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505화 (505/1,277)

##  505화

하이든의 아기자기한 고전 소나타가 이 화려한 리사이틀에 어울리긴 할까?

아무리 고전부터 시작한다는 주제라지만 너무 교과서중의 교과서 같은 곡이다.

어릴 적 학교에서 과제곡으로 배웠던 곡, 연주하기에 그리 어렵지 않고 연주 효과도 딱 난이도만큼 나와 주는 곡.

좋게 말하면 정석적이고 나쁘게 말하면 너무 방어적이었다.

나라면 적어도 자기 첫 리사이틀의 첫 곡으로 쓰진 않을 것 같은데.

「…….」

프란츠 리스트 이후의 피아노 솔리스트로서 교육받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무대 흥행을 위한 분석적인 생각을 하고 있던 세연은 타티아나의 연주를 듣고는 자신의 생각이 짧아도 한참 짧았음을 인정해야만 했다.

타티아나의 하이든은 곡이 가지고 있는 구조적인 이점뿐만 아니라 훨씬 더 깊은 곳에 잠들어 있는 음악적인 아름다움을 마음껏 뽐내고 있었다.

정갈한 구조 위에 화려한 색채가 더해지니 마치 꽃과 사과 등 정물화를 감상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 정도였다.

결코 과하거나 부족하지 않다.

기술적으로 보면 아주 기본적일지도 모르겠지만, 예술 자체가 가지고 오는 원초적인 충족감은 이 리사이틀의 전체적인 수준과 기대감을 몇 단계는 올려놓았다.

마치 연주회 자체를 거대한 하나의 곡처럼 다루는 느낌이다. 이제 막 서장에 진입했음을 세연은 직감할 수 있었다.

‘대체 어떻게 될지 상상도 안 가.’

프로그램북을 보면 이후의 곡들은 18세기의 하이든과 어마어마한 시간적 괴리를 두고 있었다. 타티아나가 계속해서 곡들로 큰 주제를 이어 나갈 것이란 점은 자명했지만, 세연은 연주회가 시작하기 전에 곡 목록을 한 번 보고도 잘 이해할 수 없었다. 하이든이 너무 충격적이어서 그다음이 기억도 잘 나지 않는다.

때문에 세연은 하이든이 끝나고 나서 잠깐 텀이 생긴 사이에 다시 한 번 프로그램북을 볼 생각이었다.

「!」

곡이 끝나고 주변에서 막 박수를 칠 것 같은 분위기가 조성되고 세연도 프로그램북을 들면서 따라 치려는 순간, 타티아나가 손가락을 들어 그 모든 행동을 제지했다.

끝났던 연주가 다시 시작되었고, 그 곡은 하이든 소나타의 뒤를 매끄럽게 이어 붙였다.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다. 조성도 다르고 박자도 흐름도 시대도 형식도 모든 것이 다른데, 자연스럽게 한 계단 너머의 세계로 나아간 듯한 기분이 든다.

「…….」

쇼팽의 안단테 스피아나토와 화려한 대 폴로네이즈 op.22.

쇼팽이 스물한 살의 젊은 시절에 작곡한 곡으로, 쇼팽 연주자들에겐 굉장히 사랑받는 곡 중 하나였다. 약간 과장하자면 피아니스트치고 이 곡을 연주해 보지 않은 사람은 없다고 봐도 될 정도다. 세연 역시 콩쿠르를 대비하면서 이 곡을 레퍼토리에 넣고 있었다.

때문에 세연은 이번에도 약간 분석적인 태도로 감상에 임했다.

그리고 몇 초 지나지 않아 어깨를 늘어뜨렸다.

하이든 소나타를 듣고 느꼈던 깊이감이 이번엔 더 아득하게만 느껴졌다.

‘대체…… 어떻게 치고 있는 거야?’

이 곡은 두 파트로 이루어져 있다. 그중 첫 번째인 안단테 스피아나토. 느릿하고 평안하게 연주하는 곡이다.

작은 호수에 잔잔하게 이는 물결처럼, 타티아나는 부드럽게 왼손으로 파동을 만들고 오른손으로는 노래를 불렀다. 심장이 두근거린다. 너무나 사랑스럽고 따뜻하다.

세연은 작게 숨을 내뱉었다.

음악의 물결이 세연을 사로잡았다. 다른 그 어떤 레퍼런스 해석들을 들어도 지금처럼 갈증 나게 하지는 않았다.

그녀는 늘 이런 해석을 가지고 싶었다. 그간 세연이 오랜 시간 노력하며 추구해 왔던 안단테 스피아나토의 완성형이라 할 수 있는 해석이 바로 눈앞에서 연주되고 있었다.

놀라움은 잠시였다. 세연은 지금 이 기회를 놓치면 평생을 후회할 것이라 생각했다.

듣는 것만으로도 실력이 나아질 수 있나?

세연의 교수는 분명히 많이 듣는 것도 실력 상승에 어마어마한 영향을 준다고 가르쳐 왔다. 그리고 세연은 바로 지금 그 가르침이 사실임을 분명하게 깨닫고 있었다.

이 음악의 반의반이라도 제대로 듣는다면, 세연이 다음 연주할 안단테 스피아나토는 분명히 이전과는 비교할 수도 없을 정도로 나아진 곡이 되어 있을 것이다.

세연은 귀로 들어오는 음악을 잠시 분석해 보려다가 포기했다. 이 음악을 조금이라도 받아들이려면 머리로 분석해선 안 된다. 그보다 조금 더 심층적인 곳에 있는 음악적 근원으로, 세연은 이 음악을 집중시켰다.

「…….」

길게 노래하던 타티아나는 손가락을 들어 호수에 담갔다. 눈으로는 분명 건반에 손가락을 대는 행위였는데, 들리기로는 건반보다 훨씬 더 말랑말랑하고 깊이 들어가는 무언가를 만지는 것 같다. 눈과 귀의 괴리감이 조금 비현실적이기까지 했다.

건반에 닿았던 타티아나의 오른손이 곧 일렁이더니 물결과 함께 움직였다. 처음부터 그랬던 것처럼, 타티아나는 피아노와 함께했다.

거의 정신을 놓고 들으면서도 세연은 타티아나의 부드러운 아티큘레이션과 흐름을 제어하는 방식이 모두 자신의 안 어딘가에 차곡차곡 쌓인다는 기분을 느꼈다.

물결과 함께 장난을 치던 타티아나는 물가로 나와 앉았다. 그러고는 허공에 다리를 까딱이며 흔들거린다. 아무런 장식음도 없는 단순한 멜로디인데도 온몸에 피부로 와닿았다.

세연은 자기도 모르게 같이 발뒤꿈치를 들었다. 조금이라도 몸에 체득해 놓고 싶었다.

다시 물결을 어루만지는 듯한 질감으로 타티아나가 곡을 스쳐 지나가고, 안단테 스피아나토는 살며시 마무리되었다.

그리고, 음악이 반전된다.

「……!」

오케스트라의 투티tutti를 연상시키는 묵직한 음량. 사장조였던 조성이 내림마장조로 변화하면서 이 곡에 붙어 있던 두 번째 주제를 꺼내 온다.

화려한 대 폴로네이즈.

쇼팽이 사랑했던 폴란드의 춤곡 폴로네이즈. 그중에서도 가장 크고 강렬한 곡이 무대 위에 전개되었다.

이전까지의 안단테 스피아나토는 이 무대를 위한 초석이었다. 타티아나는 편안하게 물가를 배회하던 사람들의 앞에 커다란 불을 내려놓았다.

그 불꽃의 형상에 모두들 넋을 놓았다.

‘예쁘게만 치는 게 아니야…….’

어떤 피아니스트들은 이 폴로네이즈를 섬세하고 예쁘게 연주하고자 한다. 그러한 해석은 굉장히 아름답고 완성도 있게 들린다. 쇼팽의 곡이 주는 자유도는 굉장히 넓다.

하지만 타티아나는 깜짝 놀랄 정도로 도전적이고 강렬한 해석으로 연주했다.

본래 이 곡은 오케스트라와 함께하는 협주곡으로 작곡되었다. 추후 피아노 솔로로 편곡된 곡이다. 타티아나는 지금 무대에 없는 오케스트라들까지 모두 보여 주려는 것처럼 피아노를 다루었다. 그야말로 화려한 대 폴로네이즈라는 제목을 완벽하게 구현해 내려는 음악이었다.

이전까지 호수에서 물장난하던 음악을 연주한 피아니스트가 맞는지 의심이 들 정도로 주저 없고 화려하다.

세연의 귀엔 모든 것이 너무나 찬란하게 들렸다.

「…….」

타티아나가 구사하는 리듬은 숨이 막힐 정도로 루바토로 옥죄었다가, 다시 심호흡처럼 긴 레가토로 풀어놓으면서 심장을 가지고 놀듯 한다.

세연은 이 리듬을 기억 속에서 떠올려 냈다. 바로 타티아나가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연주했었던 영웅 폴로네이즈. 그 리듬과 닮아 있었다.

물론 완전히 다른 곡이고 분위기에 따라 움직이는 리듬도 다르니 정확하게 일치시킬 수는 없다. 하지만 세연은 이렇게 리듬을 마치 호흡을 조절하듯 다루는 방식을 타티아나가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조금 더 이전의 기억을 되짚어 보면, 세연의 교수가 가르쳤던 폴로네이즈가 이것과 비슷한 느낌을 보였었다.

‘이렇게 하면…….’

세연은 그동안 자신의 폴로네이즈에 빈 퍼즐이 몇 개나 있다고 생각해 왔다. 분명히 교수가 가르친 대로 잘 배우고 있고 꾸준히 좋아지고 있지만 그 퍼즐들을 모두 찾아서 완성시키려면 얼마나 오래 걸릴지 까마득하기도 했다.

교수는 평생을 걸려 완성해도 좋으니 너무 안달하지 말라는 이야기만 할 뿐이었다.

그런데 지금 눈앞에 퍼즐 조각이 몇 개나 툭툭 던져졌다.

세연은 아무 생각 없이 그중 하나를 집어 자신의 음악에 끼워 넣어 보았다. 그리고 그건 마치 원래 그러해야 했던 것처럼, 정확한 그림을 나타냈다.

직접 연주해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타티아나의 음악은 세연의 귓속으로 들어와선 온몸에 들어찼다.

작년, 세연은 자신의 교수가 타티아나에게 신경을 쓰는 것을 보며 사실 왜 그러는지 정확한 이유를 알지 못했다. 그저 세연과 같은 나이인데도 연주를 너무나 잘해서 눈여겨보고 있는 게 아닐까 생각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1년이 지난 지금, 세연은 교수를 조금 이해할 수 있었다.

왜 그런 눈빛을 하고 있었는지도.

「…….」

이해는 가지만, 약간은 분하다.

피아노 실력만 놓고 봐서 타티아나가 앞서 있다는 것엔 그리 분하지 않았다. 언제든 따라잡으면 된다고 생각하고 있고.

하지만 음악성에 관련된 부분에서 제자인 세연보다 타티아나가 교수에게 더 가깝다는 건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그럴 수도 있는 일이라고 넘어가 버리면 세연은 그냥 모든 것을 놓아 버려야 할 것 같았다.

‘그렇겐 못 해.’

세연은 조금 더 귀를 기울였다. 음악은 마치 세연을 위해 준비되어 있던 것처럼, 너무나 자연스럽게 흘러들어왔다.

그녀는 그 모든 것을 전부 흡수할 심산이었다.

교수는 세연에게 타티아나를 의식하거나 따라하려 할 필요가 없다고 분명히 못 박았다. 러시아의 아카데믹함을 힘들게 따라갈 필요가 없다고 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면서도 교수가 종종 타티아나의 연주 영상이나 기록 등을 찾아본다는 걸, 세연은 알고 있었다.

그 이중적인 면모에 세연은 조금 혼란스럽기도 했다. 대체 타티아나라는 아이를 어떻게 봐야 할지 쉽게 판단할 수 없었다. 모토로 삼자니 가르침에 거스르는 일이고 그렇다고 무시하자니 교수의 태도가 마음에 걸린다.

그래서 세연은 우연과 기회를 얻어 여기까지 왔고, 지금 분명하게 결정했다.

스푼으로 떠서 입안에 넣어 주는데도 못 받아먹을 정도로 세연은 바보가 아니었다.

「…….」

음악의 바다에 빠진 스펀지처럼 귀뿐만이 아닌 온몸으로 연주를 듣던 세연은 문득 생각했다.

타티아나가 이곳에 날 초대할 이유가 있었을까?

지금 세연은 어마어마한 기회를 얻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과할 정도의 선물이다. 하지만 타티아나에겐 이럴 이유가 없었다.

심지어 타티아나는 세연을 어려워한다.

듣기론 엄청난 부잣집의 딸이라 해서 세연은 조금 나쁜 쪽으로 오해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어쩔 줄 몰라 하는 눈빛으로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을 보면 도저히 오해하려야 오해할 수가 없었다.

차라리 깔보는 눈빛을 했다면 쉽게 받아들였을 텐데, 세연이 보기에 타티아나는 이상할 정도로 자신을 어려워했다.

싫어하는 것 같진 않지만, 분명 부담스러워하고…… 가끔은 무서워하는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었다.

첫 만남에서 세연을 도와주었을 땐 안 그랬던 것 같은데, 본선 무대 직전부터 타티아나는 세연과 거리를 두는 것처럼 행동했다.

그래도 가끔 둘이서 이야기를 할 때면 상냥하게 말하고 친절하게 대해 주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연은 타티아나가 결코 자신을 좋아하고 있는 건 아니라고 확신했다.

그런데도 타티아나는 세연을 연주회에 초대했다.

지금은 어색하니까 장차 친해지고 싶어서? 전혀 아니었다. 타티아나가 보이는 거리감은 늘 그대로였다.

이유는 세연과의 인간적인 관계에 있지 않았다. 세연은 지금 그녀를 위해 준비된 듯한 폴로네이즈를 들으며 그렇게 생각했다.

타티아나는 무대에 오르기 직전 분명하게 세연에게 전했다. 가능하다면 원하는 걸 받아 가길 바란다고.

저 애는 우리 음악이 사실 닮아 있다는 걸 알고 있어.

「…….」

거기까지 생각이 닿은 세연은 자기도 모르게 살짝 몸을 움츠렸다.

타티아나가 무슨 생각을 하며 자신을 초대했는지 알 것 같으면서도, 이해가 안 되기도 하고. 교수님을 모시고 오는 게 맞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 모든 생각들이 뒤섞이는데, 어쩐지 이상하게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전혀 그럴 이유가 없는데도 세연은 타티아나를 보면서 굉장히 슬퍼졌다.

「…….」

괜히 소매로 눈가를 훔치고, 잠시 웅크린 몸으로 진정을 찾은 세연은 간신히 다시 고개를 들었다.

이 즐겁고 활기찬 음악을 들으면서 운다는 건 말도 안 된다. 그리고 그건 타티아나가 바라는 일도 아님이 분명하다.

타티아나는 이 연주가 세연에게 도움이 되길 바라고 있다. 세연은 그 바람에 충실히 따르기로 했다.

폴로네이즈는 영롱하게 다시 반짝였다. 타티아나는 손을 들어 춤을 춘다. 눈부신 아르페지오가 따뜻하게 세연의 귓가를 간지럽힌다. 세연은 미소를 지으며 귀를 더 내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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