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79화
참 붙임성 좋은 성격이었다.
“반갑습니다. 전 임세연이에요.”
아나스타샤는 생각도 못 한 러시아어에 살짝 당황했다. 여러 생각으로 머리가 복잡했다.
지금 저 애가 날 알아본 거지?
아무튼 인사를 받고도 멍하니 있을 수만은 없었다. 아나스타샤도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아나스타샤 세르게예브나 이즈마일로바야.”
“어…… 아나스타샤?”
혹시 러시아어를 잘하는가 싶었는데, 바로 이름을 부르며 더듬거리는 걸 보니 인사말만 죽어라 연습한 듯했다.
아나스타샤는 조금 재미있는 사람을 보는 기분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떻게 나오나 지켜보고 싶었다.
세연은 말도 잘 걸고 인사도 잘 했는데 막상 이제부터 어떻게 해야 할지 전혀 계획이 없는지 당황해하며 횡설수설했다.
“음…… 내가…….”
“응.”
“그, 아래? 음…… 아래.”
“응?”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전혀 모르겠다. 다른 단어를 말하는데 발음이 달라서 잘 못 알아듣고 있는 것일 수도 있고.
아나스타샤는 이쯤하기로 하고 적당한 방법을 찾기로 했다.
{영어 할 수 있니?}
일단 한국인들은 영어를 꽤 잘하는 편이기도 하니 영어가 통하면 의사소통이 가능하다.
{아니면 번역기 써야 하는데 그건 귀찮아서.}
그런데 이래도 말이 안 통하면 그냥 바이바이 하고 헤어질 생각이다.
괜히 스마트폰으로 왔다 갔다 하면서까지 이야기를 할 생각은 없었다. 멀리 미국에서 만나긴 했지만 이 아이와 잘 아는 사이인 것도 아니었고.
영어를 못 한다고 하면 아나스타샤가 떠나 버릴 거라는 걸 느껴서인지, 아니면 정말 영어를 어느 정도 할 줄 알아서인지 세연은 곧장 대답했다.
{할 수 있어.}
{잘됐네.}
사실 아나스타샤도 말이 통한다면 이 아이와 이야기를 조금 해 보고 싶기도 했다.
다른 이유에서가 아니라, 작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이 아이의 마주르카 연주를 듣고 타티아나가 갑자기 울음을 참지 못하고 홀에서 뛰쳐나간 일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나스타샤는 아직도 그 광경을 똑똑히 기억했다.
대체 무엇 때문에 타티아나가 울어 버렸는지 직접 물어볼 수도 없었지만, 어쩌면 세연에게서 실마리를 조금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아나스타샤는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우리, 두 번째 보는 거야? 맞지?}
세연은 지금 아나스타샤와 말이 통하고, 서로를 알아본다는 게 기뻤는지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응. 맞아. 난 널 기억해.}
{어떻게? 난 상트페테르부르크 콩쿠르의 참가자도 아니었는데.}
{타티아나의 옆에 네가 늘 있었는걸.}
타티아나와 같이 다니는 모습을 봤을 수도 있지만, 그래도 이렇게 상상도 못 한 곳에서 만나 알아볼 줄은 몰랐다.
물론 반대로 세연을 알아본 아나스타샤도 자신이 어떻게 알아본 건지 설명할 수 없었지만.
어쨌든, 아나스타샤는 타티아나의 이름이 나온 김에 조금 더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그 애도 기억하는구나?}
{물론이지. 그 애는 우승자였는걸. 기억하지 못한다는 게 말이 돼?}
{음…….}
묻고 나니 바보 같은 질문이었다. 세연은 어이가 없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나스타샤는 할 말이 없었다.
대화의 중심이 약간 세연 쪽으로 옮겨져 왔다는 걸 세연도 느꼈는지, 그녀는 자신이 궁금해했던 것을 살짝 물어보기 시작했다.
{그런데 아나스타샤는, 타티아나와 같은 학교인 거야?}
같이 다니는 걸 봤으니 딱 봐도 그리 보였나 보다. 아나스타샤가 긍정했다.
{그렇지.}
{어디에 다니는데?}
{모스크바 음악원 부속 중앙음악학교.}
{와…… 거기 유명한 학교지?}
{글쎄.}
사실 객관적으로 놓고 보더라도 러시아는 물론이고 세계적으로도 손꼽히는 음악학교 중 하나였지만 아나스타샤는 바로 그렇다고 답하지 못하고 얼버무렸다. 학교에 대한 자긍심이 없는 건 아니지만 이렇게 이야기를 들으면 무어라 해야 할지 모르겠다.
아나스타샤는 계속 타티아나라면 어떻게 했을지 생각하면서 세연을 대했다.
그런데 세연은 대화의 계단을 몇 계단이나 훌쩍 뛰어올라 버리기도 했다.
{유학 가고 싶다.}
{갑자기?}
{독일 아니면 러시아. 클래식을 배우는 학생이라면 둘 중 한 나라에서 공부해 보고 싶지 않겠어?}
세연은 부럽다는 얼굴로 이야기했다. 아나스타샤는 그냥 농담조로 받아넘겼다.
{글쎄, 난 태어나면서부터 러시아인이라서.}
{그건 네 키만 봐도 알 것 같아.}
{농담하는 거야 지금?}
{아하하하.}
세연은 까르르 웃으며 좋아했다. 어디에 웃을 포인트가 있는지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분위기가 나쁘진 않았다.
그런데 한참을 웃던 세연은 서서히 웃음을 거두며 말했다.
{아무튼 흥미가 있는 건 정말이야. 네 학교에 가면 타티아나를 가르친 분도 만날 수 있겠지? 만나 뵙고 싶어.}
여전히 얼굴엔 미소가 깃들어 있지만, 그 눈엔 진지한 열망이 들어차 있었다. 방금 전 했었던 유학 가고 싶단 이야기는 농담에 가까운 이야기였지만, 어느 정도는 진담이기도 했다.
하지만 아나스타샤는 그녀의 말을 약간 이해하기 어려웠다. 어쩌면 저번 우승자인 타티아나를 만나고 싶다고 할 줄 알았는데, 난데없이 타티아나의 선생님인 미하일 선생님을 찾을 줄은 몰랐던 것이다.
{선생님을? 왜?}
{난 그 애의 음악에 흥미가 있거든.}
그럼 더더욱 타티아나를 만나고 싶다고 해야 하지 않아?
아나스타샤가 의아해하자 세연은 한층 더 표정을 달리했다.
지금까지 보여 주었던 붙임성 좋고 말 많고 잘 웃는 아이는 없었다. 피아니스트로서 잘 벼려진 근원적인 날카로움이 윗입술에 맺혀 있었다. 어떠한 믿음 또는 공리를 찾아 움직이는 사람의 얼굴이었다.
세연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때 타티아나가 보여 줬었던 음악은 나로선 흉내도 낼 수 없는 음악이었어.}
사실을 당연하게 인정하는 어투. 하지만 인정한다고 해서 손을 놓아 버리지 않는다. 세연은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고 싶어 했다.
아나스타샤는 자신도 모르게 조금 긴장됨을 느꼈다. 그녀 역시 지금까지 타티아나의 음악에 몇 번이나 경도되면서 뒤를 쫓는다는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한 번이라도 이렇게 정확하게 상황을 분석하듯 말해 본 적이 있었나?
세연은 아나스타샤의 표정을 살짝 살피고는 이어 말했다.
{그리고 우리 교수님께서도 타티아나의 음악을 굉장히 신경 쓰시는 것 같아.}
{네 교수님이?}
{응. 그런데 내가 막상 그런 스타일을 따라 해 보려 하면 그러지 말라고 하셔. 나에겐 나만의 스타일이 있으니…… 뭐라셨더라? 열심히 하지 말라고 했던가?}
{……?}
{아니, 열심히 하긴 하는데 너무 열심히 하진 말라는…… 아악, 영어 어려워.}
하고 싶었던 말들을 미처 끝내지 못하고 세연이 비명을 질렀다.
타티아나의 음악에 가까이 다가가고 싶은 이유. 세연이 말하고 하는 바는 그런 것이었던 것 같다. 정확하진 않지만.
아나스타샤는 단 한 번의 콩쿠르로 이렇게나 강렬하게 열의를 불태우는 연주자를 만들어 놓은 타티아나에 대해 한 번 더 놀라고, 또 세연과 세연의 교수에게도 놀랐다.
역시 음악은 만국공통어. 국가를 가리지 않고 누구에게나 영향을 끼치는 건가.
잠시 그런 생각을 하던 아나스타샤는 어깨를 축 늘어뜨린 세연을 보곤 문득 생각이 나서 물었다.
{아까 보니 러시아어도 조금 알던데. 확실히 흥미가 있긴 한가 보네.}
{응. 너처럼 러시아 애들을 보면 이야기해 보고 싶었거든. 그런데 영어를 할 줄 알 줄은 몰랐네……?}
{러시아인들은 영어를 못한다는 편견이 있긴 하지.}
{타티아나도 영어 잘하니?}
{나만큼은 해.}
{아…… 그럼 그때도 태블릿으로 하지 말걸.}
{태블릿?}
그때는 또 무슨 말이야?
아나스타샤가 되묻자 세연이 바로 무언가 말하려다가 입을 꾹 다물어 하려던 말을 도로 집어삼키고는, 새로운 말을 꺼냈다.
{어…… 응. 그때 잠깐 이야기했었거든. 통역기로}
아마 연주자 대기실에 있을 때 이야기라도 한 모양인데, 그럼 그냥 이야기하면 되지 왜 이렇게 당황하는지 모르겠다.
세연은 거기에다가 불안감을 이기지 못했는지 덧붙여 확인하기까지 했다.
{무슨 이야기인진 말 안 해 줘도 되지?}
{내가 들어야 할 이야기야?}
{아니…… 그렇진 않아.}
무언가 숨기는 것 같다. 순간 타티아나가 이 아이의 마주르카를 견디지 못했던 일이 다시금 떠올랐다.
지금 자세히 캐물어 본다면 아나스타샤가 궁금해했던 일들을 세연이 말해 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나스타샤는 그렇게 하지 않기로 했다.
{그럼 됐어.}
{…….}
처음엔 아나스타샤야말로 세연의 음악에 흥미가 있었기에 이것저것 물어볼 생각이었지만, 세연이 갑자기 진지한 연주자로서 이야기를 한 이후로는 그러고 싶은 생각이 싹 사라졌다.
결국 음악으로만 교류할 수 있는 게 연주자들의 일이다. 이렇게 말로 어떻게 해 보려는 건 굉장히 불경한 일처럼 느껴졌다.
평소 같았으면 아랑곳하지 않았을 테지만, 아나스타샤는 타티아나라면 아마 그만두었을 거라 생각하며 이쯤하기로 했다.
세연은 입술을 달싹이다가 살짝 아쉽다는 감정을 내비쳤다.
{그 애에게 전해 주고 싶은 말도 많은데.}
뭔진 모르겠지만, 혹시 가능하다면 타티아나와 세연 두 사람이 이야기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아무래도 두 사람 간엔 잘 모를 일들이 있는 것 같으니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세연이 슬쩍 다가오며 넌지시 물었다.
{아…… 맞아, 아나스타샤. 부탁 하나만 해도 돼?}
{뭔데?}
{전화번호 알려 줄 수 있니?}
초면에 부탁이라니 무슨 말을 하나 싶었는데 조금 난데없었다.
별것 아닌 것 같은데도 예민하게 굴자면 얼마든지 예민하게 굴 수 있는 부분이었다. 아나스타샤는 어떻게 해야 할까 생각하며 세연을 바라보았다.
세연은 조금 더 설득이 필요하겠다고 생각했는지 유창하진 않은 영어로 열심히 말했다.
{나 혼자서 여기 왔거든. 재미있으니까 상관없지만 그래도 아는 사람을 만났다는 게 반가워서…….}
아는 사람……?
이 아이 정말 사람 당황스럽게 하네. 우리가 아는 건 서로의 이름밖에 없지 않니?
그리고 세연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그리고 혹시 괜찮다면 같이 다니고 싶은데. 어때?}
{…….}
우리가 서로 잘 모른다면 앞으로 잘 알아가면 되지 않냐는 듯 온몸으로 어필해 온다.
세상에 뭐 이렇게 빠르게 친밀해지려 하는지 모르겠다.
해외를 여행하면서 딱 5분 만난 사람과 친해지고 같이 여행을 다닐 수도 있겠지. 하지만 아나스타샤는 지금 그렇게 할 때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글쎄, 이제야 묻는 거긴 한데, 너 포트워스 콩쿠르 참가하는 거 아니니?}
{어…… 맞는데.}
{나도 참가자야.}
세연은 이제 와서 알았다는 얼굴은 아니었다. 이 콘서트홀에서 마주했으니 당연히 그런 용건이 있으리라 생각하는 것 같았다.
아나스타샤는 일부러 목소리를 냉정하게 하며 말했다.
{그럼 내일 예선에 집중하는 게 어때?}
{…….}
좋은 아이 같으니 나쁘게 할 생각은 아니었다. 단지 지금 콩쿠르를 앞두고 엉뚱한 곳에 집중력을 쏟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아나스타샤보다 세연은 그런 것에 더 크게 휘둘리는 성격인 것 같기도 하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서로 얼굴만 본 것에 불과하지만 그것도 세연은 반가워했다. 천성이 정이 많은 아이임이 분명했다.
그러니 더더욱 이쪽에서 적당히 선을 그어 줄 필요가 있었다.
그래도, 혹시나 크게 상처받았을까 봐 걱정되어 잠자코 지켜보는데, 세연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이해력이 좋았다.
{배려해 줘서 고마워.}
그녀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지금은 서로 경쟁자로서 바라보는 게 옳다고 느낀 것 같다. 아나스타샤가 힘든 결정을 했다는 것도 알아준 것 같아서 그녀는 조금 안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세연도 평범한 아이는 아니었다.
{알았어. 그렇게 할게. 나도 같은 학교 애들한테 두 번 지긴 싫거든.}
오, 생각보다 한 성격 하네?
아나스타샤는 눈썹을 살짝 틀어 올렸고, 세연은 도전적으로 허리를 세우며 아나스타샤를 올려다보았다. 그래도 키 차이가 워낙 나서 발돋움을 해도 안 될 정도였지만, 아나스타샤는 이미 세연과 눈높이를 나란히 하고 있다는 기분을 느꼈다.
꽤 흥겨운 기분이다.
{좋아, 그럼 내일 대기실에서 보자.}
{응. 내일 봐. 내일모레도.}
자신만만하게 인사를 남기고 세연은 미련 없이 휙 돌아섰다.
예선은 물론이고 결선까지. 아나스타샤는 세연과 며칠간은 계속 볼 수 있을 것 같단 확신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