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89화
새벽에 공항에 갔다가 돌아와선 바쁘게 아침 시간을 보냈다. 침대에 다시 누워 뒹굴거릴 시간은 없었다.
벨카와 산책 후에 아침 연습을 하고, 드미트리에게 새로운 요리를 배우기도 하면 시간은 금방 지나간다.
준비한 아침 식사를 하면서 아버지에게 간밤에 공항에 갔던 일에 대해 자세히 말씀드렸다. 아버지는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는 듯 가만히 내 이야기를 들어 주셨지만, 어쩐지 잠을 잘 못 주무신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식사까지 마치고 등교할 준비를 마치고 나오면 늘 빅토르와 자하르, 그리고 소로킨이 기다리고 있었다.
빅토르가 피곤해하지 않을까 싶다. 하지만 그야말로 반대로 내게 피곤하지 않냐고 물어보았다. 자하르와 소로킨은 우리의 대화를 들으며 의아해하다가, 새벽에 공항에 갔다 왔었단 이야기를 듣고는 경악해했다.
왜 부르지 않았냐면서 약간 섭섭해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는데, 다음에 비슷한 일이 생긴다고 해도 정말 새벽에 모두 깨울 수도 없고 참 난감했다.
“다녀오십시오.”
“다녀올게요.”
모두에게 인사하고, 정문으로 향했다.
새벽에는 코트를 입어야 할 정도로 추웠었는데, 해가 뜨고 나니 봄이 물씬 다가온 게 느껴졌다. 모스크바의 봄은 다른 나라들보다 조금 늦지만, 그 어떤 나라보다 극적이고 선명하다.
기분 좋게 우리 반으로 올라갔다.
“좋은 아침이야.”
이미 등교한 몇 명의 아이들이 인사해 왔다. 난 모두와 반갑게 인사를 주고받으며 내 자리로 향했다.
그런데 그중 바르바라가 옆으로 다가오더니 넌지시 물어보았다.
“그 이야기 알고 있어? 타티아나.”
“으, 예?”
순간적으로 바보 같은 소리를 내며 돌아보자 바르바라가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아나스타샤 말이야. 어제 미국에서 열린 청소년 콩쿠르에 참가해서 우승했거든. 혹시나 싶어서.”
갑자기 무슨 말인가 했더니 아나스타샤 이야기였다.
난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알고 있었어요.”
“그 애가 전화로 자랑했을 것 같진 않은데. 우리도 우연찮게 미국 기사에서 발견해서 알게 된 거거든.”
“아하하…….”
아나스타샤는 콩쿠르에서 우승했다고 해서 바로 호들갑스럽게 이야기하거나 하지 않는다.
내가 아나스타샤와 친하다는 걸 알면서도 바르바라가 이런 말을 해 준 건, 내가 아무것도 모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우려 때문이었던 것 같다.
“알고 있다면 다행이네. 이따가 그 애가 오면 축하해 줄 생각이거든.”
바르바라는 혹시나 모르고 있다가 놀라지 말라는 듯 말했다. 생각해 보면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갑자기 반 친구들이 아나스타샤에게 축하한다고 하면 깜짝 놀랐을 것 같다.
어쨌든, 난 전부 알고 있고 심지어 새벽에 그녀를 데리러 갔다 오기까지 했으니 놀랄 일이 전혀 없었다. 난 여유롭게 다른 친구들이 마저 오길 기다렸다.
아나스타샤는 몇 분 지나지 않아 도착했다.
문이 열리고, 아나스타샤가 들어서자마자 반 친구들이 외쳤다.
“아나스타샤!”
“이름 좀 날리고 왔다며?”
“잘 했어! 축하해!”
대체 어디서 구해 왔는지 폭죽까지 두어 개 팡팡 터졌다. 난 절대 놀라지 않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폭죽 소리엔 깜짝 놀랐다.
아나스타샤도 어안이 벙벙해졌는지 멍하니 있더니, 곧 미소를 머금으며 말했다.
“몇 년 만인지 모르겠네, 이렇게 축하받는 거.”
그녀는 일찍 찾아온 슬럼프 때문에 몇 년이나 콩쿠르 등에 나가지 못했다. 그래서 이런 상황도 상당히 생경하게 느껴지는 모양이었다.
“네가 콩쿠르 같은 거에 영 관심이 없어서 그랬잖아. 이것 봐, 나가면 그냥 휩쓸고 올 애가.”
“그래, 맞아.”
반 친구들은 아나스타샤를 높게 평가한다. 피아노에 미친 사람들만 모아 놓은 이 반에서 이 정도 고평가를 받는다는 건 상당히 시사하는 바가 컸다. 아나스타샤는 이 평가를 무시해선 안 된다.
그녀는 조금 더 진지하게 말했다.
“모두들 축하해 줘서 고마워.”
그 후로도 한참 동안이나 축하 인사가 오갔다. 다들 이 콩쿠르 우승을 아나스타샤의 부활처럼 여기는 것 같았다. 그리고 러시아가 아닌 미국까지 가서 우승을 하고 왔다는 것도 대단하게 여기는 것 같았고.
아나스타샤는 충분한 찬사를 받은 후에야 내 옆에 앉았다.
“안녕, 타티아나.”
“후후후, 좋은 아침이에요. 아나스타샤.”
몇 시간 전에 헤어졌었는데, 이렇게 만나니 기분이 좋다.
아나스타샤는 자기 가방을 내려놓고는 내게 슬쩍 물어보았다.
“네가 알려 줬니?”
반 친구들이 그녀의 콩쿠르 우승 소식을 알고 있다는 것에 꽤 놀라긴 했나 보다. 난 머리를 좌우로 흔들었다.
“아뇨, 미국 기사에서 보셨다는 것 같아요.”
“그래……? 나도 체크 안 했는데.”
정작 본인도 모르는 기사를 남들이 봤다는 것에서 이상한 기분을 느끼나 보다. 마침 잘됐다. 난 스마트폰을 들었다.
“체크할까요?”
“뭐? 싫어.”
“왜요? 작년 기억 안 나시나요? 아나스타샤가 제 인터뷰랑 기사 보면서 무슨 말씀 하셨죠?”
작년 상트페테르부르크 청소년 콩쿠르에서 우승했을 때, 아나스타샤는 내가 나오는 인터뷰를 보기도 하고 심지어 기사들이 있으면 오려 내어 스크랩하겠다고까지 했었다. 그녀가 한다면 나라고 못할 것도 없었다.
하지만 아나스타샤는 내가 인터넷 기사를 찾아보는 것도 부끄러운 듯했다.
“그건 그거고…… 아, 정말. 진짜로 찾아보려고?”
“물론이죠.”
난 그만둘 생각이 전혀 없었다.
스마트폰으로 기사를 찾아내는 건 굉장히 쉬웠다. 그냥 포트워스 청소년 피아노 콩쿠르라고만 검색해도 곧바로 관련 내용들이 주르륵 쏟아졌다. 난 한 기사를 선택했다. 거기엔 기자로 보이는 한 남자와 나란히 앉아서 인터뷰를 하는 중인 아나스타샤가 실려 있었다.
“드레스 너무 예뻐요.”
“그냥 거기 홀에서 빌린 건데 뭘…….”
묘하게 쭈뼛거리는 모습이 귀엽다. 난 싱글벙글 웃으며 인터뷰 기사를 읽어 보았다.
인터뷰 내용은 평소 아나스타샤라는 사람을 잘 아는 내가 보기엔 그리 특이할 게 없었다. 그녀는 현실적이면서도 주관이 뚜렷한 음악관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알캉에 대해 기적이라고 말한 인터뷰어에게 아나스타샤가 한 반박은 꽤 인상 깊었다.
무대에 선 연주자에게 기적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완벽히 동의하는 말이고, 언제나 스스로를 믿을 수밖에 없는 연주자들에겐 귀감이 될 정도로 올곧은 말이다.
하지만 근래 나 스스로를 돌이켜보면, 기적이라는 말을 자주 되뇌곤 했다. 난 어쩌면 이 모든 것이 기적이라고 말하면서도 굉장히 모순적으로 이 모든 걸 너무나 쉽게 여기고 있었던 게 아닐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옆을 보니 아나스타샤가 태연한 척하고 있었다. 난 살며시 웃으며 그녀를 불렀다.
“아나스타샤.”
“응.”
“이렇게 좋은 말을 하시곤 왜 편집해 달라고 하셨나요?”
“아…… 아니 그걸 왜 다 쓰고…….”
아나스타샤는 당황한 듯 내 스마트폰 화면을 보고는 탄식했다. 그런 사소한 농담까지 전부 써 놓은 것을 직접 보니 당혹스러워하는 것 같다.
스마트폰을 끄고, 난 그녀에게 말했다. 공항에선 미처 해 주지 못했던 말들이 이젠 떠오른다.
“전 아나스타샤가 얼마나 노력해 왔는지 잘 알아요.”
“……고마워.”
“물론 천재이시기도 하고요. 이건 기적이지 않을까요?”
“넌 그런 말을 너무 쉽게 해.”
하지만 아나스타샤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기쁘게 웃었다.
“그렇지만 내 손을 잡아끈 건 바로 네 말이기도 해.”
슬럼프로 고생하고 있던 아나스타샤가 다시 일어난 건 할 수 있을 거란 믿음 덕분이기도 하다. 그 믿음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난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때문에 나는 아나스타샤를 볼 때면 책임감과 자랑스러움을 느낀다.
아나스타샤는 내 얼굴을 마주 보더니 이어 말했다.
“난 기적을 믿지 않는 건 아니야. 그냥…… 모든 건 인과가 있다고…… 아니지, 뭐라니 나.”
연주자로선 믿어선 안 되는 게 기적이지만, 그래도 모든 게 온전히 자기 덕분이라고 딱 잘라 말하지 못한다. 아나스타샤는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정확하게 정해 놓지 못한 것 같았다.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
난 말이라는 것의 힘을 얕보지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것들을 말로 정리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우리는 음악가니까.
“오늘 오후에 레슨 있나요?”
“음…… 아니, 그런데 잠깐 보고는 해야 해.”
당연한 절차였다. 난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럼 그 뒤에 축하 파티 하고…… 잠깐 저랑 연습실 가는 건 어때요?”
“…….”
아나스타샤는 콩쿠르에서 쳤던 곡들을 다시 연주해 달란 게 진담이었냐고 되묻지 않는다. 그저 고요한 눈빛으로 알겠다고 답할 뿐이었다.
***
아나스타샤의 축하 파티는 스터디룸에서 작게 열렸다.
에르네스트가 그럴 줄 알고 준비했다면서 한 아름이나 되는 간식들을 준비해 왔고, 모두가 한 테이블에 모여서 건배를 했다. 아나스타샤는 평소보다 조금 더 웃고, 더 많이 말했다. 작은 파티였지만 그녀는 충분히 기쁘게 받아들인 것 같았다.
그러고 난 뒤, 나와 아나스타샤가 향한 곳은 밑층에 위치한 피아노 연습실이었다.
“…….”
난 요 근래 한 달 넘게 아나스타샤의 연주를 듣지 못하고 있었기에 그녀의 실력이 얼마나 좋아졌는지 잘 모른다. 때문에 그녀의 음악에 굉장히 목말라 있었다.
구석에 있는 의자에 앉아서 완전한 감상자로 변신했다. 아나스타샤는 내가 이러고 있을 땐 귀에 무언가 넣어주기 전까진 정말 꼼짝도 하지 않는다는 걸 잘 안다.
그녀는 콩쿠르가 어떤 방식으로 진행되었는지 설명하면서, 천천히 건반을 짚었다.
시작은 예선전에서 연주했다고 하는 스메타나의 콘서트 에튀드 op.17이었다.
곡은 짧지만, 무척이나 아름답고 감미로웠다.
“너무 좋았어요. 아나스타샤.”
“고마워.”
원래도 기교가 좋고 개성이 잘 드러나는 연주를 하는 편이었지만, 이건 정말 상상 이상이었다.
몇 달이나 듣지 못했던 아나스타샤의 음악은 시원한 바닷물이 되어 깊게 스며들었다.
그다음은 이제 본선에 진출하여 연주한 곡들이었다. 아나스타샤는 홍콩에서 왔다는 남자애를 상대하면서 연주했다며 쇼팽의 화려한 변주곡 op.12를 연주했고, 그다음은 러시아에서 예전에 만났던 상대였다며 브람스 피아노 소나타 3번을 연주했다.
“정말…… 굉장하네요.”
화려한 변주곡이라면 모르겠는데, 브람스 소나타 3번은 지금 나보다 나은 것 같다. 물론 내가 레퍼토리에 있는 다른 곡들을 연습하느라 살짝 색이 옅어져 있는 탓이긴 하지만, 다시 브람스 소나타 3번을 제대로 연습해서 무대에 올릴 정도로 되살려 놓는다고 해도 아나스타샤를 확실히 이길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었다.
그만큼 뛰어나고, 훌륭한 음악성이었다.
난 솔직히 말해서 그녀가 누구를 상대했는진 별로 관심이 없었다. 왜냐하면 상대가 누구든 간에 이 곡들을 마주한다면 어지간해선 이기지 못했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었다.
“마지막은 알캉을 연주했었어.”
“정말인가요? 조금 너무하시는 거 아닌가요?”
“그 말도 들었지.”
싱겁게 웃으며 아나스타샤는 알캉의 심포니 op.39를 연주했다.
알캉을 연주해 본 적은 없어서 잘 모르겠지만, 저게 얼마나 대단한진 듣기만 해도 알 수 있었다. 이런 말은 정말 실례될지 모르겠지만, 그녀를 상대했을 결승전 상대가 가여워질 지경이었다. 세상에 청소년 콩쿠르에서 알캉을 마주하게 될 줄 어떻게 알았겠어?
장대한 교향곡의 마무리를 들으며 난 만족스럽게 박수를 쳤다. 아나스타샤는 일어나더니 고풍스럽게 허리를 숙였다.
난 웃으며 그녀에게 물었다.
“마지막 결승전 상대는 어떤 분이었나요? 그래도 상당한 실력자였을 텐데.”
마지막 대결이 어땠는지 궁금해서 물어본 건데, 아나스타샤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무슨 일이라도 있었던 걸까?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자 아나스타샤가 결승전 상대에 대해 이야기했다.
“너도 아는 사람이야. 타티아나.”
“제가요?”
조금 의아했다. 내가 아는 또래 연주자들은 정말 몇 되지 않는다. 그런데 그중 한 명이 미국에서 아나스타샤를 만날 확률이 얼마나 되지?
기억에 남아 있는 이름들을 하나씩 꼽아 보고 있는데, 아나스타샤는 미처 상상도 못했던 이름을 꺼냈다.
그 이름을 듣고, 난 이 확률이야말로 기적이 아니면 설명할 방법이 없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