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87화
슬그머니 비춰 오는 햇살이 눈꺼풀 위를 간지럽힌다. 아나스타샤는 몸부림치듯 기지개를 켜며 눈을 떴다.
“……아.”
중얼거리며 일어나 냉장고 문을 열고 물부터 한 병 꺼내 들이켰다. 메마른 목에 차가운 물이 들어차니 정신이 번뜩 들었다.
흘러내린 머리를 쓸어 넘기며 고개를 돌렸다.
오늘로 미국도 마지막이었다.
텍사스 주 포트워스는 괜찮은 도시였다. 오기 전까진 온통 콩쿠르에만 신경이 쏠려 있어서 관광 같은 건 미처 생각하지 못했는데, 이럴 줄 알았으면 며칠 정도 여유를 둘 걸 그랬다.
하지만 이미 늦은 일이다. 이젠 떠날 준비를 해야 했다.
“…….”
아나스타샤는 간단하게 씻은 뒤 바로 호텔 조식을 먹으러 내려갔다. 베이컨과 계란 요리는 세상 어느 호텔에 가도 있을 것 같은 메뉴들이었다. 아나스타샤는 접시를 반 정도만 채우고는 빠르게 식사를 마쳤다.
그 후로는 바빴다. 사흘 동안 지내면서 풀어놓은 짐들을 다시 캐리어에 차곡차곡 정리해 넣고, 혹시 잊은 것이 있는지 다시 처음부터 체크하기도 했다. 혼자 와서 혼자 가는 일정이라 크게 챙겨야 할 일은 없었지만, 여권을 놓고 공항에 가는 불상사는 없어야 했다.
그렇게 입을 옷만 제외하고 짐 정리를 마친 아나스타샤는 체크아웃 시간이 되기 전에 호텔 밖으로 나왔다.
“괜찮았었어.”
누군가에게 하는 게 아니라 스스로에게 하는 말에 가까웠다. 그렇게 말하고 나니 한층 더 기분이 좋아졌다. 모든 게 다 괜찮았다.
아나스타샤는 공항으로 가는 택시를 잡아탔다.
여긴 분명 좋은 도시였지만, 떠날 채비를 마치고 나니 마음은 이미 모스크바에 가 있었다.
***
발렌티나로부터 메시지가 왔다.
[아나스타샤 마중하러 가자.]
살짝 갈등이 인다.
난 이번에 아나스타샤가 콩쿠르 일정에 대해 관여하는 걸 바라지 않는다는 걸 분명히 느꼈다. 그녀는 자신이 가지고 올 결과가 어떨지 모르기 때문에, 홀로 부딪쳐 보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그 마음을 모르지 않는다. 누구보다 깊게 공감하기도 했다. 때문에 깊게 묻지 않고 존중하려 했다.
하지만 그 콩쿠르도 이젠 끝난 거잖아? 그럼 모스크바에 돌아오는 것 정도는 마중해도 되는 것 아닐까?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아무리 연주자로서 입장을 이해하고 존중한다지만, 그러면서도 강하게 있지 못하고 안절부절못하는 스스로가 조금 한심하게 느껴지기도 해서 난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발렌티나가 재차 메시지를 보내왔다.
[그 애한테 마중 간다고 이야기 같은 거 한 거 아니지? 아무 말도 하지 마. 몰래 갈 거니까.]
공항 마중을 가자는 이야기 하고 있는 거 아니었어? 그런데 어떻게 몰래 간다는 건지…….
[몰래 간다니요?]
[깜짝 놀라게 해 줘야지.]
발렌티나는 당연한 걸 뭘 묻냐는 듯 빠르게 메시지로 대답했다.
[그 애는 나 혼자 가는 걸로 알고 있어. 그러니까 같이 가자.]
지금 보니 발렌티나는 아나스타샤에게서 일정을 듣고, 시간에 맞춰 가겠다고 말한 것 같다. 난 약간 더 답답함을 느꼈다. 발렌티나에겐 말해 줬다면 나한테도 말해 줄 수 있는 것 아닌가? 내가 조르지 않아서 그런가?
갑자기 머리가 아파 온다. 괜한 생각 더 해 봐야 무의미하다고 생각하며 난 발렌티나와 주고받는 메시지에 집중했다.
[발렌티나는 서프라이즈를 좋아하시네요.]
[재미있잖아?]
그녀는 별생각 없어 보였다. 그냥 할 수 있으니까 한다는 투였다. 예전부터 늘 이런 식이긴 했다.
그녀의 목소리를 듣다 보니 머리에 차 있던 갈등이 흐물흐물해졌다.
연주자로서 아나스타샤의 의사를 존중하는 것도 좋지만 이젠 잘 모르겠다. 그냥 마음대로 할 생각이다. 나도 할 수 있으니까 해야겠다.
[알겠어요. 저희 둘만 가나요?]
[응. 그러려고.]
이왕에 놀라게 할 작정이라면 다른 친구들도 우르르 데리고 가면 좋을 텐데. 예고르에게 부탁한다면 리무진도 쓸 수 있으니까 열 명 정도 데리고 가는 건 일도 아니다.
난 다른 친구들을 데리고 가는 것도 염두에 두며 물었다.
[몇 시까지 준비하면 될까요?]
[새벽 3시.]
곧바로 다른 친구들에게 메시지를 해 보려던 생각을 접었다. 발렌티나가 왜 굳이 둘만 가자고 하는지 알 것 같아졌다.
그렇게 아나스타샤의 마중에 함께하기로 하고, 난 새벽 3시까지 발렌티나를 데리러 가기로 했다. 새벽엔 대중교통도 없으니 내가 한꺼번에 데리고 움직이는 편이 낫다.
조금 더 상세한 계획을 발렌티나와 마무리 지은 뒤, 방에서 나왔다. 새벽에 깨서 나가려면 일단 허락을 받을 필요가 있었다.
아무도 몰래 살그머니 나간다는 계획은 내 머릿속에 아예 존재하지 않았다. 난 절대 그럴 수 없는 사람이다.
“…….”
휴일이라 조용한 저택을 거닐며 이곳저곳 살폈다. 거실에도 안 계시고 응접실에도 안 계신다. 난 2층에 있는 아버지의 사무실까지 다다랐다.
살짝 노크하니 들어오라는 목소리가 있었다. 난 문을 열고 들어섰다.
“타티아나.”
휴일인데 무슨 일이냐는 듯 아버지가 고개를 들었다. 옆에는 예고르도 서 있었다. 잘은 모르겠지만 분명 일과 관련된 대화를 나누고 있는 중이었던 것 같았다.
두 분의 대화를 길게 방해하고 싶지 않아서, 난 되도록 간결하게 용건을 전했다.
“아버지, 저 내일 잠시 외출해도 될까요.”
내 말을 듣고 아버지는 잠시 말이 없었다. 이 애가 말하는 법을 다시 까먹었나 하는 표정이다.
이윽고 아버지가 차분하게 말씀하셨다.
“내일 말이더냐. 내일은 월요일인데. 타티아나.”
“새벽 3시쯤에 나가려고 해요.”
“뭐라고?”
새벽 3시면 하루가 지났으니 내일 외출한다는 말이 틀린 말은 아니다. 아버지는 깜짝 놀라며 들고 있던 서류들을 책상 위로 내려놓았다.
상당한 충격이 서린 얼굴을 보니 죄스러워졌다. 아버지의 기억엔 3년 전 내가 새벽에 빠져나갔던 일이 여전히 충격으로 남아 있었다.
쿡쿡 쑤시듯 아파 오는 마음을 추스르며 난 오해에 대해 설명했다.
“다름이 아니라 아나스타샤가 미국에서 콩쿠르를 마치고 돌아오는데…… 공항에 마중 나가고 싶어서요. 새벽에 돌아온다고 하네요.”
아버지는 자세한 이야기를 듣고 나서야 안심하셨다. 내가 쓸데없는 이유로 나가려는 게 아니라는 걸 이해해 주신 것 같다.
“……그리하거라.”
“허락해 주셔서 감사해요.”
“아니다, 타티아나. 그리고 그 애에 관한 일이라면…… 앞으로도 무엇이든지 이야기하거라. 내가 도울 일이 있다면 최선을 다해 도와줄 테니.”
아버지에게 있어 아나스타샤는 그냥 내게 가장 친한 친구 정도가 아닌 것 같다. 하긴, 그 애가 없었으면 지금 내가 없을 확률도 높으니 잘못 보고 계신 건 아니었다.
새벽 외출에 대한 허락은 쉽게 받아 냈다. 그리고 아버지는 도와주겠다는 말씀을 실제로 실천하시려는지 곧바로 옆에 있는 예고르에게 물었다.
“일단은…… 예고르. 오늘 야간에 있는 인원 중에 타티아나를 데리고 나갈 사람이 있겠나?”
예고르는 이미 내가 이야기를 꺼낸 시점에 모든 것을 다 계산한 것처럼 곧장 대답했다.
“예, 유리 님. 저와 빅토르가 가면 될 것 같습니다.”
“자네가 가 준다면 걱정이 없고.”
나 역시 예고르가 함께해 준다면 무슨 일이든 걱정이 없지만, 조금 미안하기도 했다.
내 용건이라도 새벽엔 되도록 삼가야 하는 게 맞는데, 심지어 내 친구의 일이었다. 사실 할 수 있다면 내가 알아서 가는 방법을 찾고 싶기도 했다.
하지만 내 곁에 사람들이 늘 붙어 다니는 건 단순히 내 신변 보호를 위한 목적뿐만이 아니라, 같은 실수를 두 번 하지 않겠다는 아버지의 의지이기도 했다. 난 그 의지에 거스를 생각이 없었고, 때문에 모든 걸 알고 덤덤히 나서 준 예고르에게 미안하다 할 수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그저 감사하다는 말뿐이다.
“고마워요, 예고르.”
“별말씀을. 그나저나, 밤에 일어나시려면 일찍 주무셔야겠습니다. 아가씨. 예전처럼 주무시면 많이 피곤하실 겁니다.”
예고르는 기다렸다는 듯 조건을 내걸었다. 난 미소를 지었다. 예고르는 그렇게 안 보이는데, 사실 세심하고 잔소리가 많은 성격이기도 했다.
그리고 난 그런 그가 좋아서,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게요.”
예고르는 예전처럼 불안한 표정을 짓지 않는다. 그는 희미한 미소를 보였다.
***
약속한 대로 9시가 되자마자 잠자리에 들어서, 새벽 2시에 일어난 나는 나갈 채비를 했다. 파자마 차림으로 공항에 갈 순 없었다. 여전히 새벽 날씨는 추우니까 코트를 입어야 할 것 같다. 혹시 모르니까 카디건도 하나 챙겨야지.
그렇게 준비를 마치고 응접실로 나오니 이미 예고르와 빅토르가 깔끔한 차림으로 날 기다리고 있었다.
“피곤하시죠. 예고르, 빅토르.”
“전 밤잠이 별로 없어서, 괜찮습니다.”
예고르는 정말 평소에 전혀 다름이 없었다.
그리고 빅토르는 되레 평소보다 더 기운이 넘쳐 보이기까지 했다. 그는 장난스레 이야기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아나스타샤 아가씨를 모시러 가는 일이라면 언제든 괜찮습니다.”
“그렇게 생각해 주셔서 감사해요.”
“아마 아가씨께서 그리하라 하셨으면 전용기도 띄울 수 있었을 겁니다.”
그건 좀…… 아나스타샤가 불편해하지 않을까요?
빅토르의 말대로 하고자 하면 못 할 것도 없었지만 그랬다간 아나스타샤에게 혼날지도 모른다. 난 그녀를 필요 이상으로 특별 취급해서 부담스럽게 만들 생각이 없었다.
빅토르 역시 농담이었다는 듯 실실 웃으며 앞장섰다.
“가 볼까요? 아, 발렌티나 아가씨 댁으로 먼저 가야 하죠?”
“예. 부탁할게요.”
“알겠습니다.”
그렇게 운전대는 빅토르가 잡았고, 예고르와 나도 따라 탔다.
“…….”
이 시간에 차를 타고 나와 본 건 처음이었다.
새벽의 모스크바 시내는 마치 다른 도시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높은 고층 빌딩들엔 간간히 불빛이 들어와 있고 드문드문한 가로등, 그리고 가끔 지나가는 자동차의 헤드라이트가 이 새벽이 멈춰 있지 않음을 알려 온다.
창밖을 보면서 어두운 풍경을 감상하길 약 30분, 난 발렌티나의 집에 도착해 그녀에게 메시지를 했다. 발렌티나는 미리 준비하고 있었는지 순식간에 내려왔다.
빅토르가 내려 문을 열어 주었다. 발렌티나가 발랄하게 인사했다.
“어머나. 빅토르가 고생해 주시네요? 예고르도 안녕하세요.”
빅토르 역시 경쾌하게 받아 주었다.
“친구분 마중하러 공항에 가신다는데 이 정돈 고생도 아니죠.”
“마음도 넓으셔라. 아나스타샤도 고마워할 거예요.”
발렌티나는 내 옆자리에 앉았다. 이런 새벽에 그녀와 만나는 건 처음인 것 같았다. 난 그녀와 눈을 마주쳤다. 발렌티나의 눈썹이 길게 휘어졌다.
“타티아나, 같이 가 준다고 해서 고마워.”
“별말씀을요……. 당연히 해야 할 일인데요.”
내 대답이 조금 이상했는지 발렌티나가 고개를 저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은 아니지. 원래는 그 애 부모님이 데리러 가기로 했었어. 그런데 내가 가겠다고 고집부렸던 거거든.”
“그런…… 건가요?”
“응. 당연한 거 아니야?”
생각해 보면 그랬다. 멀리 미국에서 열린 콩쿠르에서 돌아온 딸을 위해 새벽 3시에 움직일 수 있는 건 가족 정도겠지.
이번엔 발렌티나가 무슨 고집을 부렸는지 친구들인 우리가 가는 쪽으로 정해진 것 같지만…… 알겠다고 승낙한 아나스타샤도 사실 약간 특이한 성격이긴 했다.
난 아나스타샤에 대해 잠시 생각하다가, 지금까지 누구에게도 물어보지 못했던 걸 발렌티나에게 처음 물어보았다.
“아나스타샤는 왜 혼자 갔었던 걸까요?”
발렌티나는 큰 고민 없이 대답해 주었다.
“글쎄, 그 애는 예전부터 그랬었거든. 혼자서 말없이 여행 휙 갔다 오기도 하고. 걔네 집이 좀 프리하기도 하고.”
“…….”
“그런데 요즘은 말없이 그렇게 사라지거나 하진 않잖아. 정말 많이 좋아진 거야.”
예전이라고 한다면 아마 내가 모르던 시절의 아나스타샤였을 테지.
처음 봤을 때도 아나스타샤는 학교에서 에르네스트나 발렌티나의 옆에 있으면서도 조금 고독해 보였다. 누군가와 어울리는 걸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사람처럼 느껴졌었다.
하지만 내가 앞가림도 제대로 못하고 있을 때 곁에서 가장 많이 도와줬던 건 아나스타샤였다.
그렇게 날 도와주면서 그녀도 서서히 바뀐 걸까. 아마 그럴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발렌티나가 좋아졌다고 평하는 걸 보면 잘된 일일지도.
새벽이라 그런지 별생각이 다 드는 것 같다. 난 괜히 발렌티나에게 농담을 걸면서 공항까지 가는 시간을 보냈다.
“여기서 기다리겠습니다.”
“예, 예고르.”
세레메티예보 공항 주차장에서 예고르가 기다려 주기로 하고, 빅토르와 나 그리고 발렌티나는 공항 게이트로 향했다.
피켓을 들고 있어야 하는 게 아닌가 싶었는데, 새벽이라 그런지 사람이 많지 않았다. 아나스타샤가 나타난다면 난 곧바로 알아볼 자신이 있었다.
게이트 쪽으로 신경을 집중하길 몇 분, 오래 지나지 않아 눈에 확 띄는 사람을 한 명 발견했다.
뒤로 묶은 환한 금발과 큰 키. 셔츠 차림이라 조금 추워 보이지만 움츠리는 기색은 전혀 없었다.
그녀는 단정한 걸음으로 게이트를 빠져나오다가 이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발렌티나가 손을 흔들었다.
“아나스타샤!”
난 손을 살짝 들었다. 그녀를 발견했다는 표시는 그 정도면 충분하다.
아나스타샤는 그 자리에서 우뚝 멈춰서더니, 이전보다 조금 더 빨라진 걸음으로 다가왔다. 캐리어를 끄는 소리가 요란해졌다.
“아빠 대신 온다길래 마음대로 하라 했더니…… 정말 나왔니? 그것도 둘이나?”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가장하고 있지만, 그 목소리엔 떨림이 있었다. 놀란 정도가 아니었다. 아나스타샤의 눈엔 물기가 맺혀 있기까지 했다.
몇 가지 농담을 생각하고 있던 난 그녀의 얼굴을 보고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