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507화 (507/1,277)

##  507화

온 세상이 어둡다.

방금 전까지 보이던 건반이 사라졌다.

당황하며 옆을 돌아보니 청중들도 전혀 보이지 않았다.

덜컥 겁부터 났다.

상황 판단도 제대로 안 되는데 무언가 굉장히 안 좋은 일이 벌어졌다는 것만 분명하게 직감할 수 있었다.

등을 따라 소름이 돋으면서 온몸이 굳었다. 어둠과 고요 속에서 심장 소리만이 마치 벼락 소리처럼 크게 들렸다.

머리가 새하얗게 변한다. 어쩌면 좋지.

“…….”

몇 초간 그렇게 정신을 놓고 있다가, 나도 모르게 뻗은 손등이 무언가에 닿았다. 단단한 나무의 촉감. 피아노였다.

손의 떨림이 멎었다.

적어도 난데없이 아무것도 없는 곳에 떨어진 건 아니구나.

난 지금 아직 무대 위에 있고, 눈에 보이진 않지만 내 앞엔 피아노가, 그리고 옆에는 청중들이 있구나.

솔직히 2차로 패닉이 올 뻔했다. 연주회 도중에 갑자기 이게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 이제 막 두 곡을 연주했을 뿐인데.

하지만 앞으로 연주할 곡이 많다. 난 아직 이곳을 떠날 수 없었다. 오로지 그 생각만으로 깊게 심호흡을 했다.

“후…….”

문제가 생기긴 했다. 난 모든 가능성을 열어 놓고 있었다. 때문에 갑자기 시력에 문제가 생겼을 경우도 생각해 보았지만, 몇 번 눈을 깜빡여 보니 그건 아닌 것 같다.

그렇다면 남은 건 홀 전체의 정전이었다.

끔찍한 일이지만, 그런 일이 벌어질 확률은 분명히 있었다.

거세게 뛰던 심장이 이젠 멎어 버릴 것 같다.

가끔 공연 도중 정전이 되었다는 뉴스를 보기도 했다. 그런데 그게 내 상황이 되니 정말 당혹스럽다.

어떤 상황인지는 알아도 여전히 어떻게 해야 할진 모르겠다. 억울함과 원망 등이 가슴 속에서 꿈틀거리긴 하는데, 어디로 향해야 할지도 불분명했다. 난 다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청중석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400명이나 앉아 있다고는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조용했다.

여러분들은 왜 가만히 계시나요? 정전인데?

“…….”

청중석 쪽에서 아무 말도 들리지 않으니 나도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귀가 먹먹해질 정도로 고요하기만 하다.

이 거대한 적막 속에서, 난 청중들이 왜 침묵을 지키고 있는지 비로소 깨달았다.

연주자인 내게 기대하고, 기회를 주고 있는 것이다.

분명 정전임을 알아차린 청중들도 있겠지만, 아무도 입을 열거나 다른 행동을 하지 않았다.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지만 피부로 느껴진다. 모두가 내 다음 곡을 기다리고 있었다.

곧바로 대답을 낼 순 없었다.

지금 베르너가 뭘 하고 있을진 모르겠지만 스테이지 매니저인 엘레나와 함께 이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상황을 알아보고 있을게 분명했다.

잠시 후 스테이지 매니저가 무대에 올라와서 제대로 설명하고 양해를 구하는 게 이런 사고에 대한 매뉴얼적인 대처였다.

내 뒤에서 바쁘게 움직이고 있을 수십 명의 사람들이 무언가 제대로 된 대답을 내놓기 전에 내가 마음대로 행동했다간 트러블이 커질지도 모른다.

“…….”

하지만 몇 초가 흐르는 사이, 난 이렇게 다른 사람의 판단을 기다리고만 있을 순 없을 것 같다는 걸 느꼈다.

베르너나 엘레나는 나타날 생각을 않고 여전히 홀은 암흑 속이다.

청중석은 여전히 조용하지만 미세한 소음이 조금씩 섞이기 시작했다. 불안과 염려의 기색이다.

이 어둠 자체에 대한 무서움도 스멀스멀 나타나는 것 같았다. 수백 명이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있으니 더더욱 그렇다. 누군가 말이라도 한 마디 해 준다면 나을 것 같단 마음이 은연중에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 흔들림에 다수가 동참하게 되면 다음은 혼란뿐이었다.

난 내 연주회가 불의의 사고로 인해 혼란에 빠지는 건 되도록 막고 싶었다.

어떻게 해야 할까. 베르너는 시끄러워진 후에나 나타날 것 같은데, 일단 내가 지금 정전인 것 같으니 잠시만 기다려 달라고 말을 해 볼까.

그렇게 부탁하는 건 언뜻 아주 상식적인 방법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그걸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나는 조금 자존심이 상했다.

피아노 연주자로서, 난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고 있다.

청중들 역시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고 있기에, 저렇게 침묵을 지키며 기다려 주고 있다.

내가 입으로 수습을 하려고 하는 건 저 기대를 배신하는 일이다.

난 다시 차분하게 심호흡했다.

‘신중하게…… 신중하게.’

이성적으로 생각해 봐야 한다. 혹여나 실수한다면 안 하느니만 못하다.

일단 이 어둠 속에서 내가 연주를 할 수 있는지부터 검토해 보았다. 결론은 1초도 안 되어 나왔다.

할 수 있다. 난 이전에 시력에 문제를 겪은 적이 있었고, 그 후론 정상화 되었음에도 곡을 연습하면서 눈을 감고 연습한 적이 꽤 많았다. 지금도 할 수 있다.

그럼 다음은 무대 관계자들에 대해서다.

내가 연주를 시작한다면 갑자기 무대 위로 난입해서 연주를 중단시키거나 하진 않겠지만, 갑자기 정전이 회복되어서 조명이 들어와 버릴 순 있었다. 그럼 이 상황을 어떻게든 잘 수습하려는 내 모든 노력이 물거품이 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 점은 무조건 베르너를 믿어 보기로 했다.

유능한 그라면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줄 것 같다. 무대 뒤에서 어떻게 해 주길 바라는지, 정확하게 판단해 줄 것 같다는 막연한 믿음이 들었다.

“…….”

시간이 별로 없다.

청중석에서 느껴지는 불안감은 점점 증폭되어만 갔다. 연주자인 내가 침묵하고 있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난 마지막으로 생각을 정리하고, 다시 한 번 심호흡을 해서 온몸의 긴장을 풀어놓았다. 뻣뻣해진 목도 살짝 당기며 스트레칭했다.

당황스러움이 머리에 차서 제대로 연주를 할 수 있을지 조금 걱정되지만, 지금은 그러한 의심도 모두 지워야만 했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잘못된 판단으로 연주에 나선 무모하고 오만한 바보가 되느냐, 아니면 트러블을 잘 수습한 연주자가 되느냐.

그 차이는 오로지 다음 곡에 달려 있었다.

평소와 다를 것 없다. 한 곡에 목숨을 거는 건 언제나 있는 일이었으니.

그렇게 판단한 상황들을 간단하게 정리해서 옆으로 치워 버리고, 잊었다.

난 곧장 행동에 나섰다.

어둠 속에서 손가락을 든다.

“……!”

탕, 하고 건반을 찍자 약간 어수선해지려던 청중석의 기척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보이지 않는 시선들로부터 느껴지는 희열이 정말 뜨겁다. 이 어둠 속에서도 난 전혀 추위를 느끼지 못했다.

포르티시모로 강렬하고 경쾌하게 막을 열었다. 몸이 기억하고 있는 건반의 위치는 정확했다. 난 보이지 않는 눈을 아예 감아 버리고, 두터운 화음을 감각에 의존하여 정확하게 연주해 나갔다.

***

구세프는 화가 나서 미치기 일보직전이었다.

이 중요한 연주회에서 정전이라니? 믿을 수가 없었다. 종종 있는 사고라고 넘어갈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어느새 양 주먹은 꽉 쥐어져 있었다. 타티아나가 얼마나 당황해하고 있을지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가만히 있지 않는다면 다른 뾰족한 수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당장 뛰어나가서 홀 책임자의 멱살을 잡는 것으로 정전이 고쳐진다면 그렇게 하겠지만, 그 어떤 문제도 그런 식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그리고 무엇보다, 정전 사태에도 조용한 홀 안의 분위기가 구세프를 진정시켰다.

다들 정전이라는 건 알 테니 웅성거려야 할 텐데도 그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타티아나가 앞선 연주로 조성해 놓은 분위기가 이어지고 있었다. 구세프는 고요 속에서 천천히 머리가 식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심각하게 고뇌했다.

‘설마, 타티아나.’

이 상황에서 타티아나가 할 수 있는 건 두 가지 정도였다. 그대로 가만히 누군가 직원이 나와 설명해 주길 기다리는 것과, 아니면 무시하고 연주를 계속하는 것이었다.

끔찍한 상황이었지만, 수백 년 전부터 있어 왔던 클래식 연주자들은 전기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리고 음악은 잘 다루기만 한다면 이 어둠 속에서 그 무엇보다 강력한 무기가 된다. 이 상황 전체를 이용할 수도 있었다.

구세프는 어쩐지 타티아나가 이대로 연주에 임할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피아니스트로선 대단한 실력과 정신력이라고 박수를 쳐 줘야 한다.

하지만 타티아나의 선생으로선 굳이 그런 위험을 감수하지 말라 하고 싶었다.

타티아나를 연주자로서 믿고 있는 건 사실이지만, 이런 상황에 처해진 제자를 보면서 혼자서 강인하게 이겨 내길 바랄 순 없었다.

그러나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다른 청중들처럼 침묵을 지키는 것뿐이다. 걱정은 하면서도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구세프는 무력감마저 느꼈다.

“…….”

그런 구세프를 위로하듯, 캄캄한 어둠 속에서 피아노 소리가 팡 터져 나왔다.

순간 눈앞이 환해지는 느낌마저 들었다.

슈베르트의 방랑자 환상곡. D.760

이 곡은 슈베르트가 스물다섯 살이던 1822년 작곡한 곡이다. 당시 슈베르트는 2년이 넘도록 기악곡에 대한 해답을 찾지 못하고 미완성 교향곡 등을 남겼는데, 그 방황의 끝이 바로 이 곡이었다.

방황의 끝이 방랑자 환상곡이라는 건 조금 우습게 느껴질지도 모르겠지만, 슈베르트는 자신의 삶을 이렇게 명료하게 드러냈다.

슈베르트의 상념과 고찰을 모두 담고 있는 자화상과도 같은 이 곡은 수많은 음악가로부터 사랑받기도 했는데, 프란츠 리스트는 이 작품을 편곡해서 4악장만 편곡한 솔로곡, 오케스트라와 협주곡 형태의 교향시, 피아노 듀오로 세 종류나 남겼을 정도였다.

타티아나는 이 곡을 분석해서 세 종류로 편곡하진 못했지만, 그간의 연구로 분명해진 해석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게 그녀는 연주자로서 준비한 모든 것들을 쏟아 낸다.

‘확실하게…….’

방랑자 환상곡의 1악장은 명쾌하고 드라마틱한 형태를 하고 있었다. 거대한 화성은 이 장대한 이야기의 주인공의 모습을 드러낸다. 타티아나는 자신감 있고 활기찬 음색을 펼쳐 내었다.

오케스트라의 소리를 포함하고 있어서인지 기술적으로 굉장히 어렵다. 이 곡은 슈베르트의 기악곡 중 가장 어려운 곡으로 손꼽히기도 했다.

그러나 타티아나의 음악은 단 한 번도 주춤거리거나 의심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분명한 확신을 가지고 오로지 이 곡을 선명하게 표현하려는 데에 모든 신경을 집중하고 있었다.

구세프는 타티아나가 지금 상황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지금 모두의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이 어둠 속에서 들려오는 음악에, 그리고 음악이 가져오는 이미지가 훨씬 더 중요해진다.

타티아나는 보다 신경 써서 악장의 이미지를 확실하게 만들었다.

행진곡이자 오케스트라의 교향곡이자 오페라의 시작이다.

그녀가 입을 열어 아무 말도 하지 않은 만큼, 피아노가 모든 이야기들을 전해 온다.

“…….”

자신만만한 목소리로 남자가 말한다. 여러 나라를 여행하며 겪었던 특이하고 재미난 이야기들. 모두가 흥미를 가질 법한 모험에 대하여, 자신이 마주했던 사람들에 대하여. 유쾌한 웃음소리가 그 위를 장식한다.

하지만 이 다장조의 신나는 이야기는 산뜻한 즐거움만으로 이루어져 있지 않다.

타티아나는 경쾌한 프레이즈를 이어 나가다가 갑자기 흐트러뜨렸다. 아주 정교한 무너짐이다.

자신감 속에는 외로움이 섞여 있고, 호탕함 속에는 자조가 스며들어 있다.

변덕이나 이중성이 아니었다. 그저 사람으로서의 이야기이다. 다른 주제 같지만 하나의 주제였다.

쉼 없이 지껄이고, 건들거리고, 노래한다.

정말 쉽지 않은 사람이다. 그래도 타티아나는 어둠 속에서 보다 선명하게 한 인물을 끌어냈다. 피아노뿐만 아니라 이 무대 전체로 연주하는 느낌으로 깊고 두터운 음악을 겹겹이 쌓아 올렸다.

“…….”

기대치를 뛰어넘는 훌륭한 연주다.

타티아나의 환상곡은 어둠 속에서 밀물처럼 밀려와선 구세프가 방금 전까지 느끼고 있던 걱정이나 무력감 등을 모두 쓸어가 버렸다.

피아노를 보지 않고도 이 정도 연주가 가능할 줄은 미처 몰랐는데, 타티아나의 준비성과 침착함은 상상 이상이었다. 그대로 연주를 하는 건 그녀에게 있어서 도전이 아니라 당연한 일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건반이 깊게 내리눌렸다. 분명 손가락으로 눌렀을 테지만, 보이지 않는 저편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은 마치 환상 속에서 벌어지는 무언가처럼 느껴진다.

피아노 한 대가 아니라 여러 악기가 섞여 있는 것 같다. 그렇지 않아도 타티아나는 다성 연주에 능했는데 어둠이 그녀의 모습을 감추니 소리는 더더욱 신묘해졌다.

이 음악에 대해 잘 아는 구세프조차 그렇게 느낄 정도였으니 다른 청중들이 어떻게 느낄진 자명했다.

1악장의 주제는 다시 한 번 반복되었다가 이번엔 조금 더 어두워진다. 음악의 색깔은 눈을 감았을 때 더 잘 보인다. 타티아나는 섬세하게 그 색을 조절했다.

그리고 피아노 소리는 작게, 음색은 점점 더 짙게 흘려보낸다. 자신감과 외로움의 저울이 서서히 기울어졌다.

그렇게 저울이 한쪽으로 완전히 기울었을 때, 1악장이 끝나고 2악장이 시작되었다.

구세프는 감상자의 태도로 그녀의 음악을 받아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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