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04화
라예프스키 레코즈의 사장 표트르 발레예비치 라예프스키는 자르야드예 콘서트홀에 와 있었다.
예전 녹음 장비와 음반 시스템에 대한 판로를 잡기 위해 이 콘서트홀을 몇 번 찾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오늘은 그런 비즈니스 때문에 찾은 것이 아니었다.
아니지, 크게 보면 이것도 비즈니스라 할 수 있나?
표트르는 팔짱을 끼고 생각하다가 비즈니스와 결부시킬지 말지는 이 연주회가 끝나고 나서 결정하기로 했다.
“……크흠.”
타티아나 유리예브나 베르체노바의 리사이틀.
이미 알 만한 사람들 사이에선 소문이 돈 지 오래였다. 하마터면 표트르도 티켓을 구하지 못할 뻔했다.
베르체노프가쯤 되면 그냥 1600석 홀을 빌려 버려도 무방할 텐데, 대체 왜 400석에서 만족하는지 모르겠다. 스스로의 티켓 파워를 그 정도밖에 안 된다고 생각하는 건가?
분석을 잘못해도 너무 잘못하고 있는 게 아닌가. 대체 타티아나와 함께 하고 있을 에이전트는 뭘 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표트르는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생각하다가, 작년에 마주했던 타티아나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때도 정말 이해하지 못할 이야기들만 오갔었지. 마지막에 타티아나가 했던 이야기는 정말 가당찮은 소리에 가까웠다. 연주자를 완전히 배제한 음악만을 담은 음반을 내고 싶다니, 대체 뭘 원하는 건지 모르겠다.
하지만 타티아나는 그걸 정말로 해냈다.
그리고 전 세계의 클래식 딜레탕트dilettante들 사이에선 타티아나의 음반에 대한 무수한 추측들이 난무했고, 그녀의 음반은 나중엔 없어서 못 구할 정도가 되었다. 애초에 그녀와 손잡은 에우테르페 레코즈에서 음반을 많이 찍어 내지도 않기도 했지만.
표트르의 입장에선 하나부터 끝까지 전부 이해할 수 없는 것투성이였다.
연주자가 자신의 음악만을 남긴 것, 그러면서도 많이 팔 생각도 없이 이슈가 될 정도로만 뿌려서 국제 클래식 매거진들로부터 평가를 받은 이유. 대체 돈도 안 될 일은 왜 하는가.
하지만 그 의문은 음반을 구해서 들어 보았을 때, 모두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 버렸다.
타티아나의 음반은 그냥 그 자체로 베토벤과 슈만 그리고 라흐마니노프의 에센스나 다름없었다.
표트르는 연주자의 이름을 뺀 것을 노이즈 마케팅이라 생각했었지만, 음반을 듣고 나선 생각이 완전히 정반대로 뒤집혔다. 음악의 가치를 팔려고 하지 않고 연주자를 치장하는 데에 신경을 쓰는 것이야말로 노이즈 마케팅에 미쳐 있었던 게 아니었을까.
타티아나의 음악을 들으면 그 위에 놓인 피상적인 것들은 다 무의미하게 느껴지고 오로지 음악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에 집중하게 된다. 그녀의 음악엔 그런 마력이 담겨 있었다.
“…….”
표트르는 언변으로는 거의 설득할 뻔했던 타티아나에게 음악으로 완벽하게 설득당했음을 느끼며 이 자리에 있었다. 머리로는 타티아나라는 연주자의 가치를 가늠하고 있지만, 가슴으로는 이미 그런 식으로 재는 것을 포기한지 오래다. 타티아나는 표트르의 잣대로는 잴 수 없는 곳에 가 있었다.
불쾌하거나 무력감이 느껴지진 않았다. 되레 유쾌했다.
표트르는 타티아나가 음반을 낸 뒤에도 상트페테르 챔버 오케스트라와 협연을 하고, 송년 음악회에 출연하는 등 굵직굵직한 활동들을 하는 것들을 봐 왔다. 그리고 그 때마다 멈추지 않고 나아가는 것 역시 똑똑히 느끼고 있었다.
이번에도 역시 어디에 가 있는지, 표트르는 직접 확인하고 싶었다.
“청중 여러분들은 어셔의 안내에 따라 좌석에 앉아 주시길 바라겠습니다. 휴대폰은 전원을 꺼 주시고, 소리가 날 수 있는 물건들은 소리가 나지 않도록 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다시 한 번 안내말씀 드립니다…….”
시간이 되었다. 표트르는 자신의 좌석을 다시 확인하곤 스마트폰을 껐다. 그리고 천천히 연주회 프로그램북을 다시 읽기 시작했다.
연주회 주제는 단순명료했다. 고전에서 현대까지.
하지만 이런 주제는 열여섯 살의 연주자가 풀어내기엔 너무 어려운 주제였다. 클래식 음악사 전체를 2시간 안에 요약해 보겠단 말이나 다름없었다.
연주 스타일을 바꿔 가면서 각 시대를 드러내야 하고, 그러면서도 동시에 전체 연주회가 흐름을 갖추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청중들은 집중력을 잃게 된다.
보통 연주회가 어느 한 시대나 작곡가에 초점을 맞추는 이유는 그게 청중들을 집중시키기에 용이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타티아나는 그런 건 실력으로 해내겠다는 듯 자신만만하게 이런 프로그램을 준비했다.
표트르는 여기에서 정말 타티아나의 실력이 나올지, 아니면 만용임이 드러나게 될지 기대할 수밖에 없었다.
“…….”
곧 청중들이 모두 제자리에 앉았고 홀 안의 등이 모두 꺼졌다.
쥐죽은 듯한 고요만이 어둠 속에서 흐르길 잠시, 무대 쪽에만 조명이 들어오며 피아노를 비췄다. 검은 광택이 흐르며 홀을 감싼 어둠 전체를 한 바퀴 휘감는다.
그리고 스포트라이트가 좌측에서부터 한 사람을 비췄다. 이 독주회의 주인공 타티아나였다. 보라색 드레스는 기이할 정도로 그녀에게 잘 어울렸다.
연주자를 맞이하는 박수 소리가 무대 위로 향했고, 거기에 호응하듯 타티아나가 걸어 나왔다.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은 우아한 걸음걸이와 청중석 쪽으로 든 고개. 짧은 순간이지만 타티아나는 400명 전원과 눈을 마주했다.
그 모두에게 감사를 표하듯 타티아나가 허리를 굽혔다. 박수가 폭발적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타티아나가 피아노 쪽으로 돌아서서 피아노 옆에 손가락을 짚는 순간, 모든 소리가 멎었다.
사회자 없이 진행되는 독주회였기에 박수 유도도 소개도 진행도 그 무엇도 없었지만 모두가 타티아나의 지시에 맞추어 행동했다. 타티아나는 손가락 하나만으로 이곳 400명을 벌써부터 마음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
타티아나는 피아노 앞에 앉아서 고개를 살짝 숙였다. 표트르의 눈엔 저 피아노가 마치 타티아나에게 달라붙어 있는 거대한 그림자처럼 보였다.
타티아나는 그림자 속으로 손을 뻗었다.
그리고 거기에서부터 음악을 뽑아내기 시작했다.
‘하이든…….’
독주회의 첫 곡은 하이든의 피아노 소나타 37번. 라장조였다.
처음 프로그램북을 봤을 때 약간 의아했던 선곡이기도 했다.
이 하이든의 소나타는 고전으로서 굉장히 사랑받는 곡이기도 하지만, 그야말로 고전적인 양식미에 근거를 둔 곡이라 독주회 레퍼토리로는 큰 호응을 이끌어 내기 어려운 까닭이었다. 난이도도 그렇게 어렵다 할 수 없어서 어린아이들도 종종 연주하곤 하고.
그렇게 표트르는 첫 곡은 무난하게 감상하려 했다.
하지만 그 생각은 불과 몇 초가 지나지 않아 깨졌다.
‘이게 하이든 소나타라고?’
발랄하게 재잘거리는 새소리. 숲속을 거니는 듯한 풍경. 음표 하나하나가 동물이 되고 나무가 되고 발걸음이 되어 주었다.
표트르가 생각했던 무난한 하이든은 이 정도로 선명한 이미지를 보여 주지 않는다. 고전 소나타답게 복잡한 화성이나 기교들이 없기 때문에 다채롭기 어려운 까닭이다.
하지만 타티아나의 연주는 거의 마술 같은 색채감을 지니고 있었다. 표트르는 살아생전 이런 하이든은 들어 본 적이 없었다.
“…….”
독주회를 여는 첫 곡으로 왜 이 곡을 골랐는지 알 것 같았다.
잠든 아이를 깨우는 노래와 비슷하다.
미처 집중하지 못하고 있던 집중력과 깊은 곳에 잠들어 있던 음악 감상자의 마음. 눈을 뜨고 음악을 들으면서도 제대로 듣지 못하는 청중들은 늘 있기 마련이었다.
타티아나는 이 햇살과도 같은 곡으로 그 모두를 깨우고 이끌어 냈다. 어서 여기 따라오라고, 피리를 부르며 앞장선다. 청중들은 모두 정신없이 타티아나의 뒤를 따라갔다.
주제가 다시 한 번 반복되고, 타티아나는 지루할세라 순식간에 테크닉을 바꾸며 곡에 변화를 주었다. 음표를 바꾸거나 지시를 바꾼 것이 아니라 형태 자체는 그대로인데, 숲의 색만 변화했다. 이러한 음색의 컨트롤 기술은 들을 때마다 표트르가 혀를 내둘렀던 타티아나의 진귀한 기술 중 하나였다.
게다가 실제로 듣는 피아노 소리는 음반과 스피커로 듣는 것과는 상대도 안 될 정도로 실감이 넘쳤다. 열화되지 않은 악기 그대로의 음색이 잠든 모두를 깨웠다.
‘비가 오는군…….’
1악장이 끝나고 라단조의 2악장이 시작되었다. 악장지시는 느리고 길게 늘여서 연주하라는 뜻인 라르고 소스테누토largo sostenuto.
타티아나는 느릿하게 연주하며 곡을 촉촉하게 적셨다. 비 혹은 눈물. 그 무엇이든 상관없었다. 1악장으로 음악을 들을 준비가 된 모든 청중들은 이 2악장의 물결에 저항하지 못하고 모두 물에 빠진 사람이 되어 버렸다. 표트르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그는 손을 들어 올리는 동작 하나까지도 빠르게 하지 못할 것 같았다. 소매가 무겁고, 타티아나의 박자는 여전히 느리다. 움직이려면 저 피아노 소리의 주박에서 벗어나야 하는데, 도저히 방법이 없었다.
꼼짝도 하지 못하고 손을 팔걸이에 늘어뜨린 채 표트르는 속으로 감탄사만 토해 냈다. 타티아나는 음악으로 사람을 꼼짝도 못하고 축 늘어지게 만들었다. 그에 비하면 음악으로 사람을 춤추게 하는 건 쉬운 일이었다.
“…….”
슬슬 손을 드는 게 아니라 숨이 답답해져 올 때쯤, 짧은 2악장이 끝나면서 곧바로 3악장이 시작되었다. 악장과 악장을 끊임없이 진행하는 아타카attacca 방식이었다.
3악장은 빠르게 나아간다. 그러면서 1악장과 2악장의 특징을 모두 지니고 있었다. 표트르는 타티아나의 음악을 따라가면서 동시에 음표가 하나하나 머리에 꽂히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이대로 한 곡을 다 들으면 한 번에 다 외워 버릴 수 있을 것 같다.
그 정도로 직관적이고 명쾌한 해답처럼 타티아나는 하이든 소나타 37번 3악장을 연주했다. 곡은 조성이 바뀌기도 하고 무거운 화음으로 때리기도 했지만 그 전체에 큰 변함은 없었다. 모두 타티아나의 인도를 따라가기만 하면 그 끝을 볼 수 있었다.
총 11분가량의 짧은 고전 소나타는 그렇게 끝을 향해 달려갔다. 화려한 펼침화음과 폭발적인 클라이맥스는 없었지만 그 색채감은 너무나 선명했다.
표트르는 이 음악을 잊을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렇지만 음반으로 기록할 수 있느냐고 누군가 묻는다면, 할 수 없을 것 같다고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현대의 스피커 기술로는 저런 떨림과 음색을 구현해 내지 못한다. 표트르는 이 분야의 전문가이기 때문에 분명하게 말할 수 있었다.
그렇게 음반 기획자로서 스스로 내린 결론에 표트르는 약간 실망했다. 음악을 기록하는 것을 업으로 삼는 표트르에게 있어서 기록할 수 없는 음악이란 손에 닿지 않는 절벽 위의 꽃과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클래식 음악 애호가로선 이 순간 청중이라는 사실 자체에 희열을 느낀다. 그야말로 시간예술에서만 느낄 수 있는 소름 돋는 감각이다.
‘생각보다 굉장히 멀리 갔군요. 타티아나.’
곡이 마무리되고 그 여운이 길게 퍼져 나갔다.
고전 중의 고전인 하이든의 소나타에 벌써부터 이렇게 깊은 인상을 받을 줄은 미처 몰랐다.
타티아나가 다음 곡을 준비하는 사이 한숨 돌리며 진정을…….
“……!”
그런데 미처 숨을 두어 번 내쉬기도 전에 타티아나가 다시 건반을 짚었다. 마지막 여운이 끝나자마자 박수를 치려고 하던 사람들은 그 자리에서 멈췄다. 표트르는 의아해했다. 하이든 소나타 37번에 4악장이 있었던가?
하지만 곧 들려오는 선율을 들으며 표트르는 깨달았다.
타티아나는 막 붙잡은 양들을 쉽게 풀어 줄 생각이 없었다.
다시 선율의 사슬로 꽁꽁 묶어서 데리고 갈 생각이었다. 표트르는 시작부터 너무하는 거 아니냐고 항변하고 싶었지만 들려오는 피아노 소리를 거슬러 입을 열 순 없었다.
그대로 표트르와 400명의 청중은 다시 한 번 타티아나의 두 번째 곡으로 끌려들어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