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92화
웃고 있는데도 아나스타샤는 다시 확인하듯 물었다.
“화났니?”
“아뇨.”
“미안해, 일부러 그런 건…… 맞지만 네가 어리다고 말한 건 잘못이었어.”
내가 개의치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아나스타샤는 스스로 그어 놓은 선에서 넘어갔다고 생각하는지 내게 다시 사과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그러면서도 무의식적으로 한 게 아니라 장난을 치기 위해 일부러 했다는 게 아나스타샤답다. 잘못 들으면 계속 놀리는 말로 들릴 수도 있지만, 난 그녀가 그런 뜻으로 말한 게 아니라는 걸 안다.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일부러 그런 거라면 괜찮아요.”
“용서해 주는 이유가 조금 이상하지 않니?”
“제 마음이잖아요?”
“아하하하하.”
괜한 오해를 내가 멀리 치워 버릴 때, 아나스타샤는 시원하다는 듯 이렇게 웃곤 했다.
한참을 웃던 그녀가 날 바라보았다.
“그래서…… 세연 임에게 연주회 티켓 주기로 한 거니?”
“예, 러시아에 올 이유를 찾고 있는 것 같아서…….”
“만들어 준 거네?”
“만들어 주었죠.”
아나스타샤에겐 내 목소리밖에 들리지 않았을 텐데, 그럼에도 그녀는 나와 세연의 대화 전체를 이해하고 있는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살며시 웃었다. 그럴 줄 알았다는 눈빛.
“역시 연주자라면 누구라도 돕는구나.”
“돕다니요, 그렇지 않아요. 어차피 비행기 티켓이 더 비싼걸요.”
“그 애는 그런 거 신경 쓰지 않았을 것 같은데.”
아나스타샤는 세연에 대해 상당히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그녀는 손등을 내려다보며 이어 말했다.
“우리나라 문화나 예술에 관심이 있는 거라면…… 아무래도 상관없었겠지. 오고 싶을 때 오면 되니까. 그런데 세연 임은 그런 사람이 아니었어. 그래서 초대가 필요했던 거고.”
물론 클래식 연주자로서 러시아 음악에 관심이 없을 리 없지만, 다른 연주자들은 관계없다고 단호하게 말하던 목소리를 떠올려 보면 확실히 세연에게 필요했던 건 나나 아나스타샤의 초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아나스타샤가 넌지시 물었다.
“이야기해 보니 괜찮았었나 봐?”
실제로 세연을 초대한 건 나였다. 그것도 내 연주회에.
난 세연의 목적을 상당히 정확하게 느끼고 있었다. 악의 같은 게 있다는 건 결코 아니다. 그저 그녀가 이유를 필요로 한다는 말인즉슨, 그 전에 목적이 존재한단 말이었다.
이 나라가 아닌 한 사람에게 향하는 목적. 그 한 사람이 나라는 사실은 당연하게 여겨지면서도 약간 두렵기도 하다.
결국 음악의 세계에서 벗어나지 못했으니, 이 모든 것이 전부 운명이자 인과라면 난 무얼 해야 하는 걸까.
“…….”
홀로 생각하던 나는 그냥 괜찮은 사람이었던 것 같다고 이야기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아나스타샤도 방관자가 아니다. 아마 적극적이었던 건 세연 쪽이었겠지만, 아나스타샤가 그녀를 무시하지 않고 나에게까지 이어 줬던 건 그냥 괜찮은 연주자 같아 보여서가 아니었다.
그러니 난 최소한의 사실은 아나스타샤에게 이야기할 필요가 있었다. 이번만큼은 그래야겠다 생각했다.
난 되도록 감정을 싣지 않고 말했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잘 모르겠어요.”
“…….”
아나스타샤는 일순 당황한 표정을 보였다. 내가 이렇게 부정적으로 들리는 말을 할 줄은 몰랐던 것 같다. 애초에 난 다른 사람을 부정적으로 말하지 않는 편이었으니까.
하지만 놀라는 것도 잠시, 아나스타샤는 차분하게 내 이야기를 들어 주었다. 난 이어 말했다.
“전 임세연이라는 연주자를…… 사람을 잘 모르니까요. 하지만, 그렇기에 저 역시 이유를 찾고 있었던 것 같아요.”
세연이 그녀의 스승이 흥미를 가진 음악에 접근하려 하는 것처럼, 나도 비슷했다. 이 흥미는 인간적인 것과는 거리가 좀 멀다고 생각한다.
아나스타샤는 다시 한 번 물었다.
“그 애와 친해질 이유를?”
“그녀와 친밀해지는 건 제 목적이 아닐 거예요.”
“…….”
난 확실하지 않은 걸 확실하지 않은 어투로, 그 어떤 말보다 확신하는 것처럼 말했다. 그리고 곧바로 후회했다. 이렇게까지 말할 필요는 없었는데.
침묵하는 아나스타샤를 보니 조금 우울해졌다. 난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저도 참 못났네요. 화가 나요.”
세연과 만나고자 하는 목적이 무엇인지, 아직도 분명하지 않다.
차라리 일부러 말했다면 또 모를까. 무의식중에서 티켓을 두 장 주겠다고 한 시점에서 글러먹었을지도 모르겠지만, 난 내가 그렇게까지 양심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면 지금 이렇게 잔인하게 말할 것도 없었다. 세연과 친해질 수도 있는 건데, 왜 이렇게 말해야만 했을까.
이래서야 1년 전에 잔뜩 겁을 먹고 우린 친구가 될 수 없다고 딱 잘라 말했던 것과 뭐가 다른 건지 모르겠다.
“타티아나.”
“……예.”
그러나 지금, 나보다 훨씬 어른스러운 내 친구는 언제나 그랬듯 쾌활한 미소와 함께 말했다.
“뭐라도 상관없어. 그래서 오늘 그 이유를 서로 찾았잖아? 앞으로 잘 될 거야.”
“정말요……?”
“응.”
그녀는 맹목을 주의하라 하곤 했지만, 종종 이럴 때마다 난 아나스타샤를 맹신했다.
가만히 날 바라보는 아나스타샤의 눈빛은 내 생각을 거의 꿰뚫어 보는 것 같았지만, 그녀는 그 이상 내게 주의를 주거나 하진 않았다. 다만 웃으며 말할 뿐이다.
“그러면…… 이젠 정말 연주회를 잘 준비할 일만 남았네? 타티아나.”
“그렇겠네요.”
“연습은 얼마나 했니? 나도 네 연주 들어 본 지 꽤 된 것 같아서…… 조금 듣고 싶은데.”
아나스타샤는 눈앞의 목적에 내 초점을 고정시켰다.
난 고개를 끄덕이곤, 피아노 앞에 앉았다.
***
4월이 되었다.
날씨는 한층 더 포근해졌다. 이젠 한밤중에도 영하로 떨어지지 않고, 한낮엔 10도 이상으로 올라와서 따스한 봄 날씨였다.
학생들의 옷차림도 조금 더 간소해졌다. 코트와 모자는 보이지 않았다. 군청색의 교복만이 북적거린다. 몇몇은 아예 재킷을 벗고 조끼만 입고 다니기도 했다.
“…….”
아무리 그래도 아직 저렇게 다니기엔 추운데.
난 이젠 찬바람 좀 쐬었다고 감기에 걸리거나 하진 않지만, 그래도 추위를 잘 견디는 편이 아니었다. 아마 하복을 입을 때까지도 이렇게 다니지 않을까 싶다. 단정해 보이기도 하고.
선선한 복도를 걷다 보니 어느새 익숙한 문 앞이다.
노크를 하면 늘 기다리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안녕하세요. 미하일 선생님.”
“그래. 일찍 왔구나, 타티아나.”
겨우 10분 정도 일찍 온 건데도 미하일 선생님이 굉장히 반가워하신다는 게 느껴졌다. 선생님은 곧장 찻물을 끓이고 날 위한 찻잔을 준비하셨다.
“영화는 어땠니.”
선생님과 첫 이야기는 늘 학교생활과 동떨어진 이야기로 시작된다. 책, 방송, 영화 등등. 그 주제는 한계가 없다.
처음엔 상식이 부족한 날 위해 레슨 전에 다양한 대화를 하며 인문학적 배경을 쌓는 걸 도와주시려는 목적이었다. 하지만 기본적인 상식 정도는 생긴 지금도 이 시간은 변함없이 계속되었다.
난 지금도 여전히 선생님에 비하면 상식이 부족하고 음악 외에도 배워야 할 것들이 무궁무진하게 많기 때문이다.
차를 마시며 이번에 본 영화 이야기, 소설 이야기 등을 하다 보면 30분 정도는 금방 지나간다. 선생님은 마지막으로 또 몇 개나 되는 작품들을 추천해 주시곤 찻물을 비웠다.
“슬슬 과제곡은 얼마나 완성했는지 볼까. 타티아나.”
“예, 선생님.”
티타임이 끝나면 레슨 시간이다.
난 선생님에게 받은 과제곡들을 연주했다. 선생님은 내가 지난 가르침을 제대로 이해했는지 똑바로 들어 주시곤, 이번엔 어떤 방향으로 곡의 완성도를 높여 나가야 좋을지 지도해 주신다.
레슨을 받다 보면 혼자서 연구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속도로 곡이 발전해 나가는 게 시시각각 귀에 들릴 정도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멈칫하는 순간이 있는데, 내 개인 연습이 필요한 순간이다.
“자, 그 부분은 다음까지. 알겠지?”
“예.”
미하일 선생님도 정확하게 그 부분을 캐치하고는 숙제를 내어 주셨다. 이미 2년 가까이 레슨을 받다 보니 척하면 척이었다.
그렇게 과제곡들을 레슨 받고 나면 보통은 끝이겠지만, 난 선생님과 해야 할 일이 더 남아 있었다. 바로 연주회에 올릴 곡들은 레슨 받는 것이다.
“오늘은 앞의 두 곡만 해 보자꾸나.”
한 번에 2시간 넘는 모든 프로그램을 통째로 연습하고 한꺼번에 레슨 받으면 효율이 떨어지니, 이렇게 나누어서 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렇게 나눠서 몇 곡만 레슨을 받아도 시간은 부족했다.
난 최근 연습 중인 곡들을 선보이고, 지도를 받아 다시 피드백했다. 모든 신경을 집중하며 몇 번 반복하면 시간이 어떻게 흘러가는지도 잘 모르겠는 기분이 든다.
“이쯤 할까.”
그제야 시간을 보니 레슨을 마쳐야 할 시간이었다. 마음 같아선 오늘 저녁때까지 봐 달라 하고 싶지만, 미하일 선생님의 제자는 나 혼자가 아니다. 괜히 미적거리면 내 다음 순번 학생에게 피해가 간다.
마지막으로 짧은 시간 동안 배웠던 것들을 되새기면서 건반을 노려보고 있자니, 미하일 선생님이 웃었다.
“준비는 착실하게 되어 가는 것 같아 걱정이 별로 없구나.”
나만 걱정이 많은 건가……?
아니, 선생님이 걱정이 많다 하시면 그거야말로 큰 문제니까 지금은 괜찮은 거겠지.
미하일 선생님은 다시 끓인 홍차로 목을 축이시곤 하나하나 내 연주회를 구성하는 것들을 꼽아 보셨다.
“프로그램도 좋고 홀도 문제없고, 이번에 맡긴 에이전시도 잘해 주고 있고…… 아, 그래. 타티아나. 베르너가 그러더구나. 초대할 사람이 몇 명쯤 되는지 대략적으로 알려 달라고 말이다.”
이번 내 연주회의 거의 모든 행정은 라파 에이전시의 베르너 위넬이 맡아 주고 있었다.
이번 한 번만 계약한 상태이긴 한데, 앞으로도 영향이 있을 거라 생각하는지 베르너는 작은 독주회임에도 불구하고 열성적으로 일해 주고 있었다.
이야기를 들어 보니 슬슬 티켓이 준비//될 것 같다. 난 잠시 생각해 보았지만 티켓을 줄 사람이 너무 많아서 한 번에 정리되지 않았다.
“아직 확실하게 정해지진 않아서…… 연락을 조금 해 봐도 될까요?”
“그러려무나. 이번 주 안에만 알려 주면 될 것 같구나.”
“알겠습니다.”
“좋아…… 다음에 보자. 타티아나.”
난 마지막으로 선생님께 인사를 드리고 복도로 나왔다.
아무 생각 없이 걸으면서 난 몇 명이나 초대해야 할지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일단 가족들과 친구들, 그리고 마카로프 프로듀서. 이번엔 세연까지. 가능하다면 여유분도 한두 장 정도……
“어디 가?”
“!!”
머릿속에 꽉 차 있던 생각들이 한순간에 펑 하고 터졌다. 난 소스라치게 놀랐다가, 날 부른 게 누군지 확인하고는 간신히 진정했다.
“아…… 에르네스트.”
“레슨 끝났어?”
“예. 방금요.”
“그렇구나.”
멍하니 걷고 있는 걸 보곤 뭐 하나 궁금했나 보다.
에르네스트는 막 납득한 것처럼 고개를 끄덕이더니, 난데없이 이어 물었다.
“그런데 야단이라도 맞았어?”
“……예??”
“정신없는 것 같아 보여서. 왜 아무도 없는 복도 구석으로 가는 거야?”
그제야 앞을 보니 정말 막다른 복도 끝 방향이었다. 누가 보면 정말 오해할 만도 하…….
“그, 그런 거 아니에요.”
“그런 거라니?”
“그…….”
죽는 한이 있어도 내 입으로 말할 순 없었다. 지금 대체 무슨 오해를 하고 있는 거야?
난 변명처럼 말하는 대신 자세를 똑바로 하며 에르네스트를 흘겨보았다.
“레슨은 잘 받았으니 걱정 마세요. 그냥 지금은 연주회 일로 누굴 초대할지 생각 중이었으니까요.”
“음…… 그래. 난 이만 가볼게.”
“……왜 그러시나요?”
갑자기 와서 말을 걸더니 이젠 또 그냥 가겠단다. 대체 뭐 하자는 건지 모르겠다.
그런데 에르네스트에겐 나름의 이유가 확실했다.
“옆에서 헛소리하면 내 이름 뺄까 봐.”
“…….”
그 말은 꼭 자기 티켓도 준비해 달라는 것처럼 들리긴 했지만, 웃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잘 모르겠다.
난 어이가 없다는 투로 물었다.
“그날 초연하는 곡도 있는데, 작곡가 본인이 빠질 수 있나요?”
“그것도 그런가?”
“아무 생각 없으시죠?”
“……내가 방금 야단맞았냐고 해서 이러는 거야?”
말이 약간 심했나.
더 쏘아붙이지 못하고 주저하니 에르네스트가 피식 웃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아무 생각도 없는 게 아니라는 듯 말했다.
“그건 그렇고…… 곡 제목은 지었어?”
“…….”
아무 생각 없는 건 사실 내 쪽이었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