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494화 (494/1,277)

##  494화

클래식 에이전시 라파rapa 러시아 지사.

지사장 마틸다 페레스는 마지막 결재를 마치고 한숨 돌리며 사무실을 돌아보았다.

직원들은 각자 맡고 있는 연주자들을 한 번이라도 더 세상에 내보이기 위해 전화, 컴퓨터와 싸우고 있다. 한 사람은 아예 책상에서 일어나서 전화 너머의 누군가에게 열변을 토하고 있었다.

한 번의 통화가 한 번의 기회를 만든다는 일념하에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어떨 때 보면 에이전트가 아니라 열성적인 팬 같다.

마틸다는 모두를 슥 일견하다가, 최근 많이 바빠진 한 사람에게 물었다.

“베르너. 타티아나 유리예브나 건은 잘되어 가고 있어요?”

“예, 마틸다. 순조롭습니다.”

베르너 위넬. 독일어, 러시아어, 스페인어, 영어까지 4개 국어가 가능한 그는 상당히 유능한 에이전트 중 한 명이었다.

때문에 그에겐 주어진 일도 많았다. 그런데도 그는 스스로 일을 가지고 오기도 했다.

그렇게 직접 가지고 온 일이 마음에 드는지 그는 싱긋 웃으며 서류를 하나 들어 보였다.

“이번 주 안에 홀과 티켓 관련 상의를 마칠 겁니다.”

“그런가요?”

정확히 어떻게 진행 중인가 싶어 마틸다는 베르너의 자리로 향했다. 베르너는 마치 준비하고 있었다는 듯 순식간에 마틸다를 위한 자료들을 컴퓨터 화면에 띄우고 서류들을 준비했다. 정말 신속했다.

마틸다는 베르너의 일 처리에 늘 만족하면서도 가끔은 놀랍기까지 했다.

천천히 준비 사항들을 살펴보니 큰 문제는 없어 보인다. 베르너는 마틸다가 서류를 살펴보는 걸 보더니, 마지막 부분에 시선이 가 닿을 때쯤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말했다.

“무대를 준비하는 일만 남았는데, 독주회이고 연주자가 워낙에 뛰어난 터라 크게 걱정할 일은 없을 듯합니다.”

베르너가 자신 있게 말했다.

타티아나 유리예브나 베르체노바. 중앙음악학교의 열여섯 살 피아니스트. 수상 경력은 상트페테르부르크 청소년 콩쿠르 대상. 그리고 러시아 송년 음악회에도 출연.

마틸다는 송년 음악회에서 직접 타티아나의 무대를 본 적도 있었다. 직접 보고도 믿기 어려울 정도의 엄청난 실력자였다.

그녀는 앞으로 몇 년만 더 흐르면 이 세상의 모든 클래식 애호가 중 타티아나 유리예브나라는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없게 될 것이라 확신했다. 때문에 그녀는 베르너가 타티아나와 인연이 닿아 있다는 걸 천운처럼 여겼다.

베르너가 타티아나의 독주회 계약을 성사시켰다고 했을 때, 마틸다는 베르너에게 지사장 자리를 넘겨주어야 하는 게 아닌가 했을 정도였다.

그런데 막상 독주회 프로그램 초안을 보고 난 뒤, 마틸다는 약간 의구심을 느꼈다.

타티아나 유리예브나가 세기의 천재라는 건 분명하다. 거기엔 의심의 여지가 전혀 없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 정도 되는 프로그램을 단기간에 완성시킬 수 있나?

“대단한 연주자인 건 확실하죠…….”

마틸다는 자신만만해하는 베르너를 두고 괜한 불안을 이야기할 수 없었다. 지금 타티아나의 담당은 베르너였다. 아무리 지사장이라도 프로그램을 바꾸는 게 낫지 않냐고 하는 건 몇 번이나 심각하게 고민해 본 뒤에나 해야 할 일이었다.

마틸다는 일단은 별 신경 쓰지 않는 것처럼 서류를 휙휙 넘겨 보고는, 다음으로 모니터 화면을 보았다.

“포스터 초안인가요?”

“그렇습니다.”

타티아나의 독주회 포스터는 초안임에도 흠잡을 곳이 없었다. 차분한 눈빛으로 살짝 먼 곳을 바라보는 눈빛은, 앳된 외모에도 불구하고 연주자로서 거의 완벽해 보인다.

혹시나 열여섯 살답게 발랄한 사진이라 기대감이 떨어지지 않을까 생각했던 마틸다는 괜한 걱정을 접어 버리곤 말했다.

“잘 나왔네요.”

지사장의 퍼밋이나 다름없는 말이 떨어졌다. 하지만 베르너는 전혀 엉뚱한 소리를 했다.

“걱정하실 일은 전혀 없습니다.”

“……?”

무슨 말이냐는 눈으로 바라보니 베르너가 히죽 웃었다. 마틸다는 지금 자신이 조금 불안해하고 있음을 들켰다는 걸 깨달았다.

기분 나쁘진 않았다. 그저 이 프로그램을 받아 본 베르너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궁금할 뿐이다.

하지만 베르너는 뭔가 마틸다를 설득하려는 생각도 없어 보인다.

“타티아나는 대단한 정도가 아닙니다. 그냥 믿고 계시면 잘 해낼 겁니다. 마틸다.”

당신 지금 여기가 성당이라고 착각하는 거야?

대체 연주회를 기획하는데 믿음이라는 말이 왜 등장하는 건지 전혀 모르겠다. 마틸다는 자기도 모르게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그거 알아요? 난 베르너가 이렇게까지 열성적인 거 처음 봐요.”

“마틸다도 곧 저처럼 될 겁니다.”

이쯤 되면 할 말이 없다. 베르너는 정말 유능하고 냉철한 에이전트였는데, 어쩌다가 이렇게 예수의 기적이라도 목도한 제자들처럼 되어 버린 걸까.

마틸다는 헛웃음을 흘리며 옆 의자에 앉았다. 그냥 타티아나에 대해 이야기나 조금 더 하고 싶었다.

“그런데 이렇게 열렬한 신자를 두고 왜 아직도 그 아가씨는 안 넘어오는 거죠?”

베르너는 이번엔 대답하지 않고 그냥 웃기만 했다. 마틸다는 스스로 대답을 찾아냈다.

“아, 베르체노프.”

“그 이유도 없다고 할 순 없을 것 같습니다.”

없는 게 아니라 굉장히 컸다.

베르체노프 콘체른의 하나뿐인 영애가 피아니스트로서 자신의 활동을 책임질 에이전시를 찾는다고 생각해 보자. 아마 그 앞에 줄을 설 에이전시가 스무 곳도 넘을 것이다. 그것도 러시아에서만.

독일에 본사를 두고 있는 에이전시 라파는 그 점에서 굉장히 불리했다.

아마 타티아나가 순수하게 라파를 마음에 들어 하더라도 베르체노프 콘체른 입장에선 러시아의 에이전시들을 두고 선뜻 이쪽을 선택하지 못할 수도 있었다. 그렇게 큰 기업 집단의 일거수일투족엔 전부 다 비지니스적인 이유가 있기 마련이니까.

그리고 더 크게 보자면, 타티아나는 굳이 어느 에이전시에 소속될 이유도 없었다. 뛰어난 에이전트와 매니저들을 몇 명 직속으로 영입하는 편이 훨씬 낫다. 타티아나를 지원할 인력들이 베르체노프 콘체른에 소속되는 것이다.

어쩌면 베르너도 그런 걸 생각하고 있는 게 아닐까? 생각이 아니라 이미 구체적인 말들이 오갔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니 조금 우울해졌다.

유능한 에이전트를 이렇게 보내 주어야 하나 마음의 각오를 다지고 있는데, 베르너는 캔 커피를 하나 따선 마틸다에게 건네주었다.

“하지만 마틸다. 제 생각에…… 타티아나의 목표는 어딘가 조금 멀리에 있는 것 같습니다.”

“……무슨 말이에요 그게?”

마틸다가 캔 커피를 마시며 물었다. 베르너는 모니터에 떠 있는 타티아나의 사진을 바라보았다. 그는 조금 막연하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연주자가 저희 에이전시와 계약하는 이유가 뭐겠습니까? 행사 등에 참여하거나 연주회를 열고, 오케스트라 등과 협연하고…… 등등 일거리들을 가져와 홍보하거나 기획하고 진행하는 것을 혼자 할 수 없기 때문이지 않겠습니까?”

그건 비단 연주자들만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스포츠 선수나 배우 등 스스로 일을 찾아서 해야 하는 세상의 여러 직종의 사람들에겐 자신의 실력 발휘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지원해 줄 에이전시가 필요했다. 마틸다가 답했다.

“그렇죠. 타티아나 유리예브나는 취할 수 있는 방법이 많으니 굳이 그렇게 일거리를 구할 필요가 없을 테고요?”

“아니요, 그게 아닙니다.”

베르체노프 콘체른이 할 수 있는 수많은 방법들이 가장 큰 이유라고 생각했는데, 베르너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냥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겁니다.”

도무지 무슨 소린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피아니스트가 연주회를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으면 뭐라고 생각하는데?

마틸다는 말도 안 되는 소리 좀 그만하라고 한마디 하고 싶어졌다. 하지만 베르너는 장난 같은 걸 치고 있는 사람의 얼굴을 하고 있지 않았다. 정말 진지하게, 지금까지 봐 온 타티아나라는 연주자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알아듣게 설명해 봐요.”

한 번 더 참으면서 마틸다가 말했다. 베르너는 자신이 이해하고 있는 바를 천천히 말했다.

“예를 들자면 지금 독주회를 2500명의 콘서트홀에서 하든, 5명이 간신히 앉을 연습실에서 하든 그녀는 본질적으로 다르게 보지 않는 겁니다.”

콘서트홀과 연습실이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그 말은 듣기엔 굉장히 올바른 말처럼 들렸다. 연습과 무대를 구분하지 않는 태도는 뭇 연주자들의 귀감처럼 여겨지기도 하고.

하지만 그건 이상적인 이야기에 가깝다. 2500명과 5명이 결코 같을 리 없기 때문이다. 500배의 차이는 연주자가 다르지 않게 보고 싶다고 해서 그리 볼 수 있는 차이가 아니었다. 모든 게 다르다. 정말 모든 게.

하지만 이어지는 베르너의 말은 삐딱한 마틸다의 생각을 툭 쳐서 넘어뜨렸다.

“장소가 어디든 피아노의 크기는 같고, 거기에 청중이 있다면 연주자는 피아노를 연주하고 싶어지기 때문이죠.”

“…….”

모든 게 다르다고 했지만 다르지 않은 게 있었다. 바로 피아노의 크기. 물론 같은 그랜드 피아노라도 등급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피아니스트들이 쓰는 콘서트 그랜드 피아노는 뵈젠도르퍼 같은 몇몇 예외 브랜드를 제외하면 거의 다 비슷한 크기로 제작된다.

연주하는 악기가 같다면, 모든 무대는 같을 수 있나? 마틸다는 늘 홀의 크기만 생각해 온 사람이라 연주자의 입장에서 그렇게까지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 봐도 그건 그리 썩 의미 있는 생각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베르너가 빠르게 덧붙였다.

“물론 그녀가 현실적이지 않단 말이 아닙니다. 열여섯 살의 나이로 몇 명의 청중을 모을 수 있을지 냉철하게 보고 있고, 심지어 홀의 크기에 따른 어쿠스틱까지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그 정도로 현실적이지만…….”

“그게 연주를 하는 이유가 되진 않는다는 거군요.”

“그렇습니다.”

타티아나가 연주회를 필요로 하는 건 돈이 필요해서도 명성이 필요해서도 아니다. 그저 피아노를 칠 수 있게 음향적 세팅이 완비된 공간과 청중이 앉을 좌석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정말 단순한 이야기이지만, 한편으론 왜 타티아나가 저런 눈빛을 할 수 있는지 알 것 같기도 했다.

베르너의 말이 맞다면, 타티아나는 현대에 참 찾아보기 힘든 피아니스트였다. 그 환경이 좋아서일까 아니면 천성이 타고난 걸까.

마틸다는 캔 커피를 다 마셔 버리곤 옆에 대충 내려놓았다.

“아무튼…… 앞으로도 타티아나 유리예브나가 하고 싶은 대로 할 거란 말이잖아요? 간단한 말을 왜 그렇게 어렵게 해요.”

“……지사장님께 그렇게 말씀드릴 순 없잖습니까?”

“그냥 그렇게 말해요. 내 성격 아직도 몰라요?”

마틸다가 손을 휘휘 저으며 말했고 베르너는 허무하게 웃었다.

마틸다는 다시 서류를 살폈다. 이번 독주회 한 번에 그치는 계약이다. 하지만 이건 어쨌든 간에 타티아나가 에이전시의 지원을 필요로 한단 뜻이다. 그 사실 자체만으로도 상당히 고무적이다.

“그래도 이번 계약으로 앞으로 잘될 것 같으니…… 최선을 다해서 에이전시의 필요성을 입증해 봐요.”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그 대답에 마틸다는 만족스럽게 웃으며 다시 모니터 쪽을 바라보았다. 사실 포스터만 봐도 연주회 성공 확률이 보이곤 하는데 지금 이렇게 보니까 최소한…… 그런데 저게 뭐지.

“그건 그렇고, 여기 빈칸이 있네요, 베르너. 나중에 수정하셔야겠어요.”

마틸다는 모니터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그녀의 손끝엔 프로그램 목록이 있었는데, 중간이 부자연스럽게 비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베르너는 그걸 보더니 고개를 가로저었다.

“실수한 게 아닙니다. 일부러 그렇게 해 놨습니다.”

“……예? 왜요? 인터미션이 있을 부분도 아닌데.”

아무리 생각해도 굳이 저렇게 비워 둘 이유를 모르겠다.

궁금해하는 마틸다에게 베르너가 말했다.

“저번에 말씀드렸던 타티아나가 가지고 온 곡입니다. 아직 제목이 정해지지 않아서 공백으로 비워 둔 상태입니다.”

“……뭐라고요?”

프로그램 초안을 보면서 이야기를 듣긴 했다. 약간 당황스럽긴 했지만 헌정곡 초연은 할 수 없다고 정해져 있는 것도 아니니 말릴 수도 없었다. 워낙에 베르너의 태도가 강경하기도 했고.

그런데 제목도 안 정해 놨다니, 불안하다.

“베르너, 정말 뭘 믿고 그렇게 느긋한 거예요?”

그런데 그런 마틸다와 달리 베르너는 시종일관 같은 태도였다.

“아까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말을 말아야 했는데……. 한번 들어 보기라도 하죠. 혹시 녹음 파일 있어요?”

“예.”

연주회 직전까지 리허설 녹음 파일 같은 건 보통 잘 없기 마련인데, 베르너가 이 곡만큼은 어떻게 구한 모양이었다.

이미 이렇게 된 것,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며 마틸다는 베르너가 건네준 이어폰을 받았다.

그리고 1분도 채 지나지 않아 눈을 크게 뜨고 베르너를 바라보았다. 베르너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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