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506화 (506/1,277)

##  506화

무대에서 들려오는 쇼팽의 감미로운 선율을 들으며 베르너 위넬은 몸을 쭉 폈다.

베르너는 그간 수많은 음악가들의 연주회를 서포팅해 왔다. 항상 완벽한 준비를 위해 심혈을 기울였지만, 상상도 못한 트러블들은 여기저기서 튀어나오곤 했다. 때문에 베르너는 연주회 내내 긴장하면서 막상 음악은 제대로 감상하지 못하는 일이 많았다.

그런데 타티아나의 음악회는 긴장을 하려고 해도 그럴 수가 없었다.

긴장하지 못하는 건 사실 믿을 수 있는 에이전트로선 불성실한 태도였다. 열여섯 살에 첫 독주회를 하는 연주자의 무대이니만큼 얼마든지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 베르너는 어떤 일이든 간에 적절히 도울 수 있도록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

“……음.”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문제가 생길 것 같지가 않았다.

타티아나는 이미 텔레비전으로 송출되는 러시아에서 제일 큰 음악회에서도 무대에 오른 적이 있었고, 그때도 한 번도 떨거나 잘못해서 무대를 망친 일이 없었다. 되레 다른 성인 연주자들보다도 더 능숙하게 무대에 적응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런데 이번엔 다른 연주자들과 합을 맞출 필요도 없는 독주회다. 그야말로 타티아나가 지닌 모든 능력을 선보이면 그만이었다.

타티아나 역시 그 점을 잘 아는지 자신의 장점을 있는 그대로 내보였다.

첫 곡은 하이든으로 정갈하게 그녀가 지닌 음악성을 보였고, 그다음은 쉬지도 않고 곧장 쇼팽을 연주했다.

겸손하고 성실한 평소 그녀의 성격을 생각하자면 약간 과격한 진행이기도 했다. 하지만 곡 목록만 봐선 이해가 안 갈 이 흐름을, 타티아나는 실력으로 완벽하게 증명해 냈다.

그녀의 음악적 수준에 화려한 기교가 섞이자 장대한 교향곡을 마주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학생이라곤 믿기지 않을 정도의 음악연구와 깊은 해석, 그리고 뛰어난 테크닉까지. 타티아나의 강점은 마음대로 펼치기 시작하면 정말 끝도 없이 커진다.

베르너는 프로그램을 처음부터 끝까지 타티아나에게 맡긴 것에 대해 한 점 후회도 없었다.

“…….”

타티아나의 폴로네이즈 춤곡이 다시 한 번 뒤돌았다. 어깨를 흔들고, 종종걸음 친다. 그러면서도 기악곡의 특성 또한 빠뜨리지 않는다.

타티아나는 자신의 춤동작에만 집중하지 않고 배경에 깔리는 오케스트라까지 빠짐없이 이끌어냈다. 섬세함과 성대함이 한곳에 공존했다.

베르너는 이 피아노 컨트롤 능력에 다시 한 번 감탄했다.

변화무쌍하게 박자가 요동친다. 그저 흘러내리는 아르페지오에도 하나하나 다 정교한 리듬이 부여되었다. 그 누구도 따라 하기 어려운, 타티아나만의 감각적인 연주였다.

폴로네이즈는 곧 클라이맥스에 다다랐다.

타티아나의 양손이 더더욱 화려하게 건반 위를 뛰논다. 디테일한 꾸밈음과 견고한 베이스가 음악의 양감을 점점 더 키워 나갔다. 몇 개의 악기가 들리는지 모르겠다.

이어져 마치 계단처럼 상승하는 양손의 거대한 반음계적 아르페지오 하모니, 그 직후 통통 튀며 내려앉는 하강과 화려한 피날레로 곡이 마무리되었다.

200년 가까이 뭇 음악가들에게 사랑받아 온 안단테 스피아나토와 화려한 대 폴로네이즈는 이렇게 오늘 또 한 번 수백 명의 청중들의 기억 속에 각인되었다.

음악의 재현자 타티아나는 완벽하게 여운까지 마치고는 손을 내려놓았다.

“…….”

아무런 호응도 없었다.

하이든에서 바로 쇼팽으로 넘어갔던 것처럼, 이번에도 그렇지 않을까 싶어 모두 꼼짝도 못하고 있는 것이다. 흥분과 기대감, 뜨거운 분위기만이 고요 속에서 소용돌이쳤다.

음악이 끝났음에도 모두가 타티아나의 손끝에 집중했다.

타티아나는 그 손을 들어 올렸다가, 의자를 살짝 짚으며 일어섰다.

“브라바!”

그녀가 일어나자마자 모두들 기다렸다는 듯 환호성을 터뜨렸다. 얼마나 큰 환호인지 폭죽이 터지는 것같이 들리기까지 했다. 대기실에서 기다리던 베르너는 흐뭇하게 미소를 지었다.

청중들은 하이든의 소나타가 끝난 후 못 했던 박수와 환호를 한꺼번에 몰아서 하겠다는 듯 열렬하게 찬사를 보냈다.

타티아나는 긴 연주를 마치고도 흐트러짐 없이 예스럽게 답례를 보냈다. 베르너도 말없이 가볍게 박수를 보냈다.

대기실 문이 벌컥 열리더니 스테이지 매니저 엘레나가 들어왔다. 그녀는 모니터를 보더니 웃으며 말했다.

“연주자분 정말 독주회 처음 맞아요?”

자신이 칭찬받은 것도 아닌데 약간 뿌듯해진 베르너는 킬킬거리며 답했다.

“그렇게 안 보이죠?”

“리허설 때보다 훨씬 더 잘하시는 것 같은데요?”

엘레나는 리허설을 보고 이미 타티아나에 대한 걱정을 거의 지워 버렸다. 하지만 본 무대를 보니 너무 잘해서 황당할 지경인 모양이었다.

물론 연주자가 잘 해 주면 그 뒤를 봐주는 사람들 입장에선 그만큼 좋은 일도 없다.

타티아나는 다시 피아노 앞에 앉아 있었다. 곧 다음 곡이 시작될 것이다.

타티아나 외에 다른 사람들에겐 청중이 되는 일 말고 해야 할 일이 있기는 한 걸까? 베르너는 그냥 음악을 감상하면서 엘레나와 함께 차나 한 잔 마실 생각으로 일어서며 말했다.

“스테이지 매니저님…….”

그때였다. 갑자기 조명이 동시에 확 꺼졌다. 무대를 비추던 모니터도 마찬가지였다.

“!?”

대기실이 어두워졌다. 햇빛이 닿는 로비로부터 문틈을 통해 미약한 빛이 새어 나왔다.

그 외엔 어떠한 빛도 찾아볼 수 없었다. 꺼져 버린 모든 전기 장비들은 다시 켜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정전 사고였다.

정확한 상황 판단은 곧 베르너와 엘레나를 패닉으로 몰고 갔다.

“이게 대체…….”

공연 중 정전 사고는 종종 있는 일이다. 하지만 자신이 담당하는 연주회에서 그런 일이 생긴다는 건 그야말로 악몽이나 다름없었다.

너무 당황한 나머지 목 근처가 바르르 떨렸다.

패닉에 빠진 머리는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그저 의문만이 가득했다. 왜? 무엇 때문에? 왜 하필 지금?

그다음은 누구를 원망해야 할지 시위를 당길 차례다. 베르너는 가장 가까이에 있는 스테이지 매니저를 겨누려다가, 간신히 그만두었다.

비상상황이었다. 지금 자르야드예 홀의 책임자를 탓한다고 해서 상황이 나아지진 않는다. 무대에 홀로 던져져 있는 타티아나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생각을 해야만 했다.

베르너는 등 뒤로 흐르는 식은땀을 느끼며, 빠르게 생각을 정리했다.

이 콘서트홀의 시스템의 문제로 벌어진 짧은 정전이라면 곧 전기가 들어올 수도 있다. 담당자들이 지금 바쁘게 움직이고 있을 테니.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베르너는 끔찍한 상상을 하며 스마트폰을 들었다. 그리고 전파가 아예 다 죽어 버린 것을 보곤 빠르고 간결하게 말했다.

“이 지역 일대에 정전이 생긴 것 같습니다. 기지국도 정전인지 휴대폰이 먹통…….”

베르너는 끝까지 말하지 못했다. 너무 절망적인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국지적인 정전은 짧게 잡아도 몇 시간은 간다.

상황파악을 한 엘레나도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미치겠……네.”

베르너는 10여 년 전 이와 같은 정전 사고를 겪은 적이 있었다. 그때를 떠올리며 홀 안의 상황을 상상하니 뒷목이 서늘해졌다.

문틈으로 약한 햇빛이라도 들어오는 이곳 대기실과 달리 홀 안은 정말 완벽한 밀실이다. 조명이 없으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곧 어둠 속에서 청중들의 혼란스러운 웅성거림이 일 테고, 그 혼란이 공포가 되는 데엔 그리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는다. 혹시 누군가 홀을 노린 테러라고 오해라도 한다면 걷잡을 수 없는 소동이 벌어질 것이 분명했다.

지금 불과 10초도 안 지났으니 아직은 괜찮을지 모르겠지만 이제 곧……

‘왜 조용하지……?’

무대 쪽으로 온 신경을 집중하던 베르너는 자기도 모르게 생각했다. 소동이 벌어지길 바라는 건 아니지만 당연한 일이 벌어지지 않으니 이상했다.

하지만 베르너는 곧 청중들의 생각을 이해했다.

청중들은 이 또한 타티아나가 준비한 어떠한 기획이라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홀 안의 조명이 꺼지고 심지어 안내등마저 꺼져서 모든 불빛이 사라졌음에도 지금 홀을 지배하고 있는 타티아나에 대한 믿음과 열기는 청중들을 사로잡고, 안정시키고 있었다.

물론 그것도 계속 지속되진 못하겠지만, 일단 당장의 혼란은 막았고 앞으로도 조금은 분명 괜찮으리란 확신이 들었다.

그리고 연주자로서 트러블을 마주한 타티아나는 지금 이 자리의 그 누구보다 빠르게 문제 해결을 위한 판단을 내리고 있겠지.

베르너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엘레나는 스테이지 매니저로서 사태 수습을 위해 나섰다.

“일단…… 제가 무대에 나가서 잠시 연주회를 중단시키고 설명하겠습니다. 오래 걸리진 않아요. 저희 홀에는 이런 정전을 대비한 비상 전원 시스템이 있으니 곧 그게…….”

“아뇨, 지금 당장 가셔서 그거 켜지 말라고 하십시오.”

“네?”

“비상 전원을 켜면 도중에 조명이 들어올 거 아닙니까?”

지금 곡과 곡 사이에 조명이 꺼졌다. 때문에 청중들은 잠시나마 기다려 주고 있다.

베르너는 타티아나가 파리에서 한 일을 봤다.

연주자가 마주해야 할 트러블에서 타티아나는 쉽게 약해지지 않는다.

바로 지금도, 베르너는 타티아나가 그런 활로를 찾아냈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다른 연주자라면 모르겠지만, 그녀라면 지금 이 상황을 이용할 생각마저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베르너는 지금 타티아나의 에이전트로서 해야 할 일을 정확하게 상기했다.

지금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홀의 상태를 유지시키는 게 타티아나를 도와주는 일이다. 비상 전원이 켜져서 조명이 들어와 버리면 안 된다.

“이대로 진행하는 겁니다. 어둠 속에서.”

“무슨 말씀이세요 대체?”

엘레나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말했다.

“여기는 그나마 나아요. 홀 안이 얼마나 어두운지 아세요? 아예 옆 사람 실루엣도 안 보일 거라고요.”

“…….”

“이 상태에서 무슨 연주회를 할 수 있겠어요?”

엘레나는 지극히 상식적인 이야기를 했다. 그녀는 길게 말하는 시간도 아깝다는 듯 베르너의 코앞에서 빠르게 쏘아붙였다.

“그리고 이런 어둠 속에선 피아니스트들이 연주할 수 없어요. 심지어 다음 곡은 쉽지도 않죠. 타티아나에게 평생 갈 트라우마를 심어 주고 싶은 건가요?”

지금 책임자로서 올바른 판단을 내리고 있는 건 엘레나였다. 일단 나가서 상황을 설명하고 연주회를 중지시키는 것이 옳다. 정석적인 대처였다.

하지만 베르너는 여전히 고요한 홀의 분위기를 파악하고, 타티아나가 어떻게 행동할지에 대해 생각했다.

청중들은 여전히 청중이었고, 타티아나는 여전히 연주자였다. 그렇다면 그녀는 연주를 멈추지 않을 터.

베르너는 그녀가 프랑스 파리에서 당당하게 무대에 오르던 때를 떠올렸다. 타티아나는 이런 상황을 극복해 낼 실력과 마인드를 분명히 갖추고 있었다. 신중하게 생각한 그는 다시 한 번 강력하게 주장했다.

“모든 책임은 제가 지겠습니다. 1부가 마무리될 때까지 조명 켜지 마세요.”

“……제정신인가요?”

“냉정합니다.”

어두워서 보이지 않지만, 엘레나가 미친 사람 보는 듯한 시선을 하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베르너는 자기도 모르게 헛웃음을 흘렸다. 괜한 위험을 감수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베르너는 타티아나를 믿고, 또 그녀가 자신을 믿고 있을 거라 생각했다.

엘레나는 제발 이러지 말라는 투로 말했다.

“베르체노프 콘체른의 유리 알렉세예비치가 와 있다는 건 알죠? 당신이 옷 벗는 걸로는 안 끝나요. 나도 끝난다고요.”

듣고 보니 그것도 맞는 말이었다. 일이 정말 잘못되면 이 홀의 관계자 전부가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베르너는 혼자서 밀어붙여서 될 일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때문에 그는 마지막 타협을 하기로 했다. 조용한 홀의 분위기를 다시 살핀 베르너가 작게 말했다.

“그럼 5초만 기다려 보죠.”

“네?”

“타티아나라면 지금 이 정도 시간이 지났으면 어느 정도 판단이 섰을 겁니다.”

“……???”

5초가 흘렀는데도 타티아나가 어둠 속에서 당황해하며 아무 행동도 하지 못하고 있다면, 전부 베르너의 무책임한 기대였던 것이니 그때부터 빠르게 수습하면 된다. 그렇게 생각하며 그는 마음속으로 시간을 쟀다.

그리고 정확히 5초 후, 엘레나는 비상 전원을 켜지 말라는 말을 전하기 위해 대기실을 박차고 홀의 시설을 관리하는 담당자들에게 달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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