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82화
본선은 기존까지의 콩쿠르에선 볼 수 없었던 토너먼트 방식으로 진행된다.
8명 본선 진출자들이 2명씩 승부를 겨루어 승자와 패자를 나누게 되고, 다시 승자들끼리 승패를 나누는 방식이었다.
미국의 기풍은 형식에 구애되지 않는 편이긴 하지만 그래도 상당히 파격적인 방식이다. 그리고 아나스타샤는 이 방식이 마음에 들었다.
{안녕.}
{네가 내 상대구나. 안녕.}
아나스타샤는 8강에서 마주하게 된 앤디라는 이름의 홍콩 남자애와 인사했다. 대기실엔 두 사람과 직원뿐이었다. 토너먼트 형식이라 그런지 정말 단둘이 대결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
약간 어색하기도 했지만 아나스타샤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본래 살갑게 먼저 다가가서 말을 걸거나 하는 성격도 아니었고, 여기서 웃으며 통성명하고 친하게 지낼 상황도 아니었다. 두 사람은 지금 4강전 진출을 놓고 겨루는 경쟁자인 것이다.
앤디 역시 유쾌한 분위기를 바라는 것 같진 않았다. 그는 이어폰을 꽂고 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나스타샤 쪽은 아예 신경도 쓰지 않는 건조한 분위기였다.
그렇게 시간이 조금 흐르고, 본선 8강전이 시작되었다.
총 4팀 중 첫 번째 팀. 그중에서도 첫 번째 순서인 앤디가 이어폰을 빼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아나스타샤를 힐끔 일견하고는 척척 걸어 나갔다.
아나스타샤는 어제 그의 실력을 잘 봤기에 꽤 기대했다.
“흠.”
8강전은 10분 이내의 독주곡으로 대결하게 된다.
앤디가 선택한 곡은 쇼팽의 환상 즉흥곡. op.66
폴리리듬polyrhythm으로 시작되는 첫 주제. 오른손은 빠르게 치솟았다가 되돌아오며 변화무쌍한 음형을 선보이고, 왼손은 틀림없는 박자로 균형을 유지한다.
굉장히 깔끔한 연주여서 어딘가 흠잡을 곳이 딱히 없게 들릴 정도였다.
하지만 그저 깔끔한 것만으론 부족하다. 이 환상 즉흥곡은 연주자의 음색을 완벽하게 드러내고 있지 못했다. 그 실력이 미흡해서일 수도 있지만, 곡의 그릇과 형태가 부족한 것처럼 들리기도 했다. 아나스타샤는 이 즉흥곡을 꽤 좋아하는 편이었지만 늘 한계가 느껴진다는 점에선 아쉬움을 느끼기도 했다.
환상 즉흥곡은 화려하면서도 정갈한 첫 주제를 마치고 보다 부드러운 두 번째 주제를 거쳐 다시 첫 주제를 반복하며 멋지게 마무리되었다. 아나스타샤는 모니터로 모든 연주를 지켜보았다.
연주를 마치고 대기실로 돌아온 앤디는 조용히 아나스타샤를 바라보다가 무대 쪽으로 손가락을 뻗었다.
긴말 필요 없고 직접 보여 달란 표시였다.
과묵하기도 해라. 아나스타샤는 침묵에는 침묵으로 대꾸하며 무대로 향했다.
“…….”
그녀가 선택한 곡은 쇼팽의 화려한 변주곡variations brillantes. op.12
이 콩쿠르를 앞두고 준비한 곡들 중에선 쉬운 편에 속하는 곡이다. 하지만 이 서정적이고 아름다운 곡을 고른 건 과시하려는 뜻 없이 온전히 음악성으로만 상대하겠다는 표시이기도 했다.
흥얼거리며 부르는 노랫소리처럼 들리는 밝고 기다란 프레이징. 아나스타샤는 그 긴 호흡을 건반에 담아내며 표현했다.
직전에 있었던 환상 즉흥곡처럼 빠르고 직설적이지 않다. 하지만 은연중에 파고들며 간지럽히고, 미소를 자아낸다.
아나스타샤는 서두르지 않고 편안하게 이 곡이 가진 힘을 보란 듯이 펼쳐 냈다.
{내가 졌겠지.}
연주를 마치고 박수를 받으며 대기실로 돌아오니 앤디가 문득 그런 말을 했다. 결과가 나오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이런 말을 하는 게 약간 패배주의적으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아나스타샤가 느끼기에 지금 앤디의 태도는 굉장히 객관적인 자기성찰에 가까운 것이었다.
아나스타샤는 아직 결과가 나오지 않았으니 모르는 일이라고 할 생각이 없었다. 어차피 두 사람 다 숙련된 연주자였고, 굳이 심사위원의 평가가 없더라 하더라도 누가 다음 무대로 향할지 정도는 알고 있다.
아나스타샤는 대답하지 않고 앤디를 바라보았다. 그의 기회까지 쥐고 끝까지 가겠단 의미였다. 제대로 그 뜻이 전해졌는진 모르겠지만, 앤디는 꽤 편해진 얼굴로 의자에 앉았다.
결과는 금방 나왔다. 예상했던 대로였다.
“…….”
두 사람은 함께 대기실 밖으로 나왔다.
앤디는 잠시 발걸음을 멈칫했다. 그러더니 휙 돌아서선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그는 과묵했고, 마지막까지 흔들림이 없었다. 아나스타샤는 미소와 함께 그 악수를 받아 주었다. 앤디는 두어 번 손을 흔들고는 다시 돌아서서 가 버렸다. 이제 홍콩으로 돌아가겠지만, 언젠가 다시 이런 국제 무대에서 보게 될 날이 올지도 모르겠단 생각을 하며 아나스타샤는 그 뒷모습을 잠시 지켜보았다.
그 후엔 연주자들을 위해 마련된 객석에 앉아 다음 6명의 경합을 관전했다.
“이렇게 보니 별로 다를 것도 없네.”
참가자들이 순서대로 나와서 피아노를 연주하고 들어간다는 사실에 변화가 없으니 콩쿠르 방식이 토너먼트라는 게 그리 큰 의미가 있나 싶기도 하다.
하지만 두 명씩 연주가 끝날 때마다 연주자 객석엔 한 명만이 돌아오는 걸 보면 약간 섬뜩하기도 했다. 꽤 긴장되는 맛이 있기도 하다.
그렇게 8강전이 모두 끝나는 데에 2시간 정도 걸렸다. 이후 점심 식사를 하고, 아나스타샤는 다음 4강전을 위해 대기실로 향했다.
“큰일 났네.”
상대는 바딤이었다. 그는 차를 마시다 말고 아나스타샤를 보자마자 중얼거렸다.
“뭐가 큰일이니?”
“너랑은 결승전에서 만나고 싶었거든.”
아, 이게 또 토너먼트의 단점 중 하나구나.
아무리 상대와 결승전에 만나서 최선을 다하고 싶어도 결국 중간에 만나게 된다면 둘 중 하나는 떨어지게 된다. 아나스타샤는 아쉽다는 듯 말하는 바딤을 보며 정말 진지한 성격이구나 새삼 느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어쩌면 세연과 결승전에서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단 생각을 했다. 여기서 아나스타샤가 바딤을 이기고, 세연이 자신의 상대를 이기면 된다.
“아나스타샤.”
“……응?”
“결승전 생각해 설마?”
생각하던 것이 딱 걸린 아나스타샤는 뜨끔해서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닌데?”
“쓸데없는 생각 말고 나한테 집중해 줬으면 좋겠는데.”
바딤 입장에선 자신을 뛰어넘고 그다음 상대 생각을 한다면 굉장히 기분 나쁠 만도 했다. 하지만 그는 차를 마시며 점잖게 자신의 뜻을 전했다.
아나스타샤는 조금 미안하기도 했지만, 드러내지 않고 농담으로 받아쳤다.
“그거 이상한 의미야?”
“콜록, 컥…… 갑자기 황당, 한 소리 하네…….”
뜬금없는 소리에 바딤이 차를 거의 뿜을 뻔했다. 찻잔이 흔들리며 테이블 위로 흘렀다. 농담이 너무 짓궂었나? 아나스타샤는 정말 미안해져서 옆에 있는 티슈를 건네며 말했다.
“농담이고, 충분히 집중하고 있으니까 걱정 마.”
“……그래.”
바딤은 떨떠름하게 답하며 티슈로 테이블을 닦았다.
그 후로 대화는 거의 없었다. 각자 서로의 음악에 집중하기 시작한 것이다. 바딤은 눈을 살짝 감고 진지하게 시간을 기다렸다.
그리고 곧 두 사람이 맞붙을 시간이 찾아왔다.
“먼저 할게.”
바딤은 자신을 찾는 부름에 따라 일어나 무대로 향했다.
뜨거운 박수에 가볍게 답례하고, 피아노 앞에 앉아 곧장 연주에 들어간 곡은 슈베르트 피아노 소나타 19번이었다.
“오…….”
다단조로 첫 시작부터 묵직함이 선명하게 드러나는 굉장히 강렬한 연주였다. 아나스타샤는 자기도 모르게 탄성을 흘리며 연주에 빠져들었다.
슈베르트는 특유의 정처 없는 흐름을 특징으로 하고 있지만, 사실 생전 베토벤을 가장 존경했던 음악가로 꼽는 만큼 베토벤식의 화려하고 거대한 화성도 굉장히 잘 사용하는 작곡가이기도 했다.
바딤은 그러한 슈베르트의 특징을 굉장히 노련하게 풀어냈다.
장엄하고 웅장하면서도 어딘가 기울어져 흘러간다. 이 기묘한 균형감을 자연스럽게 표현하기 상당히 어려운 곡인데도 바딤은 잘 해내고 있었다. 얼마나 연습을 많이 했는지, 그리고 음악적 이해도가 얼마나 높은지 바로 드러났다.
몇 번의 주제가 반복되며 1악장이 마무리되고, 다음으로 따뜻하게 흐르는 2악장 아다지오가 진행되었다. 바딤이 처음의 강렬한 연주뿐만 아니라 다채롭고 서정적인 연주에도 강한 연주자라는 걸 확실히 증명하는 연주였다.
그리고 잠깐 바단조로 이조되며 곡과 곡 사이의 산책길같이 느껴지는 3악장 미뉴에트. 이후 다시 다단조로 돌아오며 4악장이 펼쳐졌다.
“…….”
알레그로의 굉장히 빠른 리듬으로 바딤이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빠르게 달려가나 싶더니 돌부리에 걸려 휘청거리고, 다시 허리를 세우고 마구 뛴다. 굉장히 급박한 모습이다.
그렇게 달리고 달려 언덕에 도착한 남자가 멈춰 서서 풍경을 돌아보고, 이번엔 조금 더 여유롭게 걷기 시작했다. 섬세한 아티큘레이션이 정말 훌륭했다.
주제는 점차 발전하며 피날레로 향해 가다가, 어느 순간 두루뭉술하게 흩어졌다. 그리고 목적지를 찾아 달려가는 한 남자의 이야기는 어떠한 끝이 없이 영원히 이어지는 뉘앙스로 마무리되었다. 슈베르트다운 마무리였다.
이 모든 것을 잘 해낸 바딤에게 뜨거운 박수가 쏟아졌다. 바딤은 꾸벅 인사하고 대기실로 돌아왔다.
“네 차례야.”
아나스타샤는 여유를 잃지 않고 미소로 답했다. 멋진 연주였으니까, 그에 걸맞은 곡이 필요하겠지.
아나스타샤가 무대에 올린 곡은 브람스의 피아노 소나타 3번이었다.
“!”
마치 거대한 오케스트라의 튜티tutti와도 같은 웅장한 화음이 홀 전체를 때렸다. 직전의 슈베르트에서 느껴졌던 무게감과는 또 다른 규모의 무게다.
아나스타샤는 양손으로 옥타브를 짚으며 피아노에 최대한의 힘을 집중시켰다.
건반에 실리는 힘은 결국 1cm 정도의 깊이에 얼마나 빠르게 힘을 집중시키느냐에 달려 있다. 강하게 할 필요도 없고 온 어깨를 긴장시킬 필요도 없다. 그저 빠르고 정확하게 건반을 누를 뿐. 아나스타샤는 이 기법과 노하우를 타티아나에게 배웠다.
타티아나는 자신이 할 수 있다면 아나스타샤도 반드시 할 수 있을 거라며 몇 번이나 응원하고 도와주었고, 아나스타샤는 결국 그 응원에 힘입어 이렇게 강렬한 소나타를 연주할 수 있게 되었다.
“…….”
그다음으로 이어지는 2악장의 안단테를 스무스하게 연주하고, 3악장 스케르초는 1악장의 세찬 느낌을 그대로 실어 연주했다. 정신없이 연주하다 보면 금방 4악장이다.
바딤이 연주했던 소나타의 3악장이 마치 프롬나드와 같은 역할을 한 것처럼 이 곡의 4악장 역시 피날레까지 이 곡의 모든 것을 이어가는 인테르메조의 역할을 한다.
아나스타샤는 4악장으로 이전까지의 주제를 살짝 가라앉히고, 5악장에서 보다 선명하게 꺼내어 보여 주었다.
지독하게 어려운 리듬과 아티큘레이션, 대체 어디에서 시작되어 어디에서 끝나는지 모를 프레이징. 하나하나가 다 신경 쓰이고 복잡한 곡이다. 하지만 아나스타샤의 실력은 이 곡을 깔끔하게 표현하기에 모자람이 없었다.
소나타가 아니라 교향곡을 연주하듯, 아나스타샤는 이 5악장이나 되는 소나타를 연주했다. 바딤이 슈베르트로 영원히 이어지는 동화책을 연주했다면, 아나스타샤는 몇 권이나 되는 거대한 서사시를 연주했다.
웅장한 장조로 곡이 마무리되자 그 후로도 여운이 가시기 전까지 몇 초간 침묵이 이어지다가, 청중들은 약속이라도 한듯 동시에 박수를 보냈다.
아나스타샤는 건반을 놓고 일어났다. 아마 다른 참가자들의 지지자들도 있을 텐데, 지금은 모두들 아나스타샤에게 환호하고 있었다. 아나스타샤는 옅게 웃으며 답례했다.
대기실로 돌아오자 바딤이 말했다.
“너 생각보다 너무 잘하는데. 대체 지난 4년간 얼마나 연습을 한 거야?”
그 역시 결과를 예상하는 목소리였다.
그리고 길게 걸리지 않고 결과가 나왔다. 결승으로 향하는 건 아나스타샤였다.
“축하해.”
아나스타샤는 담담하게 바딤의 축하를 받았다. 웃거나 고맙다고 할 일은 아니었다. 그는 일부러 져 주거나 하지 않고 최선을 다했고, 아나스타샤 역시 최선을 다해 그를 상대했다. 각자 최선을 다했으니 모자람 없다.
바딤은 대기실을 나가며 말했다.
“결승전 잘해. 아나스타샤. 네가 원하던 상대가 올라올지도 모르겠네.”
“……응.”
바딤은 바로 가지 않고 결승까지 지켜볼 생각인 것 같았다. 아나스타샤는 고개를 끄덕이고 연주자용 객석에 앉았다.
그리고 세연과 미국인 참가자가 다음 4강 대결을 치렀다.
{……정말 이렇게 되었네.}
{그러게. 아나스타샤.}
1시간쯤 지난 뒤, 연주자 대기실에서 마지막 남은 세연과 아나스타샤가 조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