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13화
기립박수는 타티아나가 다시 피아노 앞에 앉을 때까지 끊이질 않았다. 열광적인 분위기였다. 그만큼 그녀가 연주한 밤의 가스파르는 찬사를 받아 마땅한 완성도를 지니고 있었다. 여느 연주회 같았다면 아마 이 곡으로 이미 마무리되고 끝났을 것이다.
하지만 밤의 가스파르가 끝나고도 연주회는 한 곡을 남겨 놓고 있었다.
“…….”
구세프는 팔짱을 끼고 앉아 무대를 바라보았다. 다시 피아노 앞에 앉은 타티아나는 조용히 건반을 바라보고 있었다. 적막 속에서 다음 음악으로 집중력을 옮겨 가는 찰나의 순간이다.
지금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구세프는 상상도 할 수 없었다. 그런데 긴장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도 않는다.
청중석에도 온통 처음 초연되는 곡에 대한 기대감만 가득했다.
구세프는 지금 이 공간에서 정말 긴장하고 있는 건 자신 혼자뿐일지도 모르겠단 생각을 하며 눈가를 찡그렸다.
‘마음대로 하라 했다고 정말 그리하다니…….’
그간 몇 번이나 생각하면서 어느 정도 내려놓긴 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깐깐한 선생의 입장은 남아 있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지금 이 상황은 정말 황당했다. 수십 년 동안 음악학교 선생을 하면서도 이렇게 당돌하고 도전적인 연주회는 본 적이 없었다.
만약 그가 타티아나의 지도 선생이었다면 이런 도전은 나중으로 미루고 일단 레퍼토리에 있는 완성된 곡들을 무대에 올리도록 종용했을 것이다. 타티아나 정도 실력이 된다면 2시간이 아니라 3-4시간이라도 혼자서 연주회를 할 수 있으니까.
그런데 무대에 올릴 곡이 모자란 것도 아니고, 난데없이 친구의 곡을 헌정받아 초연할 줄은 몰랐다. 구세프는 처음 이 소식을 전해 듣고는 그야말로 기함했다.
심지어 중간에 살짝 끼워 넣은 것도 아니다. 정 연주하고 싶다면 2부가 시작할 때 청중들의 관심을 끌어모으는 식으로 연주했어도 될 일이다.
하지만 타티아나는 전혀 타협하지 않았다. 심지어 라벨의 밤의 가스파르 같은 고난도의 대곡 뒤에 바로 붙여 연주회의 하이라이트로 만들어 놓았다.
미하일이 대체 무슨 생각으로 저런 순서를 허락했는지 모르겠다.
“…….”
하지만 아무 생각 없이 막 나가는 건 아니었다.
곡 순서를 보면 깜짝 놀라 기겁할 정도로 당돌한 자신감이 엿보이지만, 그 자신감이 전부 타티아나에게서 나오고 있진 않다. 타티아나는 평소 자신감이 넘치는 스타일도 아니었고.
그녀의 자신감과 믿음은 바로 곡 자체에 있었다.
작곡가로서 첫 발을 내디딘 에르네스트의 첫 곡. 구세프는 이 곡을 컨펌하면서 내심 상당히 감탄하고 있었다. 작곡에 대해 따로 가르친 적도 없는데, 에르네스트는 순수하게 여러 대가들의 음악을 흡수하여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선 다시 재창조하고 있었다.
거의 본능적인 음악성에 아주 기초적인 작곡 기법과 화성학 등의 이론이 가미되었을 뿐임에도 구세프는 에르네스트의 재능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타티아나 역시 그러했을 것이다. 구세프는 그리 확신했다.
듣기론 곡을 헌정받자마자 미하일에게 가서 이 곡을 초연하고 싶다고 했다고 하는데, 이 곡의 가치를 제대로 알아보지 못했다면 그런 허락을 구할 리가 없었다.
두 사람의 음악적 식견과 실력, 그리고 신뢰. 구세프는 그것을 믿고 있었다. 두 사람이 이견 없이 추진하는 기획이라면 아무 문제 없이 성공할 것 같다는 믿음이 구세프를 조금 차분하게 만들었다.
이젠 다시 깐깐한 선생으로 돌아올 차례다. 구세프는 두 사람의 결론을 지켜보기 위해 조금 더 팔에 힘을 주고 침묵을 지켰다.
연주자 타티아나는 팔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세상에 아직 알려지지 않은 음악을 처음으로 흩뿌렸다.
“…….”
에르네스트 스테파노비치 베샤스트니흐의 첫 번째 피아노 소나타. 겨울의 표리.
직관적인 것 같으면서도 모호한 느낌의 제목이었다. 구세프는 에르네스트가 곡을 헌정할 때 제목을 짓지 않고 넘겨주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어이없어하기도 했다.
세상의 수많은 표제음악들 중엔 작곡가가 스스로 이름을 붙이지 않은 음악들도 물론 많다. 작곡가 사후에 다른 음악가나 출판업자가 붙이거나, 아니면 평론에 의해 특정한 명칭으로 불리게 되는 경우 등이다.
하지만 작곡가가 스스로 제목을 붙일 수 있는데도 그렇게 하지 않는 경우는 들어 본 적이 없다. 마치 헌정인에게 어떤 주제인지 제목만 들어보고 맞춰 보라는 퀴즈를 낸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 퀴즈에 대한 해답을 지금 타티아나가 내놓고 있었다.
그녀의 손이 섬세하게 음형을 그리고, 잇달아 독립된 성부 하나가 저 멀리서 서서히 날아든다.
‘좋은 해석이야.’
타티아나가 내놓은 1악장의 부제는 칼리오페와 새.
현악의 뮤즈와 새의 이미지는 지금 들어 보니 에르네스트가 애초에 이런 주제를 가지고 작곡을 한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정확하고 명료했다.
칼리오페는 무대를 거닐며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 속삭이거나 한숨을 내쉰다. 그녀의 걸음 뒤로는 두루마리가 길게 늘어졌다. 서사시의 뮤즈이기도 한 그녀의 두루마리엔 장대한 이야기들이 빼곡히 적혀 있다.
그 중얼거리는 목소리조차 정교하게 짜인 음형으로 그려졌다. 구세프는 기교를 과시하지 않고 오로지 음악성에만 몰두하며 가볍게 흘려보내 버리는 타티아나의 과감하고 영리한 해석에 혀를 내둘렀다. 심지어 작곡가인 에르네스트도 저런 식으로 하진 않았다.
끝없이 흘러내리는 두루마리가 다시 칼리오페의 발에 밟힐 때쯤, 칼리오페는 고개를 들고 주위를 날던 새와 눈을 마주한다.
순간, 음악이 멈추었다.
구세프는 눈을 감았다 떴고, 서 있던 칼리오페는 어느새 피아노 앞에 앉아 있었다.
타티아나는 이전보다 조금 더 높게 손을 들어 올렸다.
“……!”
칼리오페가 건반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음악은 이조되며 전개되었다. 이전까지의 음악도 충분히 환상적인 분위기를 자아내었지만, 이젠 그저 보이는 풍경이 아니라 음악 그 자체를 직접적으로 귀에 퍼붓는 기분이었다.
몇 초 사이 나타난 프레이즈에 몇 개나 되는 기법이 들어갔는데, 악보를 본 적이 있는 구세프조차 한 번에 이해하기 힘들 정도였다.
전체적인 형태는 환상곡에 가깝다. 수십 단으로 쌓인 화성과 고난도의 테크닉은 근현대 이후의 음악임을 증명한다. 하지만 곡을 바닥부터 이루는 구조는 확고한 기초를 지니고 있었고 다채로운 음색과 주제는 낭만주의와 인상주의의 경계에 위치해 있었다.
구세프는 에르네스트가 기초를 벗어나지 않고 낭만적 사조를 지키고 있다는 것에 흡족했다. 에르네스트는 러시아 클래식 음악을 되살리겠다는 약속을 철저하게 지키려 하고 있었다. 그에 대한 자신감도 충분히 엿보인다.
그리고 타티아나는 그런 에르네스트가 원하는 모든 음악을 현실로 만들어 주겠다는 듯 화려하게 연주했다.
‘상상 이상이군.’
몇 개나 되는 성부가 끊이지 않고 교차되며 연주되다가 사라지고, 옥타브를 몇 개나 뛰어넘는 소리들이 곳곳에 나타나며 음악을 풍부하게 만든다. 그 와중에도 빠지지 않고 섞이는 꾸밈음과 트릴 등이 연주자를 더더욱 극한으로 몰아붙였다.
하지만 칼리오페의 화신은 그러한 테크닉적 난해함에 가로막히지 않고 더더욱 빠르게 음악을 풀어헤쳤다.
정열적인 옥타브 도약이 숨 가쁘게 차오른다. 그리고 다시 그 숨을 내쉴 땐 이성적이고 날카로운 아르페지오가 음악을 고풍스럽게 물들였다. 그 화려함은 협주곡의 카덴차이자 오페라의 아리아와 닮아 있었다.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다웠다.
절묘한 균형을 잃지 않는 칼리오페의 환상곡은 무대에 넘실거리는 데에서 그치지 않고 홀 구석구석까지 파고들었다. 그녀의 새는 넋을 놓은 사람들이 다시 세상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길잡이가 되어 준다.
물론 이 해석은 타티아나의 해석이었지만, 구세프는 이보다 더 뛰어난 해석은 찾기 어려울 것 같다는 직감을 느꼈다.
에르네스트는 곡의 중요한 부분들에만 기호 등을 사용해서 지시를 내렸기 때문에 해석의 자유는 상당히 넓게 열려 있다. 그렇지만 타티아나는 그 모든 자유도를 전부 사용하는 것처럼 음악을 변화무쌍하고 다채롭게 다루었다.
음악가들에게 영감을 안겨 준다는 전설 속 뮤즈 칼리오페.
타티아나의 연주는 그 칼리오페의 축복처럼, 음악을 부리는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3분 정도 길이의 환상곡이 끝나고, 한껏 연주를 마친 칼리오페가 일어서는 것과 동시에 다음 악장이 펼쳐진다.
피아노 소나타 겨울의 표리 2악장. 메아리.
1악장의 주제가 살짝 변주되어 자연스레 이어졌다. 템포지시는 안단테로 느긋한 속도. 1악장이 어마어마한 음표들을 단시간에 얽어내어 환상적인 음악으로 승화시켰다면, 이번엔 보다 세련된 소리가 서두르지 않고 움직이며 곳곳에 맺혔다.
타티아나가 지은 메아리라는 부제는 단번에 이 곡을 이해하기에 좋았다. 1악장의 주제를 여운처럼 연주하면서 동시에 같은 음형을 반복한다. 먼 골짜기에서 들려오는 메아리와도 같다. 듣기에 편안하면서도 우아한 음악이었다.
구세프는 이 음악을 들으며 타티아나의 음악적 이해도가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다는 걸 분명하게 느꼈다.
밤의 가스파르처럼 음악 자체가 시와 정확하게 일치되는 철저한 표제음악도 정말 잘 연주해 냈지만, 이렇게 음악만이 주어진 상태에서 배경과 의도를 정확하게 읽어내고 그것을 함축된 단어로 표현하는 능력도 출중했다.
이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심지어 직접 작곡을 한 것도 아니라 다른 사람이 작곡한 것이라면 더더욱.
편안하게 들려오는 음악에 심취하면서 구세프는 에르네스트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의도한 것인지 가늠해 보았다.
1악장에서 나타난 그 화려한 비르투오시티는 타티아나를 위해 쓴 것이라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그녀에게 잘 어울렸다. 그리고 두 번째 악장 역시 타티아나의 섬세한 음악성을 잘 드러내는 데에 굉장히 유리하게 느껴졌다.
처음부터 타티아나를 염두에 두고 썼냐고 물어본 적은 없었지만, 굳이 물어볼 필요도 없을 것 같았다. 구세프가 보기에 에르네스트가 작곡을 하기로 마음을 먹게 된 데엔 타티아나의 영향도 굉장히 컸으니. 그렇게 영향을 준 타티아나를 모티브로 곡을 쓰고 싶다고 생각하는 건 그리 특이한 생각이 아니었다.
중요한 건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걸 실제로 써 낼 수 있었다는 점이다.
타티아나는 그렇게 써 낸 곡을 굉장히 수준 높게 연주할 수 있었고.
물론 두 사람의 음악을 평가하자면 얼마든지 평가할 수 있었다.
이 곡을 컨펌하고 작곡을 허락한 건 구세프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곡에 발전시킬 부분이 전혀 없이 완벽하다고 인정한 건 아니었다. 타티아나의 연주 역시 아직 완벽하다고 할 순 없었고.
그러나 구세프는 굳이 자신이 끼어들어 레슨을 하지 않더라도 타티아나와 에르네스트는 서로 피드백을 주고받으며 훨씬 더 빠르고 높이 나아갈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몇 번만 반복되면 대체 어떻게 될지 구세프는 상상조차 하기 어려웠다.
“…….”
울려 퍼지는 메아리는 몇 개가 뒤섞이더니 증폭되어 한 번 크게 확대되고는, 다시 사그라들었다. 본래 메아리는 그리 길게 울리지 않는다.
길게 울리는 건 메아리에 응답하여 잠에서 깬 누군가의 울음소리였다.
2악장과 3악장 사이에도 빈틈이 거의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소나타가 단악장 소나타로 들리는 일은 절대 없었다. 각 악장별로 나타나는 주제와 음향은 각각의 개성이 뚜렷하고 의도하는 바가 분명하다.
타티아나는 그 부분을 놓치지 않고 정확하게 짚어 냈다. 슬그머니 악장 사이를 이어 가는데도 불구하고 어느새인가 음색이 돌변해 있었다.
구세프는 흥미진진하게 타티아나와 에르네스트가 만들어 낸 마지막 이야기에 빠져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