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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의 여명-497화 (497/1,277)

##  497화

잠시 스타니슬라프와 시간을 보냈다. 낚시용 의자에 앉아 테이블 없이 종이컵에 따라 준 차를 마시며 나누는 티타임이었다.

지난 협연 이후로 반년도 채 안 지났지만 그간 난 송년 음악회에도 출연했고 다른 일들도 많이 겪었으므로 음악가로서 나보다 훨씬 더 연륜이 있는 스타니슬라프와 할 이야기가 많았다.

그사이 스타니슬라프의 친구분은 오빠를 데리고 자리를 피해 주었다. 나와 스타니슬라프가 방해받지 않고 대화를 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신 것 같다.

그리고 조금 떨어진 곳에서 오빠에게 낚시를 가르쳐 주고 있는 것 같았는데, 오빠는 낚시가 처음인지 꽤 진지하게 따라 배우고 있었다.

지금 보니 오빠가 강변에 가 보자고 했던 건 낚시에 흥미가 있어서였을지도 모르겠다.

“……기쁘네요.”

주말을 헌납한 오빠가 지루해하지 않을까 싶었는데 지금 보니 그럴 걱정은 안 해도 될 것 같았다. 정말 무작정 돌아다니기만 하다가 모스크바로 돌아갔으면 미안해서 큰일 날 뻔했다.

스타니슬라프는 피식 웃고는 종이컵을 모두 비웠다. 내가 다시 찻물을 따라 주겠다고 하자 그는 그만 마시겠다고 거절했다.

레나 강을 바라보며 한적하게 시간을 보내는 것도 좋지만, 슬슬 끝이 다가오고 있음을 느낀다.

빅토르에게 내 손가방을 달라 부탁했다. 그 가방 안엔 혹시나 해서 넣어 두었던 연주회 티켓이 몇 장 들어 있었다.

“스타니슬라프, 잊었던 것이 있어요.”

스타니슬라프가 날 돌아보았다. 난 조심스럽게 티켓을 내밀었다.

“티켓을 드려도 될까요?”

그는 날 친구라 부른다. 우리는 한 번의 협연을 했을 뿐이지만 그걸로 충분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스타니슬라프는 내 나이의 네 배는 되는 선배였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유명한 지휘자이시기도 하고, 이제야 첫 독주회를 하는 연주자인 내가 당당하게 초대하겠다고 할 수 있는 분이라 하긴 힘들었다.

운 좋게 이런 식으로 만나지 않았더라면 쉽게 초청할 순 없었을 것 같다. 반대로 운 좋게 만났기 때문에 꼭 전해 드려야겠단 생각이 들기도 했고.

그리고 스타니슬라프는 내 티켓을 받지 않았다.

“내 건 되었네.”

“아…….”

혹시나 싶었는데 안 되는가 보다. 티켓을 쥐고 있던 손이 무릎 위로 툭 떨어졌다. 절로 맥이 풀렸다.

적어도 분위기가 어색해지지 않도록 어떻게 수습을 해야 할까 생각하고 있는데, 가만히 날 보고 있던 스타니슬라프가 나직하게 웃으며 말했다.

“제 값 주고 보도록 하지. 분명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연주회일 테니.”

“!”

고개를 번쩍 들었다. 약간 장난치고 계신 것 같단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연주회에 와 주신다면 아무래도 좋았다.

그리고 이왕 오신다면 티켓을 받으셨으면 좋겠다.

훌륭한 연주회는 돈을 일부러 주면서도 보고 싶어 한다는 마음은 이해하지만, 훌륭한 청중을 티켓을 주면서 모시고 싶은 게 내 마음이기도 했다. 난 다시 한 번 청했다.

“말씀은 정말 감사해요. 하지만…….”

“타티아나, 그렇게 만나는 사람마다 티켓을 줄 필욘 없네. 연주자로서 성공하려면 그런 부분도 잘 생각해 보게.”

오랜 시간 많은 연주자들을 만나 온 스타니슬라프의 눈에는 이제 막 독주회를 시작하며 한 발을 딛는 내가 어설프게 보이는 모양이다.

그래도 굉장히 조심스러운 조언이었다. 내가 기분 나쁘게 받아들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시는지 헛기침도 하시는 모습에 나도 모르게 웃을 뻔했다. 저 카리스마 넘치는 분이 한참 어린 내 눈치를 보는 듯한 행동을 하실 줄은 몰랐다.

난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

“저도 아무 분에게나 드리는 건 아니에요.”

“영광일세.”

“받아 주셨으면 좋겠어요.”

“…….”

세 번째 제안이었다. 이번에도 거절하신다면 정말 드릴 방법이 없다.

내가 물끄러미 바라보자 스타니슬라프는 결국 졌다는 듯 티켓을 받아 들었다. 난 환하게 웃었다. 그는 티켓을 가만 내려다보다가 품 안에 넣고는 잠시 고민했다. 그러더니 갑자기 옆에 있는 커다란 물고기를 가리켰다.

“그렇다면 이거라도 가지고 가게.”

“아, 물고기.”

“가지고 가려면 민폐인가?”

그 질문은 내가 아니라 뒤편의 빅토르에게 향하고 있었다. 저 꽁꽁 얼어붙은 물고기는 그 자체로 짐이기도 하니 가지고 갈 방법이 확실히 있어야 줄 수 있다는 것 같다.

물론 빅토르에게 불가능이란 없었다.

“감사히 받겠습니다.”

“나도 감사히 받도록 하지.”

다시 스타니슬라프는 내게 말했다. 지휘자분과 서로 선물을 교환한 느낌이라 좋았다. 그게 물고기라는 건 약간 기묘한 기분이긴 하지만…… 뭐 어떤가. 음악이든 물고기든 내가 손댈 수 있다는 건 마찬가지다.

“꼭 제가 요리하도록 할게요.”

“요리도 할 줄 아나?”

그건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는 듯 눈을 크게 뜬 스타니슬라프는 갑자기 피식 웃었다. 내가 저 물고기를 상대하고 있는 상상만 해도 웃긴 모양이다. 난 그저 따라 웃었다. 솔직히 나도 드미트리가 도와주지 않는다면 저걸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모르겠으니까.

스타니슬라프는 낮은 웃음소리를 몇 번 흘리더니, 다시 레나 강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럼 이만 가 보게. 자네 성격으로 보면 분명 다이아몬드 광산도 직접 보고 싶을 텐데. 낚시꾼에게 시간을 빼앗길 필요는 없지.”

지금 이렇게 보면 영락없이 덩치 큰 낚시꾼 할아버지이긴 하다. 그렇지만 난 스타니슬라프가 이렇게 대화의 막을 내리려고 준비하는 모습에서 근엄한 오케스트라 지휘자의 모습을 보고 있었다.

난 시계를 보며 말했다.

“빼앗기다니요. 스타니슬라프.”

스타니슬라프가 다시 나를 돌아보았고, 난 지금 느끼고 있는 기분을 그에게 전했다.

“지금 20분은 제가 혼자 피아노 앞에 있었던 20시간보다 유익했어요.”

“하하, 하하하.”

크게 웃는 일이 드문 스타니슬라프가 별안간 웃음을 터뜨렸다.

“나도 그렇네. 타티아나.”

별다른 이유도 없이 우리는 서로를 마주 보고 한참을 웃었다.

***

미하일은 타티아나의 레슨 시간이면 늘 신경을 곤두세운다.

타티아나는 이미 음악을 스스로 일궈 낼 줄 아는 연주자라 레슨을 할 때도 길게 말할 것도 없이 어느 부분에 손을 봐야 할지 한 마디만 해 주면 순식간에 열 개는 뜯어고치는 수준 높은 역량과 기술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타티아나는 그 정도로 음악을 자유자재로 다루면서도 늘 신중하고 경건한 자세로 임한다. 단 한 번도 자만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연주자로선 올바른 태도이지만 미하일은 타티아나가 왜 그렇게 음악의 신자처럼 사는지 그 이유를 어렴풋이 느끼고 있기에 마냥 좋은 제자를 두었다고 좋아하지 않았다.

고생할 필요가 전혀 없는 환경임에도 고행을 자처하듯, 타티아나는 정말 피나는 노력과 자기쇄신을 통해 저 수준에 올랐다.

누군가는 그러한 노력도 알아주어야 한다. 때문에 그는 타티아나의 음악에서 읽어 낼 수 있는 아주 작은 것들도 놓치지 않으려 늘 집중해 왔다.

조금이라도 그녀의 힘이 되어 줄 수 있도록.

“……음.”

그렇게 귀를 기울이던 미하일은 오늘 타티아나의 연주를 듣고 약간 당황했다.

에르네스트가 작곡한 곡. 분명 저번 주까지만 하더라도 타티아나는 캔버스에 데생만 하고 있는 중이었다. 에르네스트가 어떤 그림을 의도했는지 그 방향성을 쫓아서 크고 간략하게 구도를 그리고 있었다.

미하일은 타티아나가 잘 하고 있다고 생각하며 전체적인 느낌에 대해서만 조금씩 레슨하고 있었다. 적어도 이 그림에 대해선 그녀가 혼자 완성해야 한다고 생각했으므로.

그런데 며칠 지난 사이 세부적인 묘사가 다 나와 버렸다. 그것도 굉장히 자신감이 넘친다. 명쾌한 해석이 듣기에 상쾌할 정도다.

“…….”

“선생님?”

상쾌해서 기분이 찝찝했다.

타티아나는 이렇게 확신이 짙은 해석을 쉽게 내놓는 연주자가 아니었다. 그녀는 몇 번이고 고찰을 거쳐 수렴한 결과를 마지막으로 자신의 것으로 삼는 사람이다.

대체 어디에서 이렇게 답을 구해 왔는지 모르겠다.

미하일은 타티아나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약간의 의문이 서린 눈빛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아니다, 잠시 생각을 좀 하느라.”

미하일은 중얼거리다 말고 손을 내렸다. 어차피 혼자 생각해서 추론이 가능한 부분이 아니었다. 한 번 물어보는 편이 나았다.

“혹시 에르네스트에게 도움을 구했니? 타티아나.”

“예……?”

타티아나가 눈을 크게 떴고, 미하일은 그녀가 오해할까 싶어 덧붙였다.

“잘못되었다 말하려는 건 아니란다. 이전보다 훨씬 견고하고 좋은 음악이 되었는데 잘못이라 할 순 없지. 하지만 생각보다 훨씬 빠르게 음악에 확신을 가지게 된 것 같아서 말이다.”

타티아나에게 모든 해석을 위임하는 것처럼 제목도 없이 곡을 헌정한 에르네스트가 뒤늦게 그랬으리라 생각하긴 힘들었지만, 미하일이 생각하기에 타티아나가 이 결과물을 가장 손쉽게 얻을 수 있는 방법은 작곡가인 에르네스트에게서 곡에 대한 자세한 해석을 받는 것이었다.

선생이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다는 얼굴을 하고 있던 타티아나는 곧 상황판단을 했는지 옅은 미소를 지었다.

“에르네스트는 제 연주를 들으려 하지 않아요.”

“무대에서 듣겠다고 했나 보구나.”

“정확히 그렇게 말했어요.”

에르네스트는 생각했던 대로 꼼짝도 하지 않은 모양이다.

그럼 정말 이 해석이 어디서 튀어 나왔는진 미궁에 빠지게 된다. 타티아나가 곡들을 분석하는 속도는 말도 안 될 정도로 빠르지만 그 신중함 때문에 최소 일주일은 걸려야 한다는 걸 미하일은 잘 안다. 그렇기에 더더욱 궁금해졌다.

“구세프도 아닌 것 같고……. 주말간 뭘 했지? 타티아나.”

“아하하…… 역시 선생님에겐 아무것도 감출 수가 없나 봐요. 조금 놀라게 해 드리려고 일부러 말 안 했었는데.”

타티아나는 잠시 미하일을 슥 올려다보더니, 짧게 이야기했다.

“시베리아의 야쿠츠크에 갔었어요.”

“……멀리도 갔구나.”

분명 무언가 있겠거니 싶었는데, 주말간 연구를 위해 움직인 모양이다. 미하일은 평소에도 타티아나에게 피아노 앞에만 붙어 있지 말고 여러 곳을 경험하라 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 그녀가 갑자기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갔다 왔다고 해도 그리 놀라지 않았다.

그리고 타티아나는 시베리아에서 있었던 일을 한 가지 더 털어놓았다.

“스타니슬라프 올레고비치를?”

“예. 정말 놀라운 일이죠?”

타티아나는 여전히 믿기지 않는다는 듯 스타니슬라프와 만나서 나눈 대화를 말했다. 그저 혹한과 눈만을 생각했던 시베리아에서 다이아몬드를 찾아내면서 해석에 큰 진전이 있었다며 타티아나는 자신의 경험을 미하일에게 즐겁게 설명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며 미하일은 새삼 혀를 내둘렀다.

타티아나는 당연하다는 듯 저렇게 말하고 있지만, 그 동토에서 나이 많은 지휘자와 이야기를 조금 나누었을 뿐인데 저렇게 고스란히 자신의 것으로 만든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타티아나는 세상 어디에서든 배울 것을 찾아냈고 음악에 접목시켰다. 그녀가 이 학교에서 벗어난다면 얼마나 높은 곳까지 갈 수 있을지 미하일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기대되었다.

“아, 그렇지.”

이야기를 하다 말고 타티아나가 생각났다는 듯 가방에서 작은 종이를 한 장 꺼내 미하일에게 건넸다. 그녀의 독주회 티켓이었다.

“와 주셔야 해요?”

“그럼, 가고말고.”

“기뻐요.”

타티아나는 한 치의 의심도 없이 그렇게 말하며 웃었다. 자신이 얼마나 성장했는지 증명할 수 있음에 기뻐하는 모습이었다.

미하일은 종종 타티아나의 이런 모습을 볼 때면 영원히 중앙음악학교에서 가르치고 싶단 생각을 하기도 했다. 물론 시베리아 한복판에서 이 정도의 음악적 해석을 만들어 오는 연주자는 더 넓은 세계로 가야 하는 게 마땅한 일이겠지만.

갑자기 복잡한 기분이 들었다. 미하일은 자기도 모르게 쓴웃음을 지었다.

아직 남은 날들이 많다. 괜한 생각은 독이 될 뿐이다. 타티아나는 아직 이 학교의 학생이었다. 그리고 그녀 역시 학교에 깊은 애착을 지니고 있다. 다른 건 상관없었다.

타티아나가 문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구세프 선생님에게도 드려야겠죠.”

“그래, 안 그래도 꽤 기다리고 있는 것 같던데 말이다.”

“기다리고 계시나요?”

“그렇지 않겠니. 네 무대이기도 하지만 에르네스트가 작곡가로서 쓴 곡이 초연되는 무대이기도 하니. 여러모로 의미가 깊겠지.”

미하일의 말에 타티아나는 더더욱 눈빛을 빛냈다. 당장에라도 구세프를 만나고 싶어 하는 것 같다. 미하일이 피식 웃으며 건반 덮개를 덮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자꾸나.”

“예, 선생님.”

“다음 레슨 때는 소나타 위주로 할 참이다. 그리고…….”

미하일은 마지막으로 레슨 일정에 대해 일러 주었고, 타티아나는 모든 걸 확인한 뒤 밖으로 나갔다.

갑자기 조용해진 레슨실에서 미하일은 홍차를 한 잔 더 탔다. 그리고 방금 받은 타티아나의 독주회 티켓을 내려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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