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483화 (483/1,277)

##  483화

세연은 이 상황이 반가우면서도 약간 긴장하는 것처럼 보였다.

아나스타샤는 시계를 보았다. 오후 3시였다. 결승전 시작까지 30분 정도 시간이 있었다.

{차 마실래?}

이번엔 가만히 있지 않고 아나스타샤가 먼저 말을 걸었다. 시간도 조금 있겠다, 차를 마시며 이야기하는 정돈 괜찮을 것 같다.

원래 과묵한 앤디 같은 애랑 같이 있는 거라면 피차 신경 쓰지 않고 각자 있는 게 편하겠지만, 저 애는 아무 말도 없이 내버려 두면 불안해할 것 같기도 하고…….

{응. 마실래.}

아니나 다를까, 세연은 언제 긴장했냐는 듯 가까이 다가오며 대답했다.

아나스타샤는 대기실에 있는 포트기로 물을 끓이고, 두 명 분의 차를 끓였다. 세연은 차에 대해선 잘 모른다며 모든 걸 아나스타샤에게 맡겼다. 아나스타샤는 혹시라도 몸에 무리가 갈까 싶어 카페인이 없는 허브티를 두 잔 끓였다.

세연은 아무것도 묻지 않고 아나스타샤가 끓여 준 찻잔을 받고는 홀짝이며 마셨다. 그 모습을 보며 아나스타샤가 말을 걸었다.

{아까 보니까 잘하던데.}

세연이 고개를 들고는 배시시 웃었다.

{너도. 아나스타샤. 너무 잘해서 놀랐어. 스메타나의 콘서트 에튀드도, 화려한 변주곡도…… 음.}

빈말로 하는 게 아니라, 정말로 연주자로서 하는 평가였다. 아나스타샤가 연주했던 곡들은 어느 하나 쉬운 곡이 없었다. 세연은 정말 아나스타샤의 연주를 높게 평하는 듯했다.

그런데 그렇게 한 곡씩 이야기하던 세연이 멈칫하더니 아나스타샤를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왜 보냐는 듯 고개를 갸웃하자 세연이 조심스레 말했다.

{그런데 있잖아……. 타티아나랑 비교하면…… 누가 더 잘하니?}

갑자기 타티아나의 이야기가 왜 나오는지 잘 모르겠다. 무슨 생각이지? 하지만 이상한 속셈이 있거나 한 것 같진 않았다. 아나스타샤는 잠시 생각하다가 거꾸로 물었다.

{네가 듣기엔 어떤데?}

{어…… 글쎄, 타티아나랑 무대에 섰던 게 좀 오래되기도 하고…… 솔직히 방금 브람스 소나타 3번은 너무 인상 깊기도 해서…….}

그냥 말하면 될 것을. 아나스타샤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말 빙빙 돌릴 필요 없어. 타티아나가 훨씬 나으니까.}

딱 잘라 이야기하니 세연이 놀란 표정으로 입을 벌렸다.

{당연하다는 듯 말하네?}

{실제로 그럴걸?}

세연은 잠시 말이 없었다. 아나스타샤는 약간 말실수를 했음을 느꼈다. 그냥 잘 모르겠다고 넘겼어야 했는데, 평소 하고 있던 생각을 너무 있는 그대로 내보인 것 같다.

그냥 곧 따라잡을 거라고 덧붙이고 대충 얼버무릴까 생각하고 있는데, 세연이 찻잔을 살짝 기울이더니 천천히 중얼거렸다. 혼잣말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건 아나스타샤에게 하는 질문이기도 했다.

{내가 아까 듣다가 느낀 건데, 네 피아노에서 약간 타티아나와 비슷한 음색이 느껴져. 그냥 묘하게 그런 걸 느끼는데…… 나도 내가 이상하다고 생각해. 네가 친구에게 피아노를 배우진 않았을 텐데.}

아나스타샤는 세연의 말을 이해하고도 입을 열지 못했다.

그건 상당히 정확한 이야기이기도 했다. 아나스타샤는 스스로 의도적으로 하진 않았지만 은연중에 타티아나의 피아노를 닮아 가고 있음을 느끼곤 했다. 그리고 거꾸로 타티아나는 아나스타샤에게서 아이디어를 얻어 가는 것 같기도 했고. 그렇게 두 사람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지난 시간들을 공유했다.

그게 세연의 귀엔 들린 모양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정말 예민한 분석이었다. 승우 한도 귀가 좋던데, 한국인들은 다 이런가?

두서없이 떠오르는 생각들이 스쳐 지나간다. 아나스타샤는 잠시 멍하니 세연을 바라보았다. 그 시선을 오해했는지 세연이 살짝 움츠리며 물었다.

{혹시 기분 나빴니?}

{아니, 괜찮아.}

{음…… 그냥 괜히 물어본 건 아니야. 난 그저, 내가 배울 수 있는 게 있다면 배우고 싶어서 그래.}

세연이 아나스타샤에게 약간 민감할 수도 있는 이야기를 물어본 것은, 세연이 바로 그 음악적인 부분에 관심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사사한 교수가 흥미를 보는 음악성. 세연은 그것이 타고난 게 아니라 배울 수 있는 것이라면 배우고 싶어 했다. 타티아나의 선생을 만나고 싶다고 할 정도이니 상당히 진지한 바람인 것 같았다.

아나스타샤는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가 말했다.

{네 교수님은 남의 스타일을 따라 하지 말라 하셨다면서?}

{응, 그건 그렇지만…… 그래도.}

{기뻐하실 것 같아?}

세연은 곧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잠시 머뭇거렸지만, 그래도 곧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무슨 일이 있는 걸까. 아나스타샤는 그런 생각부터 했다.

아무리 자기 교수님을 좋아해도 그렇지, 이렇게까지 적극적으로 기쁘게 해 드리고 싶다며 나설 이유까지 있는진 잘 모르겠다.

그러나 세연의 표정은 진지함을 넘어 절박하기까지 했다. 그녀는 가능한 모든 방법을 찾고 있는 중이었다.

평소 같았으면 바보 같은 일이라고 일축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 아나스타샤는 그렇게 딱 부러지게 말하지 못했다.

{난 네 교수님의 말이 맞다고 생각해. 왜냐하면 너도 이미 충분히 스스로의 음악을 하고 있거든.}

그리고 그 음악으로 타티아나를 울게 하기도 했지.

아나스타샤는 세연을 처음 봤을 때부터 신경 쓰고 있던 사실을 굳이 입 밖으로 내지 않고, 결론만을 이야기했다.

{사실 그래서 나도 네 음악에 관심이 많아.}

{어…… 그렇게 말해 줄 줄은 몰랐네.}

{말해 준 게 아니라, 정말 그렇게 생각해.}

세연도 굉장한 실력자였고, 분명 배울 점이 많았다. 아나스타샤는 거짓말 없이 말했고 세연은 부끄럽다는 듯 어물거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곧 상황을 다시 파악한 세연이 말했다.

{우리 지금은 경쟁하는 거잖아? 콩쿠르 결승전이기도 하고.}

{그렇지.}

{나중에…… 혹시 다른 곳에서 볼 수 있을까?}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그럴 순 없다고 대꾸할 수 있을 정도로 아나스타샤는 성격이 파탄 나 있지 않았다. 그녀는 결국 웃음을 흘리며 손가락을 손바닥 위에 쿡쿡 찍었다.

{이거 다 끝나고, 전화번호 불러 줄래.}

{어!? 정말?}

{먼저 말했었잖아.}

처음 보자마자 전화번호 알려 달라고 했었던 그녀다. 세연은 이틀 만에 전화번호를 얻는 데에 성공하게 될 것 같은 게 기쁜지 환한 미소를 지었다.

{알았어. 음…… 지금은 안 되겠지?}

{지금은 차로 만족하는 게 어떠니.}

지금 두 사람은 경쟁자였고, 그럼 마지막으로 함께하는 티타임이면 적절하다. 세연도 동의의 뜻으로 찻잔을 들었다. 그렇게 두 사람은 잔잔하게 대화를 나누며 차를 마셨다.

30분 정도 시간이 흘러 티타임은 끝났다.

다시 홀 쪽이 시끄러워지기 시작했고, 대기실을 지키던 직원이 세연에게 무대에 오를 준비를 해 달라 말했다.

연노랑 드레스를 입은 세연은 마지막으로 자신의 상태를 확인하고, 신호에 맞춰 무대로 나갔다.

“…….”

아나스타샤는 정말 자신의 마지막 상대가 되어 버린 세연을 모니터로 지켜보았다.

저 애에게 반드시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연주자의 세계에선 언제든 승패가 뒤집힐 수 있다. 그러니 지금 연주를 제대로 보고 아나스타샤는 자신의 연주를 똑바로 할 필요가 있었다.

박수를 받으며 결승전 연주자로서 무대에 선 세연은 꾸벅 인사를 하고는 피아노에 앉아 연주를 시작했다.

“……쇼팽.”

가을 낙엽이 떨어지는 것같이 선율이 흘러내린다.

아나스타샤는 그녀가 연주하는 소나타의 이름을 바로 알 수 있었다.

쇼팽의 피아노 소나타 3번. 우아하고 시적인 음악으로 뭇 대중의 사랑을 받는 명곡이다.

하지만 아나스타샤는 그 시작과 구조에서 어쩐지 익숙함을 느끼기도 했다.

페달의 사용법이나 루바토의 너비에서 타티아나가 연주했던 쇼팽 피아노 소나타 1번의 환영을 느낀다. 아나스타샤는 순간 잘못 들은 건가 싶었지만, 그렇게까지 많이 어긋나 있지도 않았다.

다만 리듬이 조금 더 가볍고 생동감 있다. 타티아나의 차분한 리듬과는 상당히 달랐다. 때문에 결정적으로 큰 차이가 있긴 하지만, 세연이 조금만 더 차분한 음악을 추구할 수 있게 된다면 굉장히 비슷할 것 같기도 했다.

“…….”

아나스타샤는 세연의 음악에 계속 신경이 쓰였던 이유를 비로소 알 수 있었다. 어딘지 모르게 낯익었기 때문이었다.

타티아나 역시 비슷한 걸 느꼈던 걸까.

높고 푸른 가을 하늘과 같은 음악은 보다 낭만적으로 흐른다. 바람에 휘날리는 단풍은 풍경을 아름다운 붉은 빛으로 장식했다. 세연은 보다 집중하며 선명한 색채감을 뽐냈다.

아나스타샤는 세연이 지금까지 연주했었던 곡들은 예선을 통과하기 위한 곡들이었고, 결승을 위해 본격적으로 연습했던 곡은 바로 이 소나타임을 확실하게 느꼈다. 그만큼 높은 완성도를 지닌 음악이었다.

“…….”

곡은 다채로운 1악장을 마치고 2악장 스케르초로 넘어간다. 작은 다람쥐가 나무를 타고 쪼르르 내려갔다가, 도토리를 물고 다시 올라간다. 고개를 들면 나무가 흔들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3악장. 집으로 돌아가는 느긋한 여로를 그리는 음악이다.

이전의 빠르고 강한 음악보다 사실 더 컨트롤하기 까다로운 악장임에도 불구하고 세연은 한 번 잘못하는 일 없이 분명하게 의도하는 그대로 음악을 연주했다. 조금이라도 의문이 있다면 제대로 이야기를 만들어 나가기 힘들 텐데도, 세연은 전혀 그런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마지막 4악장.

“이거구나.”

도약하는 옥타브로 시작하는 나단조의 커다란 음형, 그리고 곧바로 프레스토의 피날레가 시작된다.

한 손으로 2도 다성부 화음을 처리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인데, 얼마나 연습했는지 너무나 자연스럽다. 아나스타샤는 세연이 옥타브를 처리하며 선율을 이어 나가는 것을 이렇게 잘하기 위해 많은 시간을 쏟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연습으로 빛나는 음악성이 돋보인다.

쇼팽은 의도하지 않았겠지만 아나스타샤는 이 소나타에서 가을을 본다. 4악장은 이전까지의 모든 주제들을 축복하는 가을 축제와도 같은 악장이었다. 세연은 그러한 이미지를 정말이지 잘 드러내고 있었다. 어찌 보면 해석이 비슷한 것 같기도 했다.

춤추듯 오다가 다시 물러나고 안개처럼 일렁이는가 싶으면 구름 한 점 없다. 그렇게 세연은 능숙하게 피날레는 이어 나갔고, 화려하게 귀 주변으로 흐르는 선율을 선사하며 곡을 끝냈다.

“브라바!”

엄청난 환호성이 일었다. 기립박수를 보내는 사람들도 굉장히 많았다. 세연은 이 엄청난 열정 속에서 당황스러워하거나 너무 들뜨지 않고 담담하게 감사만 묵례로 표하고 대기실로 돌아왔다.

그리고 문을 열고 들어오자마자 크게 숨을 내쉬며 말했다.

{세상에…… 지금까지 했던 것 중에 제일 잘한 것 같아…….}

너무 만족스러운 연주여서 스스로에게 놀라고 있었다. 그런 경우 종종 있지. 아나스타샤는 웃으며 말했다.

{다행이네. 나도 최선을 다해야겠어.}

{어, 그렇겠지?}

사실 최선을 다하는 건 당연한 일인데도 세연은 그렇게 멍하니 되물었다. 그러더니 급기야 궁금한 걸 다 묻기로 한 것 같다.

{무슨 곡 연주할 거야? 아나스타샤.}

말해 주지 못할 것도 없지만, 아나스타샤는 손가락을 흔들며 웃기만 했다.

{미리 말하면 별로 안 놀랄 테니까, 듣고 알아맞혀 봐.}

그렇게 말하니 세연은 문제를 받은 학생처럼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그녀를 두고 아나스타샤는 문 앞에 섰다.

잠시 후 직원이 신호에 따라 아나스타샤는 무대로 나갔다.

스포트라이트가 확 비춰 오고, 뜨거운 환호와 박수가 날아들었다.

오늘로 3번째다.

솔직히 말해 힘들지 않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 하지만 아나스타샤는 연주자로서 이 마지막 곡이야말로 지금까지 했던 것 중 가장 잘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세연이 말했던 것처럼, 최소한 그 정도는 해 주어야 한다.

“…….”

다시 한 번 곡을 떠올리고, 아나스타샤는 그 떠올린 선율을 현실에 쏟아 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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