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503화 (503/1,277)

##  503화

드레스룸 직원이 내 뒤편에 서서 함께 거울을 확인하더니 탄성을 흘렸다.

“너무 잘 어울리시네요. 머리를 이렇게 살짝 올리시면, 오케스트라와 함께 하지 않으니 독주자가 크게 돋보일 필요 없이 은은하게 무대 전체에 스며드는 느낌으로…….”

직원이 중얼중얼했다. 난 그녀의 말에 어느 정도 동감했다.

앤티크한 스타일의 오프숄더 드레스는 연한 보라빛을 띠고 있었다. 저번에 확 눈에 띄었다던 금색이나 붉은색도 염두에 두고 있었지만, 지금 보니 이 색이 나은 것 같았다.

이리저리 날 둘러보던 직원이 이어 물었다.

“세부 교정은 할 필요 없겠는걸요? 불편하신 곳 있으세요?”

“괜찮아요.”

“팔 들어 보세요. 이렇게. 연주하시는 데에 조금이라도 걸리적거리면 안 되니까요.”

직원은 막 내 팔을 들어 보기도 하고, 의자에 앉으라 하곤 발을 움직여 보라 하기도 했다. 이미 몇 번이나 피팅을 하면서 확인해 봤던 것들인데, 다시 마지막 점검을 하는 걸 보니 프로 의식이 대단했다. 난 불평하지 않고 그녀가 시키는 대로 움직여 보았다.

내가 전혀 불편해하지 않는다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직원이 마지막으로 가넷 목걸이를 걸어 주었다.

물론 이걸로 끝이 아니었다. 그다음은 다른 직원의 손에 넘어가 헤어 스타일링을 받고 화장도 해야 했다.

홀 대관료에 이 사람들을 고용하는 것도 모두 포함되어있으니 이용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무엇보다 모두들 굉장한 프로들이기도 했고. 나 혼자서 하는 거랑은 그야말로 차원이 달랐다.

음악과 무대에 이어 연주자로서의 모습도 완성하기까지 약 1시간. 난 마지막으로 거울을 확인하고, 날 도와준 직원들에게 감사를 표했다.

“마음에 들어요. 연주도 잘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감사합니다.”

“연주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다면 저희야말로 보람이 있네요. 멋진 무대가 되길 기원할게요.”

손을 흔드는 그녀들에게 살짝 고개를 숙여 묵례하고, 드레스룸을 빠져나와 다시 관계자 대기실로 돌아갔다.

베르너가 나지막이 웃으며 말했다.

“왜 드레스를 입는 게 차근차근 준비하는 일인지 이제야 알겠군요. 눈빛부터 달라지셨는데요, 타티아나.”

“그런가요?”

“예, 지금 당장 무대에 오를 준비가 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연주자로 보인다는 말은 내게 있어서 언제나 칭찬이었다. 난 미소로 그의 말에 답했다.

우린 시간을 확인하고, 다시 한 번 모든 스케줄과 프로그램을 꼼꼼하게 정리했다.

사실 독주회이기 때문에 그렇게 빡빡하지도 않았다. 이미 송년 음악회에서 1분 1초도 어긋나지 않는 무대를 경험해 본 내게 이 정도는 편안하게 느껴졌다.

처음 하는 독주회라고 해서 너무 부담감을 느끼지 않고, 그렇다고 해서 너무 긴장감을 풀어놓지도 않은 채 나는 적당히 여유 있게 마음을 준비시켰다.

그때였다. 직원 한 분이 날 불렀다.

“타티아나 유리예브나. 지인 분들께서 찾아오셨습니다.”

“아, 나갈게요.”

스마트폰은 이미 꺼 둔 상태였기 때문에 난 이런 식으로 연락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얼른 밖으로 나가 보니 대기실 옆 휴게실에서 드레스코드에 맞춰 한껏 멋을 낸 사람들이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건 아버지와 스타니슬라프, 그리고 구세프 선생님이었다. 세 분 다 굉장히 크신 분들이라 멀리서 봐도 한눈에 보였다.

내가 다가가니 세 분이 동시에 휙 내려다본다. 모두 좋은 분이라는 걸 알면서도 순간 무릎에 힘이 풀릴 것 같다.

곧 이어진 구세프 선생님의 목소리가 제정신을 찾게 도와주었다.

“키가 조금 컸나? 타티아나.”

갑자기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다. 일주일 전에도 뵈었으면서.

난 괜히 목을 쭉 빼며 말했다.

“그럴지도 모르겠어요. 생일 소원이 이루어진 걸까요?”

“……생일에 키 크게 해 달라고 했나?”

“……아.”

지난겨울 아나스타샤와 키에 대해 이야기를 한 뒤에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혼자 생각하고 있었던 건데…… 내 입으로 이렇게 말해 버리게 될 줄은 몰랐다.

구세프 선생님은 안쓰러움 반 그냥 웃김 반 정도로 섞인 눈빛으로 날 바라보았다. 난 입을 열면 손해일 것 같아서 꾹 다물고 있었다.

스타니슬라프가 날 달래듯 말했다.

“키 같은 건 관계없지 않나? 이미 연주자로선 거인이니.”

“…….”

그렇게까지 말해 주시면 너무 부끄러운데요…….

내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자 갑자기 아버지가 웃음을 터뜨리셨다. 난 멍하니 아버지를 보았다.

“이 분들에게 이런 말을 듣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겠지. 난 무척 자랑스럽구나.”

아버지는 기분 좋게 웃으며 말씀하셨다. 아버지는 스타니슬라프가 빈말로 저런 말씀을 하지 않으신다는 걸 알고 계신다. 난 아버지를 따라 미소를 지었다.

다시 스타니슬라프와 구세프 선생님을 돌아보며 정중하게 말했다.

“세 분, 오늘 연주회에 와 주셔서 감사드려요. 그 자랑스러움 지켜 보일게요.”

“하하하, 기대하마.”

그리고 바로 옆에는 세 분과 비교해서 체격은 작지만, 음악가로선 분명한 거인인 미하일 선생님과 아르카디 교수님이 함께 계셨다.

“좋아 보이는구나. 타티아나.”

“미하일 선생님.”

선생님은 가볍게 웃더니 무대를 앞둔 제자에게 실로 선생님다운 조언을 해 주셨다.

“연습한 대로만, 네 음악을 보여 준다면 그 누구라도 빠져들 테니 걱정 말고 자신 있게 실력을 보여 주거라.”

“예, 선생님.”

“내가 이렇게 말 안 해도 잘 알고 있겠지. 하하. 그냥 노파심에 한 잔소리였단다.”

좋은 말씀은 몇 번을 들어도 잔소리로 들리지 않는다. 난 선생님 말씀대로 하겠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미하일 선생님은 내 어깨를 가볍게 툭툭 쳤다.

“힘내거라.”

아르카디 교수님은 길게 말씀하시지 않았다.

“오늘 기대하고 있겠어요. 타티아나.”

저번 송년 음악회에서 나와 에르네스트가 움직이지 않는 이유를 듣고 납득하신 후로 아르카디 교수님은 한 번도 음악원에 오라 말씀하신 적이 없었다. 하지만 내 연주회 티켓을 구해서 오시기까지 한 걸 보면, 여전히 주의 깊게 지켜보고 계시는 것 같다.

아르카디 교수님과 인사를 마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에르네스트의 어머니가 와락 달려들어 내 손을 잡았다.

“어쩜 이렇게 예쁜지 모르겠구나 타티아나. 깜짝 놀랐잖니 정말.”

에르네스트의 어머니도 내가 티켓을 미처 드리지 못했는데 와 주셨다.

난 두 손을 쥐며 인사했다.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팬으로서 당연한 일이니 그럴 것 없단다. 그리고 오늘 초연되는 곡이 있다고도 하고.”

괜히 먼저 드리면 반드시 오셔야 한다고 하는 것처럼 보일까 싶어 그렇게 하지 않았던 건데, 바보 같은 생각이었던 것 같다. 에르네스트가 작곡한 곡이 초연되는 무대이니 오시고 싶어 하실 게 당연한 일이었는데.

약간 죄송함을 담아 말했다.

“좋은 무대 보여 드릴게요.”

에르네스트의 어머니는 신경 쓰지 말고 무대에만 집중하면 된다는 듯 웃으셨다.

그리고 막 달려든 류보비가 칭찬해 달라는 듯 말했다.

“언니! 저 오늘 감상하려고 미리 예습도 해 왔어요!”

“제가 먼저 하자고 했었어요.”

“그런 말을 왜 하는데!”

“아니, 맞잖아?”

아니나 다를까 바로 끼어든 아나톨리와 티격태격하는데, 난 두 사람의 모습을 보며 웃을 수밖에 없었다.

살짝 옆쪽에 서 있던 사샤는 두 사람을 보고 한숨을 쉬더니, 내게만 들리도록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타티아나 누나. 궁금한 거 물어봐도 되나요.”

“뭐든지요, 사샤.”

갑자기 무슨 질문일까 싶어 귀를 기울이는데, 사샤는 예상치 못한 질문을 했다.

“형이 작곡했다는 곡, 혹시 제목은 누나가 붙인 거예요?”

이미 포스터나 팸플릿에 곡에 대한 모든 정보가 나와 있다. 사샤는 그저 그것만 봤을 텐데, 왜 제목을 내가 지었다고 생각하는 건지 모르겠다.

“음…… 맞아요.”

“……그렇구나.”

“이상한가요?”

내가 실수라도 했나 싶어 물어보자 사샤가 도리도리 고개를 저었다.

“아뇨, 형이 그럴 사람이 아닌데 어찌 된 일인가 싶어서요.”

“……?”

“아무것도 아니에요. 아…… 오늘 연주회 잘 하세요!”

그러더니 사샤는 류보비와 아나톨리가 있는 쪽으로 갔다.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지만 약간 아쉬웠다. 사샤도 예전처럼 내게 달라붙는 일이 드물어졌다. 부쩍 커 버린 만큼 철도 든 걸까……?

한바탕 폭풍처럼 아이들이 지나가고, 마카로프 프로듀서와도 인사를 나누었다. 막심 선배와 니콜라이 선배 역시 마찬가지였다.

멀찌감치 있던 친구들이 손을 흔들었다. 내가 티켓을 준 친구들은 빠짐없이 다 와 있었다.

아나스타샤와 발렌티나가 웃으며 말했다.

“인사는 다 했니? 드레스 정말 잘 어울린다. 타티아나.”

“이 콘서트홀 고르기도 잘 고른 것 같아. 연주회도 잘 될 것 같은걸?”

“고마워요. 두 분.”

“오늘 힘내. 보고 있을게.”

그리고 에르네스트는 오늘 나만큼이나 중요한 사람이면서, 그리 눈에 띄고 싶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그는 의자에 앉아 있다가 날 보고는 피식 웃었다.

“전혀 긴장하고 있지 않은 것 같네?”

난 고개를 저었다.

“적당한 선을 유지 중이에요.”

“다행이네. 그런데 웃긴 건…… 나도 지금 하나도 긴장이 안 돼.”

앉아서 뭘 하고 있나 했더니, 자신이 쓴 곡이 초연되는 무대인데도 긴장이 안 되어서 멍하니 있었나 보다. 대체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다.

난 일부러 고개를 삐딱하게 들었다.

“긴장시켜 드릴까요? 사실 저 오늘 아침에 연습하는데 곡이 갑자기 생각이 안 나서…….”

“거짓말인 게 너무 뻔해서 더 맥이 빠져.”

“…….”

내가 어이없어하자 에르네스트는 다시 웃기만 했다.

난 얼마 전 그가 했었던 말이 떠올랐다. 직접 연주하는 것보다 나에게 맡기니 더 안심이 된다고 했던가.

그는 킥킥거리더니 내게 손을 내밀었다.

“아무튼, 잘 부탁해.”

“걱정 마세요.”

난 그 손을 맞잡았다. 부탁받은 곡은 걱정할 필요 없을 것이다. 에르네스트도 깜짝 놀랄 테니까.

리처드와 한승우는 세연과 같이 있었다.

내가 그쪽을 바라보자 리처드가 세연을 툭툭 쳤다. 가 보라는 것 같다. 아니, 다 같이 오면 되지 않아?

{타티아나.}

그녀가 환한 미소와 함께 말했다.

{지난 며칠 동안 이곳저곳 정말 많이 돌아다녔거든? 연주회도 두 번이나 갔었고.}

같이 다녀 주진 못했지만 이야기를 전해 듣긴 했다. 아나스타샤와 발렌티나가 구경시켜 주기도 해서, 세연은 지난 일주일간 원 없이 모스크바를 관광했다는 것 같다.

그런 그녀가 말했다.

{그런데 오늘이 제일 기대되는 것 같아.}

커다란 성당들보다, 다른 연주자들의 연주회보다 오늘 내 무대가 더 기대된다고.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순수한 진심이 느껴진다. 하지만 동시에, 그녀가 내 음악을 바란다는 진심 또한 거대하게 느낄 수 있었다.

“…….”

그것도 나쁘지 않다. 그녀가 내 음악에서 무엇을 읽어 내었는지 모르겠지만, 어떤 방법으로든 가져갈 수 있다면 내어 주고 싶다.

{제가 초대한 만큼…… 가능하다면 원하시는 걸 받아 가실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어?}

{잘 봐 주세요. 세연.}

세연은 약간 당황해했지만 난 그저 웃기만 했다.

왜 그리 편하게 여기지도 않는 세연을 연주회에 초대하고 싶었는지, 이제 조금은 알 것 같아졌다. 속죄라기엔 비겁하고 빚을 지운다기엔 교활하지 못한 내 마음은 사실 그렇게 복잡하게 이루어져 있지 않았다.

난 아마 세연이 나와 연관이 전혀 없었더라도, 지금처럼 내 음악에 관심을 보였더라면 틀림없이 도우려 했을 것이다.

의심과 걱정 때문에 순수한 마음마저 없는 걸로 만들진 말자. 난 그렇게 생각하며 세연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당장 날 무대로 올려 보내고 싶은 눈을 하고 있었다. 난 그만 웃고 말았다.

그렇게 보채는 얼굴 할 것 없어. 잠시 후에 나는 있어야 할 자리에 있을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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