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84화
이게 무슨 곡이었지?
세연은 의자에 앉아 차를 홀짝이다 말고 멍하니 고개를 들었다.
낮게 웅웅거리는 옥타브의 연타와 무언가의 시작을 알리는 전조.
아나스타샤가 막 연주하는 곡은 어디선가 들어 본 것 같으면서도 한 번에 기억나지 않았다. 얼핏 브람스 같기도 하고 쇼팽 같기도 하다. 하지만 그녀가 아는 한 그 작곡가들의 곡 중에 이런 곡은 없었다. 결정적으로 기교적으로 너무나 큰 차이가 있기도 했고.
그런데 옆에서 대기실 직원의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처음이네…….}
상당히 놀라워하는 표정이었다. 저 밖에서 연주 중인데 떠드는 건 실례이지만, 세연은 그래도 알아봐야겠다 싶어서 목소리를 낮추며 물었다.
{뭐가 처음인가요?}
{알캉이 이 콩쿠르에서 연주되는 건 지금까지 살면서 처음 보겠네요.}
{알캉…… 아, 알캉!}
그 이름을 들으니 바로 생각하는 곡들이 몇 가지 있었다. 그리고 그중에서 가장 위쪽으로 떠오르는 제목은 하나였다.
{이 곡, 혹시 알캉 심포니인가요?}
{맞아요.}
알캉 심포니symphonie. op.39
심포니란 본래 교향곡을 뜻한다. 오케스트라와 함께 하는 소나타다.
하지만 알캉의 심포니는 오케스트라 없이 피아노 독주로 연주되는 그냥 소나타였다. 대신 곡의 웅장함을 심포니의 규격에 맞추었기 때문에 알캉은 이 곡을 심포니라 이름 지었다.
물론 그 규격에 걸맞게 난이도는 지옥과도 같이 어렵다. 세연은 10대가 알캉을 연주하는 건 듣도 보도 못했다. 아마 연주하고 싶다고 하면 교수님이 말도 안 되는 소리 말라고 혼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러시아에선 그렇지 않은지, 아나스타샤는 매우 숙련된 알캉을 연주하고 있었다.
거의 모든 부분이 기본 3도, 4도로 이루어졌다. 정말 오케스트라를 고려하며 작곡했다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그냥 무작정 피아노로 표현할 수 있는 최대 규격만을 사용한 것이 아니라, 내용 면에서도 굉장히 뛰어났다.
‘어떻게 하는 거야……?’
정말 교향곡을 듣는 것 같은 기분에 휩싸이며 세연은 소름이 돋는 걸 느꼈다.
저건 반칙이지 않아? 난 소나타를 연주했는데 심포니를 연주하면 어떡해? 물론 심포니도 소나타 형식이고…… 연주하는 건 피아노 한 대로 같지만……. 그래도 알캉은 너무하잖아?
그리고 건반을 가볍게 누르는 것 같은데도 벽을 뚫고 대기실까지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음량이 정말 말도 안 되게 느껴졌다. 저 속도로 옥타브를 치면서 어떻게 이 정도 힘을 싣는지 이해가 안 간다. 테크닉적으로 보면 성인 피아니스트들도 저만큼 연주하기 어려울 것 같았다.
그러나 아나스타샤는 폭발적으로 건반을 두들기며 연주를 해 나갔다. 아무리 어려운 부분이라도 전혀 템포에 문제가 없다. 거의 신기에 가까운 실력이다.
세연은 아나스타샤를 피아노의 신이라 불러도 되는지 고민했다. 하지만 아나스타샤는 타티아나가 자신보다 낫다고 분명하게 말했다.
다시 한 번 타티아나의 피아노가 듣고 싶기도 했다. 지금은 아나스타샤에게 모든 신경을 쏟아야 할 때이지만.
“…….”
심포니 1악장이 끝나고, 2악장은 이전보단 조금 느긋한 템포로 진행되었다. 하지만 템포가 조금 느려졌을 뿐이지 곡 자체는 여전히 까다로웠다.
3성부로 진행되는 주제는 무거우면서도 은밀해야 한다. 이 모순적인 음악을 아나스타샤는 기이하리만치 뛰어난 표현력으로 그려 냈다. 그리고 갑작스레 터져 나오는 다성화음의 합창. 세연은 숨도 똑바로 못 쉬고 2악장의 신비로움에 빠져들었다.
3악장은 미뉴에트. 하지만 심포니의 미뉴에트는 궁정 무용이 아닌 그야말로 기악 협주곡으로 변화해 있었다. 그리고 알캉은 그것을 다시 한 번 피아노 독주곡으로 압축시켰고, 아나스타샤는 그걸 완벽하게 재현해 냈다.
언뜻 들으면 쉽다. 그렇게 빠른 것 같지도 않고 음향이 복잡하지도 않다.
그러나 연주자의 피로도는 아예 고려하지 않는 어마어마한 옥타브의 향연, 그리고 옥타브가 이어지면서 필연적으로 페달링으로 조절해야 하는 프레이징. 세연은 저 곡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감도 잘 안 올 정도였다.
아나스타샤는 음을 최대한 깊게 찔러 넣고 도약 시간을 최소화시키며 선율을 완벽하게 살려 냈다.
대체 어떻게 하는 건지 한참을 지켜보던 세연은 자신도 모르게 테이블 위로 손을 펼치고 따라서 화음을 짚어 나가고 있었다. 저 속도와 정확함, 지금이라도 할 수 있다면 연습하고 싶다.
사방을 튀어 다니는 것 같은 음향과 아름답게 사그라드는 끝을 마지막으로 3악장이 끝나고, 곧바로 4악장이 시작된다.
‘얼마나 연습해야 하는 걸까.’
왼손 옥타브가 프레스토의 속도로 도약하는 것이 모니터로 보였다. 굉장한 테크닉이다. 그런데도 아나스타샤는 필요 이상으로 크게 소리를 펼쳐 보이며 과시하지 않고, 오로지 음악에 필요한 만큼만 보이고 있었다.
정확하고 간결하게 모든 음을 짚어 나간다. 말로는 쉽지만 인간의 한계에 가까운 일이다.
그 뒤로도 피아니스트로서 탐낼 만한 수많은 기교들이 쏟아졌다. 세연은 거의 넋이 나가 아나스타샤의 연주를 지켜보았다.
심포니라는 이름에 걸맞게 엄청난 규모로 음악이 커지기도 하고, 또 잠시 사그라들며 피아노만의 기교를 선보이기도 하면서 음악은 점점 앞으로 향해 나갔다. 그리고 피날레는 4성부의 합주로 착각될 정도로 정교하게 표현되고 화려한 옥타브의 상승, 그리고 쿨한 마침표로 깔끔하게 마무리되었다.
지금까지 저 정도 기교를 보였다면 조금은 더 여운을 주는 것처럼 크고 과시적으로 해도 좋을 텐데. 아나스타샤는 그럴 일도 아니라는 것처럼 곡의 완성도에만 힘을 실었다.
청중들도 직접 듣고도 이 믿을 수 없는 연주에 잠시 정신이 나간 듯 침묵을 지켰다. 그 침묵은 아나스타샤가 일어나고 나서야 홀이 터져 나갈 것 같은 박수 소리와 함께 깨어졌다.
청중 전부가 아나스타샤에게 기립박수를 보냈다.
「대단해…….」
대단하단 말밖에 안 나왔다. 마지막에 그건 도대체 뭐였지? 어떻게 그렇게 깔끔하게 끝낼 수 있는 거야? 세연은 자신이 알캉을 저 정도로 연주할 수 있다면 절대 쿨하게 못 할 것 같았다.
대기실로 돌아온 아나스타샤의 이마엔 땀이 맺혀 있었다. 지금까지 몇 곡이나 연주하면서도 힘든 기색을 보이지 않았는데, 이 알캉의 심포니는 그녀로서도 힘든 것 같았다.
세연은 아나스타샤를 보고 뭐라 해야 할지 바로 떠올리지 못했다. 결국 입 밖으로 나온 건 약간 푸념 같은 말이었다.
{난 소나타였는데, 심포니는 반칙 아니야?}
{그러니?}
아나스타샤는 대수롭지 않게 반응했다. 피식 웃는 걸 보니 생각해 보면 이름만 심포니이긴 해도 규격 자체가 다른 건 약간 반칙 같기도 하다고 느끼는 것 같다.
세연은 이 엄청난 실력을 지닌 피아니스트가 자신과 동갑이라는 데에, 그리고 이보다 더 뛰어난 아이가 저 멀리 모스크바에 있을 수도 있다는 데에 약간 무서움마저 느꼈지만, 그래도 한편으로는 이 아이들과 같은 시대에 있단 것을 기쁘게 생각하기도 했다.
***
연주를 마친 아나스타샤는 갑자기 몰려드는 피로감을 느꼈다. 이 정도로 격렬한 연주를 마치고 집중력이 풀어지고 나면 정말 아무것도 하기 싫어진다.
하지만 미처 앉아서 물을 한 잔 마시기도 전에 결과를 발표하겠다는 안내가 흘러나왔다.
일반적인 콩쿠르 같은 경우엔 경합자가 몇 명이나 되니 심사위원들끼리 점수를 종합해서 마지막 승자를 정하는 과정이 필요하지만, 이 콩쿠르는 토너먼트 형식이기에 아나스타샤와 세연 둘 중 한 명만이 승자가 된다. 때문에 결정이 매우 빠른 듯했다.
직원이 아나스타샤와 세연을 불렀다. 아나스타샤는 막 앉자마자 다시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직원의 안내에 따라 밖으로 나가니 이미 무대 위엔 심사위원들이 모두 올라와 있었다.
백발이 성성한 한 심사위원이 마이크를 쥐었다.
{이틀간의 여정에 함께해 주신 여러분 감사합니다. 이제 포트워스 국제 청소년 피아노 콩쿠르의 승자를 발표하려 합니다.}
심사위원은 나란히 서 있는 아나스타샤와 세연 쪽으로 팔을 펼치며 말을 이었다.
{마지막까지 남은 두 후보자 모두 너무나 뛰어난 실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심사위원 만장일치로, 대상은 러시아의 아나스타샤 세르게예브나 이즈마일로바. 축하합니다.}
그 이름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다시 박수 소리가 쏟아졌다.
아나스타샤는 그 박수에 이끌리듯 옆으로 향했다. 백발의 심사위원이 그야말로 감동한 눈빛으로 아나스타샤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아나스타샤에게 악수를 청했다. 아나스타샤가 말했다.
{감사합니다.}
{정말 기적과도 같은 실력이었습니다. 왜 지금까지 아나스타샤라는 이름을 모르고 있었는지 모르겠군요.}
이번엔 놀았다고 답할 수 없어서 아나스타샤는 그저 웃기만 했다.
심사위원은 다시 한 번 강하게 손을 쥐며 말했다.
{앞으로도 훌륭한 피아니스트가 되길 기원합니다. 아나스타샤.}
아나스타샤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지금까지 멈추어 서 있었다. 지난 4년간 타티아나가 주도한 자선 연주회에서 찬조 연주자로 무대에 선 것 외엔 이렇다 할 활동 없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 비로소 한 발 앞으로 내디딘 것 같단 기분이 들었다.
이제 그 애들과 조금이라도 더 가까워진 걸까.
앞으로 훌륭한 피아니스트가 될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 적어도 이렇게 한 걸음씩 다가갈 수 있다면 좋겠다. 아나스타샤는 그렇게 생각하며 막 안겨지는 상패를 받아 들었다.
다시 청중들에게 인사하고 뒤로 물러서자, 그다음 2등을 차지한 세연에게도 상패와 상금이 주어졌다. 그리고 다음 3, 4위에게도 순서가 돌아갔다.
아나스타샤는 상패를 받아 온 바딤과 눈을 마주했다. 그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결국 웃으며 이야기했다.
“앞으론 자주 볼 수 있을 것 같네. 다음에 또 보자, 아나스타샤.”
아나스타샤는 홍콩에서 왔다는 앤디를 보며 했었던 생각을 이번엔 바딤이 거꾸로 하고 있음에 약간 웃었다.
우린 결국 서로 음악이 있는 곳에서 자주 보게 되길 바라는 사람들이구나.
아나스타샤도 음악으로 얽힌 세계에 속한 사람이었다.
그녀는 옆에 있는 세연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처음부터 굉장히 적극적으로 아나스타샤와 연락을 하길 바랐다. 다시 생각해 보니 그건 그냥 붙임성이 좋은 정도가 아니라, 정말 대단한 일이었다.
{끝났군.}
그 뒤로 몇 개의 특별상도 주어졌다. 이 콩쿠르는 입상자에게 특별상이 중복 수여되지 않는 규칙이 있어서 아나스타샤에게 돌아가진 않고 골고루 돌아갔다. 아나스타샤는 그것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시상식이 마무리되고, 콩쿠르가 슬슬 끝날 때였다. 아나스타샤는 그 후로도 몇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말을 걸어와서 대답해 주어야 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영어 할 줄 모른다고 할 걸 그랬다는 생각이 살짝 스쳤지만, 아나스타샤는 그 생각을 곧바로 지워 버리고 성실하게 사람들을 대했다. 무대에 서 있을 땐 바랐던 성원을 이제 와서 저버리는 건 연주자로서 안 될 일이었다.
청중들에게 할 인사도 끝난 뒤, 비로소 아나스타샤는 약간 여유를 가지고 연주자 대기실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런데 그렇게 시간이 나기가 무섭게 달려드는 아이가 있었다.
{아나스타샤. 자. 찍어 줘.}
아나스타샤는 10초만 있다가 이야기하면 안 되겠냔 눈빛으로 내려다보았지만 세연은 지금이 아니면 안 되는 것 같았다. 결국 아나스타샤는 그녀로부터 스마트폰을 받아 자신의 전화번호를 입력했다.
해외에 아는 사람이 없는 건 아니지만…… 이렇게 같은 피아노 연주자인 또래와 연락을 하게 된 건 처음이기도 했다. 약간 감회가 새롭기도 하고, 예전 같았으면 귀찮다고 피했을 일을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이게 된 자신이 조금 이상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럼 연락할…… 아, 아니지. 오늘 저녁 같이 먹지 않을래? 응? 우리 이제 콩쿠르도 끝났잖아?}
아나스타샤는 잠시 고민했지만, 결국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