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14화
손끝에 힘을 주었다.
내가 겨울의 표리라 이름붙인 에르네스트의 소나타는 내 템포로 총 7분 정도 되는 짧은 소나타였지만 그 안에 있는 이야기들은 전부 강렬하고 내용이 또렷해서 조금이라도 집중이 흐트러지면 이미지 전체가 무너진다.
난 이제 정말 끝에 다다랐음을 느끼면서 마지막까지 온몸의 신경을 집중시켰다.
3악장의 부제는 설원의 용.
7분짜리 소나타에 굳이 붙이지 않아도 되는 부제를 붙인 이유는 이만큼 분명하게 해석을 직관적으로 드러낼 방법도 드물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에르네스트도 오늘 프로그램북을 받아 보고 나서야 제목을 봤을 테니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다. 중간에 만났을 땐 별 내색 하지 않았지만 속으론 조금 당황했을지도 모르지.
겨울의 표리라는 제목은 물론이고 부제까지 붙인 건 사실 피아노 소나타보다는 서사시나 가곡에 어울리는 제목처럼 느껴지니까.
그러니 왜 이런 부제를 붙였는지는, 지금부터 연주로 보여 주고 설득할 생각이다.
“…….”
쿵 하고 건반을 내리눌렀다. 댐퍼를 풀어놓은 상태로 거의 현이 끊어지기 직전까지 울리게 했다. 소리란 본래 파동이다. 난 거대한 파동을 청중석으로 퍼뜨렸다.
다시 한 번 육중한 소리가 울리고, 새하얀 용이 고개를 들어 주시한다.
정교회를 국교로 하는 러시아에서 용이란 그리 좋은 이미지를 가지고 있지 않다. 하지만 하늘에서 내린 눈과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새하얀 용의 신비로움은 그냥 포기하기엔 너무 아쉬운 이미지였다.
난 이 해석을 고집하며 다시 한 번 더 용을 화려하게 그려 냈다.
규모에서 무게감만이 전부가 아니다. 용의 전신을 덮고 있는 비늘은 용이 조금만 움직여도 함께 사락거리며 움직였다. 덕분에 난 작은 동작들도 섬세하게 표현할 수 있었다.
한 걸음씩 서서히 용에게 다가간다. 용은 제자리에서 서성이고, 목을 좌우로 흔들거리고, 다시 발을 구른다. 그 모든 것을 살피며 조금 더 다가서자 용이 경고하듯 날개를 홰쳤다.
“…….”
피아노가 아니라 관현악으로 연주해야 할 것같이 느껴지지만, 에르네스트가 요구한 건 오로지 피아노 한 대뿐이었다.
용을 고집한 내 잘못일지도 모르겠지만, 이제 와서 해석을 엎어 버릴 순 없다. 할 수 있는 최대한의 테크닉으로 장대한 화성을 쉼 없이 쌓아올리고, 날개가 흔들리는 형상에 따라 한 음도 빼놓지 않고 그대로 덧붙였다.
그렇게 용과 눈싸움을 하는 사이 음악은 점점 후반부로 접어들었다.
잔뜩 얼어붙은 청중들의 기색이 여기까지 느껴져 온다. 그중엔 왜 이런 식으로 용과 대치하고 있는지 이유를 궁금해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리고 그 이유는 보석의 찬란한 빛이 반짝이는 것으로 밝혀지게 되었다. 용이 숨기고 있는 다이아몬드의 광채였다.
“…….”
처음 이 곡을 접했을 땐 무거운 칼날 같은 음이 무엇을 뜻하는지 제대로 정의하지 못하고 그저 더더욱 차갑고 냉정하게만 연주하는 방향으로 연구했다.
하지만 저번 야쿠츠크행으로 많은 것을 이해한 뒤 다시 정립된 3악장은 새하얀 용과 다이아몬드를 놓고 대결하는 구도가 그려지고 있었다.
괜히 서사시처럼 이름을 붙인 게 아니다. 이 곡은 짧은 소나타이지만 파격적이고 흥미로운 흐름을 가지고 있었다. 난 거기에 제목을 붙이고 이미지를 부여해 보다 생명력을 불어넣었고, 이젠 그 위력을 체감할 때였다.
휙 날아드는 날개와 꼬리, 이빨 등을 피하며 광채를 향해 손을 뻗는다. 이젠 그냥 도망칠 수도 없다. 난 더더욱 빠르게 상황을 몰아붙였다.
전개부에 도달한 뒤 불과 몇 초 정도, 음형이 이전과는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하고 거대해졌다.
테크닉적인 한계에 거의 다다랐다. 세계적 난곡인 밤의 가스파르와는 또 다른 어려움이었다.
폭발하는 화성의 향연. 그리고 연달아 내리긋는 하강 글리산도는 피아니스트에게 수많은 건반을 연주할 수 있게 해 주었다.
난 신체적으로는 거의 극한을 느끼고 있었지만, 사실 연주자로선 일종의 희열을 느끼기도 했다.
에르네스트가 의도하고 작곡하진 않았겠지만 이 곡은 내가 컨트롤할 수 있는 끄트머리에 위치하고 있었다. 조금만 더 어려웠다면 이 해석을 버리고 다른 조금 더 쉬운 방법을 찾아야 했을 텐데, 최대한으로 집중하면서 모든 테크닉을 쏟아붓는다면 분명히 연주할 수 있는 곡이었다.
할 수 있다는 걸 안다면 주저하거나 늦출 이유가 없다. 난 더더욱 세차게 건반을 연타하며 주제를 완성해 나갔다.
전개는 완전한 클라이맥스를 맞이하여 화려하게 펼쳐지고, 마지막으로 눈이 멀 정도로 밝은 다이아몬드의 광채가 환하게 비춰지며 피날레가 마무리되었다.
아르페지오의 마지막 음을 탁 튕기듯 놓고, 그제야 길게 숨을 들이쉬었다. 난 몇 초 동안 숨을 참은 채 연주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 탓인지 머리가 어질거렸다.
“브라바!”
그리고 어질거리는 옆머리로 용의 울음소리보다 더 큰 함성이 쾅 하고 울렸다.
난 일어설 엄두도 내지 못하고 고개를 돌려 청중석을 돌아보았다.
기립박수가 쏟아지고 있었다.
야유가 있을 거라 생각하진 않았지만, 이 정도로 성대한 찬사가 있을 거라 기대한 것도 아니었다. 검증되지 않은 곡이었고, 인상주의 같은 뉘앙스가 있어서 감상하기 어려울 수도 있었으니까.
그러나 이곳에 모인 청중들은 그 어떤 때보다 큰 성원을 보내왔다. 난 가슴이 먹먹해짐을 느꼈다.
“…….”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연주 집중력은 이미 건반에서 손을 뗀 시점에 흩어져 버렸지만, 비로소 해냈다는 성취감이 온몸을 서서히 채워 나갔다. 어깨가 파르르 떨렸다.
1부 마지막에 작은 사고를 겪긴 했어도, 이제 그 누구도 그런 건 신경 쓰지 않았다. 난 그 상황을 잘 견뎌 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2부 마지막으로 준비한 곡 역시 상상 이상의 성원을 받으며 성공적으로 초연을 마쳤다. 이건 연주자로서의 나만의 성공이 아니라 작곡가로서의 에르네스트의 성공이기도 했다.
난 고개를 돌려 에르네스트가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 그는 아나스타샤와 함께 있었는데, 일어서선 물끄러미 날 바라보고 있는 중이었다.
별로였나요?
입을 열어 말하진 않았지만 눈빛으로 전해졌을지도 모르겠다. 저 멀리서도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에르네스트는 킥킥거리더니, 손을 들어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난 이곳에 모인 400명의 청중들을 향해 정중히 고개를 숙여 보인 후 뒤돌아섰다.
이대로 대기실로 나갔다가 커튼콜을 받아 다시 나올 수도 있겠지. 지금 이 분위기로 보자면 두 번 정도는 다시 불러 줄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난 커튼콜을 즐기는 것이 연주자의 권리라 생각하면서도 내가 그걸 당당하게 누릴 생각은 들지 않았다.
아직 많이 모자란 연주회를 위해 시간과 돈을 내어 이곳에 와 주신 분들에겐 제대로 감사만 표해도 모자랄 시간이다.
난곡인 밤의 가스파르에 이어 격렬한 연주가 계속 이어지면서 상당히 힘이 빠졌지만, 난 그걸 핑계로 시간을 벌지 않고 보이지 않게 스트레칭으로 팔을 풀며 다시 피아노로 향했다.
메인 디쉬를 잘 대접했다고 해서 끝난 건 아니다.
사실 나도 레스토랑에 가면 디저트에 관심이 많기도 하고.
***
대기실에서 연주회의 마무리를 지켜보던 베르너는 자기도 모르게 헛웃음을 흘렸다.
타티아나가 성원을 보내 준 청중들에게 감사를 느끼고 있다는 건 잘 알겠다. 대기실로 들어와 물이라도 한 잔 마시고 커튼콜을 받으며 다시 나가서 앙코르 요청을 받아도 좋을 텐데, 타티아나는 그럴 이유가 없다는 듯 곧바로 다시 피아노 앞에 앉아 앙코르 곡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갑자기 라벨의 라 발스la valse를 연주하는 건 서비스가 조금 과한 게 아닌가 생각이 들 정도였다.
라 발스는 연주회의 메인 프로그램으로 삼아도 무방할 정도로 에너지를 많이 쏟아야 하는 곡이었다. 그러나 타티아나는 이미 어려운 곡들을 몇 곡이나 연주한 상태에서도 최선을 다하여 라 발스를 선사했다. 이렇게 보면 마치 이제 막 연주회를 다시 시작한 것같이 느껴질 정도였다.
베르너는 타티아나가 연주하는 라 발스의 완성도를 느끼면서 감탄을 금치 못했다.
원래 연주할 줄 아는 곡이 어마어마하게 많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갑자기 앙코르 무대에서 이런 대곡을 툭 꺼내어 연주하는데도 이 정도로 잘할 줄은 몰랐다.
물론 자신이 있으니까 꺼낸 것이겠지만…… 처음부터 앙코르 곡으로 라 발스를 준비한 건가? 아무리 생각해도 잘 이해가 가지 않는다.
그렇게 환상적인 오스트리아 왕실 무도회의 풍경을 연주한 타티아나는 일어서서 잠시 환호를 받은 뒤, 곧바로 다음 앙코르 곡도 연주했다.
니콜라이 기르셰비치 카푸스틴의 콘서트 에튀드 6번. op.40
언뜻 재즈의 뉘앙스도 느껴진다. 위아래로 흔들리는 리듬이 무척이나 귀엽다.
하지만 콘서트 에튀드라는 제목은 허명이 아니었다. 언뜻 듣기엔 박자도 화성도 쉽게 들리지만 직접 연주하려면 끔찍하게 어려운 난이도를 지니고 있었다.
물론 타티아나는 자신 있게 꺼내든 곡을 망치는 법이 없다.
처음 시작은 분명 하이든이었는데 그런 고전부터 카푸스틴 같은 근현대 작곡가까지, 타티아나는 시대를 막론하고 모든 곡들을 너무나 깔끔하게 연주해 냈다.
- 브라바!
연주가 끝나자 또 우레와 같은 함성이 터졌다.
앙코르로 두 곡을 연주한 타티아나는 이번엔 청중석을 향해 다시 한 번 깊게 머리를 숙이고는 대기실 쪽으로 나왔다.
베르너는 허둥지둥 타티아나를 맞이하기 위해 일어섰다.
“멋졌어요 타티아나!”
“좋은 연주회였습니다!”
베르너와 엘레나를 비롯한 관계자들이 모두 다가가 한마디씩 칭찬을 보냈다. 타티아나는 환하게 웃으며 한 명 한 명 모두에게 답인사를 했다.
베르너는 그녀에게 물병을 따서 건네며 물었다.
“타티아나, 아직 커튼콜이 계속되고 있는데. 어떻게 하실 겁니까?”
베르너는 타티아나가 다시 나가서 앙코르를 몇 곡 더 연주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타티아나는 여전히 박수 소리로 요란한 홀 쪽을 바라보더니 고개를 살짝 저었다.
“나가서 인사만 하고 들어오려고 해요.”
“앙코르는 두 곡만 연주하실 겁니까?”
“예.”
커튼콜 한 번도 없이 다시 피아노에 앉는 모습은 솔직히 몇 곡 정도 더 연주할 기세였는데, 이렇게 담백하게 마칠 줄은 또 몰랐다.
베르너가 약간 궁금하다는 시선으로 바라보자 타티아나가 배시시 웃었다.
“디저트가 너무 달아도 안 좋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어요. 오늘 연주회는 저 혼자만의 것이 아니었으니…… 이 정도면 괜찮겠죠.”
무슨 말인진 잘 모르겠지만 타티아나에겐 분명한 이유가 있었다. 베르너에게 있어 타티아나는 알 것 같으면서도 잘 모를 연주자였다.
“물 감사해요.”
“아. 주시죠.”
“인사하고 오겠습니다.”
타티아나는 베르너에게 물병을 돌려주고는 다시 밖으로 나갔다. 대기실에선 조금 풀어져 있던 태도도 홀에선 다시 곧게 펴졌다.
베르너는 이후의 일정을 떠올렸다.
계약엔 음반 판매나 사인회 등이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타티아나는 아직 그런 걸 할 생각이 없다고 했다. 첫 독주회에서 사인회를 한다고 해서 뭐라 할 사람이 있을 리 없지만 그녀는 되도록 기본적인 것만 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아직 음악학교에 다니는 학생 연주자이니 그 정도는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청중들은 그리 생각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앙코르도 이쯤에서 끝나는 것 같은데…… 지금 분위기를 보면 거의 손바닥이 터져 나가도 신경 쓰지 않을 사람들이 수백 명은 되는 것 같았다. 연주회가 너무 성공해 버려서 만족도가 너무 폭발해 버려도 이런 경우가 생기곤 한다.
베르너는 청중들의 열기를 느끼면서 아마 타티아나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끝낼 순 없을 거라 예감했다. 그는 무대 위에 선 타티아나를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