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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의 여명-486화 (486/1,277)

##  486화

모든 게 끝나고, 상패를 들고 평범한 차림으로 콘서트홀을 나왔을 땐 이미 어둑어둑한 저녁이었다.

아나스타샤는 피로감을 느끼면서도 세연과의 약속을 어기지 않았다.

{어디에서 먹으면 좋을까? 아나스타샤.}

세연은 피곤하지도 않은지 활기차게 앞장서며 말했다. 아나스타샤는 픽 웃으며 말했다.

{글쎄. 평소 먹고 싶었던 거라도 있니?}

{어…… 친구들이 텍사스엔 선인장 구이가 있다고 했었는데. 뭐라더라, 알로에 같은 맛에다가 피부에도 좋다고 했었던가.}

말도 안 되는 고정관념과 억지로 이루어진 농담임이 분명했는데 세연은 별 의심 않고 정말 선인장을 먹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 것 같았다. 아나스타샤는 그 믿음에 전갈도 얹어 줄까 생각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그런 건 안 팔지 않겠니.}

{어? 왜?}

{텍사스 특산품은 석유로 바뀐 지 오래일 테니까.}

석유 전의 특산품이 뭐였는지 아나스타샤는 잘 모르지만, 그냥 생각나는 대로 그리 말했다. 그랬더니 세연이 고개를 갸우뚱하며 답했다.

{그렇다고 석유를 마실 순 없잖아? 우리가 자동차도 아니고.}

웃어야 할지 어이없어해야 할지 모르겠는 묘한 감정에 아나스타샤는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스마트폰을 들었다. 모르는 지역에서 괜찮은 곳을 찾는 방법으로는 이것만 한 방법이 없었다. 세연도 아나스타샤를 도와 나름대로 검색을 시작했다.

그렇게 인터넷에서 추천하는 레스토랑 중 괜찮아 보이는 곳으로 두 사람은 들어갔다. 고급스러운 파인 다이닝은 아니었지만 부담 없이 저녁식사를 하기엔 적당한 곳이었다.

안내를 따라 테이블에 앉아 잠시 기다리자 웨이터가 주문을 받으러 왔다. 메뉴를 뒤적이던 세연은 닭 날개 요리가 맛있어 보인다며 그것을 주문했다.

{뭐 주문할 거야? 아나스타샤.}

{난 이렇게 하려고.}

아나스타샤는 멕시코식 샐러드와 볶음 요리들을 집었다. 세연이 의문을 표했다.

{여긴 미국인데?}

{뭐 어떠니, 난 러시아에서도 프랑스 요리나 중국 요리 자주 먹곤 했어.}

가끔은 본고장이 아닌 다른 지역에 맞게 로컬라이징된 음식이 더 맛있는 경우도 종종 있곤 하지. 아나스타샤는 때문에 굳이 어떤 나라에 간다고 해서 그 나라의 음식만을 먹어 봐야 한다는 고정관념은 별로 없었다.

물끄러미 바라보던 세연이 물었다.

{한국 요리도 먹어 본 적 있어?}

그런 게 궁금할 만도 한가?

아나스타샤는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있어.}

{와, 언제?}

{작년에. 우리 학교에 한국인 유학생이 있어서. 그 애랑 같이.}

작년에 한승우의 소개로 갔었던 한식 레스토랑은 아직도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었다.

아나스타샤가 유학생 이야기를 해서 그런지 세연이 관심을 표했다.

{여자애야?}

{아니, 남자애.}

{그 애랑도 친하니?}

{응.}

{얼마나?}

친하냔 말에 대수롭지 않게 그렇다고 답했더니 세연이 더더욱 흥미진진한 얼굴을 했다. 남녀관계로서 어떻냐고 묻는 게 아니라, 순수하게 유학생과 얼마나 친하게 지내고 있는지 궁금해하는 모습이었다.

아나스타샤는 그냥 가끔 같이 공부도 한다고 말하려다가 고쳐 말했다.

{조만간 대결하자고 할 거야.}

{어……?}

세연이 당혹스러움에 찬 중얼거림을 내뱉었다.

아나스타샤의 말은 진심이었다. 그녀는 이미 리처드를 피아노로 이긴 적이 있다. 그때 리처드는 스스로를 시금석이라 말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아나스타샤는 이것저것 시험해 보고 싶은 게 많았으니까. 그리고 꼭 그다음 순서가 정해져 있는 건 아니었지만, 사실 한승우를 노리고 있긴 하다.

물론 쉬운 상대는 아니다. 처음엔 귀만 좀 좋을 뿐이지 말도 잘 못하고 성적은 평범했지만, 9학년이 되면서 실력이 그야말로 일취월장했고, 특히 최근 타티아나를 잔뜩 뒤흔들었던 그 소나타를 생각하면, 한승우가 얼마나 강한 연주자인지 솔직히 잘 가늠조차 안 될 정도였다.

그리고 그가 그렇게 강하다는 점은 아나스타샤를 하여금 더더욱 대결에 몰두하게 만들었다.

지금은 타이밍이 그리 좋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언젠가는. 분명히 한 번쯤 매듭을 지어야 할 때가 올 것이다.

이렇게 친구에게 향하는 경쟁심에 대해 세연은 조금 놀란 듯하다. 아나스타샤는 싱겁게 웃으며 그녀에게 말했다.

{너희들은 그런 거 잘 안 하니? 우리는 툭하면 피아노로 승부하곤 하는데.}

{어, 아니. 우리도 자주 해. 교실 뒤쪽에 피아노가 있어서 쉬는 시간마다 하는 것 같아.}

쉬는 시간마다 피아노에 앉아서 자신 있는 녀석들끼리 이것저것 하는 모양인데, 그런 것도 나쁘지 않게 느껴진다. 아나스타샤는 잘 모르는 교실의 풍경을 떠올리며 피식 웃었다.

세연은 아나스타샤가 한 말이 그렇게 특이한 말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는지 조금 편안하게, 하지만 조심스레 물었다.

{그런데 갑자기 그렇게 말할 줄은 몰라서. 그건 그 애와 친하니까 가능한 거야?}

아나스타샤는 가볍게 답했다.

{아마도? 그 애는 날 얼마나 친하다고 생각할지 잘 모르겠지만.}

세연은 그 말을 듣고 곰곰이 무언가 생각하더니, 테이블 위로 스르르 가라앉듯 양팔을 내리면서 말했다.

{조금 부럽다.}

그녀가 부럽다고 하는 부분은 유학 생활에 대한 막연한 동경이 아니었다.

같이 어울리며 식사도 하는 친한 친구이면서도 동시에 경쟁심을 누그러뜨리지 않고 조만간 대결을 하겠다고 하는 그 관계 자체에 대한 부러움이다.

콩쿠르에서 세연을 보면서 느낀 바로는, 그녀는 친구들을 경쟁 상대로 여기는 것에 능숙하지 않다. 상황에 처한다면 물러서지 않고 최선을 다하지만, 그래도 그런 상황을 구태여 만드는 스타일은 아님이 분명했다.

아나스타샤는 그런 성격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세상에 경쟁할 상대는 많고, 그게 굳이 자기 주변의 사람일 이유는 없겠지.

하지만 아나스타샤의 환경은 약간 다르기도 하다. 그녀의 옆에 있는 친구들은 세계 전체를 통틀어도 상당한 수준에 있는 연주자들이었으니까. 사실 굳이 멀리 볼 필요도 없었다.

세연은 그런 부분도 부러워하는 듯했다. 그러나 다시 유학 이야기 등을 꺼내진 않았다. 대신 세연은 희미하게 웃으며 말했다.

{나 진짜 러시아어 공부 열심히 할게. 독일어 공부도 해야겠어.}

세계 어디에 있든, 연주자로 살아간다면 만날 수 있을 해외의 연주자들과 친하게 지내고 싶다는 마음이 느껴진다. 아나스타샤는 세연이 해낼 수 있을 거라 믿었다. 바로 지금 아나스타샤가 그녀와 함께 저녁 식사를 하고 있는 것처럼.

그러다 약간 장난을 치고 싶어져서 웃음을 담아 말했다.

{글쎄, 안 그래도 될 것 같은데?}

{하, 하지 마? 왜?}

곧이곧대로 듣는 성격답게, 세연은 울상이 되었다. 굳이 공부 같은 거 하지 말란 말은 그녀에게 있어 벽을 치는 것처럼 들렸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나스타샤가 하고 싶은 말은 그런 게 아니었다.

{네가 유학을 올 생각이라면 모르겠지만…… 지금도 음악의 언어를 다루는 실력을 보니까, 굳이 다른 언어를 배울 필요는 없을 것 같아서 그래.}

이미 세연은 연주자로서 상당한 수준에 이르러 있다. 저 정도 실력과 성격이라면 세상 어디에 가서든 음악가들에게 사랑받을 터. 더 노력을 한다는 건 좋지만, 시간이 있다면 음악에 더 쏟는 쪽이 좋을지도 모른다. 아나스타샤는 세연을 그렇게 평가했다.

세연은 아나스타샤가 농담을 하는 게 아니라는 걸 느꼈는지 손가락으로 테이블 위에 피아노 치는 시늉을 하며 물었다.

{이걸로도 대화가 가능한 걸까?}

{난 그렇게 배웠고, 그렇다고 생각해.}

선생님들에게 귀가 아프게 들었어도 이해하지 못했던 걸 타티아나가 이해시켜 주었고, 이젠 의심하지 않는다. 아나스타샤는 음악가들이 무엇을 나눌 수 있는지 이젠 잘 안다.

세연은 아나스타샤의 말이 마음에 드는지 테이블 앞으로 몸을 기울이며 물었다.

{그럼 오늘 우린 영어로 말고도 많은 이야기를 한 거네? 그렇지?}

{난 네가 재미있는 애라고 봐.}

{나 그런 말 자주 들어.}

대뜸 대답하는 세연의 말에 아나스타샤는 웃고 말았다.

곧 주문한 요리가 테이블 위에 차려졌다.

두 사람은 각자 요리를 먹으며 대화를 나누었다. 세연은 닭 날개 요리가 한국의 닭 요리와 비슷하다며 신기해했고, 아나스타샤는 멕시코 요리를 먹으며 다음에 시간이 있다면 멕시코도 한 번쯤 놀러 가 볼만 하겠다 말했다.

그리고 그간 여행 다녔던 나라들에 대한 이야기를 했는데, 세연은 아나스타샤가 그렇게 많은 나라들을 여행했다는 것에 대해 놀라워했다.

{오늘은 사실 호텔에서 룸서비스나 시켜 먹을 생각이었는데, 이렇게 나와서 먹지 않았으면 후회할 뻔했어.}

{나도 그래. 아나스타샤.}

식사를 마치고 디저트로 나온 비스킷을 먹으며 세연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녀도 아나스타샤가 아니었으면 혼자서 식사를 할 수밖에 없던 모양이다. 그게 큰 문제는 아니겠지만, 세연은 혼자서는 식사하는 것도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아나스타샤는 조금 의아하기도 했다. 저렇게 혼자 있는 걸 좋아하지 않는 애가 어떻게 보호자도 없이 혼자 미국에까지 올 생각을 한 걸까. 연주자로서 자기 일에 최선을 다하는 건 외로움을 잘 타는 것과는 별개인 건가?

갑자기 세연이 했었던 인터뷰가 생각났다. 이 콩쿠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는 질문에 세연은 교수님이 기뻐하길 바란다고 답했었다. 세연에게 있어 교수는 굉장히 큰 동기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아나스타샤는 그 부분에 대해서 깊게 묻지 않고 그냥 다른 이야기들에 초점을 맞췄다.

한참이나 그렇게 이야기하다 보니 비스킷도 바닥났다. 두 사람은 마지막 커피를 마시고는 레스토랑 밖으로 나왔다.

“…….”

아나스타샤는 약간 쌀쌀해진 바람을 마주하며 거리를 돌아보았다. 아직 거리엔 불빛이 반짝반짝하지만, 이젠 밖에서 놀기보다 들어가 쉴 시간이었다. 두 사람은 현지인이 아니라 외국인이기도 했고.

세연도 더 놀자고 하기엔 너무 늦었다는 걸 느꼈는지 아나스타샤에게 물었다.

{비행기는 언제쯤이니?}

{내일 오전이야.}

{아…… 그렇구나. 난 오후라서.}

시간이 비슷하면 공항에도 같이 가자고 할 참이었던 건가?

너무 아쉬워하는 세연을 보며 아나스타샤는 매정하게 대하지 못했다. 그렇다고 해서 붕 뜬 소리를 하긴 싫었다. 아나스타샤는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이야기를 했다.

{다음에도 혹 가능하다면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네.}

{그럴까?}

{전화번호도 교환했잖니?}

콩쿠르 참가자와 연락처를 주고받다니, 처음엔 전혀 그럴 생각이 없었지만…… 이제 와서 생각해 보니 그리 나쁘지 않은 일인 것 같았다.

아나스타샤는 오른손 새끼손가락을 펴 입가에 가져다대며 말했다.

{혹시 러시아에 올 일 있으면 연락해.}

{농담하는 거 아니지? 진짜 간다?}

{그러렴.}

아나스타샤가 그렇게 말해 주는 것만으로도 기쁜지 세연은 환하게 웃었다.

마지막으로 세연의 미소를 확인하고, 아나스타샤는 손을 흔들었다.

{그럼 안녕.}

{아…… 응.}

그래도 조금 아쉬운지 세연은 웅얼거리며 손을 들다가, 이렇게 인사하는 건 좋지 않다고 생각하는지 한 걸음 내디디며 말했다.

{아나스타샤!}

아나스타샤는 갑자기 이름을 부르며 다가오는 아이에게 순간적으로 조금 놀랐다. 세연은 약간 주저하던 느낌을 모두 던져 버리고 딱 부러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은 즐거웠어. 타티아나에 이어 너한테도 진 건 조금 아쉽지만.}

혹시 잊고 있었나 했는데, 결코 그렇지 않았다.

{다음엔 쉽지 않을 거야. 진짜로.}

{그러니.}

연주자 임세연은 오늘 콩쿠르 결과에 대해 받아들이면서도 분명 아쉽고 분하게 여기고 있었다.

그걸 잊지 않고 곱씹고 있었다는 것이, 아나스타샤는 그 무엇보다 기분 좋았다.

연락처를 주고받은 세연이 그저 잘 웃고 착하기만 한 애가 아니라, 분명히 나중에도 세상에서 몇 번이나 마주할 연주자라는 점이 보다 확실해진 것이다.

아나스타샤는 보다 똑똑히 세연의 얼굴을 기억하면서 조용히 말했다.

{기다릴게.}

세연은 그 말에 대답하지 않았지만, 대답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아나스타샤는 미련 없이 뒤돌아섰다. 그리고 저 애 역시 비슷한 마음을 느끼고 있길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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