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08화
악장 사이의 쉬는 시간은 없었다. 방랑자 환상곡은 총 4악장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그 전체가 하나의 이야기로 이루어져 있어서 흐름이 끊어지지 않는다.
난 1악장의 경쾌하면서도 외로움을 담고 있는 분위기를 그대로 이어 나가 2악장의 울적한 멜로디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
악장지시는 아다지오adagio 조성은 올림다단조.
두터운 화성으로 이루어진 곡이지만 피아니시모를 지켜서 차분하게 연주한다. 결코 화려하게 과시하거나 앞서나가는 곡이 아니었다. 이 어둠 속으로 천천히 흘려보내듯, 그렇게 음악을 이어 나갔다.
잔향은 너무 반사되지도 않고 정확하게 내가 의도한 크기에서 멈추어 주었다. 홀의 크기가 마치 무한한 것처럼 느껴졌다.
꽤 만족스럽다. 지어진 지 1년밖에 안 된 최신식 콘서트홀이라 그런지 음향이 정말 훌륭했다.
전기가 나가 버린 건 정말 안타까운 일이지만, 적어도 이 2악장을 구사하는 데에 있어선 어둠이 한몫을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 생각한다.
건반이 보이지 않으니 난 기술적으로 더 어려워졌고 청중들은 귀에 들리는 것들에 더 까다로워졌음이 분명하지만, 이렇게 됨으로써 여기에 있는 모두는 조금 더 음악에 가깝게 집중할 수 있었다.
‘더, 더 가까이.’
난 조금 더 나지막하게 속삭이면서 모두를 가까이 끌어온다. 가장 멀리 있는 청중도 내 바로 옆에 앉아 있는 것 같다.
2악장을 이루고 있는 방랑자의 이야기는 본래 슈베르트의 가곡이었다. 마음을 둘 조국도 사랑하는 이도 없이 세상 어디에서나 이방인으로 살 수밖에 없는 슬픈 이의 노랫소리가 울린다.
그리고 그 노래는 살짝 변주되며 점점 목소리를 키워 나갔다. 크게 소리를 치며 주변에 있는 모두의 가슴에 깊게 파고들고는, 다시 잦아든다.
이 곡에서 가장 길고 가장 중요한 악장인 만큼, 난 굉장히 공들여서 이 악장을 해석하고 연습해 왔다. 그리고 그 결과가 오늘 확실하게 드러났다.
보이지 않는 청중들로부터 이 음악에 영향을 받은 기색을 분명하게 느꼈다. 거칠고 황량한 분위기가 뚜렷하게 전해져 왔다.
난 서서히 왼손으로 흐름을 늘어뜨리며 악장을 마무리 지었다.
다음으로 이어지는 3악장은 스케르초다.
“…….”
우울함은 씻은 듯 사라지고 1악장의 주제가 다시 돌아왔다.
방랑자의 삶은 역설적으로 그 삶을 즐기지 못한다면 계속할 수 없는 삶이기도 하다. 지쳐서 그 자리에 멈추어 버리면 결국 끝나 버리는 까닭이다.
멈추지 않고 삶에 긍정적인 사람만이 방랑자가 될 수 있다. 걸어온 길을 뒤돌아보면 외롭지만, 다시 앞을 보고 향할 수 있어야 한다.
흥겹고 유쾌하게. 조금은 억지로 움직이는 우스꽝스러운 모양새라도 괜찮다. 슈베르트 특유의 모호한 음형은 너무나 인간적이고 아름다웠다. 난 그런 부분까지 부각시키며 음악을 진행시켰다.
천천히 움직이던 음악은 다시 발전해 나가면서 점프하고, 거대해져 간다. 연달아 울리는 옥타브 도약이 피아노를 보다 크게 만들었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음악을 키웠다. 광대한 음악이었지만 건반을 제대로 짚었는지 의심할 필요는 없었다. 난 이미 이런 연주를 해 본 적이 있었다. 눈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쇼팽 소나타 1번을 연주했을 때였다.
마치 손이 아닌 생각만으로 건반을 움직이는 감각. 집중력을 한껏 끌어올린 지금, 난 그때의 기분을 다시 느끼고 있었다.
옥타브 아르페지오로 피아노를 크게 쓰면서 오른손으로 강렬한 화음을 연타한다. 3악장의 클라이맥스를 그렇게 최고조로 끌어 올리고, 마무리는 짓지 않는다.
그 마지막 바턴을 4악장이 받았다.
“…….”
다시 돌아온 다장조 알레그로.
고전적인 묵직한 음형이 왼손만으로 시작되고 곧 오른손이 따라붙는다.
이야기 전체를 꿰뚫으며 화려하게 펼쳐지는 화음을 빠르게 연주했다. 푸가로 진행되는 악장이라 조금도 형식을 망가뜨리면 안 된다. 고전적인 구조적 아름다움을 그대로 지키면서 연주자로서 보일 수 있는 비르투오시티를 퍼붓는다.
슈베르트가 아니라 리스트의 음악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어렵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차이가 있다면, 리스트의 음악처럼 보란 듯이 연주하면 안 된다는 점이었다.
아무것도 눈에 보이지 않는 이 상황은 이러한 슈베르트의 음악을 연주하기에 적합하게 느껴졌다.
내 손은 복잡하게 도약하고 쉴 새 없이 오르내리며 음악을 쌓아 올렸다. 그러나 누군가의 눈에 보일 필요는 없었다. 이 모든 기교는 오로지 소리로만 청중들에게 닿는다.
보다 정밀하게 건반을 컨트롤했다. 난 피아노와 무대를 넘어 홀 전체로 음악을 펼쳐 내다가, 다시 피아노로만 소리를 집중시켰다.
슈베르트의 음악은 보다 하염없이 자연스럽게 연주되어야만 한다. 터질듯이 터지지 않게, 끝날 듯이 끝나지 않게. 반복되고 반복된다. 슈베르트의 푸가는 회전하는 푸가다.
이렇게 강렬하면서도 다이내믹하고, 끊임없이 이어지는 프레이즈는 연주자로 하여금 지치게 한다. 이 4악장은 마치 무궁동처럼 쉬는 일이 없다. 이런 음악을 연주하다 보면 나도 숨을 언제 쉬어야 할지 잊게 된다.
난 호흡을 길게 잡으며 최대한의 퍼포먼스를 유지했다. 한 번도 템포를 놓치거나 무의미한 루바토를 섞지 않는다. 화폭에 여백이 없도록 세심하게 붓질을 한다.
“…….”
후회나 회환 같은 불필요한 감정은 여기에 필요 없었다. 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더더욱 강하게 피아노를 몰아붙였다.
날아들듯 도약하고, 다시 종종걸음으로 뒤로 물러섰다가, 빠른 걸음으로 뛰어든다. 4개의 모든 악장을 총망라하는 이 음악은 도저히 종잡을 수 없는 움직임처럼 보이지만 견고한 푸가의 구조 위에 있는 음악엔 흔들림이 없었다.
방랑자 환상곡이 그리는 이야기는 영롱하고 희망적인 인간찬가다.
행진곡과 같은 템포에 맞추어 방랑하고 또 방랑한다. 때론 외로워지고 우울해하지만 그렇기에 사람과 만나는 순간을 감사히 여긴다.
슈베르트가 보는 인간의 아름다움이 더할 나위 없이 잘 드러난다. 난 그러한 부분이 조금도 희석되지 않도록 내 온몸을 피아노에 쏟아 넣었다.
슈베르트는 마지막으로 내게 가능한 가장 큰 화성을 주문했고, 난 그대로 했다. 오케스트라의 규모를 연상케 하는 거대한 음의 부피는 어둠을 꿰뚫고 홀 전체를 뒤흔든다.
그렇게 모두를 음악으로 끌어들인 후 가장 화려하고 멋진 클라이맥스로 인도했다. 더 이상 사람들에게 어둡다는 건 그리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지금 이 음악 안에 모두 함께할 때만큼은 그 무엇도 거리가 될 수 없었다.
마지막 아르페지오와 피날레로 곡의 마침표를 찍고도 한참 동안 건반에서 손을 떼지 않고 모든 것을 밀어 넣었다.
잔향까지 모두 사라졌을 때, 난 고개를 들 수 있었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 조명이 켜졌다.
정확한 타이밍이다. 무대 뒤의 사람들을 믿길 잘 했다.
“브라바!!”
정신이 어질어질했다.
해낸 건가?
연습실도 아니고 저 많은 청중들 앞에서 내 연주를 제대로 해 보인 건가?
집중이 조금 풀렸는지 방금 전까지만 해도 아무 생각 없던 머리가 마구 복잡해졌다. 그 와중에 눈은 조명에 적응을 못 해서 너무 따갑고 아프다.
마음 같아선 그냥 감고 싶지만, 난 청중들이 기립박수를 보내는 모습에 눈을 감고 답하고 싶지 않았다.
“……감사합니다.”
몸에 힘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았지만 인사만큼은 제대로 했다. 난 작게 말하며 묵례했고, 다시 쏟아지는 박수세례를 간신히 뒤로 하고는 연주자 대기실로 돌아왔다.
대기실 안에서도 몇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와락 달려들었다. 난 깜짝 놀라서 뒷걸음질 치다가, 이 사람들에게 다른 뜻이 있는 게 아니란 걸 간신히 알아차렸다.
“타티아나!”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타티아나. 아, 세상에, 대체 이 일을 어떻게…….”
정말 난리였다. 다들 날 둘러싸고 어쩔 줄 몰라 했다. 난 조금 어지러워서 어디 앉고 싶었는데 이래선 앉을 수도 없었다.
멍하니 사람들을 둘러보는데, 가장 힘들어하는 것처럼 보이는 엘레나가 품속에서 무언가 꺼내선 내게 건넸다.
“손수건…… 받으세요. 타티아나.”
“……?”
“정말 죄송합니다……. 변명하지 않겠습니다. 이 일에 대한 모든 책임은 저희 홀에서 질 테니 그렇게 울지 마시고…….”
무슨 말인가 싶어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손을 들어 뺨을 만져 보니 물기가 느껴졌다. 나도 모르는 사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나 보다.
울고 싶었던 건 아니고, 그냥 갑자기 조명이 들어와서 눈을 뜨고 있느라 눈물이 난 것뿐인데. 어쩐지 분위기가 굉장히 이상했다. 왜 이러지 다들?
난 나도 모르게 멀거니 물었다.
“저 혹시 연주 망쳤나요?”
눈 뜨고 했어도 이번보다 잘하진 못했을 것 같은데, 너무 분위기가 묘해서 물어봤더니 엘레나와 베르너가 눈을 휘둥그레 뜨며 경악했다.
“무슨 말씀이세요! 그렇게 훌륭한 슈베르트를 연주하시고 어떻게 그런…….”
“타티아나, 설마 방금 정말 제 실력을 못 냈다고 생각하는 겁니까? 그래서 지금 눈물을…….”
베르너가 당황해했다. 난 손수건으로 눈가를 쿡쿡 찍으며 대답했다.
“아뇨…… 그냥 눈이 부셔서요…….”
“……네?”
그는 잠시 얼빠진 목소리를 내더니, 곧 웃기 시작했다.
“하하하, 하…….”
베르너의 웃음소리를 들으며 나는 그가 지난 20분 사이 어떤 마음이었는지 느낄 수 있었다.
결국 내게 모든 것을 믿고 맡기기로 했지만, 그런 결정을 내리면서 그가 얼마나 마음고생을 했을지……. 힘든 건 나 혼자만이 아니었다. 그도 굉장히 긴장하고 있었던 것이다.
“정말 잘하셨습니다. 타티아나.”
결과적으로 모든 게 잘되긴 했지만 그의 목소리는 그저 밝지만은 않았다.
어쩔 수 없는 죄책감과 안타까움이 느껴져 온다. 엘레나도 비슷한 기분인지 웃지 못했다.
난 간신히 연주회 1부를 잘 끝냈는데 이런 상황을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베르너와 엘레나도 고마워요.”
“저를 왜……?”
베르너가 가당찮다는 듯 말했고, 난 그를 똑바로 바라보며 이야기했다.
“제가 제일 무서웠던 건 연주 도중에 조명이 켜지는 일이었어요. 베르너와 엘레나가 막아 주시지 않았나요?”
정말이었다. 난 혹시나 누군가 연주 중에 정전을 복구시켜 버릴까 봐 걱정했었다.
물론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여러분들을 믿길 잘했어요.”
“……타티아나.”
베르너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내 이름을 불렀다. 난 그저 환하게 웃어 보이기만 했다.
그리고 이제 쉬어도 되나 싶었는데, 엘레나는 절차는 절차라면서 이런 콘서트홀의 문제에 대한 보상 이야기를 꺼냈다.
솔직히 지금 그런 건 관심이 없어서 베르너에게 일임했다. 내가 대관료를 모두 돌려 달라 한다고 해서 그렇게 할 수 있는 것도 아닐 테고, 그냥 베르너가 잘 해 주리라 생각한다.
그에게 짧게 한마디 덧붙이기만 했다.
“모두 곤란하지 않게 해 주세요. 부탁드릴게요.”
베르너는 고개를 끄덕였다.
난 그제야 잠시 앉을 수 있었다. 여전히 정신이 들지 않았다.
멍하니 테이블 위를 바라보다가, 옆의 직원분께서 물을 권하셔서 그대로 받아선 한 컵을 다 마셨다. 물을 마시고 나서야 내가 목이 말랐었다는 걸 느꼈다.
그리고 나가서 햇살도 받고 싶었다.
아무리 연주엔 지장이 별로 없었다고 해도, 어둠 속에서 너무 오래 있었던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으.”
대기실 밖으로 나오니 원하던 햇살이 가득했다.
마음 같아선 로비 쪽으로 나가 보고 싶지만, 괜히 그랬다간 사람들에게 둘러싸일까 싶어 그냥 문가에 서 있었다. 연주자 대기실은 홀에서도 조금 외진 곳에 위치해 있어서 이렇게 서 있으면 아무도 날 찾지 못할…….
“나와 있었네? 타티아나.”
“……?”
난 생각지도 못한 사람을 보고는 순간적으로 할 말을 잊어버렸다.
그러나 아까 목마름을 뒤늦게 느꼈던 것처럼, 사실 내가 친구나 가족들을 보고 싶어 했다는 걸 이제야 깨달았다.
기쁘긴 한데,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에르네스트도 조금 신중한 모습이다. 평범한 무대였다면 가볍게 평을 하면서 대화를 시작했을 텐데, 지금은 갑자기 정전이 나서 암흑 속에서 연주를 했으니……. 내가 연주를 잘 마치긴 했지만 그래도 기분이 좋지만은 않으리라 생각하는 것 같았다.
“에르네스트.”
난 그가 그렇게 날 어려워하길 바라지 않는다. 그냥 연주회 1부를 마친 친구로 봐 줬으면 좋겠다.
“어땠나요? 저.”
그는 무슨 생각이 났는지 갑자기 킥킥거렸다.
“하나도 안 보이던걸.”
“그랬겠네요.”
마주 키득거리며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기분 좋게 평했다.
“그래도 네 슈베르트는 확실하게 들렸어. 정말 좋은 연주였으니까 혹시라도 걱정하고 있다면, 그럴 필요 없어.”
“고마워요.”
“정전에 대한 대처도 인상 깊었고. 내가 집에서 텔레비전 보다가 정전되었을 때보다 더 침착한 것 같던데.”
난데없이 무슨 소린가 싶어 멀뚱히 바라보다가 그가 말한 상황을 상상해 보고, 난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아하하하, 텔레비전이요?”
한참을 숨이 넘어갈 듯 웃다가, 정말 숨이 차서 옆에 있는 벤치에 주저앉았다가, 다시 참지 못하고 웃었다. 미친 사람처럼 한참을 혼자 웃고 있는데도 에르네스트는 가만히 날 지켜봐 주기만 했다.
난 다시 뒤늦게 한 가지 알 수 있었다.
연주에 집중하면서 뒤로 미뤄 두긴 했지만, 정전된 일로 인해 사실 난 생각보다 굉장히 많이 충격을 받고 있었다는 걸.
“하…….”
그래서인지 뒤늦게 반동이 몰려왔지만, 괜찮았다.
에르네스트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안 보여도, 보였어. 타티아나.”
말하지 않아도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친구가 있다는 건 이렇게 마음이 편안해지는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