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488화 (488/1,277)

##  488화

아나스타샤는 소에 무뚝뚝하게 감정을 감추는 사람은 아니다. 하지만 늘 감정 조절에 굉장히 능한 건 사실이었다. 때문에 그녀는 어떤 상황에 처해서든 늘 침착하고 어른스럽다. 가끔은 정말 열여섯 살이 맞는지 의문이 들 정도였다.

그런데 종종, 감정을 컨트롤하는 것에 실패한 아나스타샤는 이런 얼굴을 보이곤 한다. 어찌해야 할지 모르는 듯한 눈빛. 난 그녀가 우릴 보며 그런 표정을 보인다는 것을 기껍게 느꼈다.

발렌티나는 순간적으로 아나스타샤에게 휩쓸렸는지 비슷한 표정을 짓다가, 의식적으로 표정을 관리하면서 일부러 놀리듯 말했다.

“뭐야, 감동했구나? 그치? 아나스타샤?”

“놀란 것뿐이야.”

그제야 아나스타샤는 짜증스레 부정했다. 순식간에 평상시의 그녀로 돌아간 것 같다.

이렇든 저렇든 좋았다. 난 셔츠 차림의 아나스타샤에게 팔을 뻗었다.

“이리 와요, 아나스타샤.”

아직 날씨가 춥다. 난 혹시나 해서 가지고 온 카디건을 그녀의 어깨에 둘러 주고, 반가움의 인사로 끌어안았다.

“별일 없었죠?”

“응…….”

“다행이에요.”

평소처럼 강하게 반가움을 표시하지 않고 아나스타샤는 얌전히 내 손에 의지했다. 난 그녀와 한참이나 포옹하고 있다가 놓아주었다.

아나스타샤는 어깨에 걸쳐진 카디건을 살짝 매만져 보더니,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다음으로 빅토르에게 말했다. 굉장히 미안해하는 것 같다.

“그냥 부모님이나 오빠한테 와 달라 하려 했는데…….”

“하하하, 제가 오빠분보단 못하겠지만, 그래도 괜찮지 않겠습니까?”

“……고마워요.”

빅토르는 언제나 그렇듯 아나스타샤를 굉장히 좋아하는 편이었다. 내가 굳이 부탁하지 않아도 만약 아나스타샤에게 곤란한 일이 생긴다면 기꺼이 도와줄 사람이었다.

아나스타샤는 다시 우리 세 명을 번갈아 돌아보더니 중얼거렸다.

“무슨 말을 더 해야 할지 모르겠어.”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난 그냥 가볍게 웃어 보이기만 했다. 아나스타샤도 그저 따라 웃는다. 그런데 발렌티나만 할 말이 많았다.

“하긴 뭘 해? 누가 보면 미국에 한 2년쯤 살다 온 줄 알겠네. 며칠 만에 내 얼굴 보니 반가운 건 알겠는데, 감동 그만 받아.”

이번에야말로 감동이고 뭐고 싹 사라졌다는 듯 아나스타샤가 차갑게 말했다.

“넌 하나도 안 반가워. 발렌티나.”

“뭐? 나, 나도 너 하나도 안 반가워!”

“농담이야.”

“농담할 걸 해!”

막상 차갑게 대하니 역정을 낼 거면서 왜 그러는 건지…….

아나스타샤는 이런 발렌티나의 반응도 즐겁다는 듯 웃으며 다시 투닥거리기에 나섰고, 발렌티나 역시 여느 때나 다름없는 말다툼을 하면서도 즐거워 보였다.

그 광경을 지켜보는 것도 나쁘지 않았지만, 모르는 사람들이 보면 정말 싸우는 줄 안다. 벌써부터 주변에 있는 사람들 중 몇 명은 이쪽을 힐끔거리고 있었다.

내가 나서서 말리기 전에 눈치 빠른 빅토르가 살짝 끼어들었다.

“이만 가면서 이야기하시죠, 아가씨들. 아, 캐리어는 저 주시고.”

“아, 네.”

아나스타샤는 순순히 캐리어 손잡이를 내어 주었다. 그렇게 빅토르가 앞장서고, 우리 세 명은 그 뒤를 따라갔다.

공항 주차장에 이르자 저편에 서 있는 검은 벤츠와 예고르가 보인다. 아나스타샤는 예고르에게도 감사 인사를 전했다.

차에 오르자 빅토르가 어디로 갈지 물었다. 난 고민할 것 없이 아나스타샤의 집으로 가자고 했다.

그녀는 콩쿠르를 마치고 10시간 가깝게 비행기를 타고 온 차였다. 게다가 몇 시간 후엔 학교에 등교해야 하는데, 조금이라도 쉬어 두는 게 중요했다.

이 새벽에 어딘가 놀러갈 수 있을 리도 없었고, 우린 어둑어둑한 고속도로를 달리며 드문드문 이야기를 나누었다.

“저기, 아나스타샤.”

한동안 말없이 옆을 보던 나는 그녀를 불렀다. 아나스타샤가 돌아본다.

어쩐지 오늘 아나스타샤는 뭐든 물어보면 순순히 대답해 줄 것같이 보이기도 했다. 난 조심스레 질문했다.

“어디에 계셨던 건지 이젠 말씀해 주실 수 있나요?”

내 질문에 가장 의아해한 건 다름 아닌 발렌티나였다. 그녀는 대체 지금 무슨 말을 들은 건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아나스타샤를 바라보았다.

“뭐야, 너 이 애한테 말 안 해 줬어?”

“응.”

“…….”

왜냐고 묻지도 못하고 황당하다는 눈초리로 발렌티나가 침묵했다. 그녀는 아나스타샤의 행동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것 같았다.

아나스타샤는 친구의 힐난 섞인 눈빛을 견디지 못하고 변명하듯 입을 열었다.

“그냥…….”

“전 이해해요. 아나스타샤.”

난 그녀에게 변명이 필요하다 생각하지 않는다.

몇 년 만에 콩쿠르에 도전하면서 되도록 혼자 조용히 다녀오려고 하는 마음을 난 이해한다. 그건 자신감의 결여나 도피 같은 게 아니라 스스로 오롯이 서기 위함이었다. 충분히 그럴 수 있었고. 때문에 지금까지 조용히 존중해 왔던 것이다.

그렇지 않나요? 아나스타샤.

확신이 담긴 눈으로 올려다보자 아나스타샤가 부드러운 눈으로 미소를 지었다.

“그래 줄 거라 생각했어.”

그리고 그녀는 한결 마음이 편해졌는지 조금 더 편하게 좌석에 앉았다. 가만 보니 언제 어떻게 이야기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녀는 자신이 하는 말을 남이 어떻게 듣든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으면서도 고민이 깊은 구석이 있다.

아나스타샤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약간의 미안함, 그리고 고마움. 그런 것들이 느껴진다.

“미국이었던 건 알고 있지?”

“예. 에르네스트에게 거기까지만 들었어요.”

“텍사스에 갔었어. 더 정확하게는 텍사스 주에 있는 포트워스라는 곳에.”

“포트워스…… 처음 듣는 곳이네요.”

“큰 도시야. 괜찮더라.”

어느 기억을 돌아보더라도 난 미국에 한 번도 가 본 적이 없었다. 클래식 음악을 공부하는 지금 입장에선 작곡가 조지 거슈윈 정도밖에 떠올리지 못하기도 하고.

하지만 미국은 음악가들이 활동하기에 충분한 자유가 있고 또 예술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가득한 나라이기도 하다. 미국으로 망명한 라흐마니노프가 그곳에서 만난 음악가들과 교류하며 쓴 곡들엔 그러한 분위기가 물씬 서려 있다.

난 포트워스라는 지명에서 막연한 이미지들을 떠올리며 물었다.

“그럼 그곳에서 열린 콩쿠르였나요?”

“응. 포트워스 국제 청소년 피아노 콩쿠르. 생긴 진 얼마 안 되었는데 후원하는 단체가 많아서 참가자들도 많고 수준도 상당했어.”

아나스타샤는 콩쿠르에 대해 해 줄 이야기가 많은지 즐겁게 말하기 시작했다. 베이스 퍼포먼스 홀이라는 이름의 콘서트홀이 얼마나 좋았는지, 또 청중들은 얼마나 열정적이었는지 등등.

“조금 특이한 건…… 본선에 올라가 보니까 마지막 여덟 명이서 토너먼트 방식으로 겨루게 되어서 상당히 신선했지. 이전까지 콩쿠르가 그냥 심사위원들 앞에서 준비해 온 거 펼쳐 놓고 시험 보는 느낌이었다면 이번엔 정말 다른 연주자와 경쟁하는 기분이었는데…… 나쁘지 않았어.”

그건 정말 살면서 처음 듣는 콩쿠르 방식이었다. 재미있게 들리긴 한다. 나는 다른 연주자와 단둘이 대결하는 것을 일종의 교류라고 생각하기도 하고.

그런데, 이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난 참지 못했다.

“아나스타샤.”

“응?”

“그래서 본선에 올라 몇 명을 이기셨나요?”

조금 보채는 것처럼 들렸을까? 모르겠다. 그러나 어쩔 수 없었다. 난 아나스타샤가 콩쿠르에서 어떤 결과를 받았는지 정말 궁금했다.

아나스타샤는 잠시 말을 멈추더니,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손가락을 들었다.

“세 명.”

방금 들은 방식대로라면, 더 생각할 것도 없었다.

난 아나스타샤의 두 손을 잡으며 말했다.

“정말 축하해요! 아나스타샤!”

“어? 뭔데? 무슨 말이야? 나 이해 좀 시켜 줄 사람?”

내가 갑자기 큰 소리를 내서 놀랐는지 발렌티나가 어리둥절해 하며 고개를 기웃기웃했다. 난 그녀에게 짧게 말했다.

“아나스타샤가 우승했어요!”

“뭐? 정말?”

그제야 발렌티나도 깜짝 놀라며 아나스타샤를 돌아보았다. 아나스타샤는 의기양양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혹시 1등이 아닌 다른 등수를 생각했다면 크게 잘못 생각 하고 있지 않았냐는 얼굴이다.

그런데 발렌티나는 엉뚱한 걸 물었다.

“상금 얼마 받았어?”

“그런 것부터 묻는 거니?”

“어, 미국 대회니까…… 갑자기 궁금해져서.”

뭔가 미국 대회는 규모가 클 것 같은 느낌이 있긴 하지……. 그래도 그렇지 지금 그걸 묻는 건 조금 아니지 않나…….

아나스타샤도 약간 질린 표정이긴 했지만, 그래도 키득거리며 대답해 주었다.

“꽤 받았지. 지금이 새벽이 아니었으면 좋았을 텐데.”

만약 저녁나절이었다면 곧바로 우리들을 데리고 근사한 곳에 가기라도 했을 것 같은 어투였다. 발렌티나는 지금이 아니라도 언제든 시간은 많다고 말했고 아나스타샤는 기분 좋게 웃었다.

난 솔직히 머릿속이 복잡했다.

미국에서 열린 콩쿠르가 어느 정도 규모인진 잘 모르겠지만…… 아나스타샤의 말을 들어 보니 굉장히 수준 높고, 또 굉장히 까다로운 콩쿠르인 것 같았다. 그런데 아나스타샤는 그런 콩쿠르에 참가해서 당당히 우승을 거머쥔 것이다.

지금 내가 그녀를 얼마나 자랑스럽게 생각하는지, 과연 그녀가 알까?

아까 전엔 아나스타샤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했던 것처럼, 이번엔 내가 그런 기분이 들었다. 그냥 잘 했다는 칭찬으로는 내 기분을 전혀 표현하지 못할 것 같다.

돌고 돌다가 입 밖으로 나온 말은 결국 평소에 별반 다를 바 없었다.

“무슨 곡을 연주하셨나요? 나중에 저한테도 들려주실 수 있나요?”

“응?”

“안 되나요?”

너무 듣고 싶어 견딜 수 없었다. 난 아나스타샤에게 다시 부탁했다.

그런데 느닷없이 그녀가 웃음을 흘렸다.

“푸흐흐…….”

“……?”

영문을 몰라 멀거니 바라보니 아나스타샤가 도저히 참을 수 없다는 듯 입을 가리며 중얼거렸다.

“모든 게 예상했던 그대로라서…… 너무 좋아.”

“무슨 말씀이세요?”

“그냥…… 기뻐, 타티아나.”

손을 뗀 그녀는 환하게 웃고 있었다. 확실한 안도감이 만면에 가득했다.

“너도. 발렌티나.”

“갑자기 무슨 말이야? 그런 소리 필요 없거든?”

발렌티나는 언제나처럼 잡아떼듯 대꾸했지만, 아나스타샤는 이번엔 짜증스럽게 반응하지 않고 그저 웃기만 했다.

대화를 나누다 보니 아나스타샤의 집까진 금방이었다. 체감으로는 5분도 안 걸린 기분이다.

아나스타샤가 차에서 내리며 말했다.

“오늘 정말 고마웠어. 타티아나, 발렌티나. 그리고 빅토르와 예고르도요. 덕분에 편히 왔어요.”

“별말씀을.”

예고르는 신경 쓰지 말라는 듯 짧게 인사했다. 아나스타샤는 마지막으로 차 문을 닫기 전, 내게 말했다.

“그럼 들어갈게. 내일…… 아니, 오늘 봐.”

재미있는 인사였다. 난 손을 흔들었다.

“그래요, 오늘 봐요. 아나스타샤.”

“응.”

아나스타샤가 집으로 올라가고, 빅토르는 잠깐 기다렸다가, 이번엔 발렌티나의 집으로 차를 돌렸다.

그렇게 가던 중, 발렌티나가 은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 애, 아까 울었지?”

아나스타샤는 숨기려 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난 그럴 수도 있다는 투로 답했다.

“그럴 뻔했죠.”

“아, 아쉽네. 차라리 네가 어디 숨어 있다가 나올 걸 그랬어.”

발렌티나는 정작 본인도 아나스타샤를 따라 울 뻔했으면서, 이제 와서 이런 소리를 하고 있었다.

“제가 숨어 있다가 나온다고 아나스타샤가 그럴까요……?”

“아닐까? 그럼 반대로 생각해 봐. 어떨지.”

반대로?

미국 콩쿠르에 갔다가 돌아왔는데 생각도 못 했던 아나스타샤가 공항에서 기다려 준다면 난 어떻게 했을까?

깊게 생각할 것도 없었다.

“전 그냥 게이트에서 울어 버렸을걸요.”

“너도 참…….”

발렌티나는 괜한 걸 물어봤다는 듯 말끝을 흐렸다.

잠시 후, 발렌티나의 집 앞에 도착했다. 저편에서 해가 밝아 오며 어둠을 몰아내기 시작하는 시간이었다.

난 살짝 손을 흔들며 말했다.

“오늘 불러 주셔서 고마워요. 발렌티나.”

“나야말로. 지금부터 몇 시간 못 자겠지만 조금 더 자. 알겠지? 나도 잘 거야.”

“그럴게요. 잘 자요.”

“잘 가.”

발렌티나는 피곤한 듯 하품을 하며 집으로 올라갔다. 피곤할 걸 뻔히 알면서도 친구를 위해 움직이는 걸 보면, 발렌티나가 얼마나 착한 사람인지 알 만도 하다.

마지막으로 예고르, 빅토르와 함께 셋만이 남았다.

계속 말없이 있던 예고르가 문득 말을 걸어왔다.

“오늘 기분 좋으실 것 같군요.”

약간 뭘 묻는 건지 모를 질문처럼 들리기도 하다. 하지만 난 고개를 끄덕였다.

“예, 예고르.”

“더 주무실 겁니까?”

평소 깐깐하고 내 걱정이 많은 예고르이지만, 오늘만큼은 그렇지 않을 것 같다.

“안 자도 괜찮죠?”

“뜻대로 하십시오.”

예고르는 그답지 않게 흐뭇한 웃음과 함께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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