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90화
너무 놀라 기겁하거나 당황스럽진 않았다. 그저 세상이 좁다던 말들이 틀린 말이 아니구나 싶었을 뿐이다. 우리는 세상 어디에서든 만날 확률이 있었다.
그 확률이 얼마나 될지 생각해 보고 있는데, 아나스타샤의 눈엔 내가 멍하니 있는 것처럼 보였나 보다.
“기억 안 나니?”
순간적으로 난 기억나지 않는다고 답할 뻔했다. 굳이 거짓말을 하려는 게 아니었는데도 버릇처럼 그럴 생각이 든다.
난 망령처럼 살면서도 최소한의 의무를 지키려 늘 애써 왔다. 지금도 여전히 그 그림자는 조금 남아 있다.
때문에 아직도 무엇이 내가 해야 할 행동인지 추종할 당위성을 찾아 멈칫거리곤 하지만…… 이제 그런 순간은 찰나에 스쳐 지나갈 뿐이다.
지금은 그런 것에 과하게 얽매어 있는 것이야말로 날 망령으로 만든다는 걸 알게 되었으니까.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기억들로 대답했다.
“기억해요…… 임세연이라는 이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단상에 오르기도 했었죠.”
“맞아, 그때도 입상했었지.”
아나스타샤는 내가 기억해 낼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손가락을 들어 서서히 위쪽으로 올렸다.
“1년 사이에 연습 열심히 한 것 같았어.”
“그땐 5위, 지금은 2위…… 그렇겠네요.”
난 그때의 세연이 연주했던 음악들을 기억하고 있었다. 음악을 제대로 배운 게 몇 달 되지 않았다고 한 건 거짓말이 아니었다. 미숙하고 허술한 연주가 그것을 증명했다. 다만 그때도 잡혀 있던 틀이 그녀를 5위로 만들어 주었다.
그리고 불과 1년 만에 세연은 국제 청소년 콩쿠르에서 2위에 올랐다. 이 성과는 단순히 몇 등을 올라간 수준이 아니었다. 콩쿠르에서 2위는 사실상 1위와 큰 차이가 없곤 하니까. 대단한 성장이었다.
아나스타샤는 내가 등수까지 말하는 걸 듣더니 살짝 놀란 것 같았다.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네? 그 애도 우승자인 널 기억하고 있었어.”
“……그걸 어떻게 아시나요?”
“무슨 말이야?”
나와 아나스타샤는 의문이 가득한 얼굴로 서로를 마주 보았다. 지금 어디서 대화가 꼬였지?
이야기의 실타래를 풀어본 나는, 내가 어디에서 착각을 하고 있었는지 깨달았다.
“두 분, 대화도 나누셨나요?”
아나스타샤가 세연을 콩쿠르 결승전에서 만났다고 했던 것보다, 지금 조금 더 놀라운 기분이 들었다.
내가 묻자 아나스타샤는 아무도 없는 주위를 괜히 두리번거리더니 작게 대답했다.
“뭐 이런저런. 왜, 이상하니?”
“아뇨, 그렇진 않은데…….”
뭔가 상상이 안 간다.
난 아나스타샤가 혼자 돌아다니는 모습을 보진 못했지만, 그녀가 평소 어떤 성격인진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다. 적어도 콩쿠르 같은 곳에서 만난 상대와 화기애애하게 이야기를 할 성격은 절대 아니다.
그래서 그냥 연주자 대기실에서 알아보고 이렇게 이야기하는 줄 알았는데…… 지금 보니 내가 단단히 착각하는 중이었다.
나도 모르게 사과부터 나왔다.
“미안해요. 아나스타샤.”
“갑자기 왜 그래?”
이 착한 애를 보면서 나 아닌 다른 사람에겐 성격 파탄자처럼 굴 거란 생각이나 하고 있다니, 스스로를 때리고 싶어질 정도였다.
그러나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을 하고 있는 아나스타샤를 두고 더 영문 모를 짓을 할 순 없었다. 난 고개를 휘휘 저어 버리곤 빠르게 말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어떻게 이야기를 하시게 되었나요?”
“그냥, 그 애가 먼저 러시아어로 말을 걸어오길래.”
“러시아어요? 설마요.”
“공부했다던데. 인사말밖에 못하긴 했지만. 그래서 나중엔 그냥 영어로 이야기했어.”
지난 1년 사이 세연은 피아노 실력만 키운 게 아니라 정말 러시아어 공부도 한 모양이다.
클래식 음악을 업으로 삼게 되면 독일어, 러시아어, 이탈리아어, 프랑스어 중 하나쯤은 할 줄 아는 게 좋다. 세연은 정말 진지하게 피아노 연주자로서 공부하고 있었다.
그런데 아나스타샤가 거기에 생각도 못 한 이유를 덧붙였다.
“있잖아, 타티아나. 네가 러시아어 배우라고 말했니?”
“예?”
어안이 벙벙해져서 되물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린지 모르겠다.
하지만 기억을 돌아보니 짚이는 곳이 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콩쿠르 당시 내가 연주자 대기실에서 반쯤 정신이 나가 있었을 때, 나와 번역기를 통해 이야기를 하던 세연은 다음엔 러시아어를 배워 오겠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내가 직접 시킨 일은 아니지만,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아나스타샤가 이어 말했다.
“그 애는 사실 너랑 이야기하고 싶어서 우리말을 배우려고 했던 걸지도 모르겠어.”
“저랑요……?”
“네 음악에 흥미가 많다고 했었거든. 전해 주고 싶은 이야기도 있고.”
“흥미…….”
머리가 복잡해져 왔다.
그때 세연이 사사 중인 박 교수님이 내 음악에 관심을 보였단 이야기도 했었지. 그러면서 그녀도 함께 흥미를 갖게 된 걸까.
내가 1년 전 생각들의 표면을 훑고 있는 사이, 아나스타샤는 보다 더 이야기의 중심으로 파고들어 왔다.
“타티아나, 너도 흥미 있지 않니?”
“…….”
아나스타샤는 나와 세연의 사이에서 뭘 읽어 낸 걸까. 사실 아나스타샤가 알 수 있는 건 굉장히 적었을 텐데, 그럼에도 그녀는 이렇게나 통찰력 있는 모습을 보여 준다.
난 잠시 고민했다. 흥미가 없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 하지만 그렇게까지 알고 싶은 건 아니었다. 세연은 같은 스승을 둔 내 사제라 할 수 있는 사람이기도 했지만, 지금 난 이렇게나 멀리 떨어져 있으니까.
“아뇨.”
“정말이니? 작년 겨울, 세연 임이 쇼팽을 연주했을 때 어땠었는데?”
“그땐 그저…….”
순간 말문이 막혔다.
세연이 연주했던 마주르카는 지금도 여전히 내 가슴 한구석을 뒤흔드는 비수로 남아 있다.
음악적인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해서 모든 게 깔끔하게 해결되진 않는다. 난 남기고 온 사람들에게 끔찍한 일을 했다는 자각을 여전히 가지고 있다. 해결할 수 없는 마음의 짐은 그렇게 쉽게 잊거나 놓아 버릴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내가 침묵하자 아나스타샤가 사과했다.
“미안해. 타티아나. 괜한 걸 물었지.”
“아니에요. 말로 설명하기 조금 어려울 뿐이에요…….”
“괜찮아.”
아나스타샤의 말은 약간 묘했다. 제대로 말해 보라 하지도 않고, 차근차근 설명해 보라 하지도 않는다. 그냥 괜찮다고 할 뿐이다.
그런데 지금 내겐 그 말이야말로 가장 필요한 말이었던 것 같다.
조금 차분해진 머리로 생각했다. 임세연, 난 그녀를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 걸까. 평범하게 사제로 대하면서 피아노를 가르쳐 주거나 하는 건 말도 안 된다. 그렇다고 무시할 수도 없고.
아나스타샤는 마치 내 생각을 들여다보고 있는 것처럼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난 그 애가 실력도 줏대도 없이 흥미나 유학 운운했다면 말도 안 섞고 무시했을 거야.”
“…….”
“그런데 그렇진 않은 것 같았어.”
아나스타샤가 세연과 잠깐 이야기한 게 아닌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난 세연과 잠깐 이야기하는 것만으로도 힘겨워서, 친구가 되고 싶다고 하는 그녀에게 딱 잘라 싫다고 말하기까지 했었다. 그땐 그게 내 의무라고 생각하기도 했고.
그런데 아무렇지도 않게 연주자 동료로서 세연을 이야기하는 아나스타샤를 보니, 내가 얼마나 겁에 질려 있었는지 느껴진다.
“타티아나, 세연 임과 다시 이야기해 볼 수 있다면…… 어떨 것 같니?”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좋은 일이겠지요.”
“좋은 일?”
“그렇지 않겠어요? 아나스타샤가 인정하실 정도의 실력까지 올라온 것 같으니…… 저도 다시 만나 보고 싶긴 하네요.”
아나스타샤는 연주자의 실력에 있어서 빈말 같은 걸 하는 성격이 아니다. 그녀가 인정하는 실력이라면 내가 보더라도 굉장한 실력일 것임이 분명하다. 솔직히 말해 조금 기대되기까지 한다.
“큰 무대에서 볼 날이 있을지도 모르겠어요.”
“…….”
예전에 들었던 세연의 음악성, 그녀 안에 자리 잡고 있던 기초, 그리고 사사하는 교수님. 마지막으로 이번 아나스타샤의 평가까지 종합하면 내 기대가 마냥 헛된 기대로 흩어져 버리진 않을 것 같단 예감이 들었다.
아나스타샤는 잠시 말없이 날 바라보았다. 세연과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고,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그녀는 목을 슥 늘어뜨리면서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이미 작년에 알았던 거지? 비록 등수는 낮았어도 그 애가 피아니스트로서 거기에서 그치지 않으리란 걸.”
항상 느끼곤 하는 아나스타샤의 예리함은 이번에도 빗나가는 일이 없었다.
난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면 그랬을지도요.”
“그러니.”
나지막한 말들이 오갔다. 아나스타샤는 내가 막연하게 세연의 재능과 장래를 기대하고 있는 게 아니라는 걸 느끼고 있다.
난 작년에 세연의 마주르카를 견디지 못하고 눈물을 보이기까지 했다. 옆에서 그걸 모두 본 아나스타샤가 내 반응을 가볍게 여기진 않을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적어도 난 아나스타샤의 연주를 듣다가 말고 눈물을 보이거나 한 적은 없었으니까.
하지만 그걸 아나스타샤가 이해할 수 있도록 적절하게 설명할 순 없었다.
연주자 임세연의 존재가 어쩌면 내 분신과 다름없을지도 모른다는 그런 무서운 생각을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그건 말로 꺼내는 게 아니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죄가 된다. 나는 더 이상 죄를 짓고 싶지 않았다.
“다음에…… 콩쿠르에서 만난다면, 대화를 나눌 시간이 있겠죠.”
지금 내가 기대할 수 있는 건 이 정도였다.
내 스스로의 문제에 대해 긴 시간 고민하다가 매듭을 지었던 것처럼, 이 또한 언젠가 똑바로 마주할 기회가 곧 찾아올 테다.
그땐 바른 답을 찾을 수 있겠지. 박 교수님이 지켜보았다는 말엔 기뻐하면서도 세연과 가까워질 기회는 밀쳐 내는, 그런 바보 같은 짓을 되풀이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난 이전처럼 아무것도 믿지 못하고 불안해하는 사람이 아니었고, 내 생각에 책임질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런데 모든 것이 이렇게 눈앞으로 확 다가오게 될 줄은 미처 몰랐다.
“다음에 말고 지금은 어때?”
“예?”
“그 애가 나랑 연락하고 싶다고 그래서 서로 연락처 교환했거든. 가르쳐 줄 수도 있는데.”
세연과 친해졌단 아나스타샤의 이야기를 믿지 못하겠다는 눈으로 바라보는 건 한 번이면 족했다.
그래도 이렇게 구체적으로 친해졌을 줄은 몰랐는데…… 아니, 구체적으로 친해진다는 게 뭐야?
당황하지 않으려고 하는데도 멋대로 생각이 빙빙 돈다.
그리고 아나스타샤의 표정도 그리 밝지만은 않았다. 굉장히 조심스럽고, 언제라도 이 이야기를 그만둘 태도다.
그녀도 내가 좋다고 냉큼 받아들이지 않을 거란 걸 직감적으로 느끼고 있는 것이다.
“…….”
그런데도 이렇게 말해 주고 그 애와 이야기할 방법도 가져와 준 건, 아나스타샤도 모종의 필요성을 느꼈기 때문이겠지.
그녀가 보기엔 유난이라 할 법한 반응을 보인 나와, 1년 사이 러시아어도 조금이나마 배워서 말을 걸려고 시도해 본 세연.
아나스타샤는 한 번 신경을 쓰게 된 사람을 그냥 아무렇게나 내버려 두는 성격이 되지 못한다.
난 그런 그녀의 고민을 그냥 내팽개쳐 버릴 수 없었다.
“지금도 하고 있나요?”
“헤어진 게 바로 어저께였는걸.”
“아, 그렇겠네요.”
난 웃으며 이야기했다. 이 이야기를 복잡하고 무겁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이야기하곤 싶어요. 하지만 그녀와 친구가 된 건 아나스타샤잖아요? 제가 말을 걸면 어색해질 거예요.”
기본적인 부분으로 돌아오자 아나스타샤도 내 마음을 느꼈는지 키득거리며 답했다.
“그 애는 안 그럴 것 같은데. 솔직히 나한테 연락처 교환하자고 한 것도 사실은 네가 목적이 아닌가 싶기도 하고…….”
“예? 그런 목적을 느끼면서도 말씀을 꺼내신 건 절 팔아넘기시려는 건가요?”
“잠깐만, 내가 말을 그렇게 했니?”
보기 드물게 당황하는 모습이 귀여워서 몇 번이나 말꼬리를 잡으며 장난쳤다. 아나스타샤는 어떻게든 수습을 해 보려 했지만 작정하고 장난을 거는 내겐 역부족이었다.
난 몇 번 그러다가 아나스타샤가 거의 더듬거리는 걸 보고는 그만두었다.
“농담이었어요.”
“나 힘들어…… 타티아나.”
“안 힘드시게 해 드릴게요.”
모든 건 내가 하기에 달려 있었다. 간단했다.
“이야기 조금만 해 볼까요……?”
“그래 볼래?”
“예. 아나스타샤가 정말 임세연을 안 좋게 생각하신다면 제게 이런 말을 하실 리도 없죠. 그렇지 않나요?”
“응. 그렇지.”
아나스타샤의 손을 가볍게 쥐었다. 그녀는 가만히 내 눈을 바라보았다.
겉으론 아무 내색도 하지 않는다. 하지만 손으로 모든 걸 전하는 우리는, 손에서 많은 걸 느낄 수 있다. 난 그녀가 자신도 모르는 무의식중에 불안감을 안고 있었음을 느꼈다.
내 불안함이 그녀에게 조금 옮겨 갔음을 느낀다.
난 그 모든 것을 떨쳐 내듯 웃었다.
“그럼 전 아나스타샤를 믿어요.”
“…….”
불안이 옮겨 갔듯, 웃음도 아나스타샤에게 번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