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511화 (511/1,277)

##  511화

조금 더 페달에서 힘을 풀고, 간결하게 주제를 연주했다.

난 처음 이 곡을 연습하기 시작했을 때 다른 곡들을 참고하면서 이 곡을 군대의 행진처럼 표현하려 했었다. 하지만 그런 방향으로는 생각처럼 잘 되지 않았다.

결국 연구 끝에 찾아낸 해석이 바로 이 행진곡이었다. 전쟁을 향하는 것이 아닌 축제를 위한 행진이다. 보다 경쾌하고 자유분방하다. 웃음과 활기가 넘친다.

조금도 숨기거나 딱딱하게 굴 것 없었다. 난 강렬한 옥타브를 연달아 연주하면서도 힘을 주지 않았다. 그런 불필요한 힘은 이 연주에 필요하지 않았다.

거대한 코끼리는 구태여 힘을 주어 땅을 짓밟지 않아도 그저 걷는 것만으로도 큰 소리를 낸다. 존재 자체가 지닌 무게감을 피아노로 연출했다.

음의 부피와 무게 그리고 색깔을 보다 선명하게 드러내는 건 내 주된 연구 중 하나였다. 난 테크닉과 에너지에 뚜렷한 한계가 있으니 이런 깊이 있는 부분에서 우위를 찾아야만 했다.

다행히 예민한 감각은 소리 자체를 다루는 데에 있어서 굉장한 강점이 되어 주었다.

‘조금 더 많이.’

모든 연구와 연습의 결과는 지금 제대로 나타나 주었다. 더 정확하게 건반을 터치하면서 보다 많은 존재들을 음악에 등장시켰다.

음악은 처음보다 훨씬 더 장대한 행진곡이 되어 퍼져 나갔다. 난 깃발을 들고 리스트가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흔들었다. 천지를 뒤흔드는 발소리들이 뭉치면서 내 쪽으로 향한다. 모두를 이끌고 홀을 천천히 한 바퀴 돌았다.

홀 곳곳에 음악을 뿌리고 나니 그 크기가 마치 풍선처럼 서서히 줄어들었다. 난 남은 음악을 잘 가지고 와선 다시 피아노 앞에 살며시 올려 두었다.

“…….”

다시 알레그로 비바체. 스케르초가 시작되었다.

1악장과 똑같이 은밀하게 파고드는 어조로 속삭인다. 그리고 모두가 이쪽으로 고개를 돌렸을 때, 장난을 치고 춤을 추었다.

그러나 이전처럼 길지 않다. 딱 한 번 반복해서 상기시킨 뒤, 곡은 마지막을 향해 갔다.

스트레타stretta. 주제와 주제가 겹쳐지는 부분을 뜻한다. 베토벤 이후의 음악에선 음악의 주요 주제를 다시 되짚는 코다나 마찬가지였다.

행진곡의 주제를 불러일으키는 스트레타를 또박또박 연주하고 나면 조성이 바뀌면서 피날레로 향한다.

피날레는 이전의 스케르초의 라장조로 행진곡을 연주하면서 둘 모두를 아우르는 통합의 악장이었다.

난 템포를 늦추지 않고 연주하면서 집중력을 쏟아부었다. 마지막 악장은 겨우 1분이 조금 넘는다. 이전까지의 모든 주제들을 빠짐없이 합치려면 조금이라도 실수가 있어선 안 된다.

가벼우면서도 깊게 옥타브를 연주하고, 빠르면서도 정확하게 아르페지오를 연주한다. 포르티시모의 화음 연주는 홀 전체를 흔들 수 있는 크기로 키워 냈다.

그렇게 마지막 연타와 클라이맥스를 화려하게 잇고, 깔끔하게 손을 튕겨 곡을 끝냈다.

피아노에서 나오는 모든 소리를 거두고 고개를 들자 그제야 청중석 쪽에서 무대로 소리들이 쏟아져 내렸다.

“브라바!”

그 소리들에 이끌리듯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가볍게 머리를 숙였다. 내 연주에 성원을 보내 주는 청중들에게 감사를 보낸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몸의 상태를 다시 체크하기도 했다. 1부에서 쌓인 피로는 다 풀리지 않았다. 그리고 방금 전 스케르초와 행진곡도 13분 정도의 길이이지만 연주자에게 상당히 부담이 되는 난곡에 속한다.

정신을 못 차릴 정도로 쏟아지는 소리들 속에서 난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도록 어깨에 힘을 주며 살짝 비틀었다. 아주 작은 동작이었지만 가볍게 스트레칭이 되면서 연주에서 쌓인 피로가 흩어진다. 반대쪽 어깨와 팔도 똑같은 방법으로 풀었다.

단 몇 초 정도뿐이었지만, 무대 위에서 이런 짧은 시간을 이용해서 상태를 살피고 빠르게 재정비하는 것 또한 테크닉에 속한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다시 확인한 뒤, 난 피아노 앞에 앉았다.

길게 심호흡했다.

이렇게 시간을 조금 들인 건 다음 곡이 만만찮기 때문이기도 했다.

“…….”

건반을 내려다보며 집중력을 끌어올리고, 머릿속에 있는 선율의 첫 끄트머리를 오른손으로 살짝 잡아당긴다.

그렇게 손으로 붙잡은 선율을 그대로 쥐고 건반에 내렸다.

***

마카로프는 타티아나에게 부탁하고 싶은 것이 너무나 많았다.

슬슬 새 음반을 녹음하자고 하고 싶기도 했고, 만약 한다면 이번엔 슈베르트나 리스트도 꼭 포함시키자고 부탁하고 싶었다.

타티아나의 낭만음악에 대한 이해도는 1년 전과 비교해서 현저하게 높아져 있었다. 그때 연주했던 베토벤이나 슈만, 라흐마니노프와는 또 다른 굉장한 음악성이었다.

지금도 홀에서 녹음 중이지만, 보다 나은 스튜디오에서 더 확실하게 녹음하고 싶다.

물론 지금 실황을 들으며 느낀 바로는 타티아나의 연주에 담긴 음악성을 제대로 디지털 파일로 만들 수 있을지 의문이었지만, 프로듀서이자 엔지니어로서 마카로프는 타티아나의 편린이나마 기록하고 싶은 바람을 그칠 수 없었다.

손으로는 박수를 치면서 머릿속으로 타티아나와 이야기하면서 부탁하고 싶은 곡들의 목록을 쭉 만드는 사이, 타티아나는 다시 피아노로 돌아갔다.

마카로프는 적막을 깨뜨리며 흐르는 선율을 듣고서야 생각을 멈추었다. 그의 곡 목록에 또 한 곡이 더해진다.

“…….”

밤의 가스파르Gaspard de la nuit. op.55

이 제목은 본래 프랑스의 작가 알로와즈 베르트랑의 산문시집의 제목이다.

모리스 라벨은 프랑스의 시인들과 초현실주의자들에게 널리 알려진 이 시집을 친구 피아니스트의 추천으로 접하게 되고, 금세 빠져들게 된다.

그렇게 1908년, 약 60여 편 정도의 시 중에서 3편을 추려 피아노 독주곡으로 작곡한 것이 바로 이 라벨의 피아노 모음곡 밤의 가스파르이다.

시의 모든 문장을 그대로 음악의 언어로 옮겨 낸 것처럼 명료한 곡이지만, 그만큼 어렵고 까다롭다. 때문에 프로 피아니스트들에게 연주하기에 어려운 난곡을 꼽으라 한다면 빠지지 않고 꼭 들어가는 곡이기도 하다.

하지만 타티아나는 그러한 어려움에 겁먹지 않고 도전했고, 분명한 성과를 거두었다.

그 결실이 지금 서서히 피어났다.

‘시작부터 완성되어 있군.’

타티아나의 오른손은 건반 위에서 좌우로 움직이지 않고 그대로 떨린다. 마치 경련을 일으키는 것 같지만, 그것은 매우 정교하게 연주되는 트레몰로였다.

마카로프는 이 첫 트레몰로에서 연주를 망치는 연주자들도 많다는 걸 안다. 하지만 타티아나의 나지막한 트레몰로엔 움직임 속에 정적이 있고, 정적 속에 움직임이 존재했다. 굉장히 기초적인 것 같으면서도 그 깊이를 알기 어려울 정도로 수준이 높았다.

올림다장조의 몽환적인 분위기를 전개하는 아름다운 트레몰로는 스포트라이트가 닿는 무대를 서서히 적셨다. 나무로 된 마루가 음악에 따라 물결치며 호수가 되었다.

밤의 가스파르 그 첫 번째 곡의 제목은 옹딘ondine. 프랑스어로 물의 요정을 뜻한다.

오른손만으로 요정이 등장할 수 있도록 배경을 만든 타티아나는 곳 왼손도 들었다. 그리고 천천히 음을 찍어 낸다.

“……!”

준비된 무대 위에 어느샌가 물의 요정이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 좋아하는 요정은 여길 보라는 듯 물방울을 튀기기도 했다.

귀여우면서도 신비로운 분위기이지만 어딘가 섬뜩하다. 인간과 같은 세계를 공유하지 않는 요사스러운 존재의 목소리는 경계와 긴장을 끌어낸다.

쉽사리 다가갈 수 없다. 그저 멍하니 요정들을 바라볼 뿐이었다.

타티아나는 라벨 특유의 애매한 화성이 지니는 분위기를 너무나 잘 표현해 냈다. 가까이 느껴지면서도 현실 같지 않는 환상적인 느낌.

그저 그려진 음표대로만 연주해선 절대 이러한 음색을 만들어 낼 수 없다. 이 아름다운 요정의 스케르초는 평소 타티아나가 몰두하는 표현력에 대한 결과물이었다.

찰랑거리는 물결은 멈추지 않고, 장난스러운 요정은 계속해서 속삭인다.

환하게 빛나는 달과 별을 품고 있는 호수의 아름다움을 아시나요? 호수 위에 떠 있는 저 달을 흔드는 흐름이 제 자매이고, 별을 흔드는 흐름 역시 제 자매이지요.

우리는 물거품의 팔로 무엇이든 쓰다듬을 수 있답니다.

무언가가 휙 다가왔다.

“…….”

눈앞에서 물방울이 튀어 오른다.

순간적으로 요정의 손이 귓가를 스쳐 뺨에 와닿는 것 같은 기분에 마카로프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시의 문장을 섬세하게 펼쳐 놓은 것처럼 작곡한 표제음악인 만큼 주어진 이미지는 굉장히 명확하다. 하지만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존재를 마치 당연한 것처럼 음악을 통해 현현시키고, 피부로 느껴질 만큼 선명하게 만드는 일은 아무리 생각해 봐도 보통 일이 아니었다.

그간 타티아나의 연주를 많이 듣기도 했고 같이 일도 했었다. 때문에 마카로프는 타티아나가 이러한 표제음악의 표현에 강하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어떤 곡이라도 그리 크게 놀라진 않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건 어느 정도를 넘어선 수준이었다.

타티아나의 표현력은 그 끝을 모를 정도로 깊어져 가기만 했다.

테크닉적인 까다로움은 그녀의 발목을 잡지 못했다. 음악이 전개되면서 생겨나는 복잡하고 어려운 패시지도 기이할 정도로 가볍고 정확하게 헤쳐 나갔다. 대체 얼마나 연습을 한 건지 모르겠다.

양손은 이제 구분이 없어졌다. 오른손이 물방울을 흘리기도 하고, 왼손이 아르페지오를 연주하며 파문을 그리기도 했다. 요정이 이쪽저쪽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하나의 주제 선율이 위치를 가리지 않고 나타나며 수다스럽게 재잘거렸다.

나지막하던 목소리는 자랑스러움에 힘입어 점점 커지게 되었고, 요정이 물장구를 칠 때마다 튀던 물방울이 서서히 청중들을 젖게 만들었다. 마카로프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미 이 요정에게 너무 빠져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화려함과 찬란함. 그리고 그 속에 있는 집착. 요정의 모든 행위는 인간을 옭아매는 마법에 가깝다.

청중들이 이미 쉽게 달아날 수 없게 되었다는 건 요정 역시 잘 안다. 즐겁게 자매들과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하던 요정이 보다 가까이 다가왔다. 그러고는 호수의 왕이 되어 주기를 애원했다. 요정의 반지를 받아들이기만 하면 되는 일이다.

애절하고 사랑스러운 목소리는 낮게 울리며 인간을 매혹한다.

“…….”

하지만 요정의 반지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곧 사람임을 그만두게 되는 일이다.

타티아나는 화려한 요정의 유혹을 연주하길 그치고, 고뇌에 찬 단선율의 대답을 내놓았다. 결국 인간을 사랑하고 있다는 대답이었다.

몇 개의 음으로 된 짧은 프레이즈이지만 마카로프의 귀엔 그게 어떤 의미인지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요정의 격렬한 반응.

물의 요정은 멀찍이 휙 날아오르더니, 부루퉁해져선 신경질을 낸다. 그 모습도 인간의 눈에는 너무나 아름답게 비추어졌다.

넋을 놓고 바라보고 있자 요정은 소리 내어 웃고는, 물방울이 되어 하얗게 흩어져 버렸다.

이 모든 장면을 타티아나는 오로지 아르페지오와 몇 개의 음에 악센트를 넣는 것만으로 표현해 냈다.

“…….”

물의 요정이 가 버리고, 정적만이 남았다.

3개의 모음곡 중 한 곡이 끝났을 뿐이니 아직 찬사를 보낼 때는 아니었다. 그러나 마카로프는 청중들이 그런 형식적인 이유 때문에 가만히 있는 게 아니라는 걸 느꼈다.

희미하게 사라져 버린 물의 요정의 목소리가 여전히 귓가에 맴돌고 있는 것이다. 마카로프 역시 지금이라도 다시 요정이 튀어나와 물방울을 뿌리지 않을까 생각이 들 정도였다.

타티아나는 연주를 마치고도 잠시간 침묵을 지켰다. 요정의 여운이 모두에게 남아 있는 것처럼, 타티아나에게도 준비할 시간이 조금 필요해 보였다.

그렇게 모든 이미지를 정돈해서 내려놓고 다음 곡을 준비하기까지 겨우 몇 초.

이어진 음악은 물의 요정이 뛰놀던 호수를 순식간에 메마르게 만들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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