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12화
음울한 종소리가 울린다.
아나스타샤는 숨을 죽이고 타티아나를 살폈다.
작은 종은 검은 건반에 위치해 있다. 음악가의 귀로 듣자면 시플랫 혹은 라샾의 음이지만, 청중으로서 듣자면 죽은 자들에게 들리는 종소리로만 들렸다.
밤의 가스파르 제 2곡 교수대.
죽음의 바람이 분다.
“…….”
타티아나는 마치 연습실에 혼자 앉아 있는 사람처럼 움직였다. 멜로디를 연주하면서 종을 친다. 살짝 고개를 숙인 채 천천히 소리를 확인하는 것처럼 규칙적으로 건반을 누르는 모습은 경건하게 보이기도 하지만, 가끔은 섬뜩하게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평소 연습하는 것처럼 연주하는 이 곡이 얼마나 어려운 곡인지 아나스타샤는 잘 알고 있었다.
아나스타샤가 알캉에 손을 뻗기 시작하자 타티아나는 자신은 그런 곡은 아마 연주하지 못 할 것이라면서 손사래를 치기도 했지만, 지금 연주하는 곡을 들어 보면 그건 겸손하게 말해도 너무 겸손하게 말한 것이었다.
이 조용한 곡은 듣기엔 알캉보다 쉽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내포하고 있는 고도의 기교들은 결코 쉽다고 말할 수 있는 것들이 아니었다.
거대한 무쇠 칼로 요리를 하는 것은 차라리 쉽다. 도마에 놓고 내리치면 되는 법이니까.
하지만 지금 타티아나의 음악은 빳빳한 종이로 과일을 자르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가늘고 약하지만 매우 예리하고 치명적이다. 종이에 베여 본 적이 있는 아나스타샤는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타티아나…….’
음악을 사랑하는 타티아나는 따뜻하고 경쾌한 장조의 음악을 자주 연주하며 사람들에게 행복을 전해 주려고 하곤 했다. 아나스타샤는 그녀가 사람들이 모인 곳에서 음울한 음악을 풀어놓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타티아나가 종종 이런 음악을 연주할 때면, 사실 그녀가 이런 어두운 면모에 더더욱 가까운 게 아닐까 생각이 든다.
홀로 고독하게 독백하는 것처럼 건반들을 가져와 섞는다. 타티아나는 절망이나 죽음처럼 사람들이 가까이하고 싶지 않아 하는 무거운 관념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다루고, 받아들인다.
음악가로선 성실한 태도일지 모르겠지만, 아나스타샤는 여전히 타티아나가 걱정스럽기도 했다.
물론 몇 개월 전 기억을 되찾은 뒤엔 한층 더 밝아지고 자기 자신에게 확신이 생긴 것 같아서 보기 좋아졌지만…….
세연을 다시 만난 이후로는 혼자서 고민하는 모습이 종종 나타나기도 했다. 그 고민은 감정 등을 겉으로 드러내어 해결할 수 있는 종류의 고민이 아니었다.
옳은 일을 한 건지 모르겠다. 아나스타샤는 세연과 타티아나의 음악적 공감대를 두 사람이 다시 만나 해결을 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그리 간단하지 않았다.
아나스타샤는 자신에게 상담해 달라고 이야기를 붙여 보지도 못하고 타티아나를 지켜보기만 했다.
타티아나와 깊은 이야기를 해 본 지도 상당히 오래되었다. 그런데 지금, 이 음악을 통해서 타티아나의 이야기를 듣는 기분이었다.
깊은 곳에 있는 우울함은 이렇게 손끝을 통해 거짓 없이 드러나곤 한다. 아나스타샤는 타티아나의 입으로는 들을 수 없는 목소리를 피아노로 전해 듣는 것 같은 느낌에 착잡해졌다.
“…….”
자기도 모르게 아나스타샤는 고개를 살짝 돌렸다. 연주회 중엔 무대에만 집중해야 하겠지만, 옆에 있을 에르네스트의 모습이 보고 싶었다.
반사되는 조명으로 희미하게 보이는 에르네스트는 언제나 그렇듯 무표정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 평소엔 그리 무뚝뚝한 성격이 아니지만 음악에 집중할 때만큼은 에르네스트만큼 진지한 사람도 드물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지금 아나스타샤가 느끼는 것만큼 타티아나의 우울함에 같이 빨려 들어가고 있는 것같이 보이진 않는다. 고매한 태도로 감상에만 집중하고 있다.
저 차분한 모습은 조금 배울 필요도 있었다. 아나스타샤는 다시 똑바로 정면을 보며 타티아나의 음악에 집중했다.
“…….”
먼 곳에 있는 마을에서 종이 울린다. 청중들은 종소리를 따라 마을로 걸으며 길가에 서 있는 교수대들을 올려다보았다.
한숨 소리가 흐르고, 까마귀가 운다. 스산한 바람을 마주하며 어깨를 웅크렸다. 발을 멈추면 이곳에 그대로 남아 있게 되어 버릴 것 같아서, 계속해서 종소리를 쫓는다.
타티아나가 만들어 놓은 황량한 풍경은 공포스럽고, 동시에 허무하기도 했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계속해서 들리는 종소리 때문에 시간 감각도 희미해졌다. 최면에 걸린 것처럼 청중들은 걷기만 했다. 그렇게 정신적으로 서서히 지쳐 갈 무렵 마을에 가까워질수록 종소리는 점점 더 아련하게 들리다가 스르륵 사라졌다.
타티아나는 건반을 끝까지 짚고 있었다. 죽음의 음악은 끝났지만 마을에 도달한 사람들의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스카르보.’
마을 어귀에 나타난 작은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자세히 보려고 집중하면 어느샌가 사라지고 없다.
그림자는 다시 시야 옆에서 흔들거리다가, 고개를 돌리면 증발했다.
밤의 가스파르. 마지막 곡의 제목은 스카르보scarbo. 장난을 좋아하는 작은 요정의 이름이다.
옹딘에 이어 다시 한 번 요정의 스케르초가 시작되었다.
찾으려고 하면 보이지 않던 요정이 이번엔 시야에서 벗어나지 않고 계속 달라붙었다.
정신이 산만해질 정도로 뛰어다니고, 장난을 친다. 물의 요정처럼 말을 걸어오거나 유혹해 오진 않는다. 하지만 스카르보는 사람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라도 나타나서 귀찮게 구는 요정이었다.
어떠한 목적성 등을 찾을 순 없었다. 바람에 나뭇잎이 흔들리는 것처럼, 사람을 마주한 스카르보는 춤을 추고 빙글빙글 구른다.
가만히 지켜보다가 문득 음산함을 느껴서 고개를 돌려 버리면 바로 그 돌아본 장소에 나타나 있다. 도저히 어디에 나타날지 종잡을 수가 없다. 스카르보의 얇고 긴 손가락은 허공을 가르고 마구 흔들렸다.
“…….”
타티아나는 이 신출귀몰한 요정을 너무나 잘 그려 내고 있었다. 같은 음을 연타하다가, 순간적으로 몇 옥타브를 뛰어넘어 도약하고는 다시 되돌아온다. 그녀가 손짓하는 방향에 따라 스카르보가 나타났다.
현을 늘어놓고 하프를 글리산도로 긁듯 연주해도 어려울 것 같은 긴 아르페지오와 레가토가 요정의 잔상처럼 흐릿해진다.
이 곡은 라벨의 피아노 독주곡 중 가장 어려운 곡이기도 했다.
라벨이 당대 최고의 난곡으로 불리던 발라키레프의 이슬라메이를 듣고, 그보다 어려운 곡을 쓰겠다고 발언한 뒤 쓴 곡이기 때문이다.
이슬라메이 이후의 곡이니 기교적인 어려움은 말할 것도 없었다. 기계처럼 정확한 타건과 리듬 조절, 그러면서도 이해가 안 되는 비율로 섞인 수십 개의 잇단음표를 동시에 처리해야만 한다. 악보를 보기만 해도 아득해질 정도로 복잡해서 어설프게 접근할 엄두도 내기 어렵다.
거기에다가 라벨은 확실한 주제를 부여함으로서 아주 정교하고 분명한 이미지를 연주자들에게 요구했다.
극도의 기교를 필요로 하는 라벨 특유의 불분명한 음향으로 분명한 이미지를 그려 내야 한다. 모순이라고밖에 보이지 않는 요구사항이었다.
하지만 타티아나는 해냈다. 라벨이 요구하는 기준에서 조금도 모자라지 않는 기교적인 완성도를 갖췄을 뿐만 아니라 섬세한 음악성까지 또렷했다.
그녀가 빚어낸 스카르보는 생동감이 넘쳐서 마치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조차 느껴질 정도였다.
이슬라메이를 연주한 지 반년. 타티아나는 스카르보도 자유자재로 다루고 있었다.
“…….”
기괴하면서도 낭만적이고 아름답다. 라벨과 타티아나가 그려 내는 밤의 가스파르는 그러했다.
하얀 달빛 아래에 춤추는 요정들의 스케르초와 교수대의 풍경.
환상과 죽음이 뒤섞인 음악은 전혀 안 어울릴 것 같으면서도 이상할 정도로 잘 어울렸다.
그리고 그 음악 한가운데에 보라색 드레스 차림의 타티아나가 앉아 있었다. 환상의 경계에 손을 뻗고 있는 것처럼 건반에 손을 대고, 끊임없이 자신이 볼 수 있는 모든 것들을 음악으로 쏟아낸다.
타티아나는 전령이자 교두보였다. 무대에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여기 있는 모두를 현실에서 벗어나게 할 수 있는 안내자다.
“…….”
장난을 치던 스카르보는 그만 사라지는가 싶더니, 느닷없이 홀 중앙에서 커다란 발을 굴렀다. 거대한 진동에 온몸이 떨렸다.
손바닥만 했던 요정이 홀 천장에 닿을 만큼 커지자 그 자체만으로도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이 홀은 그만한 요정이 있을 만한 크기가 아니었다.
그러나 스카르보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 커다란 몸을 뒤흔들었다. 눈으로는 한눈에 볼 수 없는 것들이 귀로는 모두 한꺼번에 들렸다. 홀이 무너지지 않을까 걱정이 될 정도로 스카르보는 거침없었다. 뾰족한 모자 끝에 달린 종이 울렸다.
모두들 그 크기에 압도되어 턱을 바짝 당기며 얼어붙었다.
그것이 스카르보의 마지막 장난이었다.
거대해졌던 스카르보의 몸은 점차 투명해지기 시작하더니 촛농처럼 서서히 녹아내렸다. 그 촛농은 청중들의 머리 위로 우수수 떨어지지 않고 허공 어디에선가 증발해 버린 것처럼 사라졌다.
타티아나는 사라지는 스카르보를 묘사하는 트레몰로를 연주하고는, 마치 마지막으로 건반을 닦아 내듯 아르페지오로 연주를 마무리 지었다.
물 흐르듯 깔끔한 연주와 피날레.
주변에서 흥분한 기색이 점차 부풀어 오르고, 마침내 펑 터지듯 무대 위로 폭발했다.
“……브라바!”
아나스타샤도 자리에서 일어서서 기립박수를 보냈다.
타티아나는 20분이 훌쩍 넘는 대규모의 난곡을 연주하고도 지친 기색 하나 없이 인사한다. 아나스타샤는 타티아나가 정말 지치지 않아서가 아니라 무대에 집중하느라 지치는 것도 잊고 있기 때문이라는 걸 잘 알지만, 이렇게 완벽해 보이는 모습엔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정말…….’
청중들을 향해 인사한 타티아나가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아나스타샤가 있는 방향을 정확하게 바라보았다. 단 몇 초 정도였지만 아나스타샤는 그녀와 눈이 마주쳤음을 느꼈다. 타티아나는 보일 듯 말 듯 살짝 미소를 지었다.
그다음, 타티아나의 시선이 살짝 어긋난다. 그 시선은 아나스타샤의 옆으로 향하고 있었다. 아나스타샤는 옆을 바라보았다.
“이제야 긴장되는데.”
에르네스트는 하나도 긴장하지 않은 목소리로 그렇게 혼잣말을 읊조렸다. 시끄러운 환호 속에서도 아나스타샤는 그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아나스타샤는 그가 긴장할 것이 무엇 있나 생각하다가, 밤의 가스파르 다음으로 이어질 2부 마지막 곡을 떠올렸다.
여기에 있는 그 어떤 청중도 들어 본 적 없는 에르네스트의 곡이 타티아나의 손에서 최초로 연주될 순서였다.
올해 초, 에르네스트가 작곡가를 지망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자마자 아나스타샤는 이런 순간이 올 거라는 걸 예상했다. 때문에 그녀는 나중에 이야기를 들었을 때에도 그렇게 놀라워하지 않았다.
아나스타샤는 바보가 아니었다. 꽤 많은 것들을 예상하고,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리고 스스로를 경계하고 있기도 했다.
혹시라도 유치한 생각이 들까 싶어 늘 신경 썼다. 실수로라도 타티아나에게 왜 곡을 받았느냐고 묻거나, 농담으로라도 에르네스트에게 나한테 줄 곡은 없냐고 묻는 일은 없어야 했다. 두 사람은 음악가로서 정말 진지했다.
음악가라면 음악가답게. 아나스타샤는 그런 점에 있어선 분명하게 하기로 생각했다.
그렇게 앞을 바라보았을 때, 타티아나도 다시 시선을 아나스타샤 쪽으로 맞춘 채였다.
그 눈을 보고 아나스타샤의 머리에 든 생각은 딱 한 가지뿐이었다.
‘네가 잘 해냈으면 좋겠어.’
다른 건 아무 상관 없었다. 타티아나가 결정한 프로그램을 마지막까지 훌륭하게 마칠 수 있었으면 한다.
이미 정전이라는 사고까지 겪었으니 더 이상 아무 문제 생기지 않고, 만에 하나 첫 연주회가 트라우마로 남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
그저 그뿐이었다.
아나스타샤는 그런 바람을 담아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멀리 떨어져 있지만, 타티아나가 분명히 이해했을 거란 확신이 든다.
타티아나는 미소와 함께 돌아서선 다시 피아노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