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500화 (500/1,277)

##  500화

우리는 곧장 스터디룸으로 올라가지 않고 세연에게 중앙음악학교를 이곳저곳 소개해 주었다.

세연은 레슨실을 보더니 감탄사를 발했다.

{와, 바로바로 피드백할 수 있겠다.}

세연의 학교엔 레슨실에 피아노가 한 대뿐이었다. 때문에 선생님과 계속 자리를 바꿔 가면서 레슨을 받을 필요가 있었다.

이미 거기에 익숙해져 있긴 하지만, 이렇게 스타인웨이 그랜드 피아노가 두 대씩 완벽하게 갖추어져 있는 레슨실을 보면 이런 곳에서 레슨을 받아 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 만도 했다.

그리고 교내에 있는 두 개의 콘서트홀과 녹음실까지 보여 주니 세연은 여한이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학교 구경 못 했으면 후회할 뻔했어.}

{음악원 쪽도 견학할 수 있으면 좋겠네요. 그곳도 훌륭한 곳이…….}

{볼 수 있을까!?}

모스크바 음악원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데 세연이 참지 못하고 달뜬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그녀의 얼굴엔 순수한 호기심과 기대감만이 가득했다.

난 그녀를 바라보다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허락을 구하는 건 어렵지 않을 거예요. 제가 알아봐 드릴게요.}

{정말 고마워!}

세연은 막 날 끌어안으려는 것처럼 가까이 다가오다가, 내 손목을 잡고는 흔들흔들했다.

난 손목께를 내려다보았다. 세연의 손에서 느껴지는 힘은 미약했지만, 분명한 연주자의 기색이 느껴졌다.

작년, 이 손으로 연주하는 곡들을 나는 견디지 못했다. 스스로를 견고하게 지키려고 했지만 그저 물속으로 더더욱 깊게 가라앉게 만들 뿐, 음악의 힘에는 저항할 수 없었다.

지금은 약간 복잡한 심경이다. 난 여전히 이 애를 어떻게 불러야 할지 잘 모르겠다.

다시 세연 쪽으로 시선을 올렸다. 그녀는 나와 눈이 마주치고, 잠시 후에야 깜짝 놀라며 손을 탁 뗐다. 그리고 이어지는 맑은 웃음소리.

굳이 어떻게 불러야 할지 정해져야만 가까워질 수 있는 걸까. 그것도 잘 모르겠다.

{이만 스터디룸으로 갈까요.}

{그러자.}

학교 구경도 시켜 주었겠다, 우리는 세연을 데리고 스터디룸 쪽으로 향했다.

막 문을 열고 들어서니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고 있던 발렌티나가 고개를 들었다. 그녀가 고개를 까딱이며 물었다.

“그 애야?”

“응. 이름은 세연 임.”

“…….”

발렌티나는 평소와 달리 시크하게 손을 슥 흔들어 보였다. 난 약간 당황했다. 발렌티나, 지금 이미지 관리 하려는 거예요?

아나스타샤는 킥킥 웃더니 세연에게 말했다.

{저 애는 발렌티나라고 해. 전공은 우리와 같은 피아노.}

{아, 그렇구나…….}

세연은 같은 연주자라는 한마디에 모든 긴장을 푼 것 같았다. 그녀는 곧장 발렌티나에게 인사했다.

{안녕, 발렌티나.}

{……반가워.}

발렌티나는 짧게 대꾸했다. 난 발렌티나의 영어 성적이 그리 좋지 않다는 걸 떠올렸다.

아나스타샤도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발렌티나에게 다가가선 슬쩍 물었다.

“영어로 이야기해야 할 것 같은데. 어떠니?”

“내 실력 알잖아.”

“저 애가 싫은 건 아니지?”

“이야기도 한 번 안 해 봤는데 싫고 좋고 할 게 어디 있어? 일단은 네가 친하다니까…….”

“그럼 괜찮겠네.”

“……근데 생각해 보니까 난 그냥 가면 안 돼?”

발렌티나는 아나스타샤와 내 손님이라는 말에 음료수를 준비하는 것도 도와주었지만, 말도 안 통하는데 그 이상 무언가 하고 싶지 않은 것 같았다. 단순히 영어를 하기 힘들어 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이 자리에서 빠지고 싶다는 티를 내는 발렌티나에게 아나스타샤가 딱 잘라 말했다.

“싫어.”

“싫은 건 또 뭐야?”

“난 네가 영어로 이야기하는 걸 듣고 싶거든.”

“갑자기 왜 이러는데!”

아무래도 아나스타샤는 저번에 내가 어설픈 영어로 이야기한 걸 보곤 재미를 붙인 것 같다.

한동안 두 사람은 티격태격거렸다. 하지만 발렌티나는 세연이 보고 있는 앞에서 너랑은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고 강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게다가 분위기를 본 세연이 러시아어로 살짝 한마디 한 것이 결정적이었다.

“러시아어도 열심히 공부하겠습니다. 발렌티나.”

짧은 말이었지만 그래도 세연의 진심 어린 태도는 확실히 전해져 왔다. 발렌티나의 반응이 확 변했다.

“……지금은 영어밖에 안 된다니 어쩔 수 없겠네.”

“영어로 해 줘.”

“아, 진짜.”

발렌티나는 투덜거리더니 영어로 이야기했다.

{난 긴 문장은 말하지 못해.}

{우린 충분히 이야기할 수 있을 거야.}

두 사람 다 발음이 완벽하다 할 순 없었지만, 그런 건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았다.

발렌티나와 세연이 인사를 하고, 우리는 다 같이 테이블에 앉았다. 발렌티나가 사 온 음료수들이 준비되어 있었다.

{일단…… 웰컴 드링크를 준비했어. 먹고 싶은 걸로 골라.}

{고마워.}

난 오렌지 주스를 컵에 따라선, 테이블 위로 살짝 들어 올렸다. 아나스타샤와 발렌티나도 나와 똑같이 컵을 들어 올렸다.

여기서 먼저 말해야 하는 건 나겠지. 초대한 것도 나였으니까.

난 너무 부담스럽지 않게, 세연을 바라보며 웃었다.

{환영해요, 세연.}

{아…….}

학교 스터디룸에서 음료수 잔을 들고 하는 정말 단출한 환영식이었는데, 이것만으로도 세연은 감동했는지 말을 더듬거렸다.

한참이나 우물쭈물하던 세연은 간신히 미소를 되찾았다. 그리고 미안함과 고마움을 동시에 담아 말했다.

{아깐 일단 들어오라고 해서 똑바로 말하지 못했는데…… 정말 고마워. 사실 나 조금 긴장했었거든. 너무 대책 없이 민폐처럼 찾아온 게 아닌가 해서.}

서로 연락처를 모르는 것도 아닌데, 갑자기 이렇게 찾아와서 놀라긴 했다.

세연은 날 바라보더니 조심스레 말했다.

{이렇게 환영해 줄 줄은 몰랐어. 타티아나.}

난 세연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녀가 흥미와 의아함을 느끼고 있음을 알았다.

자신을 왜 연주회에 초대했는지. 그리고 환영한다고 말하면서도 왜 적당한 거리감을 유지하고 있는지.

난 세연과 친구가 되고자 그녀를 초대한 것이 아니었다.

세연은 그런 내 태도를 정확하게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그런 것들이 세연의 입장에선 꽤나 의아하게 느껴지는 모양이었다.

정말 여러 이유가 있다. 심지어 나 스스로도 잘 모를 그런 이유들.

하지만 한 가지만은 확실했다. 내가 세연에게 가지고 있는 복잡한 감정들의 색은 어둡지 않았다. 적어도 이 감정의 색만큼은 전해졌으면 하는 마음에 살짝 웃어 보였다. 세연 역시 따라 웃었다.

{학교 분위기가 진지한 것 같아.}

세연이 우리 학교에 대한 감상을 이야기하기 시작하는 것으로 이런저런 이야기가 오갔다.

세연은 7월 중순이 되어서야 여름방학에 들어가기 때문에 지금 딱 시간을 낼 수 있었다고 했다. 우리는 지금 학기가 끝날 때까지 일주일이 남았다고 했더니 세연이 깜짝 놀랐다.

{학기말로 바쁜 시기인 줄 몰랐어……. 연주회 일정만 보느라. 미안해.}

나나 아나스타샤가 시시콜콜한 학사일정까지 세연에게 이야기하는 타입은 아니었기 때문에 세연은 막연히 자신과 비슷하리라 생각했던 것 같다.

아무튼, 이미 러시아에 왔으니 일정에 관한 건 상관없었다. 되도록 즐겁게 있다가 갔으면 하는 바람이다.

{일찍 오신 건…… 다른 연주회도 관람하실 생각이신 건가요?}

{응. 두 개 더 예매해 놨어. 그리고 발레 공연도.}

세연이 스마트폰으로 예매 화면을 보여 주었다. 이름만 들으면 알 만한 유명 연주자들의 연주회와 볼쇼이 발레단의 발레 공연이었다.

{좋은 일정이네요.}

{그래? 그렇게 말해 주니까 더 기대가 돼.}

그녀가 예매한 다른 연주회들만 제대로 보고 돌아가더라도 러시아에 온 것을 후회하진 않을 것 같다는 생각에 난 약간 안심하기도 했다.

세연은 스마트폰 화면을 휙휙 넘기며 재잘거렸다.

{비어 있는 시간은 모스크바 여행도 다니면서 최대한 알차게 보내 보려고. 이렇게 몰래 해외여행을 가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니까 이번에…….}

{몰래라니 무슨 말씀이신가요?}

조금 당황스러웠다.

그렇지 않아도 보호자 없이 혼자 온 것에 대해 걱정하는 중이었는데, 아예 몰래 왔다는 말을 들으니 걱정을 넘어 불안해지기 시작한다.

내 표정을 본 세연이 고개를 세차게 저으며 말했다.

{오해야, 오해. 부모님에게 말씀은 확실히 드리고 왔어. 내가 비밀로 했던 건 우리 교수님 쪽이야.}

{교수님?}

{응. 나한테 피아노를 가르쳐 주시는 분.}

난 세연의 교수님이 누구인지 안다. 때문에 왜 러시아 여행을 말씀드리지 않았는지 이해가 안 갔다. 아무리 학기 중이라고 해도 견문을 넓히기 위한 여행을 막으실 분이 아닌데.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눈으로 바라보니 세연이 내 눈을 피하며 변명하듯 중얼거렸다.

{그냥…… 뭐라고 해야 할까? 어느 날 갑자기 놀라게 해 드리고 싶어서?}

그래도 사사하는 분께 한마디 말도 않는 게 괜찮을까 생각이 들었지만, 난 그 이상으로 세연에게 캐물어 볼 수 없었다.

갑자기 찾아든 직감이 내 목소리를 틀어막았다. 내가 말할 수 있는 건 여기까지였다.

침묵하는 나 대신 아나스타샤가 한 발자국 더 들어섰다.

{세연 임. 무슨 생각인진 알겠지만, 교수님을 기쁘게 해 드리고 싶다고 말하지 않았니? 교수님에게 러시아의 음악을 공부해 보고 싶다고 제대로 말씀드렸다면 더 기뻐하셨을 것 같은데.}

내가 모르는 세연과 아나스타샤 사이의 편린이 느껴졌다.

그리고 세연이 지금까지 보여 주던 밝았던 모습이 조금 어두워졌다. 그녀는 처연한 미소와 함께 고개를 저었다.

{말리셨을 거 같아.}

그 말엔 아나스타샤 역시 더 물어보지 못했다.

단순히 해외로 나가는 걸 교수님이 걱정하셔서 말리는 거라면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세연의 말을 들어보면 그녀가 몰래 빠져나온 데엔 그보다 더 큰 이유가 존재하는 것 같았다.

조용히 세연을 지켜보는 사이, 머릿속엔 복잡한 생각과 기억들이 뒤엉켰다. 그럴 분이 아닌데. 자꾸만 그런 말이 뇌리에 맴돈다. 하지만 이미 긴 시간이 흘렀다. 난 과거 기억을 맹신할 수 없었다.

섣부르게 판단하지 않기로 했다. 가볍게 추측하고 이해해선 안 될 무언가가 여기에 존재했다.

그때 발렌티나가 확 끼어들었다.

{어차피 음악 연구는 각자 알아서 하는 거 아니야? 너희도 그랬었잖아?}

{예?}

내가?

당황해서 되묻자 발렌티나가 손가락을 들어 저편 어디론가 휙 그었다.

{연습 잘 안 된다면서 아무한테도 이야기 안 하고 시베리아 갔었잖아. 아나스타샤도 몇 번이나 그랬었고.}

갑자기 그렇게 말하니 할 말이 없었다.

하지만 이렇게 발렌티나가 분위기를 환기시켜 준 덕분에 살짝 어색해질 뻔했던 상황을 잘 넘길 수 있었다. 우리는 세연이 홀로 이곳에 온 것에 대해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오늘 저녁은 쉬고, 내일은…… 오전엔 안 되겠지만 오후엔 이곳저곳 데려다줄게. 어떠니?}

{시험공부 때문에 바쁘지 않아?}

{난 바쁜 실기는 대충 끝내 놔서 괜찮아.}

우리는 대신 앞으로의 일정에 대해서만 이야기를 나누었다.

세연은 시험 기간인 우리를 방해할 생각은 없었는지 혼자 돌아다니겠다고 했지만, 아나스타샤와 발렌티나는 오후에 시간을 내는 것 정도는 괜찮다고 해 주었다.

난 빈말이라도 함께 하겠다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내 연주회가 일주일 남았다는 건 모두가 알고 있기 때문에 아무도 내 의견은 묻지 않았다.

사실 잠깐 시간을 내는 것 정도는 큰 일도 아니었지만…… 난 더 의견을 내지 않고 배려에 기대기로 했다.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문이 스르륵 열렸다. 모두의 시선이 약속이라도 한 듯 문 쪽으로 향했다.

“……?”

막 들어오려던 에르네스트가 우리 네 명의 시선을 받더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세 명은 그렇다 치고 세연을 보고는 의아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에르네스트는 태연한 걸음으로 걸어와선 테이블 반대편에 앉았다.

에르네스트는 겉보기에 어디 흠잡을 곳 없는 사람이었지만, 역으로 쉽게 다가가기 어렵게 보이기도 한다.

세연은 처음 보는 남자애가 말도 없이 들어와선 턱 앉은 걸 보고 약간 당황스러워했다. 바로 인사를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하는 게 눈에 선하게 보였다.

에르네스트는 그런 세연을 보다가, 아나스타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소개해 줄 거면 지금 하라는 것 같다. 아나스타샤는 너무한다는 듯 물었다.

“누군지 궁금하긴 하니?”

“너희들 친구겠지 뭐.”

태평하게 말하는 에르네스트의 모습에 난 순간 웃어 버릴 뻔했다. 그가 먼저 살갑게 인사하고 다가갈 것 같진 않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정말 이럴 줄은 몰랐다.

아나스타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인사 정도는 해 줘. 에르네스트. 이쪽은 세연 임. 이번에 타티아나가 연주회에 초대한 애니까.”

“뭐?”

에르네스트가 살짝 놀라워했다.

그리고 세연은 그보다 열 배는 더 큰 소리로 경악했다.

{진짜 에르네스트? 설마 설마 했는데, 진짜?}

{나 알아?}

세연의 격렬한 반응에 에르네스트가 처음으로 조금 당황해했다. 세연은 몇 번이나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알죠! 팬이에요!}

에르네스트가 세계적으로 이미 유명하다는 건 잘 안다. 종종 그의 팬을 자처하는 사람들이 사진이나 사인을 요구하는 광경을 보기도 했었고. 그래도 이렇게 생각지 못한 곳에서 알아보는 걸 보니 새삼 대단하구나 싶다.

그런데 에르네스트는 유명인답지 않게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단 표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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