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480화 (480/1,277)

##  480화

포트워스 국제 청소년 피아노 콩쿠르 예선전 당일.

알람에 맞춰 일어난 아나스타샤는 비몽사몽으로 하품을 하면서도 천천히 스트레칭을 했다. 오늘은 컨디션을 최상의 상태로 만들어 놓아야 하는 날이다.

다행히 몸 어딘가에 문제가 느껴지진 않았다. 어제 간 호텔 내 스파가 떠올랐다. 비용은 꽤 비쌌지만 지금 생각하니 하나도 아깝지 않았다.

정신을 좀 차린 뒤 습관처럼 스마트폰을 확인했다. 선생님과 부모님에게서 온 메시지, 그리고 가장 최근에 온 타티아나의 메시지가 눈에 들어왔다.

[일어났나요?]

정확하게 7시에 맞춰서 온 메시지였다.

예선전 당일 늦잠을 자진 않을지 걱정이 된 거라면 전화를 하면 될 텐데, 그렇게 하지도 못하고 메시지로 확인하는 걸 보니 조금 미안해졌다. 아나스타샤는 곧장 답장했다.

[응. 이제 막.]

그리고 전송 버튼을 누르자마자 드는 생각이 있어서 물어보았다.

[내가 미국에 있다는 건 어떻게 알았어? 에르네스트한테 들었니?]

아나스타샤는 타티아나에게 어디로 가는지 말해 준 적이 없었다. 그런데 지구 어디에 있는지도 모를 아나스타샤에게 아침 7시가 되자마자 정확하게 일어났냐고 메시지를 보내려면, 시간대를 정확하게 특정할 수 있어야 한다.

그 말인즉슨 위치를 안다는 소리였고, 아나스타샤가 예상하기에 그걸 가르쳐 줄 사람은 에르네스트 정도였다.

한동안 메시지가 없었다. 그런데 뚝 끊긴 대화 사이에서도 아나스타샤는 타티아나가 좀 당황한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렇게 당황시키려던 건 아니어서 아나스타샤가 먼저 다시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오늘 말해 줬나 보네?]

[언제 메시지를 해야 할까 몰라서 고민하다 보니…….]

아나스타샤에게 메시지를 보내고 싶지만 혹시 시간대가 한밤중이라면 자는 걸 방해하는 일이 되지 않을까 싶어 망설이는 타티아나를 보고 옆에서 에르네스트가 말해 준 모양이다.

그냥 메시지 정도는 마음대로 보내지. 아나스타샤가 실없이 웃고 있는데, 타티아나가 바로 본론으로 들어왔다.

[컨디션은 어떠시나요?]

[좋지. 피아노 콩쿠르가 아니라 기계체조 대회에 나가도 될 것 같은데?]

이번에도 잠시 메시지가 없다. 농담인 걸 알면서도 약간 당황해하는 표정이 눈에 선하다.

아나스타샤는 짧게 덧붙였다.

[걱정 마. 잘 할게.]

[후후후.]

웃는 의성어와 이모티콘이 돌아왔다. 타티아나는 본래 이모티콘 같은 건 전혀 쓰지 않는지라 메시지만 보면 조금 딱딱하게 느껴지기도 했는데, 근래 들어 종종 쓰곤 했다.

조금 더 감정을 잘 표현하는 것 같아서, 아나스타샤는 이런 메시지가 좋았다.

두 사람은 잠시 이러쿵저러쿵 메시지를 주고받았다. 전화를 해도 되겠지만, 타티아나는 이번엔 메시지 정도로 만족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메시지만 한다고 해서 평소의 상냥한 성격이 어디로 가는 건 아니었다.

[혹시 아시나요? 아나스타샤. 여긴 오후 3시예요.]

아나스타샤는 비행기를 타고 출발하기 전 미국 텍사스와 러시아 모스크바의 시차를 계산해 본 적이 있었다. 8시간 정도. 타티아나의 말대로 모스크바는 지금 레슨이나 개인 연습 등으로 오후 일과를 보낼 시간이었다.

[어…… 대충 그렇겠네?]

[그래서 오늘 예선전 결과를 미리 알아볼 수 있었는데요, 아나스타샤는 가뿐히 통과하시는 것 같아요.]

무슨 말인지 이해하는 데에 시간이 조금 필요했다.

그 시차라는 게 결국 사람들이 정해 놓은 시간일 뿐이고, 앞서 나간다고 해서 미래를 볼 수 있거나 한 게 아니라는 건 타티아나도 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이렇게 바보 같은 이야기를 하는 건 조금이라도 더 긴장을 풀어 주기 위함일까.

“재미있는 이야기네.”

아나스타샤는 중얼거리며 화면을 내려다보았다.

이 스마트폰으로 정말 미래의 타티아나와 연결되어 있는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타티아나의 바보 같은 소리에 이어 바보 같은 생각이었지만, 아나스타샤는 그 생각이 굉장히 재미있다고 느꼈다.

킥킥 웃으면서, 아나스타샤는 답장했다.

[그런데 3시면 아직 대회 진행 중일 시간인데.]

[앗.]

예선전은 반나절 내내 이어져 5시는 되어야 끝난다. 타티아나는 미처 그건 몰랐다는 듯 당황해했다.

[그래도 가뿐하게 통과할 수 있을 것 같아.]

순서는 조금 앞이었으니까. 3시의 타티아나가 통과할 수 있을 거라고 했다면, 3시의 아나스타샤 역시 통과를 확신하고 있을 테지. 아나스타샤는 그렇게 생각하며 미소를 지었다.

잠시 후, 짧지만 단호한 메시지가 도착했다.

[그럴 거예요.]

[응. 고마워.]

[그럼 나중에…… 또 메시지 할게요. 힘내세요.]

풍부한 감정이 실린 이모티콘이나 의성어가 섞인 메시지는 아니었지만, 이 단조로운 문장에서 아나스타샤는 진지한 염원과 격려를 느꼈다.

스마트폰을 덮고, 아나스타샤는 고개를 들었다. 텍사스라는 지역의 햇빛은 모스크바의 것과 다르기라도 한지, 쨍쨍하게 느껴졌다.

아나스타샤는 오늘 하루를 완벽하게 보낼 수 있을 것 같단 예감을 느꼈다.

***

예선전을 치르는 콘서트홀은 그야말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아나스타샤는 어제 미리 두 홀을 와 본 덕분에 전혀 헤매지 않고 길을 찾을 수 있었다.

{미국에 자주 와 봤나요?}

{두어 번? 그런데 텍사스는 처음이네요.}

{어때요? 느낌이?}

{태양에 가까운 도시 같네요.}

{아하하, 러시아에 비하면 그럴지도요.}

드레스룸에서 연보라빛 드레스도 빌려 입고, 머리 세팅도 맡겼다.

이 콘서트홀의 스타일리스트는 아나스타샤를 도와주면서도 계속해서 말을 걸었다. 미국 사람들은 원래 이렇게 수다스러운가?

하지만 이것도 콩쿠르 시작 전에 긴장을 조금이나마 풀어 주려고 하는 일이라는 걸 알아서, 아나스타샤는 스타일리스트가 걸어오는 이야기를 받아 주었다.

마지막으로 거울을 확인한 아나스타샤가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마음에 드네요. 고마워요.}

{저야말로. 아가씨는 일할 맛이 나는 손님이었어요. 오늘 좋은 무대 기대할게요.}

{콩쿠르 보시나요?}

{물론이죠.}

콘서트홀의 스타일리스트라 그런지 자신의 일이 끝나고 나면 콩쿠르 무대도 보는 모양이다. 자신의 작품이 무대에 오르는 걸 보는 기분일까?

깔끔하게 연주자로서 준비를 마친 아나스타샤는 대기실로 향했다. 이미 대기실 안에는 참가자들이 모여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수십 개의 시선이 날아와 박힌다. 오늘 싸워야 할 경쟁자를 확인하는 서늘한 눈빛이었다.

“…….”

순간적인 침묵과 시선들의 창칼. 아무 생각 없이 들어왔다간 순식간에 위축될 만도 하다.

하지만 아나스타샤는 그런 기 싸움에 밀릴 사람이 아니었다.

말없이 주변을 휙 둘러보자 시선들은 와해되며 흩어졌다. 아나스타샤와 제대로 눈을 마주한 건 그중에서도 몇 명 정도였다. 하지만 그것도 단 몇 초. 서로 시비를 걸 생각은 없었던 만큼 모두들 아나스타샤가 오기 전까지 하던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배고파 죽겠는데 사탕만 잔뜩이네.}

{사 오던가.}

“□□□ □□□□. □□□□.”

“□□□□.”

영어와 알 수 없는 언어들이 섞여 들린다. 국제 콩쿠르 대기실에선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광경이기도 했다.

아나스타샤는 의자를 하나 찾아 앉았다. 보아하니 서로 아는 사이인 참가자들도 꽤 있는 것 같다.

물론 우승자가 한 명뿐인 콩쿠르에 친구와 함께 참가했을 리는 없으니, 그 전에 만나서 알거나 이 자리에서 친해진 것 같다. 같은 나라 출신이라는 건 친해지기에 충분한 이유이기도 했다.

그리고 여기엔 아나스타샤 말고도 러시아 참가자가 여럿 있기도 했다.

“음, 안녕?”

“……안녕?”

갈색 머리의 한 남자애가 대뜸 다가와 러시아어로 말을 걸길래 아나스타샤는 고개를 까딱이며 받아 주었다. 간만에 러시아어 인사라 반갑기도 하다.

그런데 그냥 인사만 하는 게 아니라 남자애는 알은체를 해 왔다.

“꽤 확신하고 묻는 건데, 4년쯤 전에 모스크바에서 콩쿠르 나간 적 있지?”

“그런데?”

“그때 인사했었는데. 혹시 바딤이라는 이름 기억 안 나?”

가만 기억해 보니 생각날 것도 같았다. 몇 년 전, 모스크바에서 열린 청소년 콩쿠르에서 만났던 남자애.

아나스타샤는 어렴풋한 선율을 콕 집어냈다.

“베토벤 소나타 14번?”

“맞긴 한데. 이름이 아니라 곡으로 기억하네?”

“음악은 기억이 나서.”

꽤 잘 쳤었으니까 기억하고 있지.

바딤은 이름이 아닌 음악으로 기억되고 있는 것에 대해 기뻐해야 할지 슬퍼해야 할지 모르겠단 표정으로 혼란스러워하더니, 곧 아무래도 좋다는 듯 말을 이어 나갔다.

“아무튼…… 미국에서도 만나게 될 줄은 몰랐네. 반가워.”

“그러네. 나도.”

“여기 참가한 이유가 있어?”

그냥 때가 잘 맞았을 뿐, 딱히 이유는 없었다. 미국이 아니라 다른 나라더라도 아나스타샤는 시간만 맞았다면 아무 곳에나 나갔을 것이다.

“이유 같은 거 없는데. 그건 왜?”

“음…… 아니. 지난 몇 년간 러시아에서 열린 굵직굵직한 콩쿠르엔 안 나왔던 것 같길래. 그렇지?”

“응.”

“그동안 해외 콩쿠르만 참가했었던 건가 싶어서.”

가만 보니 바딤은 그동안 러시아에서 청소년 콩쿠르에 많이 나갔던 것 같다.

4년 만에 보는 사람을 바로 알아보는 걸 보니 눈썰미가 굉장히 좋은 것 같은데, 그렇다면 반대로 그동안 안 보였던 것에 대해 궁금해할 만도 하다.

아나스타샤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지금 4년 만에 처음이야.”

“……그동안은?”

“놀았는데.”

짧게 대꾸하자 바딤의 표정이 살짝 언짢아졌다. 그 표정만으로도 아나스타샤는 바딤의 성격을 알 것 같았다.

4년 동안 그냥 놀았다고 대답하는 경쟁자를 보며 안도하는 건 바보고 의심하는 건 평범한 태도다. 그런데 바딤은 순수하게 언짢아하고 있었다. 좋은 사람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바딤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단 얼굴로 잠시 고민하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정말 그랬을 거라 생각하진 않지만…… 생각해 보니 그때도 그랬던 것 같네. 얕보면 큰코다칠지도 몰라.”

약간 진지한 경고.

아나스타샤는 그의 경고가 기분 나쁘지 않고 꽤 인상 깊었다. 때문에 그녀는 비아냥거리거나 장난으로 대꾸하지 않고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전혀 얕보고 있지 않아.”

“그럼 다행이고.”

“안 믿나 본데, 그냥 보고 판단해. 오늘 준비 많이 해 왔으니까.”

그 말엔 바딤도 조금 안심이라는 표정을 지었다. 경쟁자가 준비 많이 해 왔다는데 왜 안심된다는 표정을 짓는지, 그 마음을 알 것 같아서 아나스타샤는 속으로 웃었다.

잠시 후, 몇 명의 참가자가 더 입장했다. 그중엔 세연도 있었다.

세연은 아나스타샤를 발견하고는 반색하며 종종거리며 다가오려다가, 갑자기 무언가 생각났는지 표정을 싹 바꾸고는 느긋하게 걸어왔다.

{일찍 왔네? 아나스타샤.}

{안녕.}

반가워하면서도 어제 나누었던 대화를 기억하는지 꾹 참으려는 모습이 재미있어서, 아나스타샤는 히죽 웃으며 인사를 받아 주었다.

미소를 보자 조금은 긴장이 풀렸는지 세연도 약간 어깨의 높이를 내리며 물었다.

{오늘 어때?}

{좋아.}

{기대해도 되겠지?}

기대하든 말든?

경쟁자라고 했던 걸 기억하고 있나 했는데, 아니었던 거니?

아나스타샤는 세연에게 이상한 소리 하면 예선에서 떨어지는 건 네가 될 거라고 한마디 해 주려 했다. 하지만 그녀의 표정을 보니 단순한 질문이 아니었다.

지금 아나스타샤는 자신의 실력이 곧 타티아나나 중앙음악학교로도 이어지리라는 걸 깨달았다. 물론 그렇게 연관 지을 일이 아니지만, 여기에서 형편없는 모습을 보인다면 세연이 어떻게 생각할진 뻔했다.

아나스타샤는 그런 게 불합리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단지 짧게 말할 뿐이다.

{기대해.}

세연은 그 대답에 만족했는지 아니면 약간의 위압감을 느꼈는지, 대답 없이 고개를 작게 끄덕거리곤 빈 의자를 찾아 떠나갔다.

아나스타샤는 조금 더 차분하게 이 콩쿠르에서 꺼내 보일 첫 번째 카드를 되새겼다.

{참가자분들 이름을 부르겠습니다.}

잠시 후, 대기실을 지키고 있던 직원이 참가자들의 이름을 한 명씩 호명했다. 총 40명 정도의 연주자들은 저마다 이름에 답하며 자신의 존재를 알렸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홀 쪽도 시끌시끌해졌고 안내 방송이 연달아 나오기 시작했다.

콩쿠르 시작 직전으로 향하는 분위기에서 자연스레 대기실 안 참가자들의 긴장감 역시 시시각각 높아져 갔다.

이어폰을 꽂고 눈을 감고 있거나, 스트레칭을 하기도 하면서 저마다 긴장을 푼다. 아나스타샤는 그냥 사탕을 하나 입에 넣었다.

그런데 그 사탕을 입안에서 미처 한 번 제대로 굴리기도 전에, 참가자들의 순서가 발표되었다.

아나스타샤는 첫 번째 순서였다.

“…….”

사탕 입에 물고 나가면 안 되겠지?

무대에 설 준비하라는 말을 듣고 아나스타샤는 입에 물고 있던 사탕을 휴지에 뱉었다.

그녀는 누가 쳐다보건 말건 별 신경 쓰지 않고 문 앞에 서 있다가 호명하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무대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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