇겐 못 하겠다.

그리고 지금 몸을 풀어 봐야 소용없었다.

왜냐하면 예약한 호텔까지 또 1시간 정도 더 이동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휴.”

어차피 여행길이 피곤할 건 예상했으니까 포기하자.

아나스타샤는 마음을 비우고 캐리어를 끌며 움직였다.

정확히 1시간 후, 아나스타샤는 포트워스 시가지에 위치한 호텔에 도착할 수 있었다.

너무 피곤했다. 아나스타샤는 키를 받아 방으로 올라가자마자 대충 짐을 던져놓고 침대 위에 누워 버렸다.

“으…….”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냥 이대로 몇 시간 정도 자 버리고 싶은 마음만 든다. 긴 여행은 가만히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힘을 빼놓았다.

하지만 몇 초 정도 누워 있던 아나스타샤는 눈이 감기는 것을 느끼자마자 몸을 일으켰다.

이렇게 잠들었다간 될 일도 안 된다.

바로 내일이 콩쿠르 예선인데, 긴장을 풀어 버린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아나스타샤는 머리카락을 쓸어내리면서 타티아나라면 어떻게 했을지 상상해 보았다.

길게 생각할 것도 없었다. 아마 오자마자 짐부터 깔끔하게 정리해 놓고는 바로 홀부터 확인했겠지.

“그랬을 거야.”

아나스타샤가 이번에 참가한 포트워스 국제 청소년 피아노 콩쿠르는 예선과 본선의 홀이 다르다. 모두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당일 날 가서 길을 못 찾기라도 한다면 그런 낭패가 없었다.

아마 그리고 나선 바로 연습실을 빌려 마지막 최종 연습을 했을 테지. 아나스타샤는 그냥 상상만 해도 눈에 훤히 보일 것 같은 타티아나의 착실한 일정을 떠올리면서, 그대로 하기로 했다.

일단 그대로만 한다면 절대 잘못될 일은 없을 것 같단 확신이 들었다.

일단 스트레칭으로 몸에 활력을 불어넣은 아나스타샤는 이번엔 무거운 캐리어 없이 홀가분하게 호텔을 나섰다.

“즐거워 보이는 도시네.”

텍사스 주 포트워스는 처음 와 본다. 아나스타샤는 여행을 온 기분으로 천천히 거리를 걸었다. 네모반듯한 건물들은 언뜻 딱딱해 보이지만 도시 전반적으로 굉장히 활기가 넘쳤다.

아나스타샤는 스마트폰으로 지도를 켜서 홀의 위치를 확인했다.

베이스 퍼포먼스 홀bass performance hall.

상당히 세련된 이름의 홀인데 실제로 보기엔 어떨지 궁금해졌다.

적당한 걸음으로 15분 정도의 거리였다. 아나스타샤는 그동안 포트워스의 거리를 구경하면서 긴 이동간의 피로를 씻어 내렸다.

그리고 콘서트홀 앞에 도착했을 때, 꽤 감탄했다.

모던한 느낌의 건물이었다. 얼핏 극장 같기도 하고 바로크 시대의 교회 같기도 하면서 공공기관 같아 보이기도 했다. 이 도시의 분위기에 걸맞을까 싶었지만 실제로 보니 상상 이상으로 돋보이면서도 잘 어우러졌다.

멋진 콘서트홀은 연주자의 기분을 들뜨게 한다. 아나스타샤는 그냥 내부만 한 번 더 구경하고 나오기로 마음먹고 안으로 들어섰다.

몇몇 사람들만 로비를 오다니고 있다. 아나스타샤는 홀로 들어가는 입구와 연주자 대기실 입구 등을 확인했다. 처음 오더라도 바로바로 길을 찾을 수 있도록 꽤 깔끔하게 되어 있었다. 내일 와서도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그렇게 꽤 만족스럽게 콘서트홀을 구경하고, 슬슬 나가 보려던 아나스타샤의 눈에 어디선가 본 기억이 나는 한 아이가 잡혔다.

“……?”

키는 그리 크지 않았다. 160센티미터 정도 될까. 하지만 검은 머리카락은 어깨선을 따라 내려오고 큰 눈엔 호기심과 강렬한 탐구욕이 맴돌고 있었다. 아나스타샤는 어쩐지 저 눈이 굉장히 낯익었다.

어디서 봤지? 그럴 리가 없는데. 동양인 여자아이들이야 학교에도 많지만, 이 멀리 미국 텍사스에서 만날 만한 사람은 없었다.

그런데도 기억이 날 듯 말 듯 해서 아나스타샤는 인상을 쓰며 신경을 집중했다.

그런데 아나스타샤의 시선을 눈치챈 아이가 그녀 쪽을 바라보더니, 약간 겁먹은 듯 어깨를 움츠렸다. 아나스타샤가 기억을 되살리려 집중하는 걸 노려보는 것으로 오해한 모양이다.

아나스타샤는 얼른 다시 시선을 돌렸다. 그런데 막 다시 홀 쪽을 바라보자마자, 갑자기 언제 봤었는지 기억났다.

1년 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타티아나와 같은 콩쿠르 참가자였다. 국적은 한국. 한승우와 같은 곳이었지. 이름이…… 이름도 생각날 것 같은데 가물가물하다.

혹시 얼굴을 보면 다시 기억날까 싶어 고개를 들었는데, 저 멀리 있던 아이가 바로 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

아나스타샤는 조금 놀랐다. 겁을 먹었던 게 아니었나?

굳이 이쪽으로 가까이 다가온 이유를 모르겠다. 저 아이가 아나스타샤를 알아봤을 리도 없었다. 아나스타샤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단지 타티아나를 따라다녔을 뿐, 콩쿠르 참가자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생각보다 이 아이의 기억력은 뛰어났다.

“상트페테르부르크, 콩쿠르. 오다?”

네가 그걸 어떻게 기억해?

아나스타샤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바라보았고, 곧 밝은 미소와 마주할 수 있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