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481화 (481/1,277)

##  481화

세연은 타티아나와 함께 있던 아나스타샤를 떠올렸다.

혹시 응원하러 온 친언니인가 싶을 정도로 친밀해 보이는 사람이었다. 실제로 타티아나가 응석을 부리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고.

하지만 세연은 두 사람의 관계가 보이는 것과는 정반대일지도 모른다는 느낌을 받기도 했다.

사실 제대로 이야기를 해 본 적도 없으니까 잘 모르지만, 두 사람 중 어느 한쪽을 따르고 있는 건 타티아나가 아니라 아나스타샤 쪽이 아닐까. 타티아나는 확실히 사람을 따르게 하는 분위기를 지니고 있긴 했다.

「……으음.」

어쨌든, 그 아나스타샤가 연주자이고 이번에 같은 콩쿠르에 출전한 경쟁자라는 사실은 꽤 즐거운 일이었다. 타티아나에 이어 두 번째 중앙음악학교 학생이기도 하고.

이전에 타티아나가 워낙에 강렬한 인상을 준 덕에 세연은 아나스타샤에게도 상당한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그 실력은 중앙음악학교 학생들이라면 다 가지고 있는 걸까?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는 기회였다.

“…….”

모종의 기대를 가지고 세연은 대기실에 있는 모니터링용 화면을 올려다보았다.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연보라색 드레스를 입은 소녀가 걸어 나갔다. 훤칠한 키에 반듯한 자세. 한눈에 봐도 굉장한 실력자다. 아나스타샤는 이미 무대 위로 등장하는 것만으로도 모두의 기대감을 증폭시켰다.

키가 훨씬 더 크긴 하지만, 그 모습은 분명 타티아나와 닮아 있었다. 세연은 그 광경을 똑똑히 기억했다. 몇 걸음 걷는 것만으로도 기대감을 끌어 올리고, 피아노로 완벽하게 만족시키던 모습.

연습했던 것을 까먹을까 싶어 후다닥 무대에 올라서서는, 청중에겐 신경도 쓰지 못하고 스스로에게만 집중하며 연주를 마치고 내려가는 대다수 콩쿠르 참가자들과 기본적으로 다른 태도였다.

그야말로 연주자가 갖추어야 할 태도. 세연은 그런 태도를 닮고 싶었다.

「와아.」

요란한 박수 소리.

여기에 아나스타샤를 응원하기 위해 와 준 사람은 없을 텐데, 그래도 무대에 오른 참가자에게 보내는 박수엔 열렬한 응원이 가득했다.

아나스타샤는 가벼운 묵례로 이 열정적인 사람들에게 답하고, 피아노 앞에 앉았다.

그녀의 손이 살짝 떠오르다가 건반 위에 내려앉았고, 곧 연주가 시작되었다.

「…….」

마치 피아노가 아닌 거대한 방적기에서 실을 자아내듯, 아나스타샤가 선율을 손끝으로 뽑아내었다.

그리고 곧 이어지는 매력적인 화성의 도약.

{무슨 곡이지.}

누군가 중얼거렸다. 대기실에서도 다른 사람의 연주를 얌전히 듣는 게 미덕이라지만, 그래도 모르는 곡에 대해 못 참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그리고 아는 곡에 대해 알려 주고 싶어 하는 것 또한 어쩔 수 없는 일이고.

{스메타나의 콘서트 에튀드네. op.17 올림사단조.}

누군가가 그 제목을 말해 주고 나서야 세연은 곡을 떠올릴 수 있었다.

19세기 체코의 작곡가 베드르지흐 스메타나. 그가 작곡한 곡은 교향시 나의 조국 같은 관현악곡이나 오페라가 유명하지만, 콘서트 에튀드라 불리는 화려하고도 낭만적인 피아노 독주곡도 있었다.

“…….”

부제는 해변가에서.

밀려왔다가 다시 쓸려 내려가며 아르페지오가 물결친다.

아나스타샤는 맨발로 모래사장을 사뿐사뿐 걸으며 발자국을 만들었다. 그 뒤로 파도가 몰려와 발자국을 지우면, 다시 한 걸음 쿡 찍고 파도를 뛰넘는다. 마치 파도와 장난이라도 치는 것 같다.

1861년에 작곡된 곡이라고는 믿기질 않을 정도로 간결하면서도 세련된 음향. 세연은 아나스타샤의 연주에 거의 넋을 놓았다.

{뭐냐 저거.}

누군가 어이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이번엔 곡의 제목을 몰라 묻는 게 아니었다. 너무나 솔직한 감상이었다.

쇼팽의 에튀드 중에서도 op.10의 8번이나 op.25의 11번같이 아르페지오를 배경에 깔고 주 선율을 연주해야 하는 곡들이 있었지만, 이 스메타나의 콘서트 에튀드 op.17은 음과 음을 컨트롤함에 있어 훨씬 더 복잡하게 들렸다.

단 2개의 성조가 움직이고 있어 연주하는 데에 그리 어렵지 않게 보이지만, 한 아르페지오를 한 손으로 연주하지 않고 양손으로 연주해야 한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렇게 자연스럽게 연주하는 건 결코 쉽지 않다. 완벽에 가까운 터치 센스와 음악성이 필요했다.

여기에 있는 모두는 지금 아나스타샤가 얼마나 고난도의 연주를 하고 있는지 바로 알았다.

「…….」

역시 대단하네.

타티아나의 친구라길래 만만찮을 거라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생각보다 훨씬 더 뛰어났다. 아마 이번 콩쿠르도 힘들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불쑥 들었다.

「아니야.」

세연은 세차게 고개를 저으며 중얼거렸다.

이번엔 좋은 결과를 받고 싶었다. 저번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입상했을 때도 제대로 피아노를 배운 지 몇 개월 되지 않았으니 5위 정도면 괜찮은 결과라고 합리화하긴 했었지만, 사실 속으론 굉장히 분했다. 이번에도 똑같은 기분을 느끼긴 싫었다.

“브라바!”

5분 정도 되는 연주는 한가로운 해변가의 바람 소리와 같이 나긋나긋하게 마무리되었다. 끝까지 완벽한 연주였다.

우레와 같은 박수를 받으며 아나스타샤는 짧게 인사하고 휙 돌아 대기실로 돌아왔다.

“…….”

모두들 첫 번째 무대부터 굉장한 퍼포먼스를 보여 준 아나스타샤에게 약간 압도당해 있었다. 그중 몇 명은 아랑곳하지 않는다는 듯 쳐다보지도 않고 있지만, 쳐다보지 않는 것 자체가 신경 쓰고 있다는 표시이기도 하다.

아나스타샤는 자신의 차례를 환상적으로 마친 연주자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태연하게 걸어오더니 바딤과 눈이 마주치자 히죽 웃었다.

“준비해 온 거 어땠니?”

바딤은 그녀를 인정하겠다는 듯 말했다.

“저기 애들 표정 안 보여? 집에 가고 싶어 하잖아.”

과한 립서비스에 아나스타샤는 킥킥거리며 물었다.

“그런 넌? 가고 싶니?”

“아니.”

“그럼 저 애들도 그럴 거야.”

그렇게 말하며 아나스타샤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모두들 처음엔 약간 굳은 표정이었지만, 지금은 경쟁심에 불타고 있었다. 아나스타샤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그 시선들을 받아들였다.

***

포트워스 국제 청소년 피아노 콩쿠르의 예선전은 약 7시간 넘게 진행되었다.

각 참가자당 5분에서 10분 남짓의 독주곡을 연주했다. 중간중간 남는 시간이나 인터미션, 점심 식사 시간을 합치니 상당히 긴 시간이 걸렸다.

순번을 마친 아나스타샤는 어딘가 가지 않고 대기실에 앉아 40명이나 되는 참가자들이 한 명씩 자신의 기회를 붙잡으려 노력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원래 성격 같았으면 남의 연주를 봐서 뭐하겠나 싶어 대충 시간을 때우다가 결과 발표가 날 즈음 돌아왔겠지만, 지금은 별로 그럴 맘이 들지 않았다.

가만히 지켜봐 주는 것도 경쟁자이자 연주자 동료로서 해야 할 일이란 생각이 들었다.

“음…….”

생각보다 수준 높은 콩쿠르였다.

무대에 올라온 곡들도 좋았고 연주자들의 실력도 꽤 깊이 있었다.

하지만 아나스타샤는 이다음 본선에 올라갈 참가자가 누구일지 슬슬 추릴 수 있었다. 딱 인상 깊은 연주가 몇 개 있었다.

그중엔 바딤과 세연도 끼어 있었다.

세연의 경우엔 쇼팽의 스케르초 3번을 연주했다. 조금만 완성도가 떨어지면 유치하게 들릴 수도 있는 어려운 곡이지만 정말 잘 만들어 연주했다. 아나스타샤는 세연이 틀림없이 본선에 올라갈 수 있을 것이라 짐작했다.

그리고 결과를 확인할 때가 왔다.

{설마 망하진 않았겠지……?}

세연은 두 손을 꼭 모은 채 모니터를 바라보았다. 거기엔 심사위원들이 참가자들의 채점표를 가지고 이러쿵저러쿵 실랑이를 벌이는 모습이 비치고 있었다. 본선에 오를 8명을 고르는 데에 합의가 필요한 모양이었다.

아나스타샤는 모니터를 가만히 보다가, 세연의 어깨를 살짝 쳤다.

{통과할 것 같은데?}

그 말 한마디에 세연의 얼굴이 확 밝아졌다. 그녀는 활짝 웃으며 말했다.

{정말? 그래?}

{결과가 나와 봐야 알 일이지만.}

{그러지 말구.}

잠깐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세연은 결과를 기다리면서 느꼈던 긴장이 많이 가셨는지 연신 미소를 지었다. 아무래도 옆에 사람이 있으면 금방 안정을 찾는 타입인 것 같았다.

아나스타샤는 그런 세연을 가만 내려다보다가 갑자기 생각이 난 것을 물어보았다.

{난 어땠는데?}

세연은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이제 와서 뭘 묻느냐는 투로 답했다.

{당연히 통과지?}

{그런 거 말고.}

{그런 거 말고?}

고개를 갸웃거리는 세연에게 아나스타샤는 다시 한 번 확실하게 물어보았다.

{기대해도 되냐며?}

세연은 깊게 생각하고 던진 말이 아닐 수도 있지만, 사실 기대해도 되냔 그 말은 아나스타샤를 상당히 자극했다.

세연 역시 아나스타샤가 꽤 진지하게 묻고 있단 걸 느꼈는지 표정이 살짝 굳었다. 하지만 그 표정은 곧 흐물거리며 풀어졌다. 세연은 더할 나위 없는 미소와 함께 대답했다.

{기대 이상이었어.}

{그래?}

{응.}

의문을 제기할 수 없는 순수한 미소에 아나스타샤는 더 이상 무언가 물어보거나 할 생각을 접고 그냥 따라 웃어 버렸다.

결과를 기다리면서 두 사람은 잠시 대화를 나누었다. 이렇다 할 건 없었다. 그냥 오늘 7시간이나 진행되었던 콩쿠르 예선에 대한 이야기 정도였다.

{내 생각엔…… 저기 있는 홍콩 애랑 바딤도 통과할 것 같은데.}

{바딤?}

{응, 저기 있는 남자애.}

자기 이름을 들었는지 마침 바딤이 고개를 돌렸다. 아나스타샤는 웃으며 잠깐 오라고 손짓했다.

“어때? 통과할 것 같니?”

“그래야지.”

바딤은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나스타샤는 자기 생각을 살짝 말해 주려다가, 그만두었다. 이 애에겐 굳이 그런 게 필요할 것 같지 않았다.

바딤은 잠깐 어색하게 서서 옆을 힐긋 바라보았다. 세연이 궁금한 모양이었다. 아나스타샤는 그 시선을 눈치채고는 바딤에게 말했다.

“여기 있는 애는 세연 임. 아는 애야.”

{안녕?}

세연은 러시아어를 전혀 못 하면서도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하고는 영어로 인사했다.

바딤은 흠칫 놀라더니 똑같이 영어로 답했다.

{안녕…… 음.}

그렇게 어색하게 인사하고는 바딤은 바쁜 일이 있는 사람처럼 가 버렸다.

세연은 약간 상처받았는지 아나스타샤에게 물었다.

{내가 싫은가 봐?}

{아니, 그냥 영어를 못 해서일걸?}

{아하.}

듣고 보니 그럴 수도 있겠다는 듯 세연이 손뼉을 짝 쳤다.

그렇게 몇 분쯤 지나자 결과가 발표되었다.

직원이 종이를 한 장 받아와 대기실 벽면에 붙여 놓았다. 말도 없이 그냥 종이만 한 장 붙였을 뿐인데 대기실의 모두가 저 종이에 모두의 운명이 걸려 있음을 알아차리고 우르르 달려갔다.

아나스타샤도 세연과 함께 그쪽으로 향했다. 40명이나 되는 아이들이 북적거렸지만 아나스타샤는 그리 어렵지 않게 결과를 확인할 수 있었다.

아나스타샤 세르게예브나 이즈마일로바. 다른 국적의 아이들보다 확실히 긴 그 이름이 맨 위쪽에 위치하고 있었다. 아나스타샤는 예상했던 결과라고 생각하면서도 방심하지 않기로 했다. 본선은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르는 게 바로 이 콩쿠르의 세계다.

세연 역시 낑낑거리며 결과를 확인하고는 다시 돌아왔다.

{나 통과했어!}

그녀는 너무 기뻐하면서도 아나스타샤에게만 들리게 작게 말했다. 여기 있는 아이들 중 8명을 제외한 나머지들은 실망감을 안고 돌아가야 한다. 그 아이들을 배려한 것이다.

아나스타샤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잘됐네.}

{고마워! 아나스타샤, 너도 정말 잘됐…….}

세연은 막 말을 하다 말고 아나스타샤가 여기에서 가장 강한 경쟁자라는 걸 깨달았는지 말끝을 흐렸다.

하지만 주눅이 드는 일은 없었다. 그녀는 조금 더 강렬한 눈빛으로 아나스타샤를 마주했다.

{내일도 잘 부탁해.}

{뭘 부탁하니? 각자 잘하면 되는 건데.}

{그냥 또 보게 되었으니까 하는 말이야!}

장난치지 말고 똑바로 답해 달라는 듯 말하는 세연을 보며 아나스타샤는 키득거렸다.

{그래, 내일도 모레도 보잔 약속대로 되었네.}

아나스타샤는 어제 했었던 대화를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세연은 그녀 역시 그 약속대로 되어 기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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