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510화 (510/1,277)

##  510화

클래식 음악 평론가 자렛스키는 연주회 2부를 맞아 홀로 향하며 주변에 신경을 기울였다.

“이럴 줄 알았으면 R석으로 구할 걸 그랬어.”

“구하고 싶어도 못 구했을걸. 그리고 좌석이 상관있었나?”

“그것도 그렇네. 슈베르트는 콘서트홀이 아니라 꿈속에서 피아노 소리에 얹혀 부유하는 기분이었으니까.”

주변의 시끌시끌한 목소리들 대부분은 잔뜩 흥분한 호평들뿐이었다. 인터미션 사이 샴페인과 함께 세팅된 케이터링 등을 즐기면서도 미처 흥분을 다 못 가라앉힌 것 같았다.

물론 자렛스키 역시 모두와 마찬가지였다.

이런 건 정말 처음 봤다.

캄캄한 어둠속에서 들려오는 피아노 소리. 아무것도 의지할 곳 없는 자렛스키는 정신없이 그 소리만을 따라갔고, 20분 동안 방랑자가 되어 타티아나의 부름에 따라 음악을 겪었다. 무언가 분석하고 평론에 쓸 문장들을 떠올리는 것도 어려웠다. 그저 겪었을 뿐이다.

자렛스키는 음악이 가진 힘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될 정도였다. 타티아나의 연주는 그만한 영향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런 그녀는 이제 겨우 열여섯 살이었고, 이것이 첫 독주회였다.

대체 어떻게 평해야 할지 모르겠다.

이렇게 독주회로 데뷔를 하기 전부터 타티아나는 이미 수많은 클래식 애호가들 사이에서 이름이 오가는 유명한 신예였다. 때문에 상당한 기대는 있었지만, 그래도 이 정도까지 바라진 않았다.

전무후무한 일이지 않을까.

콘서트 도중 전기가 나간 사건사고에 대한 이야기들은 몇 번 들었지만, 이렇게 사고인지 의도한 건지 분간이 안 갈 정도로 자연스럽게 처리한 건 처음 듣는 일이었다.

타티아나는 첫 독주회에서 생긴 불상사를 아주 멋지게 자신의 기회로 삼아 해결한 것이다.

“…….”

다른 건 모르겠다. 일단 특종 하나는 확실하게 잡았다. 자렛스키는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다시 홀의 좌석에 앉은 그는 방랑자 환상곡에서 겪은 모든 것들을 활자로 옮겨 적었다. 러시아어에서 이탈리아어, 프랑스어까지, 필요하다면 모조리 동원하고 활자로 안 될 것 같으면 그림도 덧붙였다. 나중에 어떻게 정리하게 될진 모르겠지만 이 소름 돋는 감각을 조금이라도 더 옮기고 싶었다.

주변의 먹먹한 열기도 자렛스키의 펜에 힘을 실어 주었다. 그 열기는 장작으로 만든 모닥불에서 느껴지는 열기가 아니었다. 마치 거대한 폭탄이 터졌을 때 그 앞에 있는 생명체들이 느낄 수 있는 폭풍에 가까웠다. 그 뜨거운 폭풍은 아직도 홀 안에 맴돌고 있었다.

“슬슬 시작할 때인가…….”

1부에 대한 요약을 마친 자렛스키는 다시 고개를 들었다. 프로그램북은 이미 외우고 있다.

다음 곡은 2부의 시작을 여는 서곡과도 같았다. 일단 이 열기를 조금 식히는 데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시작한다.”

옆에 있던 누군가가 말했다. 그리고 동시에 홀의 조명이 모두 꺼지며 무대만이 스포트라이트로 밝아졌다.

거대한 그랜드 피아노가 이쪽을 향해 입을 쩍 벌리고 있었다. 자렛스키의 눈엔 그게 마치 검은 늑대처럼 보였다. 저 안의 현들은 하나하나가 이빨이나 다름없다.

검은 늑대는 언제든지 청중들을 덮쳐서 집어삼킬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청중들은 부디 그 거대한 사냥의 희생자가 될 수 있기를 바란다. 음악에 잡아먹히는 것은 여기 있는 모두의 바람이나 다름없었다.

어두운 침묵 속에서 기묘한 긴장감이 흐르길 잠시.

검은 늑대의 조련사가 무대 위로 올라왔다. 보라빛 광채는 밤의 색과 닮아 있었다.

“타티아나!”

박수만 보내다가 누군가 참지 못하고 조련사의 이름을 연호했다. 연이어 알아들을 수 없는 수많은 환호성들이 울린다. 음악 애호가들의 아우성이라고 해서 딱히 그렇게 음악적이진 않다.

“…….”

타티아나는 청중 모두를 정면으로 마주하며 걸어 나왔다. 환호성에 그대로 떠내려가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가냘프게 보이지만, 한 번도 밀려나지 않는다.

무대 끝자락에 선 타티아나가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청중들의 소리가 한층 더 커졌다.

음악의 늑대를 다루는 타티아나는 입으로 무언가 하려 하지 않는다. 1부에서 갑작스런 사고가 벌어졌을 때도 그녀는 단 한 번도 입을 열지 않았다.

그녀가 무대 위에서 낼 수 있는 소리는, 오로지 음악뿐이었다.

발소리조차 내지 않고 타티아나가 피아노 앞에 앉았다. 이전까지 청중 모두에게 분별없이 주어졌던 발언권은 모두 회수되어 그녀 쪽으로 넘어갔다.

침묵으로 비로소 무대가 완전해졌다.

타티아나는 손가락을 세우고, 음악의 늑대를 푹 찔렀다.

늑대가 으르렁거렸다.

‘프란츠 리스트…….’

다시 한 번 타티아나는 손끝만으로 건반을 다루었다. 마치 장난이라도 치는 것 같은 행동. 하지만 그로 인해 벌어난 일은 상상 이상이었다.

슬금슬금 움직이나 싶던 음악의 늑대가 한순간에 귓가에 다가오더니, 느닷없이 자렛스키의 목을 콱 물었다. 그는 이미 빠져나갈 수 없게 되어 버렸음을 확신했다.

프란츠 리스트의 스케르초와 행진곡scherzo und marsch. S177

1851년 작곡된 곡으로서, 이때의 리스트는 천 번이 넘는 유럽 순회 연주를 마치고 바이마르에 정착해 살면서 유럽 최정상의 음악가로 전성기를 보내고 있었다.

당시 리스트는 음악가로서의 명성도 작곡가로서의 능력도 절정에 가까웠다. 오늘날까지도 여러 연주자들의 레퍼토리로 손꼽히는 초절기교 연습곡이나 파가니니 연습곡들이 바로 이때 작곡되었고, 지금 연주되는 스케르초와 행진곡 역시 정점에 이르던 리스트의 정수를 담고 있었다.

그 정수는 매우 날래면서도 묵직하다.

“…….”

이미 음악의 늑대에게 목이 물린 자렛스키는 손가락 하나도 꼼짝하지 못하고 그대로 턱을 들었다. 연이서 타티아나가 음악을 연주했다.

타티아나의 지시에 따라 청중 모두를 집어삼킨 늑대가 그대로 내달린다. 눈썹이 휘날릴 정도로 빠른 속도다.

나무 사이를 스치고 지나가고, 작은 언덕을 빠르게 올라갔다가 굴러떨어지듯 내려온다. 어딘가에 걸리적거리거나 주춤거리는 일은 전혀 없었다. 자렛스키는 그저 음악에 물려서 함께 내달렸다. 그 속도감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평야에 이른 음악의 늑대는 잠시 숨을 고른다. 목께에 와 있던 음악이 잠시 물러섰다.

이제 살았나 싶어 머리를 뒤로 빼려고 하는데, 늑대가 길게 울었다. 자렛스키는 어깨를 움찔했다. 울음소리는 두 번, 세 번 이어졌고, 늑대의 숫자가 늘어났다.

보다 복잡해진 화성으로 뛰놀고, 뒹굴고, 울부짖는다.

‘이게 무슨…….’

이제 막 시작한 음악을 들으며 자렛스키는 할 말을 잃었다. 불과 몇 분 전, 이 곡이 서곡에 불과할 것이라 생각한 스스로가 부끄러워질 정도였다.

1부는 낭만 시대로 넘어가면서 끝났다. 그리고 잠시 인터미션 후에 이어진 본격적인 낭만 시대의 음악 프로그램들은 서서히 막을 열어도 늦지 않다. 방랑자 환상곡에서 얻었던 만족감도 아직 충만하니, 조금은 쉬어 가도 괜찮다.

하지만 타티아나는 그렇게 녹록하게 연주회를 진행하지 않았다.

청중이 바라는 것이 뭔지 이미 잘 아는데 점잖을 떨 이유는 전혀 없다. 타티아나는 그대로 홀 안에 음악의 늑대를 풀어놓았고, 늑대들은 그야말로 종횡무진으로 홀을 점령했다.

“…….”

자렛스키는 정신이 홀린 것처럼 멍하니 음악에 빠져들어 있다가, 고개를 들었다. 그에겐 일이 있었다.

귓가를 스쳐 지나다니는 늑대들에게서 신경을 돌려 간신히 연주자 타티아나에게 초점을 맞추었다. 그는 평론가로서 연주자 자체를 평가해야 할 의무 또한 있었다.

언제나 그렇듯 타티아나는 반듯한 자세로 피아노를 연주하고 있었다. 그녀는 무표정한 얼굴로 팔을 들고는 휙 하고 건반 쪽으로 휘둘렀다. 마치 채찍을 휘두르는 것 같다. 하지만 채찍 소리는 공기를 찢는 섬뜩한 소리가 아닌, 프란츠 리스트의 정수를 담아낸 음악 소리로 화했다.

보이지도 않는 속도로 번갈아 옥타브를 연주하고, 오른손으로 아르페지오를 훑어 내린다. 대체 어떻게 저런 동작으로 울음소리를 현실에 끌어오는 건지 알 수가 없다. 음악 평론가로서 10년이 넘게 일해 왔지만, 자렛스키는 이런 해석과 표현력을 본 적이 없었다.

타티아나가 풀어내는 해석은 굉장히 특이하면서도 매력적이었다.

잠시 넋을 놓은 사이 다시 음악의 늑대들이 자렛스키를 둘러싼다.

“……!”

빠르고 간결하다. 하지만 둘러싼 포위망이 점점 가까이 조여 왔다. 처음엔 조금 움직일 수 있었지만 시간이 갈수록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자렛스키는 긴장감을 느끼며 숨을 멈췄다.

곧 늑대들이 같은 박자에 맞춰 뛰며 맴돌고, 순식간에 덮쳤다.

광기의 춤과 울부짖음. 거기에 휩싸인 자렛스키는 정신이 혼미해짐을 느꼈다. 모든 감각이 희미해진다.

음악 역시 밤안개처럼 무뎌지면서 그의 주변으로 내려앉는다.

이대로 잠들어 버릴 수도 있을 것 같다고 생각하며 온몸에 힘을 푸는 사이, 다시 안개 속에서 늑대 한 마리가 자렛스키의 목에 다가온다.

이번엔 색이 다르다. 조금 전 늑대가 그저 새카만 어둠과 같은 늑대였다면 이번엔 조금 더 색채감이 있었다. 타티아나의 보라빛 드레스가 눈에 들어왔다.

그 순간 타티아나가 불쑥 음악 사이에서 발을 내밀었다. 그녀의 발걸음엔 거침이 없었다. 안개를 헤치고, 늑대들과 함께 타티아나는 걷는다.

타티아나가 제대로 모습을 드러낸 것을 계기로 음악은 한층 더 체계적인 형태를 갖추었다. 모두가 그녀를 따른다. 조금 전까지의 음악이 홀 전체를 울렸다면 이번엔 분명히 무대에서부터 시작하여 청중석에 닿고 있었다.

자렛스키는 필사적으로 손을 움직였다. 그의 수첩엔 안개 속에서 나타난 음악의 늑대와 여왕에 대한 이야기들이 두서없이 단어로만 적혀 나갔다.

“…….”

바닥에서부터 진동시키는 고속 트릴과 무시무시한 크기를 지닌 화음의 연타. 듣는 것만으로도 소름이 돋을 정도의 테크닉이다.

페달을 극도로 쓰지 않으며 기교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면서도 실수하지 않고 모든 것을 표현해 내는 자신감에서 자렛스키는 타티아나가 정말 이 곡의 주인공임을 느꼈다.

수많은 늑대들을 이끌고 한밤의 산책을 나선 타티아나는 청중석 끝까지 걷고는, 다시 돌아서서 무대로 되돌아갔다. 다시 어두운 안개가 그녀의 모습을 감춘다.

‘이제 1악장이라니.’

자렛스키는 안개 너머로 사라지는 타티아나와 늑대들의 뒷모습을 끝까지 보며 작게 숨을 내쉬었다.

그는 방랑자 환상곡을 듣고 그 곡과 상황을 중점적으로 다룰 생각을 했었다. 정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되레 그걸 무기로 음악의 강점을 살려 연주한 타티아나의 실력은 그 누가 보더라도 굉장한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지금 이 스케르초를 듣고 나니 생각이 흔들린다.

한 번쯤은 이 음악적 흐름의 방향성이 꺾일 거라 생각했는데 전혀 꺾일 생각이 없었다. 타티아나는 하이든부터 시작하여 쇼팽, 슈베르트, 리스트에 이르기까지 한 번도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대체 이다음의 두 곡은 어떻게 할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게다가 그중 마지막 곡은 과거의 대가들의 곡이 아니었다.

지금 이 정도로 연주회의 퀄리티를 끌어 올려 놓고 과연 마지막까지 완벽하게 정점에서 마무리할 수 있을지 벌써부터 걱정될 지경이다.

그러나 지금 자렛스키는 그런 걸 걱정할 때가 아니었다.

곧바로 2악장의 행진곡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

1악장의 비바체보다는 조금 느긋한 모데라토의 템포로 음악이 전해졌다. 하지만 그 느낌은 전혀 느긋하지 않다.

마르치알레marziale라는 악장지시는 전쟁의 행진곡처럼 연주함을 뜻한다. 타티아나는 그 지시에 완벽하게 응했다.

늑대뿐만이 아니라 보다 거대한 짐승들, 사자와 곰도 이 행진에 함께했다.

다리의 길이도 보폭도 다름에도 타티아나는 그 모두를 한 번에 통일시키면서도 개성을 잃지 않도록 살려 낸다.

자렛스키는 귀에 똑똑히 들리는 이 동물들의 행진을 들으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

지금까지 리스트의 행진곡을 들으며 군대의 행진만을 상상해 왔다. 하지만 늘 어딘가 부족함을 느꼈다.

그 이유를 이제 알 것 같다. 타티아나가 이룬 동물들의 군대는 인간의 군대가 가지는 규율로 이루어져 있지 않았다.

자렛스키는 타티아나가 그리는 해석이 훨씬 더 경쾌하고 즐겁다는 것을 깨닫고, 이 자유로운 추종에 함께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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