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02화
9학년 2학기의 마지막 일주일은 순식간에 흘러갔다. 내내 필기시험과 실기시험을 보다 보니 정신이 하나도 없다.
최선을 다한 결과는 나중에 받아 봐야 확실해지겠지만, 일단 공부한 만큼은 잘 본 것 같다. 9학년이 되어 공부가 조금 어려워졌다고 해서 성적이 추락하는 일은 없을 것 같다.
“…….”
그렇게 학교 시험에 대한 건 정리를 마치고, 머리에서 모두 지워 버렸다. 지금 내 모든 집중력은 앞에 있는 피아노로 향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봤던 것들이 학교 시험이라면, 내일 해야 하는 건 연주자로서의 삶이 걸린 인생 시험에 가까웠다.
물론 그렇게만 생각하면 부담감에 억눌려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난 시험이라고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세상 사람들에게 평가를 받는 건 맞지만, 엄격한 평가 기준이 있는 콩쿠르와 달리 독주회는 음악가로서 내 역량을 제대로 쏟아내기만 하면 되는 무대다.
다시 한 번 집중하며 곡들을 반복해 연습했다. 학교 시험과 동시에 준비했지만 완성도에 있어선 문제가 없었다.
모든 감각을 거의 완전하게 다룰 수 있게 되면서 곡을 익히는 속도가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빨라졌고, 깊이 있게 표현할 수 있는 수준도 굉장히 올라간 덕분이었다.
지금 이 곡들은 내가 내놓을 수 있는 최선의 곡들이다.
그리고 에르네스트가 작곡한 곡 역시 제목을 제대로 붙이고, 보다 파고들어 연습하면서 초연 연주자로서 무대에 올리기에 충분할 정도로 완성도를 매듭지어 놓았다. 이 곡을 기대하고 있는 사람이 많은 만큼 신경도 많이 썼다.
“……후.”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연습을 마치고 한숨을 내쉬었다. 직전에 연주했던 연주와 거의 똑같은 해석이었다. 오늘 시간을 들여 더 연습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시험 벼락치기처럼 한다고 해서 뭔가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남은 반나절은 컨디션 조절이나 하기로 마음먹고 건반 덮개를 닫았다.
스마트폰을 켰더니 그사이 메시지가 잔뜩 와 있었다. 친구들에게서 온 것들이었는데, 연주회 전날이니 너무 열심히 연습하지 말고 컨디션 관리도 하라는 걱정이 대부분이었다.
방금 전까지 연습하고 있긴 했지만…… 다들 대체 날 어떻게 보고 있는 걸까?
그중 한 메시지가 눈에 들어왔다. 세연이 보낸 메시지였다.
[내일 날씨가 좋기를, 타티아나가 모든 실력을 낼 수 있기를 기도할게.]
짤막한 메시지였지만 세연이 어떤 마음으로 보낸 것인진 분명히 느껴졌다.
세연은 지난 일주일 내내 정말 거의 혼자서 모스크바를 여행했다. 나와 아나스타샤가 방을 내어 주겠다고 했는데도 거절하곤 알아서 숙소를 구했을 정도였다.
이유는 단 하나. 시험이나 연주회에 방해가 되고 싶지 않다는 이유였다.
특히 연주회에 있어서 세연은 완벽한 청중이 되고자 했다. 난 거기에 어디까지 부응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최고의 모습을 보여 주고 싶었다.
“…….”
메시지를 잠시 내려다보다가, 난 신경 써서 모두에게 답장을 했다. 기대해 달라는 말을 보낼 때마다 점점 더 연주자로서 준비되어 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
세연이 기도해 준 덕분인지 날씨는 화창했다
혹시나 해서 맞춰 놓은 알람은 의미가 없었다. 난 알람이 울리기 한참 전부터 일어나 움직이지 시작했다.
꼼꼼한 스트레칭과 목욕, 그리고 아침 연습으로 오늘 하루를 완벽하게 시작할 준비를 마친다. 컨디션엔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 난 만족스럽게 아침 식사를 하기 위해 식당으로 나갔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아버지. 오빠.”
“일어났구나. 타티아나.”
“좋은 아침.”
오늘 아침식사는 부담이 적은 샌드위치였다. 드미트리가 내 연주회를 생각해 준 것 같았다.
식탁 위 대화 주제도 자연스레 내 연주회로 쏠려 있었다. 아버지도 오빠도 너무 걱정하지 않으려 하시면서도 어쩔 수 없이 신경이 쓰이는지 내게 이런저런 질문을 했다. 대부분 컨디션 상태에 관한 이야기들이었다.
“오늘은 다 함께 가도록 하자.”
연주회에 대해 물어보시던 아버지가 문득 그렇게 말씀하셨다. 모든 건 콘서트홀과 에이전시의 도움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아버지가 해 주실 건 별로 없었지만, 그래도 같이 가 주신다면 그만큼 안심이 된다. 아버지가 간다 하시니 루슬란 오빠도 자동적으로 함께 하게 되었다.
준비를 마치고, 검은 벤츠 일곱 대가 동시에 출발했다. 난 이동하는 도중에도 자거나 놀지 않고 연주회 관계자들과 계속해서 연락을 나누었다. 연주회 준비에 관련하여 할 이야기들이 많았다.
1시간 남짓 모스크바 시내를 달려 중심부로 향했다. 멀리 저편으로 코텔니체스카야 빌딩이 보이기 시작했다. 슬슬 도착할 때였다.
“콘서트홀입니다. 아가씨.”
빅토르의 말에 따라 차에서 내렸다.
전부 유리로 된 벽면과, 마치 모자 챙처럼 길게 뻗어 나와 있는 구조물.
약간 난해한 현대미술적인 느낌이 들면서도 깔끔하다. 한눈에 봐도 오래된 건물처럼 보이진 않았다. 실제로 이제 지어진 지 1년도 안 된 새 건물이기도 했다.
이곳이 바로 내가 연주회를 위해 대관한 자르야드예zaryadye 콘서트홀이었다.
다른 홀들도 많았지만 베르너는 자르야드예의 매니저가 내 독주회에 굉장히 협조적이라면서 원하는 대로 대관할 수 있을 거라 했고, 난 고민하지 않고 그의 의견에 따랐다.
그레이트홀 1600석, 스몰홀 400석. 선택할 수 있는 건 두 가지였다.
베르너는 그레이트홀을 추천했지만 난 내가 스스로의 힘으로 그렇게 큰 홀을 채울 수 있을 거라 과신하지 않았다. 1600석은 어느 정도 확고한 인지도가 있어야 하는 수준이었다.
작은 곳부터 채워 나가도 늦지 않는다. 첫 독주회이니만큼 천천히 그리고 확실하게 단추를 꿰어 나가기로 했다.
난 아버지와 오빠, 그리고 빅토르 외 경호원 분들과 홀 안으로 들어섰다.
“…….”
역시 눈에 안 띌 수가 없었다. 로비에 있던 사람들이 우리 쪽을 보더니 비켜났다. 딱 봐도 뭔가 가까이 하면 안 되는 것처럼 보이나 보다. 난 오늘 연주자인데……
아버지와 함께 오기로 했을 때부터 어쩔 수 없는 일이긴 했다. 난 그냥 주위는 신경 쓰지 않고 로비를 걸어 나갔다.
스몰홀 관계자 대기실 문 앞에 서자 아버지가 날 불러 세웠다.
“타티아나. 나와 루슬란은 근처에서 기다리마.”
“아…….”
난 혹시 아버지가 같이 들어오셔서 보호자로서 무언가 하시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았다.
아버지는 지금까지 내 연주회에 대한 모든 것을 내게 맡겼던 것처럼, 홀에 와서도 내가 다른 관계자분들과 준비한 것들을 그대로 끝까지 온전히 준비할 수 있도록 해 주셨다.
사실은 같이 들어가고 싶으실 텐데, 참고 계시는 것이 느껴진다. 난 다가가서 오빠와 아버지를 차례로 포옹했다.
“잘 준비할게요.”
“그래. 도움이 필요하면 연락하거라.”
난 걱정하시지 말란 뜻으로 밝게 웃어 보였다. 아버지가 도와주실 수 있는 부분은 정말 무궁무진하지만, 여기서 아버지의 도움이 필요한 일이 있을까 싶다.
그렇게 다른 분들을 문밖에 두고, 빅토르만 대동한 채 관계자 대기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안에는 이미 사람들이 몇 있었다. 스몰홀을 담당하는 직원 분들이었다. 저마다 각자 일에 분주하면서도 날 보곤 짧게 인사를 건네왔다.
“오셨습니까? 타티아나.”
“어서 와요.”
그리고 모두의 책임자라 할 수 있는 두 사람이 다가왔다. 한 명은 내 에이전트인 베르너. 그리고 다른 한 명은 이 홀의 스테이지 매니저 엘레나였다.
독주회는 연주자 홀로 무대에 서서 모든 시간을 음악으로 채워야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무도 없이 혼자서 모든 걸 해낼 수 있진 않았다. 독주자를 도와줄 수많은 사람들이 필요했다.
오늘 연주회를 성공적으로 진행하기 위해선 한 사람도 빠져선 안 된다.
난 그들과 차례로 악수를 나누었다.
“좋은 아침이네요, 베르너, 엘레나.”
“날씨도 좋고, 모든 게 좋네요. 최고의 하루가 될 것 같아요.”
엘레나가 쾌활하게 웃으며 말했다. 난 이 열정적이고 긍정적인 스테이지 매니저가 정말 마음에 들었다.
우리 세 명은 테이블 앞에 앉았다. 베르너가 물었다.
“차 한 잔 하시겠습니까?”
“그냥 따뜻한 물로 괜찮아요.”
“하하, 그렇게 하죠.”
에르네스트가 컨디션 관리를 하는 모습을 보면서 난 그가 하는 방법을 따라 하기도 했다. 당일에는 물과 가벼운 샌드위치 정도로 충분했다. 무작정 따라 하는 게 아니라 실제로 해 보니 잘 맞는 것 같았다.
베르너는 내게 물컵을 건네주었다.
“오늘 어떻습니까?”
정말 여러 가지를 함축한 질문이었다. 연주회 당일의 음악적인 완성도, 컨디션, 사소하게는 그냥 기분까지도. 조금이라도 무대에 영향이 갈 수 있는 사항이라면 미리 알아 두고 싶은 것이다.
난 손가락을 내려다보며 살짝 까딱여 보았다. 지금 내 상태는 어렵게 설명할 필요가 없었다.
“아주 좋아요.”
“좋습니다. 나중에 연주자 대기실 이용하시면서 웜업하시면 되고, 혹시나 도중에 문제가 있으시다면 바로 말씀해 주시면 됩니다.”
“알겠어요. 베르너.”
베르너는 그 이상 세세하게 걱정하지 않았다. 그는 몇 번 같이 무대를 만들어 보면서 내가 어떻게 무대를 준비하는지 알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내 말과 행동을 굉장히 신뢰하고 있기도 했다.
그리고 연주자가 준비되었다는 말에 이번엔 무대를 담당하는 스테이지 매니저 엘레나가 바턴을 받았다.
“무대는 저번에 확인하셨던 때와 완전히 같아요. 저희 측 엔지니어가 다시 한 번 확실하게 점검했으니 걱정 않으셔도 됩니다.”
홀의 어쿠스틱이란 정말 사소한 변화로도 깨어지곤 한다. 게다가 이 홀은 전 무대를 녹음하기도 하기 때문에 스테이지를 관리하는 사람들은 피아노가 정해진 위치에서 1cm도 벗어나지 않도록 관리하고 마이크들도 음향적으로 완벽하도록 세팅해 놓는 데에 심혈을 기울이곤 했다.
자르야드예의 스몰홀은 400석이라는 그 크기에 비하면 과할 정도로 어쿠스틱이 훌륭한 홀이었다. 난 세팅에만 문제가 없다면 나머진 온전히 내 실력에 달려 있다고 생각한다.
“피아노도 그대로인가요?”
“예. 스타인웨이 콘서트 그랜드 D-274. 저번에 연주해 보셨던 그 피아노 그대로. 오늘 아침 조율만 다시 한 번 완벽하게 맞췄죠.”
“나중에 다시 한 번만 확인해 봐도 될까요?”
“물론이에요.”
피아노도 예약한 그대로였다. 난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우리는 그 후로도 회의를 이어 나갔다. 무대에 대한 세세한 사항들이나, 티켓이 얼마나 나갔는지에 대한 이야기 등이었다.
베르너는 티켓이 이미 한참 전에 매진되었다면서 그레이트홀을 대관했어도 좋았을 거라며 아쉬워했다.
아무리 그래도 네 배나 더 큰 홀은 쉽지 않았을 것 같은데…… 베르너는 충분히 가능하리라 생각하는 것 같았다. 난 괜찮은데 베르너가 더 아쉬워하고 있었다.
아무튼, 다시 체크해 봐도 문제될 건 없었다. 난 다시 한 번 베르너가 준 서류들을 살펴보다가, 다시 그에게 돌려주었다.
“음악도 무대도 준비된 것 같으니 드레스를 입고 올게요.”
“일찍 준비하시는군요.”
“차근차근 준비하고 싶어서요.”
베르너는 내가 편한 복장으로 준비하길 바라는 것 같았다. 아직 시간은 한참 남아 있었기 때문에 그가 말하는 것처럼 편하게 준비해도 되겠지만, 난 지금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더 미루고 싶지 않았다.
의상을 갈아입고, 식어 있는 몸을 다시 달구고. 무대에 오르기까지 모든 과정은 너무 늘어지거나 너무 급하지 않게 적당한 텐션으로 이어져 있어야만 했다.
엘레나가 먼저 벌떡 일어났다. 그녀는 마치 지금 이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다.
“잘됐네요. 드레스룸 직원도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 가 보도록 하죠. 타티아나.”
드레스룸이 어딘진 이미 알고 있었지만, 난 조금 들뜬 것처럼 보이는 엘레나의 안내를 거절하지 않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