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501화 (501/1,277)

##  501화

에르네스트를 돌아보았다. 그는 약간 생각에 잠겨 있는 것 같이 보인다.

난 그런 그의 반응에 조금 의아했다. 이상하다. 왜 저럴까. 내가 아는 에르네스트는 저럴 사람이 아닌데.

에르네스트는 모르는 사람에게 살가운 성격은 아니었지만 연주자로선 언제나 프로페셔널한 사람이었고, 팬을 자처하는 사람들과 함께 사진을 찍거나 사인을 해 주는 등의 팬서비스도 잘 하곤 했다.

지금 세연이 그의 팬임을 밝혔는데도 곤란해하는 건 평소 행동에서 벗어나는 일이었다.

아나스타샤도 그런 에르네스트가 이상하게 보였는지 농담조로 물었다.

“너 왜 그래? 낯가리니 설마?”

“웃기지도 않는 소리 할래.”

그제야 정신이 들었는지 에르네스트가 인상을 쓰더니 대꾸했다.

“그냥 너희 친구라는 애가 내 팬이라니까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그래.”

길에서 만난 사람이라면 웃으며 감사 인사부터 하고 능숙하게 대했겠지만, 이렇게 학교에서 만나니 에르네스트도 조금 당황한 모양이다.

난 갑자기 스터디룸에 이런 상황을 만들어 놓은 것 같아서 미안해졌다. 그런데 아나스타샤는 가차 없었다.

“뭘 어떻게 해? 웃기네.”

“……네 말 들으니까 나도 내가 웃긴다. 아나스타샤.”

에르네스트는 피식 웃더니 다시 세연을 돌아보았다. 세연은 아직도 말 하는 방법을 잊어버린 사람처럼 버벅이고 있었다.

상황에 대한 갈피를 잡은 에르네스트가 먼저 말을 걸었다. 프로 연주자의 모습과 중앙음악학교 학생의 모습이 한데 섞여 있었다.

{아무튼 인사나 할까. 난 에르네스트 스테파노비치 베샤스트니흐. 반가워.}

{어…… 임세연이에요…….}

{긴장 풀고 편하게 이야기해. 저 애들 친구라면 내 친구이기도 하니까.}

{알았…… 알았어.}

세연은 딱딱하게 말하던 걸 간신히 고쳤다. 그녀도 내성적인 성격이 아니니만큼 금방 본모습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한숨 돌린 세연이 나와 에르네스트를 번갈아 돌아보았다. 그리고 창문을 한 번, 스터디룸을 한 번. 그러고 나서 그녀는 양손으로 이마를 짚더니 중얼거렸다.

{내가 지금 여기에 있었다는 건 돌아가서 이야기해도 아무도 안 믿을 거야…….}

보아하니 세연뿐만 아니라 세연의 친구들도 에르네스트를 아는 모양인데…… 대체 그쪽에서도 얼마나 유명한 건지 좀 궁금해지기도 했다. 그냥 우리 또래의 피아노 연주자들이라면 다 알 만한, 그런 사람인 건가?

중얼거리던 세연은 곁눈질로 에르네스트를 살피더니, 그가 별 반응이 없자 조금 차분해진 어조로 말했다.

{미안해, 얼마 전까지 모니터 화면으로만 보던 사람을 갑자기 현실에서 보게 되니까 너무 놀라서.}

화면이라고 하는 걸 보니 에르네스트의 영상이 꽤 돌아다니나 본데…… 나는 잘 모르겠다. 나중에 찾아볼까.

에르네스트가 웃으며 물었다.

{화면으로?}

{응…… 음반이 있다면 사고 싶었지만…… 아직 없잖아?}

에르네스트의 음반이 없다는 것도 알고 있는 걸 보니 세연이 팬을 자처했던 게 빈말은 아니었던 것 같다.

에르네스트가 고개를 끄덕이니 세연이 부탁했다.

{그래서 말인데…… 혹시 나중에 사인 부탁해도 될까? 조금 이상한가?}

평소 좋아하던 음악가와 직접 만나서 사인을 요청하는 건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었지만, 세연이 입장에선 지금 아나스타샤의 친구이자 내 친구로 이곳에 온 상황이 조심스러운 모양이다.

에르네스트도 곧장 대답하지 못했다. 난 눈치를 보는 듯한 그의 모습이 조금 웃겨서 미소를 지었다. 아나스타샤와 발렌티나도 이견은 없어 보였다. 그제야 에르네스트가 말했다.

{괜찮아. 해 줄게.}

{고마워! 아, 맞아. 타티아나와 아나스타샤, 발렌티나도 부탁해도 돼?}

{우린 왜?}

{나중에 모두들 훨씬 더 유명해지면 받기 어려울지도 모르잖아?}

꼭 그런 이유만은 아니라는 것 정도는 모두 알고 있지만, 세연의 착한 마음을 모르는 것도 아니었다.

아나스타샤가 공책을 꺼냈다.

{그럼 서로 교환하자. 우리도 해 줘.}

{어? 난 왜?}

{네가 더 유명해지면 받기 어려울지도 모르잖아?}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아나스타샤를 바라보던 세연은 곧 환하게 웃었다.

그리고 난데없이 사인을 주고받는 광경이 펼쳐졌다. 그간 서로 사인을 볼 기회가 별로 없었는데, 이참에 보면서 서로 글씨체를 보고 웃기도 하고 놀라워하기도 했다.

“세상에 글씨체 좀 봐……. 만년필은 반칙 아니니?”

“저만 쓰는 건가요?”

내가 가방에서 만년필을 꺼내 사인을 해 줬더니 발렌티나가 황당하다는 듯 말했다. 아나스타샤도 눈을 깜빡이더니 자기도 해 달라 했다. 난 그냥 배운 대로 할 뿐인데…… 지금 반응을 보니 살짝 오버한 거 아닌가 싶기도 하다.

저편에 있는 에르네스트도 무언의 시선을 엄청나게 보내왔다. 그 혼자만 빼놓았다간 나중에 무슨 말을 들을지 모르겠다.

난 잘난 듯이 그에게 사인을 해 주겠다고 말할 용기는 없어서, 살짝 돌려 청했다.

“제게도 사인을 한 장 해 주시겠어요? 에르네스트. 답례로 제 것도 드릴게요.”

“……그럴까?”

그렇게 우리들은 한 명도 빼놓지 않고 모두 사인을 교환했다. 서로 하지 않을 것 같던 발렌티나와 아나스타샤도 분위기를 타서 사인을 주고받았을 정도였다.

손에 들린 네 장의 종이를 보니 말로 형언하기 어려운 충족감이 차올랐다. 친구들과 있으면서 평소에 이런 부탁은 할 생각도 못 할 뿐더러 어색하기도 한 일인데, 세연 덕분에 자연스럽게 선물을 얻게 된 것 같아 기분이 좋아졌다.

주위를 살짝 둘러보니 모두들 비슷한 기분을 느끼는 것 같은 표정이었다. 이런 걸 왜 우리끼리도 교환했는지 잘 모르겠지만, 기쁨은 감출 수 없다.

세연 덕분에 훨씬 분위기가 좋아졌고, 우리는 더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나스타샤나 타티아나가 중앙음악학교에 있다는 걸로도 놀랐는데 에르네스트도 이곳에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어.}

{왜?}

{다들 모스크바 음악원에 다닐 거라 생각했어. 나뿐만이 아니라 대부분 그렇게 생각할걸?}

외부에서 보면 에르네스트는 여전히 중앙음악학교에 남아 있는 게 말이 안 되는 것처럼 보이긴 하나 보다.

에르네스트가 손가락으로 자신과 내 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조기 입학 권유는 우리 둘 다 받았어.}

{어……? 그럼 왜 안 갔어?}

쉽게 납득이 안 간다는 세연의 물음에 그의 대답은 간결했다.

{여기 배울 게 많아서.}

{……그렇구나.}

세연은 더 묻지 않고 그냥 그 정도로 이해하기로 한 모양이다. 그녀는 에르네스트가 모스크바 음악원 피아노학과로 결정을 서두르지 않은 이유를 모른다. 난 설명을 보태지 않고 그저 웃기만 했다.

에르네스트는 커피를 홀짝이더니 세연에게 질문했다.

{나에 대해 신기한 건 다 풀었나? 나도 궁금한 게 조금 있는데.}

{나한테?}

세연은 그가 뭔가 물어볼 줄은 생각도 않았는지 깜짝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 에르네스트가 손가락을 들었다.

{저 애들이랑은 언제 친해졌던 거야?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인가?}

{어?}

에르네스트의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진 분명했다. 그는 세연이 상트페테르부르크 청소년 콩쿠르에 참가했었다는 걸 기억하고 있었다.

그날 무대에 오른 참가자가 수십 명이었는데, 그중 기억에 남았다는 말이었다.

“세연을 기억하시나요? 에르네스트?”

내가 묻자 에르네스트가 머리를 내 쪽으로 기울였다. 그는 기억력이 좋다.

“타티아나 너도 저 애의 마주르카를 기억하고 있지 않아? 그래서 연주회에 초대한 거 아니야?”

“……!”

에르네스트가 세연을 보고는 보였던 묘한 위화감에 대한 정체를 이제야 알 수 있었다. 아나스타샤가 작년 세연이 연주한 곡에 대해 내가 보였던 반응을 기억하고 있는 것처럼, 에르네스트 역시 잊지 않고 있었다.

그는 날 유심히 바라보았다. 내가 세연을 연주회에 초대했다는 게 대체 어떤 의미인지 알고 싶다는 눈빛이었다.

“…….”

내가 그때 보였던 이상반응을 갑작스런 발작 등으로 넘기지 않고, 진지하게 여겨 주고 있다는 건 그만큼 걱정을 끼쳤단 말이니 미안하기도 했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기뻤다.

아나스타샤는 염려를 표하면서도 일부러 세연을 다시 나와 연결시켜 주었고, 에르네스트는 옆에서 지켜봐 주고 있다. 날 믿는다는 뜻이다.

난 조용히 지금 상황을 다시 되돌아보았다.

아나스타샤로부터 시작하긴 했지만 세연을 초대한 건 온전한 내 뜻이었다.

내가 그녀에게 뭘 들려주고 싶은 건진 잘 모르겠다. 하지만 내 독주회를 들려주는 것으로, 난 세연과의 입장을 보다 확실히 할 수 있을 것 같단 직감을 느꼈다.

그뿐이다.

난 말로 답하지 않고 그저 조용히 웃어 보였다. 날 믿어 주는 에르네스트에게 걱정할 필요 없음을 알리고 싶었다.

에르네스트는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세연에게 말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널 봤던 기억이 있어.}

{……난 그때 엉망이었는데.}

{글쎄. 아무튼, 그때 친해졌어?}

{그땐 타티아나와 이야기만 조금……. 그리고 얼마 전에 텍사스 포트워스에서 아나스타샤를 만났었거든.}

세연은 포트워스 청소년 콩쿠르에게 아나스타샤를 만났던 일과, 결승전에서 마주했던 이야기 등을 했다. 그리고 친해져서 전화번호를 교환하고, 나중엔 나에게까지 연락이 닿았던 것도. 모두.

모든 이야기를 가만히 듣던 에르네스트가 말했다.

{묘한 인연이네.}

{그렇지?}

{이 세계에 손을 대고 있는 만큼…… 필연 같기도 하고.}

음악의 세계는 넓으면서도 좁다.

크게 보자면 모든 장르를 통틀어 수억 명이지만 클래식 음악이라는 한 장르, 그중에서도 피아노 연주에만 몰두하는 사람들만 추리면 생각보단 그리 많지 않다.

각 시기마다 열리는 콩쿠르에 참가하다 보면 몇 번이나 본 사람을 다시 보는 일도 흔하게 일어나곤 한다. 특히 수준 높은 콩쿠르에 참가하다보면 더더욱. 그렇게 생각하면 세연과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된 것도 흔한 일에 가깝다.

하지만 그렇게 클래식 피아노 연주자로서 높은 곳으로 향하고자 하는 우리들이 자연스레 연속해서 얽히게 되는 건, 에르네스트의 말대로 필연일지도 모르겠다.

잠시 생각하고 있자 에르네스트가 내게 물었다.

“타티아나, 연주회 준비는 어때.”

“문제없이 되어 가고 있어요.”

“그래.”

내가 왜 독주회를 하려 하는지, 왜 에르네스트가 작곡한 곡을 무대에 올리려 하는지, 왜 세연을 초대했는지. 그는 모든 것에 의문을 표할 만도 했다.

하지만 더 깊게 묻지 않는다. 단지 나지막하게 말할 뿐이었다.

“전부 잘 되겠지.”

“…….”

그가 말하는 전부는 단지 연주회에만 국한되어 있지 않았다. 내가 생각하는 것들, 그리고 미처 생각하지 못하고 있는 것까지. 에르네스트는 그 전부를 통틀어 잘될 것이라 말해 주었다.

내 마음속에 있는 의심이 가득한 목소리는 심술궂게 중얼거린다.

정말 그럴까? 다 잘될 거라 말한 시점에서 이미 불안감을 읽어내지 않았나?

난 내가 세연을 왜 초대했는지도 아직도 스스로 잘 몰라. 저 애가 내게 원하는 것이 있다는 것도 알지만, 뭘 주어야 할지도 모르고. 심지어 그럴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지. 대체 난 뭘 하고 싶은 걸까?

겉으론 웃고 있고, 착한 세연을 좋아하기도 하지. 그렇지만 사실은 그냥 내 독주회에만 집중할 걸 하고 내심 후회하고 있다는 걸. 저 애가 옆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서서히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는 걸. 그리고 그런 감정을 느낀다는 것 자체에 죄책감을 느낀다는 걸. 에르네스트도 아나스타샤도 어렴풋하게 느끼고 있겠지.

이렇게 뒤틀린 상황은 나도 원하지 않는다. 전부 잘 될 수 있을까? 세연과 진심으로 웃으며 이야기할 수 있을까? 어떻게?

“…….”

여러 의심이 맴돌고 뒤섞이며 서서히 커진다.

하지만 에르네스트는 그런 날 지켜보면서도 한 번도 흔들리지 않고 올곧은 눈빛으로 날 바라보았다. 그는 날 믿고 있다.

내가 잘 해낼 것이라, 잘 이겨 낼 것이라 믿어 준다.

그의 믿음에 응하고 싶다. 몇 번이나 그랬던 것처럼 바보 같은 일들을 반복하고 싶지 않다. 연주자로서도, 그리고 할 수 있다면 사람으로서도.

난 다시 한 번 마음을 다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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