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498화 (498/1,277)

##  498화

구세프 선생님은 언제나 그렇듯 퉁명스럽게 날 맞이했다. 연주회 티켓을 전해 드렸을 때도 그냥 올 게 왔구나 하는 투였다. 모두 예상했던 반응이라 조금 즐겁기도 했다.

티켓을 앞뒤로 뒤집어 보는 구세프 선생님을 보며 괜히 웃고 있자, 선생님이 삐딱하게 바라보며 말씀하셨다.

“긴장하는 기색도 없군. 원 참.”

아, 너무 풀어진 모습을 보였나?

연주회 때문에 웃고 있었던 건 아닌데, 오해를 살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이미 한참 늦었겠지만 난 고개를 저으며 진지한 표정을 지으려 노력했다.

“긴장하고 있어요.”

“무대에 오를 생각에 기대하고 있는 것 말이냐?”

하지만 구세프 선생님은 이미 날 너무 잘 알았다. 지금 내가 연주회를 앞두고 떨고 있거나 겁을 먹고 있지 않다는 것 정도는 단번에 꿰뚫어 보신다.

선생님은 그간 봐 온 내 무대들을 떠올리시는지 잠시 혼잣말을 했다.

“큰 무대에도 서 봤던 게 좋은 경험이었나. 아니, 생각해 보면 그때도 별로 떨지 않았었지…….”

원래부터 별종이었다고 말씀하시고 싶으신 걸까.

난 선생님이 모르실 뿐이지 송년 음악회 때 꽤나 긴장했었다고 장황하게 이야기할 준비를 마쳤다.

그런데 선생님은 혼잣말을 맺으면서 날 올려다보셨다. 그러고 무심하게 한 마디.

“믿음직스럽군.”

“……예?”

잔뜩 생각했던 것들은 한 마디도 말로 내지 못했다. 선생님의 한 마디는 그만큼 크게 다가왔다.

눈만 깜빡이고 있자 구세프 선생님은 갑자기 확 돌변하며 말했다.

“타티아나. 솔직히 말하자면 난 널 볼 때면 가끔 불안해진다. 언제 어디서 문제를 일으킬까 싶어서.”

“제가 그렇게 문제아였나요……?”

“그럼 아니라고?”

선생님에게 보였던 지난 일들을 떠올리면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고집을 부리며 싸우려 하기도 하고, 쓰러지기도 하면서 얼마나 걱정을 끼쳐 드렸을지 상상도 못 하겠다.

아마 난 그리 편한 학생은 아니었을 테지.

그러나 지금 선생님이 내게 내리는 평가는 학생의 기준을 넘어선 것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곡을 맡기는 입장이 되어서 보니 너만 한 연주자도 없겠다 싶다. 독주회도 초연도 겁내지 않는 연주자는 찾기 어렵지.”

“…….”

가끔 구세프 선생님이 이렇게 담담하게 사실을 말씀하시듯 하실 때면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가슴이 먹먹해져 와서, 난 그게 목까지 올라오기 전에 다른 말을 꺼냈다.

“에르네스트가 직접 초연할 수도 있었겠죠?”

“하, 그랬을까?”

선생님은 코웃음을 치더니 티켓을 흔들거리며 말씀하셨다.

“아무튼, 잘 해 봐라. 네 녀석들의 결과물은 내가 직접 가서 볼 테니.”

혹시 이 자리에서 연주해 봐라 하실까 싶어 마음속으로 준비하고 있었는데, 선생님은 에르네스트가 그랬던 것처럼 무대에서 청중이 되어 듣고 싶으신 것 같았다.

실망시키지 않아야 할 사람이 참 많다. 그리고 그 사실은 내게 부담감이 아닌 고양감으로 다가왔다.

“잘 해낼게요.”

“오냐.”

구세프 선생님은 대충 손을 흔들며 이만 나가 보라 말했다. 난 조용히 레슨실 문을 닫고 나와선, 곧바로 스마트폰을 들었다. 내친김에 생각하고 있던 분에게도 전화를 할 생각이었다.

“안녕하세요, 마카로프 프로듀서.”

- 타티아나.

낮지만 선명한 목소리. 에우테르페 레코즈의 마카로프 프로듀서다.

작년 음반 제작 이후로도 우리는 자주 연락을 주고받곤 했다. 대부분은 내가 무언가 받는 쪽이었다. 마카로프 프로듀서는 이번에 나온 신보라며 음반을 선물로 보내기도 했는데, 내가 음향공학에 대한 질문을 하면 거기에 대해 답변해 주기도 했다.

가끔 보면 그는 내가 음반사에 도움이 되기보단 그저 열심히 공부하는 것만으로도 만족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요 근래의 안부에 대해 서로 묻다가, 마카로프 프로듀서가 껄껄 웃으며 말했다.

- 학교생활에 충실하고 있군요. 그것도 좋죠. 그런데 언젠가 기회가 되면 한 번쯤 들러 주시죠. 저번 음악회 이후로 타티아나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직접 듣고 싶군요.

“잘 되었네요, 프로듀서. 그렇지 않아도 이번엔 제 쪽에서 초청하고 싶어서 연락 드렸어요.”

- 무슨 말입니까?

난 독주회 티켓을 마카로프 프로듀서에게 드리고 싶다고 전했다. 그는 조금 놀란 것 같지만 곧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말했다.

- 활동을 하실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긴 했는데…… 좋군요. 반드시 가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감사는 제 쪽에서 해야죠.

마카로프 프로듀서는 그렇게 말하고 있지만, 지금까지 내가 그에게 받은 것에 비하면 이 정도는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다.

내가 평소 얼마나 고마움을 느끼고 있었는지 이야기하니 그는 껄껄 웃었다.

- 그럼 홀에서 보겠습니다.

“예, 기대하셔도 될 만큼 좋은 무대 준비할게요.”

- 하하, 준비하시면서 도움이 필요하시다면 연락 주시죠, 타티아나.

끝까지 그렇게 도와줄 일이 있느냐고 묻는다. 난 이런 분과 알게 되어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게 얼마나 특별한 일인지 새삼 느끼며 전화를 끊었다.

그런데 도와주겠다는 사람은 비단 프로듀서뿐만이 아니었다.

“혹시 놀고 있는 바이올리니스트의 도움이 필요하거나 그러면 연락 줘. 아마 그럴 일은 없겠지만.”

혹시 학교에 남아 있을까 싶어 막심 선배에게 전화를 했더니 마침 니콜라이 선배와 같이 있다고 해서 찾아갔다. 이제 11학년 마지막 학기를 보내고 있는 선배들에게 내 연주회가 선물이 되지 않을까 싶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막심 선배는 티켓을 받자마자 청중이 아니라 바이올리니스트로서 날 도울 수 있느냐 물었다. 난 이미 선배들에게 그런 걸 바랄 생각이 없었다.

“말씀과 달리 피곤해 보이세요.”

“들켰나?”

막심 선배는 퀭한 눈으로 킬킬거렸다. 옆에 있던 니콜라이 선배가 말했다.

“솔직히 말해 막심은 지금 다른 연주회 어디에라도 협연자로 참가하면 주어진 과제와 시험을 대신하여 도망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야! 내가 말로 꺼냈어?”

반쯤 꺼낸 것 같기도 한데, 농담과 진담을 구분 못할 정도는 아니다.

나 역시 농담으로 합주하자고 할 정도로 선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이 아니고. 난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죄송해요, 독주회라서.”

“나도 안다고. 니콜라이가 괜한 헛소리를 해서 이상한 사람 된 것 같네.”

막심 선배는 툴툴거리더니 티켓을 들었다.

“어쨌든 연주회는 꼭 갈게.”

“저도요, 타티아나.”

“고마워요.”

이렇게 청중이 두 사람 더 늘었다. 티켓을 판 건 아니지만 기분이 좋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난 스터디룸으로 향했다. 일단 모여 있는 친구들에게 먼저 줄 생각이었다.

오늘 공부 중인 친구들은 리처드, 아나스타샤, 에르네스트 세 명이었다.

“다른 분들은요?”

“집에 간 애들도 있고. 뭐, 지금은 우리뿐이야.”

리처드가 대답하면서 귀찮아 죽겠다는 듯 기지개를 켰다. 난 조용히 그의 옆으로 갔다. 평소처럼 아나스타샤의 옆에 앉지 않고 무슨 일이냐는 듯 리처드가 날 올려다보았다.

난 그에게 티켓을 주며 말했다.

“리처드. 제 연주회에 와 주시겠어요?”

여전히 무표정하지만 살짝 놀란 모습이 보인다. 갑자기 이렇게 제안할 줄은 미처 생각지 못한 것 같아 보인다.

그렇게 당황함도 잠시, 리처드는 피식 웃으며 내게서 티켓을 받아 들었다. 장난스런 농담이 돌아왔다.

“이렇게 돈 안 받고 다 뿌리고 다니면 적자 나는 거 아니야? 타티아나.”

난 그에게 손을 벌리며 짧게 대꾸했다.

“강매예요.”

“돈 없어.”

마음대로 하라는 듯 목을 내미는 동작이 웃겨서 난 웃음을 터뜨렸다.

리처드가 한 종류의 걱정은 이미 이전에 받았던 적이 있다. 난 스타니슬라프에게 들었던 이야기들을 떠올렸다. 그리고 그에게 받았던 것도.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으며 난 리처드에게 말했다.

“그렇다면 물물교환이라도 할까요? 스타니슬라프에겐 그렇게 티켓을 드렸어요.”

“스타니슬라프? 상트페테르부르크 챔버 오케스트라 지휘자 말하는 거야?”

“예.”

“물물교환을 했다니…… 뭘 받았는데?”

“물고기요.”

“뭐?”

리처드가 어이가 없다는 듯 고개를 들었다.

난 궁금해 죽을 지경으로 보이는 그를 내버려 두고, 아나스타샤에게도 티켓을 주었다.

“아나스타샤. 가장 좋은 자리예요.”

“응. 고마워.”

아나스타샤는 티켓에 적힌 좌석번호를 보고도 내게 이게 어디쯤이냐고 묻지 않았다. 그냥 내가 가장 좋은 자리라고 했으니 상관없어 하는 것 같았다.

피아노 독주회에서 피아노는 무대에 가로로 놓이고, 자연스레 연주자는 무대 왼편에 앉게 된다. 난 아나스타샤가 연주자의 얼굴이 보이는 좌석을 좋아한다는 걸 알고 있었고, 그래서 오른편 좌석을 구했다. 아마 그녀가 실망할 일은 없겠지.

그리고 이곳에 있는 마지막 사람은 에르네스트였다.

“에르네스트는 작곡가 특별석으로 준비했어요.”

에르네스트는 살면서 처음 듣는 단어에 어이없어했다. 그는 받아 든 티켓을 보았다. 하지만 알파벳과 숫자로만 표기된 좌석이 어딘지 한 번에 알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그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그건 뭔데…… 어딘데?”

“아나스타샤의 옆자리예요.”

“그럼 아무 차이 없는 거잖아.”

“그렇죠?”

황당하다는 눈빛은 곧 속았다는 얼굴로 바뀌었다. 설마하니 진짜로 작곡가 특별석이 있었다고 믿었던 걸까? 혹시 그런 걸 원한다면 정말 준비해 줄 수도 있는데.

내가 진짜 특별석에 대해 궁리하고 있는 걸 에르네스트도 눈치챘는지, 그는 빠르게 말했다.

“고마워. 꼭 갈게.”

“꼭 와서 제 해석을 확인해 주세요.”

에르네스트는 피식 웃기만 했다. 날 믿는다는 표시였다.

그때 가만 지켜보던 리처드가 물었다.

“작곡가 특별대우는 또 뭐야? 곡이라도 써 줬어?”

아, 말한 적 없었지.

일부러 숨기려고 한 건 아니었는데, 이번 독주회는 친구들에게 연주회 프로그램에 대해 상담을 하거나 음악 연구를 같이 한 게 아니라서 이제야 이야기가 나오게 되었다.

로열티로 받은 헌정곡에 대해 어디서부터 이야기하면 좋을까 고민하는데, 나 대신 에르네스트가 짧게 대답했다.

“어. 그랬는데.”

“……그걸 또 받았고? 잠깐만, 설마 연주도 해?”

리처드는 조금 황당해했다. 검증받은 곡들만 최선을 다해 준비해도 모자란 독주회에 대뜸 친구가 작곡한 곡을 가지고 올라가겠다고 하니 놀란 것 같다.

하지만 정확히 말하자면 그 곡이 에르네스트가 썼기 때문에 무대에 올리기로 한 게 아니다.

“첫 작품이지만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좋은 곡이라서요.”

난 악보 첫 장을 넘기자마자 이 곡을 연주하고 싶다는 충동에 사로잡혔었다. 그 자리에서 마침 기회를 얻어 헌정해 달라고 했던 건 그만큼 이 곡을 연주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에르네스트가 내게 곡을 헌정했던 그 병문안 자리에 있었던 건 그뿐만이 아니었다.

“저번에 쓰고 있던 그 곡은 역시 타티아나에게 줬구나.”

아나스타샤는 그가 쓴 곡을 내게 헌정할 거란 걸 미리 알고 있었다는 듯 말했다. 매사 시큰둥한 편인 리처드조차 놀라워하는데, 아나스타샤는 전혀 놀란 기색이 없었다.

에르네스트도 자연스레 아나스타샤의 말에 대답했다.

“저 애가 제일 잘 연주해 줄 것 같아서.”

“응. 맞아. 그럴 수밖에 없을 거라 생각해.”

아나스타샤는 싱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펜을 빙글빙글 돌리며 말했다.

“나는 네가 쓰던 곡의 첫 페이지를 보자마자 알았거든.”

“언제 봤는데?”

“네가 처음 쓰기 시작했을 때부터?”

짐작 가는 때가 있는지 에르네스트가 피식 웃었다. 그가 이제야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너도 시창 초견이 굉장히 강하고 식견도 있는 편이었었지. 아나스타샤.”

“……?”

“네가 보기엔 어때. 그 곡 무대에 올려도 되겠어?”

연주회 직전에도 프로그램을 바꾸곤 하지만, 이제 와서 의견을 구하기엔 조금 늦었다. 아나스타샤도 똑같이 생각하는지 돌리고 있던 펜을 탁 튕겨 올린 후 잡았다.

“이미 연주회 관계자들에겐 검증받은 거 아니야? 너무 늦게 묻는 것 아니니?”

아나스타샤는 고개를 까딱거리더니 이어서 물었다.

“그리고 네가 연주를 강요한 게 아니라 타티아나가 선택한 일이잖아. 안 그래?”

“그렇지.”

“설마 불안하니?”

불안한 게 당연한 일이다. 에르네스트는 피아노 연주자로선 상당한 명성을 지녔지만 작곡가로서 평가받는 건 처음이니까.

하지만 그는 단호하게 말했다.

“아니, 전혀.”

아나스타샤는 그럼 뭐가 문제냐는 듯 다시 펜을 빙글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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