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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의 여명-499화 (499/1,277)

##  499화

시간은 빠르게 흐른다. 4월만 하더라도 막 찾아들었던 봄기운은 점점 푸근해지다가 6월이 되자 이젠 약간 더워질 정도에 이르렀다.

그리고 우리 학교의 생활은 점점 뜨거워졌다. 무엇보다 9학년이 되니 이전까진 배우지 않았던 고급 음악이론에도 접근하게 되었다. 심화된 화성학과 악식론은 굉장히 복잡하고 심오했다.

난 음악이론에 강한 편이었는데도 어렵게 느껴질 정도였다. 대학교는 가야 배울 내용들을 이곳에선 당연하다는 듯 가르치고 있었다.

그렇다고 일반 교과목들이 쉽게 나오는 일도 없었고, 모든 난이도가 폭발적으로 상승했다. 거기에 학기말에 다다르니 실기 과제가 하루에도 몇 개씩 이어졌다. 우리는 하루 종일 그것들과 싸워 나가야만 했다.

“넌 대체 어떻게 사는 거야……?”

발렌티나가 굉장히 무례한 질문을 했다. 난 그냥 철학적인 질문으로 받아들이곤 생각나는 대로 대답했다.

“살아야지 이 과제를 할 수 있지 않겠어요?”

“맙소사…….”

거의 질겁을 하면서 발렌티나가 귀신이라도 보는 눈빛으로 날 바라보았다. 난 그녀의 반응이 조금 재미있었다.

“거기에다가 독주회 준비까지……. 난 네가 무서워, 타티아나.”

“그러지 마세요, 저도 독주회를 방학으로 정한 걸 약간 후회하고 있어요.”

“정말? 후회도 해?”

“전 후회하면 안 되나요?”

난 독주회 일정을 학기가 끝난 후로 잡았다. 학기 중에 하면 여러 실기시험 등을 연주회로 대체할 수 있어서 부담이 훨씬 줄어들겠지만, 난 그런 식으로 학교에서 할 수 있는 일들을 줄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공부도 시험도 내가 누릴 수 있는 것들 중 일부였다. 난 어느 하나도 허투로 넘어가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와서 보자면 약간 후회된다. 너무 힘들어서가 아니라 말 그대로 하루 24시간이 부족한 까닭이었다. 네댓 시간만 자고 움직이는데도 시간이 없었다.

애초에 난 그렇게 머리가 좋은 사람이 아니었다. 학교에서 배워야 하는 것들의 수준이 올라가자 내가 쓸 수 있던 반칙들도 하루가 다르게 무의미해져 갔다. 그게 아쉽거나 하진 않았다. 단지 하루가 36시간쯤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뿐이다.

어차피 전부 내가 결정한 일이긴 하지만 스스로의 역량을 약간 잘못 평가했다는 것 정도는 인정하고 후회해도 되지 않을까. 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작게 한숨을 쉬자 발렌티나가 슬쩍 내 눈치를 보더니 말했다.

“있잖아, 피곤하면 서로 어깨 주물러 주기 할래?”

“그럴까요?”

“내가 먼저 해 줄게. 자.”

그리고 그녀는 내 뒤편에 달라붙더니 양손으로 어깨를 주무르기 시작했다.

연주자의 악력으로 주무르면 아플 것 같아서 목을 긴장시키고 있었는데, 예상외로 하나도 아프지 않았다. 문제는 시원하지도 않았단 점이다. 그냥 간지럽기만 했다.

난 뒤쪽으로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손에 힘이 하나도 없지 않나요? 발렌티나.”

“연습을 너무 열심히 했더니 힘이 안 들어가네……. 이번엔 네가 해 줄래?”

“어쩐지 속고 있다는 느낌이 드네요.”

괜히 마사지를 받고 싶어서 부린 계책에 넘어간 것 같지만, 뭐 어떻나 싶다. 난 일어나서 발렌티나를 자리에 앉히고는 막 뒤에서 어깨를 잡으려 했다. 나도 힘이 없는 건 마찬가지지만 적어도 손아귀 힘만큼은 상당히 세진…….

“타티아나 있니?”

그런데 막 어깨를 주무르려는 순간 스터디룸 문이 벌컥 열리며 아나스타샤가 날 찾았다. 내가 대답했다.

“예, 아나스타샤.”

“메시지 봤어?”

“메시지요?”

“응.”

아까 연습실에서 스마트폰을 무음으로 해 놓곤 안 바꿔 놓은 모양이다. 난 발렌티나를 놓고 내 가방으로 갔다.

다 잡은 고기를 놓친 발렌티나가 투덜거렸다.

“뭐야, 방해하지 마. 아나스타샤. 내 차례였는데.”

“무슨 차례?”

“마사지 받을 차례였다고.”

“내가 해 줄게.”

“잠깐만!”

사람이 죽어 가는 비명 소리가 들리고 아나스타샤의 조용히 있으라는 속삭임, 그리고 다시 비명 소리가 이어진다. 난 굳이 그쪽을 보지 않고 가방에서 스마트폰을 꺼냈다. 메신저를 확인하니 세연에게서 메시지가 와 있었다.

[안녕, 나 지금 혼자 러시아에 와 있어. 중앙음악학교로 가는 중인데 혹시 이미 하교했니?]

갑자기 이게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

난 당황해서 한 번 더 메시지를 읽어 본 다음, 발렌티나를 고문 중인 아나스타샤를 돌아보았다.

“지금 온다고요……?”

“우릴 놀라게 하고 싶었던 것 같은데, 거의 다 와서야 무작정 그러면 안 되겠단 생각이 들었나 봐.”

어떤 상황인지 그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 세연은 행동력은 넘치지만 그렇다고 경우가 없는 아이는 아니었던 것이다.

갑자기 학교에 와도 상관없는 일이긴 하지만…… 솔직히 약간 마음의 준비가 덜 된 건 사실이었다.

발렌티나만 아무것도 모르고 나와 아나스타샤를 번갈아 보며 물었다.

“뭔데? 무슨 소린데?”

“포트워스 콩쿠르에서 2등 했던 애가 왔어.”

“어? 왜?”

“타티아나 연주회 보러.”

“……???”

아나스타샤의 콩쿠르에서 만난 아이가 내 연주회를 보러 온다는 게 무슨 말인지 바로 연결이 되지 않는 모양이다.

의아해하는 발렌티나를 두고 아나스타샤가 말했다.

“승우 한이라도 있으면 데리고 올까 했는데, 그 애 지금 학교에 없지?”

“예. 예브게니아 선생님이 숙제를 내 주셨죠.”

한국어를 할 줄 아는 유학생이 있다면 쉽게 친해질 수 있겠지. 하지만 한승우는 지금 학교에 없었다. 이전에 듣기론 멀리 모스크바 외곽에 있는 음악학교에 잠깐 가 있다고 들었는데, 대체 무슨 숙제를 받은 건지 잘 모르겠다.

아무튼 한승우가 없다면 다른 한국 유학생도 있었지만, 아나스타샤도 나도 굳이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단 결론에 다다랐다. 세연과 대화는 영어로 하면 되고, 그 애가 여기에 온 이유는 다른 누가 아닌 우리 때문이었으니까.

아나스타샤가 테이블에 걸터앉으며 물었다.

“어쩔 수 없지. 어떻게 할까.”

“아마 혼자 들어온다면 정문에서 가로막힐 거예요.”

“경비 아저씨 영어 못하시잖아.”

“그렇죠.”

“세연 임이 우리 이름을 부른다면 교내 방송으로 나올지도 모르겠는데.”

이 바쁜 시기에 그런 방송이 나가게 할 순 없었다. 난 창밖을 가리켰다.

“마중을 나가 볼까요.”

“그래. 발렌티나, 잠깐 여기 있어. 그 애 데리고 올 테니까.”

“어, 어…… 음료수라도 사다 놓을까?”

“그래 줄래?”

발렌티나는 영문을 모르면서도 스스로 자청했고 아나스타샤가 고맙다는 듯 눈웃음을 지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고문을 하고 비명을 지르던 사이였지만, 이럴 땐 이 두 사람만큼 잘 맞는 친구도 없었다.

그렇게 발렌티나에게 적당히 부탁하고, 우리는 세연을 데리고 스터디룸에 데리고 오기로 했다.

일단 세연에게 학교로 와도 된다는 메시지를 보내 놓은 다음 정문 쪽으로 나갔다.

태양이 쨍쨍하니 날씨가 너무 좋았다. 기다리면서 잠깐 앉아 있으니 졸음이 몰려온다. 난 졸음을 쫓기 위해 아나스타샤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생각보다 일찍 왔네.”

“그러네요. 제가 제 연주회만을 목적으로 오지 말아 달라 했기 때문일까요.”

내 연주회까진 일주일도 넘게 시간이 남아 있었다. 세연이 연주회만 목적으로 한다면 당일 비행기로 왔다 가도 된다. 하지만 난 그녀가 러시아에 그런 식으로 왔다 가길 바라지 않았다.

세연은 내 조언에 따르기로 한 모양이다. 일주일이면 모스크바를 여행하면서 이런저런 관광도 하고, 공연도 몇 개 봐도 괜찮은 기간이었다.

그런데 그동안 혼자 여행을 다니게 두자니 문득 불안해진다.

내 마음을 느꼈는지 아나스타샤가 먼저 말했다.

“되도록 내가 데리고 다닐게. 알았지?”

“아, 괜찮은데요.”

“괜찮긴. 그리고 내가 약속했었던 거였어. 러시아에 오면 연락하라고 했었거든.”

“……정말요?”

“응. 그런데 두 달 만에 진짜 왔네.”

아나스타샤는 자기가 세연과 한 약속이라며 책임지고 데리고 다니겠다고 말했다. 내가 연주회 준비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는 걸 배려해 주는 것 같지만, 학기말이라 바쁜 건 아나스타샤도 마찬가지라서 조금 걱정이 된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자 택시 한 대가 학교 앞뜰에 섰다. 그리고 한 여자애가 택시에서 내렸다.

기사가 트렁크에서 캐리어를 내려 주는 사이, 여자애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우리와 눈이 마주쳤다. 멀리서도 한 번에 보일 정도로 반가움이 가득 느껴졌다.

“아나스타샤! 타티아나!”

세연이 한 손엔 캐리어를 끌고, 다른 한 손은 흔들며 다가왔다. 혹시 부모님이나 보호자가 될 분과 함께 오지 않을까 했는데, 정말 혼자 온 모습이었다.

아나스타샤가 가볍게 웃으며 인사했다.

“안녕.”

“안녕하세요. 세연.”

가까이에 온 세연은 갑자기 캐리어를 놓더니 상당히 유창한 발음으로 인사했다.

“여러분 안녕하세요. 다시 만나게 되어 반갑습니다.”

깜짝 놀랄 정도였지만 아마 이게 최선을 다한 것일 테지. 아나스타샤가 농담조로 물었다.

“이젠 우리 말로 대화해도 되겠어?”

세연이 곤란한 듯 웃음을 흘렸다.

{아하하하…… 아직은 못하겠어.}

내가 필사적으로 러시아어에만 매달렸을 때도 최소한의 의사소통이 되기까지 두 달은 걸렸다. 세연이 지금 러시아어를 제대로 할 수 있을 거라 바라는 건 과한 바람이었다.

세연은 머리를 매만지더니 우리 학교를 올려다보았다. 검은 눈동자가 초롱초롱하다. 이 학교를 처음 본 클래식 음악 전공 학생들은 누구나 저런 눈을 하게 된다.

아나스타샤가 키득거리며 웃었다.

{잘 왔어, 러시아에. 그리고 중앙음악학교에.}

학교를 감상하던 세연은 다시 우릴 보고는 말했다.

{갑자기 찾아와서 미안해. 미리 이야기를 해 줬어야 했는데.}

{괜찮아. 일단 들어가자.}

뭔가 내가 생각하던 것보다 아나스타샤는 훨씬 더 살갑게 세연을 대하고 있었다. 미국에서 친해졌다는 건 알면서도 얼마나 친한지 사실 잘 몰랐는데, 지금 보니 상상 이상이었다.

세연이 워낙에 밝기도 했다. 그녀는 이 따뜻한 봄 날씨에 정말 잘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사뿐한 걸음으로 걷던 세연이 내 쪽을 보며 웃었다.

{너희 교복 정말 예쁘다. 타티아나.}

{고마워요.}

{우리 교복은 진짜 별로거든. 나중에 사진 보여 줄…… 아니, 안 보여 줄래 그냥.}

투덜거리는 말인데도 미소를 자아낸다. 난 문득 1년 전을 떠올렸다. 그때도 이 애는 잘 웃고 다정했었던 것 같은데, 난 내가 지켜야 할 의무에 따라 매몰차게 밀어냈었다.

지금이라고 해서 친해져야 하는진 잘 모르겠다. 그런데 아나스타샤가 친밀하게 대하는 걸 보니 그렇지 않아야 할 이유도 모르겠다.

아나스타샤는 캐리어를 끌고 다니는 세연을 보더니 그걸 달라고 손을 내밀었다.

{캐리어는 잠깐 맡기자.}

{그래도 돼?}

세연은 고개를 갸우뚱했으나 아나스타샤가 바로 캐리어를 들고 정문에 있는 경비실에 가서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맡기고 오자 눈을 크게 떴다.

그렇게 한결 가벼워진 손으로 우리 세 명은 학교로 들어섰다.

{와…… 바깥이랑은 또 다르네…….}

세연은 우리를 따라 걸으면서도 신기한지 이곳저곳을 두리번거렸다. 누군가 볼지도 모른다는 건 신경 쓰지 않는 것 같다. 그녀에게 중요한 건 러시아 최고의 교육기관에 와 있다는 사실 하나뿐이었다.

{음악 소리도 들려. 여기 학생이 몇 명이나 돼?}

{400명 정도?}

{전 세계에서 유학생들이 오는 이 큰 학교에? 여러 소리가 들리는 걸 보니 학과도 많은 것 같은데……. 피아노과만 따지면 더 적겠네?}

{응. 우리 학년은 13명.}

{겨우!?}

세연은 아나스타샤가 소개해 주는 이야기 하나하나가 모두 흥미로운지 재잘거리며 대화를 나누었다.

난 한 걸음 정도 떨어진 뒤쪽에서 따라가며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약간의 안도감을 느낀다.

왜 갑자기 이런 기분이 드는지 모르겠다. 세연은 착하고 밝은 아이고, 음악가이기도 했다. 하지만 난 그녀와 지금 직접적으로 학교를 소개하거나 대화를 하지 않아도 된다는 걸 알고 나서야 내가 긴장하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

쓸데없는 기분이다. 난 앞서가는 두 사람의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망치거나 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지금 내 의무는 매우 단순했다. 이대로 세연에게 좋은 추억을 만들어 주고, 또 연주회에 초대한 만큼 그녀가 실망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면 된다. 늘 해 왔던 일이고, 잘 할 수 있는 일이다.

난 다른 복잡한 생각들은 일단 모두 치워 두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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