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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의 여명-485화 (485/1,277)

##  485화

세연은 곧장 아나스타샤와 함께 텍사스 구경을 떠나고 싶은 모양이었으나 콩쿠르의 우승자와 준우승자에겐 주어진 의무들이 산더미처럼 많이 있었다.

{우승자 이즈마일로바 양. 이쪽으로 잠시 나와 주시죠. 보호자분은 어디 계시죠?}

막 대기실로 들어온 직원이 아나스타샤와 세연을 데리고 나가며 물었다. 아나스타샤는 심드렁하게 답했다.

{혼자 왔어요.}

{어…… 그러신가요. 준우승자 임세연 양은?}

{저도 혼자예요.}

직원은 약간 당황한 듯 보였지만 그래도 자신의 할 일을 잊지 않고 이어 말했다.

{포토존에선 눈 깜빡이지 마시고, 웃어 주세요. 내일 신문에 대문짝만 하게 나갈 사진이니까 못나게 찍히면 안 되겠죠?}

열 명도 넘는 기자들과 사람들 앞에서 콩쿠르 수상자들이 긴장하거나 실수를 하는 건 직원으로서도 불명예인 일이다.

아나스타샤는 걱정 말라는 뜻으로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직원도 마주 웃었다.

{기자들의 질문은 어렵지 않을 거예요. 평소 생각하고 있으셨던 연주자로서의 생각이나 야망, 그런 것들을 편하게 말씀해 주세요. 아, 혹시 필요하시다면 러시아어나 한국어가 되는 기자를 인터뷰어로 준비해 드릴 수도 있어요.}

{괜찮아요. 그냥 영어로 하죠.}

{영어가 유창하셔서 다행이네요. 가끔은 언어에서 문제가 생기는 경우가 있어서.}

그렇게 이런저런 주의사항 등을 듣는 사이에 두 사람은 포토존에 다다를 수 있었다.

직원이 옆에 준비되어 있던 꽃다발을 건네주었다.

{아, 그리고 여기 꽃다발. 들고 계시면 됩니다.}

{고마워요.}

아나스타샤는 별생각 없이 그 꽃다발을 받았는데, 직원이 갑자기 지금까지 아이들 대하듯 하던 모습을 조금 달리하며 말했다.

{이건 그냥 사진을 찍힐 때 손을 어찌해야 할지 모르는 분들을 위한 소품이기도 하지만, 아까 연주에 대한 경애의 표시이기도 해요.}

{……그래요?}

{두 분에게 잘 어울릴 것 같은 꽃으로 제가 특별히 주문했답니다.}

아나스타샤는 꽃에 대해 그렇게까지 잘 알진 못하지만, 그 말을 듣고 다시 내려다보니 하얗고 빨간 꽃들로 장식된 꽃다발이 조금 특별해 보였다. 세연도 깜짝 놀란 눈으로 꽃과 직원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직원은 밝게 웃으며 말을 맺었다.

{연주가 그랬듯, 마무리까지 잘 하실 것 같네요.}

몇 분 사이에 척척 준비시키고 마지막까지 긴장하지 않게 도와주는 건 일종의 노련함이겠지. 그래도 아나스타샤는 이 직원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음을 부정할 수 없었다.

세연은 고개를 숙여 가며 몇 번이나 감사하다고 말했고, 직원은 슬슬 시간이라며 저편으로 손짓했다.

두 사람은 준비된 포토존으로 나갔다.

{나왔다!}

{이쪽 좀 봐 주시죠!}

순식간에 사방이 소란스러워졌다. 러시아와는 또 다른 열기가 느껴졌다. 아나스타샤는 정열적으로 카메라를 들이대는 사람들을 보며 시킨 대로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이렇게 카메라 앞에서 태연하게 서는 데에 능숙한 편이었다.

그런데 옆에 있는 세연은 그렇지 않았다. 그래도 꽃다발을 들고 있어서 양손을 어찌할 줄 모르고 허둥거리거나 말도 안 되는 포즈를 취하는 일은 없어 다행이었지만, 굉장히 어색해하는 것이 옆에서도 느껴질 정도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세연은 옆에 있는 아나스타샤가 아무렇지도 않게 있는 것을 보고는 금방 안정을 되찾았다. 금방금방 따라 하는 게 눈치도 빠르고 적응도 빨랐다.

두 사람은 그렇게 사진을 같이 찍기도 하고, 따로 찍기도 하면서 몇 분간 포토존에 머물다가 그다음 준비된 인터뷰용 단상으로 향했다.

아나스타샤는 이렇게 공개된 공간에서 인터뷰를 하는 건 또 처음 보는지라 살짝 놀랐다. 여러모로 특이한 콩쿠르였다.

안내에 따라 아나스타샤부터 앞으로 나섰다. 기다리고 있던 한 남자가 벌떡 일어서더니 악수를 청해 왔다.

{어서 오시죠! 우승자 이즈마일로바 양! 인터뷰를 맡게 된 댈러스 뮤직 저널의 마틴입니다. 영광입니다.}

마틴이라 칭한 남자의 악수를 받으며 아나스타샤가 인사했다.

{반갑습니다.}

{영어로 이렇게 대화를 나눌 수 있어서 다행입니다. 오늘 이즈마일로바 양의 첫 연주를 듣자마자 사랑에 빠지게 되었거든요. 어떻게든 인터뷰를 하고 싶었는데 전 러시아어를 할 줄 몰라서 4시간 사이 러시아어를 배울 방법을 찾아다녔지 뭡니까?}

마틴은 자연스레 옆에 놓인 의자로 아나스타샤를 인도하고는 익살스러운 농담을 건넸다.

아나스타샤는 싱긋 웃으며 러시아어로 대답했다.

“고맙습니다.”

{오, 감사하단 말씀이시죠?}

{맞아요.}

{지난 4시간이 헛된 것 같지 않네요. 하하하.}

진짜 러시아어를 공부해서 알아들었는지 아니면 감각으로 맞춘 것인지 그런 건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마틴과 아나스타샤의 인터뷰는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출발할 수 있었다.

콩쿠르 참가를 위해 멀리 러시아에서 온 것에 대한 이야기, 어느 학교에서 공부하고 있는지 등등 사사로운 이야기들이 오갔다.

그리고 이후 본격적으로 콩쿠르 내용에 대한 이야기도 있었다. 아나스타샤가 8강에서 연주했던 쇼팽의 화려한 변주곡, 그리고 4강에서 연주했던 브람스의 피아노 소나타 3번에 대해 마틴이 격정적인 찬사를 보냈다.

{제가 음악 전문 기자로 10년 넘게 있었지만, 그렇게 멋진 브람스의 연주는 정말 오랜만에 듣는 것 같았습니다. 예리하게 다듬어진 연구가 돋보이더군요. 정말 훌륭했습니다. 이즈마일로바 양.}

{감사합니다. 마틴.}

{그리고…… 결승전의 그 곡.}

어쩐지 말을 안 하나 싶었는데, 아껴 두고 있는 것이었다.

마틴은 흥분을 참을 수 없다는 듯 어깨를 들썩거리며 열변을 토했다.

{맙소사, 알캉이라니. 알캉이라니! 아마 여기엔 샤를 발랑탱 알캉에 대해 잘 모르시는 분들도 많을 겁니다. 지금 열심히 검색해서 찾아보고 있겠죠.}

좌중을 돌아보며 그렇게 말한 마틴은 다시 아나스타샤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하지만 전 압니다. 그리고 그걸 연주한다는 게 얼마나 기적 같은 일인지도요!}

하지만 아나스타샤는 그 극찬에 짧게 답했다.

{기적은 아니에요.}

순간적으로 마틴이 약간 당황한 것처럼 보였다. 아나스타샤는 그를 곤혹스럽게 만들 생각은 없었기 때문에 차분하게 그 이유를 덧붙였다.

{제가 피아노 앞에서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는데 건반이 저절로 움직이며 연주한다면 그건 기적이겠죠. 혹은 알캉의 환영이 나타나 갑자기 곡을 연주한다면, 그것도 기적일 테고요.}

농담처럼 듣고 웃을 수도 있는 말이었는데도, 주위는 조용했다. 모두가 아나스타샤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녀의 말에 단순하지만 강한 메시지가 담겨 있음을 느낀 것이다.

아나스타샤는 간결하게 말을 마쳤다.

{하지만 오늘 있었던 일은 그 무엇도 기적이 아니었어요.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죠.}

{오우…….}

마틴이 멍하니 감탄사를 중얼거렸다.

{멋지군요, 이즈마일로바 양. 감명 깊었습니다.}

그는 짧게 박수를 두어 번 치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나스타샤가 말한 이야기에 진심으로 공감하는 것으로 보였다.

그녀는 아직 어리지만 그런 건 아무 문제도 되지 않았다. 그녀의 한마디엔 어떠한 과신과 맹신 없는 통찰이 담겨 있었다.

하지만 아나스타샤는 그것도 너무 잘난 척하는 것처럼 비춰질까 싶어 싫었다. 그녀는 이쯤에서 분위기를 살짝 바꾸어야겠단 생각을 하며 미소를 지었다.

{편집되는 것 아닌가요?}

마틴은 이 이야기를 길게 할 생각이 없는 아나스타샤의 농담임을 재빠르게 알아듣고는 유쾌하게 받아쳤다.

{편집이요? 하하하, 이렇게나 훌륭한 말씀을 해 주셨는데 왜 편집을 해야 합니까? 거침없으신 줄 알았는데 속으론 걱정을 꽤 하시는 타입인 것 같군요?}

{적당히 잘 고쳐 써 주세요. 제가 영어가 서툴러서.}

{아하하하, 알겠습니다. 알겠습니다.}

둘러싼 사람들 사이에서도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 후로도 아나스타샤의 평소 취미와 이후 활동 등에 대한 이야기들이 오갔고, 10분가량의 짧은 인터뷰는 금방 끝을 보였다.

마틴은 인터뷰어라서가 아니라 아나스타샤와 이야기 하는 것 자체가 즐거웠는지 약간 아쉽다는 투로 물었다.

{자…… 그러면 슬슬, 이즈마일로바 양. 마지막으로 하시고 싶은 말씀이라도?}

아나스타샤는 잠시 고민했다. 사실 이 멀리 미국의 콩쿠르에서 우승했다 해서 특별히 할 말이 있거나 하진 않다. 그녀는 평소에도 가까이 있는 사람들 외엔 별로 관심이 없었으니까.

하지만 이번엔 약간 생각이 바뀌었다. 이 또한 평소 음악을 사랑하고, 또 음악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사랑하는 친구에게서 영향을 받은 것일지도 모른다.

아나스타샤는 자신의 바뀐 생각을 천천히 전했다.

{멋진 콩쿠르와 멋진 연주자들이었어요. 이 시대에 살고 있다는 것이 기쁘고…… 비로소 연주자로 돌아올 수 있게 된 것 같아 행복하네요.}

마틴은 그녀의 말에 감동한 듯 곧장 일어나 재차 악수를 청했다. 아나스타샤도 멋쩍게 웃으며 일어났다.

마틴이 강하게 손을 흔들었다.

{전 예술가는 아니지만, 그래도 저 역시 이즈마일로바 양 같은 분들과 같은 시대에 살고 있다는 것을 정말 기쁘게 생각합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저야말로요, 마틴.}

마지막으로 악수를 마치고 나자 마틴이 다시 둘러싼 사람들을 향해 팔을 펼쳐 보이며 말했다.

{지금까지, 포트워스 국제 청소년 피아노 콩쿠르의 우승자. 아나스타샤 세르게예브나 이즈마일로바 양이었습니다. 여러분! 큰 박수 부탁드립니다.}

쏟아지는 거대한 함성과 박수 소리. 아나스타샤는 미소와 함께 몇 번이나 묵례하며 감사를 표하고 인터뷰장 뒤편으로 빠져나왔다.

그 뒤엔 세연이 바짝 얼어붙어 있었다. 아나스타샤는 키득 웃으며 물었다.

{괜찮겠니?}

{으……응.}

세연은 생각보다 인터뷰가 본격적이라는 것에 긴장했는지 더듬거리며 말하다가, 고개를 잘래잘래 저었다.

{아니, 긴장돼서 죽을 거 같애. 사실 난 너만큼 영어를 잘하는 것도 아니라서…….}

그래도 그 정도면 상당히 잘하는 편인데.

아나스타샤가 걱정 말라고 다시 위로해 주려는 찰나, 세연은 고개를 바짝 들었다.

아나스타샤는 세연의 이런 모습을 몇 번이고 봤다. 늘 긴장하고 무서워하면서도 자신이 원하는 세상에 두 발을 딛고 서 있는 모습. 세연은 혼자서도 잘 해 나갈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녀는 잠시 무언가 생각하는 것 같더니 배시시 웃으며 아나스타샤를 돌아보았다.

{있잖아, 아나스타샤.}

{응.}

{그래도 네가 마지막에 했던 말 말이야. 이 시대에 살고 있어 기쁘다는 말.}

세연이 해맑게 웃었다.

{나도 기뻐해도 될지 모르겠는데…… 정말 좋았어.}

{……그러니.}

아나스타샤는 타티아나에게서 배워 온 그 말이 음악인들에게 어떻게 들리는지 새삼 느끼면서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세연은 자신감을 찾은 모습으로 인터뷰장 쪽으로 씩씩하게 발을 내디뎠다.

{드디어 나오셨군요! 임세연 양! 댈러스 뮤직 저널의 마틴입니다. 오늘 임세연 양의 쇼팽 소나타 3번을 듣고 사랑에 빠지고 말았는데, 그 곡에 대해 조금 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까요?}

또다시 사랑에 빠지고 말아 버린 마틴의 목소리를 들으며 아나스타샤는 실소를 흘렸다. 재미있는 사람이야 정말. 그런데 레퍼토리는 조금 다양하게 해 주었으면 좋겠는데.

“……후.”

인터뷰장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그리고 간간이 섞이는 웃음소리. 그런 것들을 들으면서도 아나스타샤는 지금 고요함을 느꼈다.

정말 다 마무리되어 간다.

결과는 최고였고,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상당히 만족할 수 있는 연주를 충분히 선보였다.

이제 돌아가면, 친구들에게 툭 터놓고 이야기해 줄 수 있겠지.

“…….”

아나스타샤는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많이 달라졌음을 느꼈다. 이전 같았으면 콩쿠르 같은 건 온전히 개인의 일이니 결과든 친구들의 반응이든 그리 개의치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결과를 받아 들고 모스크바로 돌아갈 생각을 하니 바로 생각나는 것이 친구들의 얼굴이었다.

에르네스트나 리처드는 잘 했다고 무심하게 툭 말할 거고, 발렌티나는 맛있는 거 사 달라고 조르겠지. 타티아나는 직접 듣고 싶다며 연주해 달라고 할지도 몰라.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미소를 머금으면서, 아나스타샤는 조용히 세연의 인터뷰도 끝나길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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