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509화 (509/1,277)

##  509화

1부가 끝나고도 임세연은 멍하니 좌석에 앉아 있었다.

방금 무대의 여운이 도저히 가시지 않았다.

하이든과 쇼팽만 하더라도 세연에겐 충격 그 자체였다. 세연은 타티아나가 어마어마한 실력자라는 사실은 이미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몸소 제대로 느낀 바 있었지만, 그곳에서 보인 음악은 콩쿠르에 맞추어 담백하게 정제된 음악이었다는 걸 지금에서야 알 수 있었다.

자신만의 음악을 마음껏 펼쳐도 되는 독주회에서 드러난 그녀의 음악은 훨씬 더 짙고 깊었다.

그리고 1부 마지막 곡에서 벌어진 사고와 거기에 대처한 타티아나의 모습.

그 모습이 직접 보인 건 아니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전율이 일 정도로 강렬했다.

세연에겐 마치 무대에서 거대한 피아노의 신이 돌아다니는 것처럼 느껴졌다.

피아노는 대체로 검은색이니 피아노의 신도 검은색일 테고, 안 보일 수밖에 없겠지. 그러나 그 존재감과 소리는 확실하게 거기에 존재했다.

슈베르트의 방랑자 환상곡이 연주된 20분은 세연의 머릿속에 평생 남을 것 같은 기억으로 각인되었다.

그렇게 멍하니 있는 세연의 옆으로 그녀가 러시아에서 새로 사귄 친구가 다가왔다.

「세연아. 슬슬 나가자. 어두운 곳에 너무 오래 있었어.」

한승우는 세연과 조금 늦게 만났지만, 굉장히 빨리 친해지기도 했다.

같은 한국 출신이라는 이유도 있었고, 누구하고나 잘 친해지는 세연과 누구라도 잘 받아 주는 한승우는 서로 잘 맞는 부분도 있었다.

세연은 친구의 얼굴을 올려다보고는, 멀거니 물었다.

「저기, 승우야.」

그녀 혼자선 아무리 생각해도 한 가지 결론밖에 나지 않는다. 그래서 물어보고 싶었다.

「네가 만약 방금 그런 상황에 처했으면, 저렇게 할 수 있었어?」

「내가?」

「응. 너도 중앙음악학교에 다니고 있으니까.」

어쩌면 여기 애들만 특별하게 교육받는 수업이 있을지도 몰라. 평소 눈가리개를 하고 피아노를 친다든가, 연주회 도중 무슨 일이 생겨도 평정심을 지킬 수 있는 마인드컨트롤 방법을 가르쳐 준다든가.

평소엔 별 쓸모 없는 수업이겠지만, 지금 이 상황을 보라. 타티아나는 겨우 40분 만에 여기 있는 모두를 팬으로 만들어 버렸다. 단 한 명도 빠져나가지 못했을 거라 세연은 확신했다.

「어때?」

하지만 잠시 고민하던 한승우는 깔끔하게 고개를 저었다.

「못 했겠지.」

세연은 그와 함께 연습을 한 적도 있었다. 그리고 그 역시 굉장한 실력을 지니고 있다는 걸 잘 안다. 테크닉, 표현력, 레퍼토리, 음악이론, 청음 등등 그 어떤 부분을 보더라도 한승우는 지금 세연보다 한 수 위였다.

그런 그도 타티아나에겐 한 수가 아니라 몇 수 정도는 뒤처져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타티아나는 중앙음악학교에서도 손에 꼽는 수재야. 그리고…… 방금 봤으면 알겠지만 이미 프로라 해도 손색이 없기도 하고.」

실제 프로를 데려다 놓는다고 해도 저런 상황에 처하면 당황해서 제대로 못하지 않을까?

가까스로 연주를 그냥 하기로 마음을 먹었더라도 그 당황스러움은 곡에 묻어나기 마련이다. 정전으로 그야말로 멘붕이 왔을 테니, 컨디션이 최고일 때 연주하는 것보단 낮은 수준의 연주가 나오는 게 정상이다.

그러나 타티아나의 연주에선 전혀 그런 걸 느끼지 못했다. 눈 뜬 세연이 방랑자 환상곡을 필사적으로 연주해도 저 정도 연주는 불가능했다. 아니, 과연 사람이 할 수 있긴 한 건지 근본적인 의문이 생길 정도였다.

타티아나의 방랑자 환상곡은 그 정도로 압도적이었다.

「난 방금 그 연주를 뭐라 해야 할지 아직도 잘 모르겠어.」

「나도 그래. 너무 잘 해서…….」

「아니, 그 말이 아니야.」

그냥 잘 했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게 아니었다. 세연은 자신이 느낀 걸 조금이라도 잘 설명하고 싶었다.

「무대 바닥에 있는 피아노가 아니라…… 영화관처럼 큰 스크린에서 영화를 보여 주는 것 같……. 대체 어떻게……?」

피아노는 길이가 3미터 가까이 되는 거대한 악기이지만 청중석에서 본다면 사실 전체 무대에 비해 그렇게 크진 않다.

하지만 시각이 차단되고, 오로지 소리만을 느낄 수 있는 상황에서 타티아나의 피아노 소리는 마치 무대 위 가득 채워진 오페라 세트처럼 느껴졌다. 그 전체에서 배우들이 이야기를 하고 춤추며 노래했다.

할 말이 없을 정도로 디테일하고 선명한 표현력이었다. 타티아나는 마치 어둠마저도 이용하는 것 같았다.

세연의 중얼거림을 듣던 한승우가 말했다.

「타티아나에게선 배울 점이 참 많아.」

그는 전부터 이런 말을 종종 하곤 했었다. 세연이 느끼기에 한승우는 이전부터 타티아나에게서 정말 많은 걸 배운 사람이었다. 세연이 타티아나의 쇼팽으로부터 퍼즐 조각들을 얻어 낸 것처럼.

그리고 그는 단순히 음악성만을 말하고 있지 않았다.

「내가 방금 타티아나 같은 상황에 처했으면 아마 못 했을 거라고 하긴 했지. 그런데 우린 이미 봤잖아?」

「뭘?」

「그 애가 해냈다는 걸.」

세연은 움찔했다.

그 말대로였다. 그녀는, 그리고 여기 있는 사람들은 모두 봤다. 타티아나라는 피아노 연주자가 갑작스런 정전 사고를 맞이하고도 전혀 흔들리지 않고 고난도의 곡을 연주해서 사고를 사고가 아닌 퍼포먼스로 승화시켰다는 걸.

적어도 이곳의 연주자들은 이 광경을 보고 그저 대단하다고만 생각하지 않는다.

「다음에 만약 우리가 연주 중 정전 사태를 겪는다면…… 할 수 있지 않을까?」

조명이 꺼졌다고 해서 아무것도 못 한다고 손을 놓고 관계자가 나와 연주회를 중지시킬 때까지 기다려야 할 필요는 없었다.

우리는 클래식 연주자였다. 밴드에서 신디사이저를 연주하는 키보디스트가 아니다.

바로 그 차이를 타티아나가 보여 주었다.

「……이젠 아니까.」

「그렇지.」

그래도 상식적으로 보자면 연주회 도중 이렇게 정전이 되었을 때 그냥 강행하는 건 평소보다 몇 배는 더 위험부담을 안고 하는 것이었다. 그런 일을 일부러 할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세연은 나중에 만약 이런 상황에 처하면, 자신이 연주를 계속하지 않으리라 장담할 수 없었다. 분명히 하게 될 것만 같다.

어쩌면 타티아나에게 또 이렇게 물들어 버린 것일지도 모르겠다. 세연은 그렇게 생각했다.

「나 다음부턴 눈 감고 연습도 해야 할 것 같아…….」

그래도 타티아나처럼 할 수 있게 될진 모르겠지만, 적어도 안 하는 것보단 나을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한승우는 옅게 웃기만 했다. 세연은 그가 자신과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음을 확신했다.

{둘 다 뭐 하니? 어디 갔나 싶어 한참 찾았잖아.}

그때 뒤편에서 아나스타샤가 둘을 불렀다. 홀을 나갔다가 다시 들어온 모습이었다.

세연은 좌석에서 일어서며 답했다.

{이제 나가려고 해.}

{…….}

아나스타샤는 세연에게 왜 계속 앉아 있느냐며 길게 묻지 않았다. 그녀는 다시 홀을 빠져나갔고, 세연과 승우는 그 뒤를 따랐다.

어떤 케이터링이 준비되어 있을지 기대된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 지금 세연의 머릿속에 꽉 들어차 있는 건 타티아나의 연주회 2부 일정이었다.

***

에르네스트는 잠깐 동안 같이 있어 주고는 곧 가 버렸다. 너무 오래 이야기를 하는 것보단 혼자 쉬면서 컨디션을 컨트롤하고 2부 준비를 하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서로를 잘 이해한다는 건 그런 면에서 참 편하기도 하지만, 한편으론 조금 아쉽기도 하다. 조금만 더 이야기하는 것 정도는 괜찮은 것 같은데. 2부에선 그의 곡을 연주해야 하기도 하고.

그래도 배려해 준 마음을 무시할 순 없어서, 난 조금 더 햇빛을 쬐고는 연주자 대기실로 돌아갔다.

“……아, 타티아나.”

누군가와 이야기를 하고 있던 엘레나가 날 돌아보더니 약간 안도한 것같이 말했다. 아까 말은 하지 않았지만 내가 꽤 안 좋아 보이긴 했던 것 같다.

난 웃으며 다가가 물었다.

“정전에 대한 이야기 중이었나요?”

“맞아요. 다신 이런 일이 없어야 할 테니…….”

엘레나는 조금 피곤해 보였다. 급히 정전에 대해 일처리를 하느라 굉장히 바빴던 것 같다.

그녀는 스마트폰으로 무언가를 확인하고는 조심스럽게 이야기했다.

“혹시 불안할지도 모르겠지만…… 믿어 주세요. 문제 자체도 해결했을뿐더러, 저희 홀에 있는 비상 전원 시스템도 끄지 않고 계속 켜 놓고 있으니 러시아 전역이 정전이 되더라도 조명만큼은 꺼지는 일이 없을 거예요.”

엘레나는 내가 2부에서도 혹시 문제가 있지 않을까 신경 쓸까 싶어 최대한 안심시켜 주려고 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두 번 문제가 생기는 일은 없을 거라 확고하게 말하는 게 믿음이 갔다.

난 정전으로 놀라기도 너무 놀랐던 터라, 엘레나가 이렇게 다시 말해 주는 게 고마웠다.

“믿고 있어요. 스테이지 매니저님.”

“……고마워요. 타티아나, 정말 많이 놀라고 힘들었을 텐데…… 정말 어떻게 사과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충분해요. 사고였잖아요?”

“그래도 전…….”

엘레나는 그 뒤로도 몇 번이나 사과했다. 나 역시 몇 번이나 반복해서 괜찮다고 답했고, 그제야 엘레나는 2부 무대를 다시 확인해 보겠다며 대기실 밖으로 나갔다.

“…….”

주변이 조금 조용해졌다. 직원분들이 몇 명 있긴 했지만 굳이 내게 말을 걸진 않았다.

난 천천히 손목을 스트레칭했다. 1부를 잘 마무리하긴 했지만, 상당히 힘을 많이 쓰고 스트레스도 받아 있었기 때문에 최선을 다해 풀어 둘 필요가 있었다.

그러면서 2부 준비 역시 착실히 해 나갔다. 무대에 올려야 할 곡들을 다시 머리로 떠올리며 되짚어 보았다. 혹시나 희미해진 부분이 있을까 걱정했는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 준비해 온 모든 음악이 선명하게 떠오른다.

난 그중에서도 오늘 마지막 프로그램으로 마련한 곡에 신경을 쏟았다.

원래 중간 즈음 넣을까 생각했었는데, 선생님과 기획을 짜다 보니 마지막으로 갔다. 어쩌면 이 연주회에서 가장 주목을 받을 곡일지도 모른다. 내가 그만큼 잘 한다면 말이지만.

그렇게 혼자서 조용히 준비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 5분 정도 있으니 베르너가 대기실에 들어왔다. 그사이 다른 업무를 본 모양이다.

베르너는 오자마자 내 컨디션부터 챙겼다. 요즘 보면 그는 내 에이전트이자 매니저이기도 했다.

“어디 불편하신 곳이라든가 없습니까? 타티아나.”

“전혀 없어요.”

“혹시 시간이 조금 더 필요하시거나, 그러시다면 인터미션을 늘릴 수도 있습니다. 충분히 가능하니 부담 가지시지 말고 말씀해 주시죠.”

그는 약간 무리해서라도 뭐든 할 생각으로 보였다. 인터미션을 늘리겠다니…… 무슨 이유로?

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런 건 필요 없다.

“지금이라도 무대에 서고 싶은걸요.”

“하하…….”

베르너는 내가 그렇게 말할 줄 알았다는 듯 허하게 웃었다.

그리고 그는 프로그램북을 보더니 중얼거렸다.

“2부 프로그램을 그대로 하신다면…….”

2부에 올라가는 곡은 1부와 같은 3곡. 베르너는 순서대로 곡들을 보고, 마지막에 가서 눈을 멈췄다. 그가 물었다.

“마지막 곡 긴장되지 않으십니까?”

긴장되지 않는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그 곡엔 정말 많은 것들이 걸려 있다.

하지만 원래 연주자의 업이 다 그렇지 않았던가. 어떤 곡을 연주하더라도 무대 위에서 최고의 연주를 해내려면 그야말로 목숨을 걸어야 한다.

그리고 내가 그렇게 진지하게 임하는 만큼, 내게 곡을 맡긴 에르네스트도 그런 비슷한 마음을 가지고 있겠지.

그런 생각을 하다 보면 긴장할 틈도 없다. 오로지 잘 해내겠단 생각뿐이다.

“괜찮아요, 베르너. 아까 연주했던 방랑자 환상곡만큼이나 열심히 연습했던 곡이에요.”

난 걱정 말란 뜻으로 가넷 목걸이를 만지며 싱긋 웃어보였다.

“전 제가 준비한 최선을 보여 드릴 준비가 되어 있어요. 나머진 청중분들께서 판단해 주시겠지요.”

“분명 잘 될 겁니다. 타티아나.”

그렇게 그와 이야기하길 잠시. 곧 인터미션이 끝난다는 안내방송이 흘러나왔다. 로비 쪽에서 우르르 사람들이 이동하는 발소리가 들렸다. 내 연주회를 끝까지 듣기 위해 홀로 향하는 사람들이다.

난 그 거대한 움직임을 느끼며, 차분히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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