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91화
아나스타샤가 스마트폰으로 메시지를 보내기 시작했다.
난 이미 세연을 알고 있으니 내게 연락처를 넘겨서 내 쪽에서 말을 걸어도 되겠지만, 중간에서 소개해 주는 입장인 아나스타샤가 있다면 그렇게 할 필요는 없었다.
다짜고짜 전화를 건 다음 나를 바꿔 주는 것도 세연이 굉장히 당황할 테니, 전화를 해도 되겠냐고 물어볼 필요가 있었다.
그렇게 잠시 메시지를 주고받길 몇 분. 그냥 이렇게 메시지로 이야기를 하려나 생각하고 있는데 난데없이 전화벨이 울렸다. 놀라서 돌아보니 아나스타샤가 스마트폰 화면을 내게 보여 주고 있었다. 이쪽에서 걸 생각만 했지, 먼저 걸어올 줄은 몰라서 약간 놀란 눈치였다.
물론 이쪽에서 걸든 저쪽에서 걸든 상관없는 일이다. 난 아나스타샤가 건네준 스마트폰을 받아 들었다.
밝은 목소리가 약간 서투른 러시아어로 인사했다.
- 안녕하세요? 좋은 저녁입니다.
“……안녕하세요.”
나도 나지막이 답했다. 지금 여긴 아직 해가 떠 있는 오후였지만, 저쪽 시간으로는 한밤중이었다. 어쨌든 먼저 전화를 걸어온 걸 보면 전화하기에 불편하진 않은 것 같다.
전화 너머에서 자기소개가 이어졌다.
- 저는 임세연입니다. 타티아나 유리예브나이십니까?
“예. 그래요.”
교과서에서나 볼 법한 또박또박한 자기 인사가 어쩐지 조금 귀엽게 느껴지기도 했는데, 세연은 인사를 마치자마자 갑자기 돌변했다.
- {영어로 이야기해도 될까? 러시아어 열심히 해 보려고 했는데 내가 아직은 잘 못해서.}
“……???”
뭐야, 갑자기 왜 영어로 말하는 거야?
당황해서 나도 모르게 아나스타샤를 돌아보았다. 그녀가 무슨 문제 있냐는 듯 물었다.
“왜 그래?”
“영어로 이야기하자고 해서요…….”
아나스타샤는 지금 무슨 일인지 빠르게 설명해 주었다.
“내가 저번에 그 애한테 타티아나 너도 나만큼은 한다고 말했었거든.”
“왜 그런 말을 하셨나요? 저 영어 그렇게 잘하지 않아요.”
“성적은 나보다 좋잖아?”
“그건 그저 성적일 뿐이죠.”
내가 아나스타샤보다 영어 교과목 성적이 좋은 건 사실이다. 하지만 러시아어는 기본으로 하면서 해외를 다니며 영어를 배운 아나스타샤와, 살기 위해 러시아어를 집중적으로 익히면서 영어는 성적 때문에 공부한 내가 같은 수준일 리 없었다.
모든 기억이 합쳐진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난 언제나 영어에 그다지 관심이 없는 사람이었다.
상황을 이해했는지 아나스타샤가 사과했다.
“미안해. 안 되겠니?”
이제 와서 안 되겠다고 덮어 버리기엔 늦었다.
“……해 볼게요.”
솔직히 말하자면 세연과 하는 대화를 잘 하지도 못하는 언어로 하긴 부담스러웠지만, 그래도 용기를 내 보기로 했다. 괜히 더듬거리지만 않으면 괜찮겠지.
{미안해요. 저 영어는 잘 못해요.}
- {나도 잘 못해. 간단한 회화만 하면 괜찮아.}
세연의 맑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어쩐지 마음을 편하게 해 주는 소리였다.
그녀는 대화를 주도해 나가야겠다고 생각했는지 먼저 말했다.
- {타티아나. 너와 이렇게 빨리 이야기할 기회가 올 줄은 몰랐어. 꿈만 같아.}
분명 그때도 이렇게 이야기하고 싶다고 하긴 했었지만……. 사실 내가 악보를 보자마자 갑자기 무너져 내렸던지라 약간 미친 애처럼 보였을 텐데, 전혀 내색하지 않고 이런 말을 해 주는 게 고맙기도 하면서 조금 부끄럽기도 하다.
난 세연에게 상당히 이중적인 마음을 가지고 있다.
때문에 일부러 딱딱하게 대꾸했다.
{현실이에요.}
- {아나스타샤도 비슷한 이야기를 했었는데.}
세연은 아랑곳하지 않고 웃음기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모든 건 다 기적이 아니라는 아나스타샤의 말이 꽤나 인상 깊었던 것 같다.
난 조금 늦었지만 세연에게도 축하를 전했다.
{텍사스에서 좋은 실력을 보여 줬다고 아나스타샤에게서 들었어요. 축하해요.}
- {고마워. 타티아나.}
세연은 가볍게 내 축하에 답사했다. 순간적으로 난 느꼈다. 이미 텍사스에서의 결과는 세연에게 큰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는 걸. 자랑스러움이나 아쉬움, 그런 것들은 이미 상패와 함께 선반에 장식해 놓는 것으로 끝났다.
그녀에게 중요한 건 바로 지금, 그리고 내일부터 이어질 미래였다.
세연은 무언가를 다짐하듯 이야기했다.
-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지금까지…… 1년 정도 지났네. 다음 1년은 또 다를 거야.}
{기대하고 있어요.}
- {응. 연습도 더 해야 하고 레슨도…… 열심히 받아야지.}
연주자로서 정말 올바른 마음가짐이어서 무언가 좋은 말이라도 해 주고 싶은데, 약간 걸리는 부분이 있어서 말이 쉽게 나오지 않았다.
원하는 말들은 제대로 나오지 않고, 나도 모르게 바보 같은 소리가 나왔다.
{한국에서 공부 중이신가요.}
- {그대로야. 저번에 말했었지? 본선 무대에 오르기도 전에 네 연주가 나보다 낫다고 했던 우리 교수님.}
그런데 내 바보 같은 소리가 세연에게 가 닿은 후에야, 나는 내가 정확하게 무엇을 물어보고 싶었던 것인지 깨달았다.
시간도 오래 지났고, 세연도 있으니 괜찮으시겠지.
그런데도 내 입은 멋대로 움직였다.
{건강히 잘 지내고 계신가요?}
세연의 말소리가 멎었다. 황당해할 만도 했다. 입장을 바꿔서 나라고 하더라도 세연이 갑자기 미하일 선생님의 안부를 묻는다면 왜 그런 걸 궁금해하는지 의아해할 테니까.
그래도 세연은 명료하게 내 의문에만 답해 주었다.
- {……잘 지내고 계셔.}
안도의 한숨을 내쉴 뻔했다가 간신히 참았다.
지금 세연에게 이런 걸 묻는 것 자체에서 죄책감을 느낀다. 은사께서 건강하신지, 옛 친구는 잘 있는지. 내겐 그런 걸 알 자격도 없을 테다.
“…….”
그러면서도 동시에, 그냥 궁금해서 알아보는 게 뭐 어떻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뭐가 그리 큰 문제일까. 잘 지낸다는 말을 듣는 것만으로도 안도할 수 있다면.
늘 겁을 먹고 있는 나와 달리, 파란색을 좋아했었던 그녀는 용감하기도 했다. 1년 전엔 전혀 할 수 없었던 생각들이 그녀에게서 영향을 받아 생겨났다.
그래도 일방적으로 휩쓸려선 안 된다. 어디까지나 난 보라색으로 살기로 했으니까.
{저기…….}
그러면 보라색은 무슨 말을 해야 하는 걸까.
대체 어디에 선을 놓아야 하는 거지.
내가 갈피를 못 잡고 말끝을 흐리자 세연이 조곤조곤하게 말했다.
- {듣고 있는 중이야.}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영어가 서툴러서…….}
이대로 말실수라도 한다면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실수가 커질 것 같단 직감이 들어 일단은 한 걸음 물러서는 쪽을 택했다.
알고자 한다면 나중에라도 알 수 있겠지. 1년 전엔 절대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이젠 그렇지 않다. 그걸로 충분했다.
세연은 갑자기 까르르 웃음을 흘리더니 내 말에 동조했다.
- {나도 전하고 싶은 말이 많았었는데…… 갑자기 아무 생각도 안 나. 왤까?}
{아하하, 그런가요?}
- {응. 그냥…… 나 원래 안 이러는데.}
{전화상이라서 그럴지도요.}
- {그런가?}
우리는 여전히 약간 어색하면서도 서서히 다가가고 있었다. 실없는 대화와 웃음이 서로 간에 오가면서 조금씩 이어져 갔다.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세연의 성격이 한몫했다.
- {언젠가 직접 이야기했으면 좋겠어. 아마 내가 러시아로 가게 되겠지?}
{언젠가…… 언제요?}
- {어, 콩쿠르나…… 네가 연주회 같은 거 할 때?}
친해지는 데에 적극적인 건 좋지만, 갑자기 이렇게 말할 줄은 몰랐다. 갑자기 현실적인 생각이 든 내가 답했다.
{전 콩쿠르는 이해할 수 있지만, 연주회는…… 비행기 티켓이 연주회 티켓보다 훨씬 더 비쌀 텐데요?}
- {그 정돈 괜찮은데?}
세연은 연주회를 보러 러시아에 가는 게 뭐가 문제냐는 듯 물었다. 비행기 티켓이 감당 못 할 정도로 비싼 건 아니지만, 그래도 꽤 부담될 텐데 전혀 신경 쓰지 않는 태도였다.
정말 괜찮은 걸까? 글쎄, 그냥 해 본 말일지도.
누구나 듣고 싶어 할 유명 연주자의 연주회라면 지구 반대편이라도 날아가는 게 가능할지 모르겠지만, 난 그런 사람이 아니다. 겨우 열여섯 살 연주자일 뿐.
때문에 비행기를 타고 와서 연주회를 봐 달라 할 정도로 자신 있게 이야기할 수 없다.
그러면 내가 여기서 세연의 적극성에 어울리는 건 어쩌면 괜히 그녀를 곤란하게 만드는 일일지도 몰라.
그래도 혹시나 싶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냥 언젠가라는 한 마디에 희망을 걸고 시간을 보낸다면 후회할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난 그런 약속들이 대부분 지켜지지 않는다는 징크스를 믿고 있기도 하고.
때문에 난 조심스레 제안이라도 해 보기로 했다. 이전 같았으면 상상도 못 했을 일이었다.
{저기, 세연. 혹시 괜찮다면…… 제가 연주회 티켓을 드린다면 어때요? 오실 생각 있나요?}
- {……연주회 해? 정말로?}
{예. 바로는 아니고요. 몇 달 뒤에.}
- {갈래!}
조금 걱정했던 것과 다르게 세연의 반응은 격렬했다.
거의 당장 오겠다는 투여서 약간 당황하고 있는데, 그녀가 이어 물었다.
- {정말 티켓 주는 거야?}
{물론이죠. 그런데…… 제 연주회보단 훨씬 더 유명하신 분들도 많으니까요. 모쪼록 그 시기에 하는 다른 연주회도 예약을 하셔서…….}
- {솔직히 난 네 연주회가 제일 보고 싶었어.}
내 연주회에 국한될 필요는 없다고 기본적인 틀을 잡고 가려는데, 세연은 다른 연주자들은 관심 없다는 듯 말했다.
물론, 몇 초 지나지 않아 곧바로 사과했다.
- {아니, 다른 분들이 어쨌단 건 아니고 그게…….}
순간적인 말실수로 횡설수설하는 게 웃기기도 했지만 난 그녀의 진심을 이해했다.
괜찮다는 의미로 웃으며 말했다.
{알겠어요. 두 장 준비해 놓을게요.}
- {두 장?}
이번엔 내 말실수였다. 난 세연이 더 이상함을 느끼기 전에 빠르게 이어 말했다.
{그, 아니요. 부모님과 함께 오시면 세 장이면 될까요?}
- {한 장이면 될 것 같아. 우리 엄마랑 아빠는 자기 딸 연주회에서도 조는 분들이라서 안 돼.}
{아하하…….}
대충 웃음으로 얼버무리면서 잘 넘어간 것 같아 다행이다.
세연은 내가 연주회에 개인적으로 초대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들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내가 그녀에게 얼마나 잘 해 줄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지금은 이 정도가 좋을 것 같다.
슬슬 통화도 길어졌다. 난 이야기를 마치기 위해 말했다.
{나중에…… 일정이 나오면 말해 줄게요. 아, 다음엔 메신저로 할까요? 저희가 쓰는 건 조금 다르긴 한데.}
- {메신저?}
{국제전화비를 아끼려면…….}
국제전화라는 단어를 발음하자마자 저편에서 창백하게 질려 가는 세연의 반응이 느껴졌다.
연주회 보러 비행기 티켓을 끊는 건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면서 국제전화요금엔 식겁하는 게 약간 이상하기도 하지만, 어쩐지 이해가 될 것 같기도 했다.
- {타티아나.}
{예?}
- {이 전화…… 내가 걸었지?}
{그렇죠?}
- {그건…… 다행이네…….}
세연은 뭔가 중얼중얼하더니 빠르게 말을 맺었다.
- {그럼 다음엔 그렇게 하자. 응. 알겠어.}
{또 이야기해요.}
- {바이바이.}
{예, 바이바이.}
갑자기 세연이 전화를 걸어온 것처럼, 끝나는 것도 갑자기 끝났다.
온통 영어로만 대화한 나는 전화를 끊고도 정확히 무슨 대화를 나눴었는지 똑바로 정리가 안 되어서 스마트폰을 들고 한동안 멍하니 있었다.
그런데 문득 이상한 기색이 느껴졌다. 옆을 보니 아나스타샤가 웃고 있었다. 왜 저런 표정인지 모르겠다.
“……왜 그러시나요? 제 영어 이상했나요?”
이상했겠지. 하지만 아나스타샤가 그런 걸로 날 놀리리라곤 생각하긴 힘든데……
그런데 그녀는 상상도 못한 대답을 건넸다.
“응? 전혀. 이상한 게 아니라 귀여웠는데.”
“……예?”
황당해져서 되묻자 아나스타샤가 손가락을 빙빙 돌리며 말했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외국어로 말할 땐 성격 바뀌잖아? 그렇지?”
“맞아요.”
언어가 성격에 영향을 미친다는 건 사실이었다. 예컨대 리처드는 러시아어로 말할 때 조금 시큰둥하고 무뚝뚝한 평범한 어투이지만 영어를 할 땐 깜짝 놀랄 정도로 우아하고 고풍스러운 어투를 사용하곤 한다.
아나스타샤가 키득거리며 웃었다.
“너 영어로 말할 땐 차분한 게 없어져서 그런가, 다섯 살쯤 어려진 것 같았어.”
어이가 없는 평이었는데, 딱히 반박할 수가 없었다. 내 회화 실력은 실제로 그 정도였을 테니까.
갑자기 확 부끄러워졌다. 대체 뭘 한 거지. 그냥 못하겠다고 할 걸.
아나스타샤는 눈치도 없이 옆에 다가오더니 내 팔을 잡고 흔들거렸다. 아니, 눈치가 없는 게 아니라 무언가 작정한 눈빛이다.
“다시 해 볼래? 응?”
“시, 싫어요.”
“내가 말상대 해 줄게. 영어도 배우고 싶잖아?”
“안 배울 건데요?”
“어…… 지금 비슷했는데?”
“아나스타샤!”
결국 내가 소리를 치자 아나스타샤는 깔깔 웃으며 휙 벗어났다.
연습실 저편으로 떨어진 아나스타샤는 아예 도망치진 않고 거기에서 날 지켜보았다. 난 그녀가 왜 이렇게 장난을 치는지 알 것 같아서 그만 따라 웃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