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493화 (493/1,277)

##  493화

에르네스트가 내게 곡을 헌정해 주는 데엔 조건이 있었다. 바로 제목을 지어 달란 것이었다.

작곡가가 직접 제목을 짓지 않고 그것을 초연하는 사람에게 맡겼다. 이건 사실 너무 관대하다 못해 아예 조건이라 할 수도 없었다. 작곡가로선 정말 큰 부분을 위임한 것이다.

하지만 제목 짓기가 요 근래 실제로 날 괴롭힌 것 역시 사실이었다.

“…….”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 슬슬 제목이 나와야 하는 건 맞다. 연주회 티켓이 준비될 참이니 포스터도 나올 테고, 그렇다면 포스터에 곡 제목이 들어가야 하니까. 하지만 난 아직도 제대로 갈피를 못 잡고 있었다.

음악이 아닌 곳에 신경을 쓰는 것이 힘들기도 하다. 하지만 난 약간의 불만도 말할 수 없었다. 막말로 정 못 하겠으면 대충 아무렇게나 제목을 짓는 게 아니라, 내가 능력이 모자라서 못 하겠으니 마무리를 지어 달라고 에르네스트에게 정확하게 말해야 했다.

그런데 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곡 연습에만 시간을 쏟고 있었다.

에르네스트는 무표정한 얼굴로 서 있었다. 이대로 멍청하게 있지 말고 뭐라도 말을 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게…….”

“…….”

그런데 막상 시간이 더 필요하다고 하려니 말이 잘 안 나왔다. 미칠 것 같다.

에르네스트는 한참이나 있다가 웃었다.

“곡이 난해하긴 하지?”

저번에 칠 만하다고 했던 것에 대한 복수인가?

사실 그렇게 난해한 곡은 아니었다. 이해하기 쉬운 아름다운 주제들이 악장을 이루며 거대한 주제를 이룬다. 그런데 그 주제를 뭐라 칭해야 할지 내 부족한 어휘력으론 한계가 있었다.

난 한숨을 푹 쉬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냥 솔직하게 말해야겠다.

“되도록 신중하려고 해요.”

“너무 그럴 것도 없는데.”

“그래도 순수음악에 제목을 붙이는 일이잖아요.”

내가 그냥 바보 멍청이라서 몇 글자 되는 제목도 똑바로 못 붙이고 여태 갈등하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오해다.

난 그간 배웠던 모든 음악이론과 감상이론 등을 총동원 하고 있었다.

“표제음악이라 생각하고 주제를 따라가면 앞으로도 제 해석에 곡 전체가 고착될 테니…… 그럴 순 없어요. 그러니까 되도록 유연하면서도 포괄적으로 해야…….”

“하하하, 하하하하.”

“?”

내가 어떻게 제목을 지으려 하고 있는지 좀 두서없이 이야기하고 있는데, 갑자기 에르네스트가 크게 웃었다. 난 당황해서 말을 뚝 멈췄다.

멀거니 바라보니 그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정말 너한테 주길 잘했어.”

“…….”

이렇게 기분 좋게 웃는 모습을 보니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렇다고 마주 웃자니 바보 같을 것 같고. 난 그냥 무슨 말인지 설명해 보라는 뜻으로 가만히 바라보았다.

에르네스트는 복도 저편을 엄지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레슨실이 있는 방향이다.

“난 네가 혹시 미하일 선생님과 상담해서 그 곡의 제목을 완성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도 했었거든.”

“……그럴 리가요.”

“정말 무례한 생각이었네.”

에르네스트가 사과했다. 난 짧게 대꾸했다.

“약속은 지킬게요.”

그는 내게 곡을 헌정했고, 난 그에게 이 곡의 제목을 지어 주기로 했다. 물론 반드시 혼자 하겠단 조건은 없었으니까 억지를 쓰자면 선생님들의 도움을 구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난 그건 약속을 어기는 일이라 생각하고 있다. 나 혼자 해내고 싶기도 했고.

쓸데없는 고집일지도 모르겠지만, 적어도 에르네스트는 그걸 고맙게 여기는 것 같다. 내가 고개를 치켜들자 에르네스트가 물었다.

“레슨도 안 받는 거야?”

“그냥 제가 연주한 것에 대한 평가만 받고 있어요.”

미하일 선생님도 에르네스트가 준 곡에 대해선 전체적인 분위기나 뉘앙스 등만 감상으로 말해 줄 테니 해석은 처음부터 끝까지 혼자 해 보라 말씀하셨다. 그것도 연주자가 해 봐야 할 일이니 이번 기회를 잘 살려 보라는 것 같았다.

그 후로 선생님은 단 한 번도 감상을 넘어선 레슨을 한 적이 없었다.

내가 어떻게 곡을 만들어 나가고 있는지 들은 에르네스트가 미소를 지었다.

“지금 그 곡이 어디까지 갔을지, 갑자기 궁금해지는데.”

궁금하다고? 난 눈을 빛내며 바로 제안했다.

“보여 드릴까요.”

“지금?”

“예. 지금. 상관없어요.”

에르네스트에게 연주를 들려주면 그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아도 힌트를 굉장히 많이 얻을 수 있을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다른 사람이라면 안 되겠지만, 그는 뛰어난 연주자이면서 동시에 작곡가 본인이니까 괜찮지 않나?

하지만 지나치게 기대를 보인 탓이었을까, 에르네스트의 미소가 짙어졌다. 그는 슥 다가오더니 똑똑히 말했다.

“안 듣는 게 낫겠어.”

“……왜요?”

“그 편이 훨씬 나을 것 같아서.”

“무슨 말씀이세요? 작곡가이시잖아요.”

그냥 날 철저하게 내버려 두려는 건가 싶어서 다시 말했지만, 그런 의도로 보이진 않았다.

에르네스트의 얼굴엔 지금까지 한 번도 보지 못한 기대감이 서려 있었다.

“글쎄, 어차피 듣는다고 해서 할 말도 없을 거야. 난 그 곡 다 쓰고 나서는 직접 쳐 본 적도 없거든.”

“정말이신가요?”

“응. 그러니까 이미 네가 나보다 훨씬 잘 연주할 거란 게 분명하지. 내가 끼어 봐야 방해만 돼.”

너무 확신에 찬 어투여서 난 한 마디도 반론을 말하지 못했다. 에르네스트는 지금 내 연주를 듣지 않는 행위가 음악에 도움이 되리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음악에 대해 그가 말하는 것들은 대부분 옳다.

멍하니 바라보니 그가 손을 저었다.

“그러니까, 난 그냥 네 무대에서 듣고 싶어.”

“…….”

“너무 부담 주는 거야?”

잘 모르겠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그는 맛있어 보이는 건 아껴 놓는 타입임이 분명했다.

그런 생각을 하니 조금 재미있기도 했다. 난 가볍게 웃으며 대답했다.

“아니요, 전혀.”

“고마워.”

지금 에르네스트는 내게 곡 한 곡을 준 것 이상을 맡기고 있다는 걸 알고 있다. 내가 그것을 얼마나 중요하게 여기는지 알고, 때문에 고마워한다.

하지만 난 그가 날 이만큼 믿는다는 것 자체에 형언할 수 없는 감사함을 느꼈다. 연주자로서 이 정도의 신뢰를 받는다면 못 할 것이 없어야 한다.

***

루슬란은 정말 오랜만에 평화로운 늦은 오후를 보내고 있었다. 늘 학과 공부에 아버지가 내 주는 공부까지 하느라 머리가 터질 지경이었는데, 오늘은 어쩌다 보니 운 좋게 모든 과제가 마무리되고도 다음 과제가 쥐어지지 않은, 황금 같은 타이밍이었다.

“…….”

하지만 멍하니 있는 것 말고 달리 할 일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게임을 할 생각도 들지 않았고, 어딘가 나가자니 같이 갈 사람도 없었다.

물론 집엔 귀가한 타티아나가 있긴 하지만…… 그 애는 늘 바쁘니까.

“흠.”

사실 이것도 일종의 핑계이긴 했다. 타티아나가 아무리 자기 일로 바쁘더라도 잠깐 같이 바람이나 쐬러 가자고 하면 절대 거절하지 않는다는 것 정도는 이제 알기 때문이다.

그건 기억이 돌아온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타티아나의 행동엔 전혀 변함이 없다. 그렇지만 이젠 기억도 멀쩡한 동생을 데리고 돌아다니자니, 그 애가 속으론 어떻게 생각할지 조금 무섭다.

물론 남매 사이가 불안하게 보이진 않는다. 루슬란은 타티아나와 서로를 용서했을 때를 똑똑히 기억한다. 타티아나는 부정적인 감정을 내보인 일이 없이 깔끔하게 루슬란을 가족으로 대했다.

하지만 그것도 그 애가 참을성이 강해서일지도 모르잖은가?

“…….”

루슬란에겐 늘 그러한 불안감이 있었다. 타티아나는 여전히 이 저택을 자기 집으로 여기지 않지만, 아버지와 루슬란에게 상처를 주지 않겠다는 이유만으로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타티아나는 떠나지 않겠다고 말했지만, 어느 날 그녀가 마음이 바뀌어 훌쩍 떠나겠다고 한다면 루슬란은 죽고 싶은 심정이 들 것 같았다.

이런저런 생각에 갑자기 마음이 복잡해진 루슬란은 소파에서 고개를 들었다.

어쩐지 들려야 할 소리가 안 들리고 있는 것 같은데.

“뭐지?”

피아노 소리가 없었다.

학교에서 돌아온 타티아나는 저녁 식사 직전까지도 피아노 연습을 한다. 별관의 연습실은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늘 이 시간이면 아련하게 피아노 소리가 들려와야 정상이었다.

그런데 아무리 귀를 기울여 봐도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냥 쉬고 있나 보다 생각하는 게 정상이겠지만, 한참이나 조용하니 아무래도 이상했다.

의아함을 느낀 루슬란은 혹시 무슨 일 있나 싶어 몸을 일으켰다.

별관에 다다라서도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루슬란은 소리 내지 않고 조용히 타티아나의 연습실로 다가갔다. 문은 잠겨 있지 않았다.

“……?”

살짝 문을 열어 보니 타티아나가 피아노 앞에 앉아 있긴 했다. 하지만 그녀의 손은 건반 위에 있지 않고 축 늘어져 있었다.

타티아나는 악보를 바라보며 무언가 단어들을 중얼거리고 있었다. 넋이 나간 것 같다. 그 모습은 섬뜩해 보이기까지 했다.

지금 굉장히 많이 안정된 상태이긴 하지만, 루슬란은 쉽게 걱정을 떨쳐 버릴 수 없었다. 그는 자기도 모르게 문을 벌컥 열고 들어섰다.

그런데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나자마자 타티아나가 휙 돌아보았다. 루슬란을 발견한 그녀가 미소를 짓지 않았다면 루슬란은 뒷걸음질 쳤을지도 모른다.

“아, 오빠. 무슨 일이에요?”

명랑한 목소리. 타티아나는 갑자기 연습실에 찾아온 루슬란을 반겼다.

아까 중얼거리던 모습과 달리 멀쩡해 보여서, 루슬란은 안도의 한숨을 쉬며 말했다.

“시베리아 지하에 냉동되어 있는 병사를 깨우려는 거야?”

“……예? 시베리아요?”

전혀 이해하지 못했는지 타티아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루슬란은 쓸데없는 비유는 하지 않기로 했다.

“단어들을 중얼거리고 있길래.”

“아…… 아니에요. 그게…… 떠올라야 하는 단어가 잘 떠오르지 않아서요.”

뭔진 모르겠지만 도와줄 수 있다면 빨리 도와주고 싶었다. 루슬란이 말했다.

“뭔데? 나한테 물어봐.”

“그건 안 돼요.”

“……왜?”

타티아나는 단호하게 딱 잘라 말하더니 손가락으로 자기 자신을 가리켰다.

“제가 직접 하기로 약속했거든요.”

“…….”

무서울 정도로 성실하다. 루슬란은 순간 할 말을 잊었다가, 간신히 입을 열어 반론했다.

“숙제라는 게 다 그렇지만 정 안 풀리면 도와 달라 할 수도 있는 거잖아.”

정론에 대한 반론은 불성실하게 들릴 뿐이었지만, 타티아나는 딱히 더 뭐라 하지 않고 앞에 놓인 악보를 톡 쳤다.

“이건 숙제가 아니라서요. 이 곡의 제목을 지어야 해요.”

“아…… 그래?”

새 곡인가? 그냥 타티아나가 썼겠거니 막연하게 생각하던 루슬란은 순간 그녀가 말했던 약속이란 단어를 떠올리고는 다시 물었다.

“잠깐만…… 약속? 누가 쓴 곡인데?”

타티아나는 눈을 깜빡이더니 곧장 대답했다.

“에르네스트예요.”

“뭐?”

루슬란은 저도 모르게 되물었다.

“그걸 왜 네가 제목을 지어?”

“제가 헌정받았으니까요.”

당연한 거 아니냐는 듯 말하니 할 말이 더 없었다.

루슬란은 머리가 복잡해졌다. 사실 그렇게까지 당황스럽진 않았다. 저번 연말 연주회 때 타티아나와 에르네스트가 함께 연주하는 것도 보지 않았던가? 곡을 주고받는 것 정도는 저 두 사람에게 아무것도 아닐지도 모른다.

그런데 왜 자꾸 에르네스트 녀석을 한 번 봐야 할 것 같단 생각이 드는지 모르겠다. 정말 그런 짓을 했다간 타티아나가 정말 질색할지도 모르는데.

잠깐 드라이브라도 나갔다 와야 하나 생각하며 루슬란이 방해해서 미안했다고 말하려는 순간, 가만히 루슬란을 보던 타티아나가 생긋 웃으며 말했다.

“들어 보시겠어요? 제가 좋아하는 부분만 짧게.”

“응?”

뭐라 하기도 전에 타티아나가 건반을 짚었다. 루슬란은 그녀의 연주를 막을 수 없었다.

굉장히 현란하면서도 아름다운 음악. 루슬란은 이 곡을 에르네스트가 썼다는 걸 미리 듣지 못했다면 차이코프스키나 라흐마니노프 같은 다른 작곡가라 하더라도 믿어 버렸을 거라 생각했다. 그만큼 그가 듣기에도 훌륭한 곡이었다.

그리고 짧은 연주를 마친 타티아나는 자랑이라도 하는 듯 피아노 쪽으로 팔을 펼치며 말했다.

“어떤가요? 멋지지 않나요?”

“…….”

루슬란은 순간 헛웃음이 새어 나오는 걸 느꼈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타티아나는 음악밖에 모르는 사람이었다.

이 또한 겉으로만 보이는 부분일지도 모르겠지만, 지금 루슬란이 해야 할 말은 정해져 있었다.

“그래, 그렇네. 지금 들은 건 마치…….”

“잠시만요! 제가 해야 한다고 말씀드렸잖아요! 아무 말도 하지 말아 주세요!”

“감상도 안 돼?”

“시적인 감상을 하실 거잖아요. 안 돼요.”

“깐깐하네.”

“당연한 거예요.”

타티아나는 어림도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루슬란은 그냥 웃어 버렸다.

“알았어. 그보다 타티아나, 그거 언제 끝나?”

“……글쎄요?”

적어도 1-2시간 내로 끝날 일은 아닌지 타티아나가 심각하게 중얼거렸다. 당장 집중해서 끝내야 하는 일이 아니라면 괜찮겠지. 루슬란이 제안했다.

“오늘 저녁은 우리 둘이서 먹게 될 것 같은데, 괜찮으면 외식할래? 드미트리도 좀 쉬게.”

“아, 좋아요.”

아버지도 늦게 돌아오시니 어떠냔 제안에 타티아나는 밝게 웃으며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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