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15화
타티아나가 커튼콜에 응해 다시 올라오는 모습을 보자마자 에르네스트는 그녀가 더 이상 앙코르를 연주할 생각이 없다는 걸 느꼈다. 피아니스트 특유의 분위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나 상황을 잘 모르는 다른 청중들은 무대 위로 나온 타티아나를 보자마자 더더욱 열성적으로 박수를 쳤다. 앞선 앙코르에서 느낀 황홀감에 더 취하고자 하는 박수 소리다.
타티아나는 작게 고개를 숙여 보이는 것만으로 답했다.
그녀는 피아노로 향하지 않고 잠시 서서 조명 아래 환하게 드러난 청중들을 바라보았다. 이전까지의 시선과는 달랐다. 성원은 감사하지만 준비된 연주회는 여기까지라고 전하는 듯하다.
그녀와 함께한 청중들은 이제 몸짓과 태도에서 느껴지는 의사를 어느 정도 느낄 수 있었다. 2시간이 채 안 되는 시간이었지만 그 정도면 충분했다.
환호와 박수가 조금 옅어졌다. 누군가 주도한 것도 아닌데 자연스럽게 그러한 분위기가 퍼져나갔다. 타티아나는 자신을 이해해 준 것에 대해 고맙다는 듯 다시 한 번 허리를 숙이곤 무대 밖으로 나갔다.
청중들은 말없이 박수 소리로만 소통했다. 타티아나가 다시 앙코르 곡을 연주해 줄 때까지 커튼콜을 이어 나가고 싶어 하는 청중도 있었고, 연주회는 여기까지라는 의사를 드러낸 타티아나를 존중해 주고자 하는 청중도 있었다.
그 무언의 대결의 결과는 연주회를 마치는 쪽의 승리였다.
“……하고 싶은 대로 해도 괜찮을 텐데.”
웅성거리며 홀을 빠져나가려 하는 청중들 사이에서 에르네스트는 홀로 중얼거렸다.
그는 타티아나의 평소 성격을 잘 안다. 원래대로였다면 앙코르만 다섯 곡은 더 연주하고도 남았을 터다. 그녀는 목말라하는 청중을 한 사람이라도 가만 두지 못하는 연주자였으니까.
하지만 오늘은 상황이 조금 달랐다.
2부의 마지막에 연주한 곡. 겨울의 표리. 타티아나는 그 곡의 여운이 앙코르 곡들에 희석될까 우려했다. 그래서 타협한 게 두 곡이었다.
“…….”
앙코르를 몇 곡이나 연주하고 싶은 마음을 꾹 눌러 참으면서 그녀가 물러났단 사실에 에르네스트는 조금 생각이 복잡해졌다.
연주회의 완성도가 높으면 높을수록 앙코르를 자제하는 건 평소 에르네스트의 방식이었다. 이 연주회는 타티아나의 독주회이니만큼 그녀가 원하는 대로 했으면 좋겠다는 게 그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그런데 더더욱 깊은 곳에서 에르네스트의 생각을 어지럽히는 건 순수하게 기쁘다는 마음이었다.
타티아나가 평소 자신의 신념을 자제해 주면서까지 배려해 줘서 고마웠다. 초연한 곡이 청중들에게 조금이라도 더 가치 있게 남기를 바라는 것 같아 기뻤다.
그녀가 고민 끝에 내놓은 겨울의 표리라는 제목에 대해 에르네스트는 아무런 덧붙일 말이 없었다. 악장별로 붙인 부제들도 정말 마음에 든다.
“…….”
단지, 칼리오페와 새라는 첫 번째 악장의 제목을 듣고는 약간 뜨끔하기도 했다.
타티아나는 음악가들의 뮤즈인 칼리오페를 은유하며 연주했지만, 사실 에르네스트는 그가 아는 피아니스트들 중 가장 경건한 피아니스트를 모티브로 하여 작곡했기 때문이었다.
곁에서 보고만 있어도 공부가 되어 에르네스트는 그런 그녀의 다채로운 매력을 곡으로 쓰고자 했지만, 막상 칼리오페라는 이름이 나오니 아차 싶기도 했다. 스스로도 미처 몰랐던 심중의 무의식이 정확하게 겨누어진 기분이었다.
‘틀리진 않았어.’
신의 이름은 조금 멀게 느껴졌지만, 타티아나에겐 그만큼 잘 어울렸다.
첫 악장의 주인공임을 증명이라도 하듯 타티아나는 에르네스트조차 미처 예상하지 못한 음악들을 쏟아냈다. 그녀의 기량으로 이루어진 재해석은 곡을 적어도 한 단계는 더 높은 수준에 올려다 놓았다.
그 결과는 이 홀의 전체적인 분위기가 말해 주고 있었다.
“슬슬 나갈까.”
“앙코르는 조금 아쉽지만…… 그래도 본 무대가 워낙 좋았으니까.”
“초연은 그리 기대하지 않았는데, 하이라이트로 놓을 만하더라.”
“작곡가가 그 에르네스트였잖아?”
“작곡도 하는 줄은 몰랐어. 왜 직접 초연은 안 했지?”
“헌정받은 사람이 하는 게 일반적이잖아.”
좌석 뒤편에서 두런두런 들려오는 이야기를 들으며 에르네스트는 허리를 조금 더 낮췄다. 누가 알아볼까 싶어 숨고자 한 건 아니었다. 그냥 온몸에 들어차 있던 무언가가 스르륵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조금 남아 있던 긴장이 사라지고, 남은 건 전신에 감도는 희열뿐이었다. 타티아나에게 헌정하면서 내렸던 모든 선택들은 옳았다.
에르네스트는 그의 곡으로 타티아나를 음악가로서 한층 발전시켰고, 타티아나는 에르네스트를 작곡가로서 성장시켰다.
이보다 더 기쁠 순 없었다.
“멋진 곡이었어. 에르네스트.”
무대를 멍하니 바라보는 에르네스트의 옆에서 아나스타샤가 넌지시 말했다. 에르네스트는 그녀를 돌아보았다.
아나스타샤는 옅게 미소를 짓고 있었다. 친구들의 성공을 축하하는 웃음이었다.
하지만 희미하게 묻어 나오는 승부욕 역시 존재했다. 친구로서 진심으로 축하하지만, 친구이기에 마냥 넋 놓고 있지 않는다.
피아니스트의 손은 박수만 치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었다.
아나스타샤는 몇 년 사이 몰라볼 정도로 실력을 키워 나가면서 에르네스트를 직접적인 경쟁자로 여기고 있기도 했다. 에르네스트도 바보가 아니니 그 정도는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는 오랜 친구가 자신에게 그런 승부욕을 불태운다는 사실에 감사했다.
“고마워.”
순수하게 고마움을 표시하자 아나스타샤의 표정이 순간 장난꾸러기처럼 돌변했다.
“그런데 있잖아, 꾸밈음들은 일부러 그렇게 넣은 거야?”
“……뭐?”
어이가 없어 반문하자 아나스타샤의 손이 이리저리 복잡하게 허공을 갈랐다.
“넌 예전부터 불필요한 음표들이 많다면서 브람스를 혹평했었잖아. 그런데 왜 직접 작곡할 땐 간결하게 안 쓰는지 모르겠네?”
“충분히 간결하게 썼거든?”
“정말? 맹세할 수 있니?”
“난 정말 할 수 있는 한에서…….”
“1악장 전개부에서 나온 폴리리듬으로 된 아르페지오도?”
“…….”
딱 꼬집어 말하니 할 말이 없었다.
불필요하게 난해하게 만든 프레이즈는 아니라서 구세프도 별말 않고 넘어가긴 했지만, 아나스타샤가 분석한 것처럼 조금 더 쉽게 하자면 얼마든지 쉽게 할 수 있었다. 그 복잡한 아르페지오는 일종의 욕심이었다.
작곡가로서 에르네스트가 어디까지 쓸 수 있는지, 그리고 타티아나의 기량을 어디까지 끌어낼 수 있는지.
그런 욕심들이 합쳐져서 나온 것이 아나스타샤가 짚어 낸 구간이었다.
말문이 막힌 에르네스트가 한숨을 쉬자 아나스타샤가 킥킥 웃었다.
“피아니스트 출신인데 피아니스트의 마음을 몰라주다니 섭섭해.”
“그게 아니라…….”
일단 다시 자기변호를 해 보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피아니스트로서 괜히 복잡하게 꼬아 놓은 프레이즈에 불만을 가지는 건 에르네스트도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결국 그는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다음부턴 쉽게 쓸게. 됐냐?”
“진작 그럴 것이지.”
아나스타샤는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에르네스트는 그녀에게 말로 이길 생각을 하면 절대 안 된다는 걸 다시 한 번 깨달았다.
물론, 아나스타샤를 이길 수 없는 건 그녀가 항상 괜한 시비를 거는 법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래야 많은 사람들이 연주할 수 있을 것 아니니?”
“…….”
겨울의 표리같이 난이도가 높은 곡은 몇몇 전문 연주자들밖에 연주하지 못한다. 에르네스트는 그 사실을 인정했다. 그의 곡은 다수의 사람들의 손에 닿기엔 너무 먼 곳에 있었다.
에르네스트는 지금까지 러시아 낭만사조를 되살리려는 클래식 작곡가로서 그런 것까지 따질 여유가 없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아나스타샤의 말은 하나도 틀리지 않았다.
음악으로서의 가치는 단순히 기교적 어려움에 종속되어 있지 않다. 쉬우면서도 좋은 곡을 쓰는 것을 궁극적인 목표로 할 필요가 있었다.
이제 작곡가로서 첫 발을 내디딘 에르네스트는 친구의 조언을 새겨들었다.
고개를 끄덕이며 아나스타샤를 바라보던 에르네스트는 문득 궁금점이 생겨 물어보았다.
“아나스타샤. 너 혹시 지금 저 곡 연주할 수 있…….”
“우리도 이만 나갈까? 다른 분들 다 나갔어.”
그런데 주변이 시끄러워서 잘 안 들렸는지, 아나스타샤는 옆을 바라보며 말했다.
에르네스트는 재촉하는 그녀의 옆얼굴을 보다가, 피식 웃으며 일어났다.
“그러자.”
근래 아나스타샤의 실력을 제대로 확인해 본 적은 없었다. 두 사람이 피아노를 두고 제대로 실력을 겨루어 본 건 작년 자선연주회 때였다.
그때 듀엣 연주를 하면서 에르네스트는 아나스타샤가 이미 슬럼프 따위는 완전히 깨뜨려 버렸다는 걸 확실히 느꼈다.
그로부터 1년이 더 지났다. 에르네스트는 지금 친구가 어디까지 가 있는지 확인해 보고 싶었다. 아나스타샤 역시 스스로의 위치를 확인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았고.
언젠가 기회가 생기겠지.
느닷없이 붙잡아서 연습실로 가자고 할 엄두는 안 난다. 피아노라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 타티아나라면 언제라도 그런 대결을 받아 주겠지만 아나스타샤는 그렇지 않다. 그녀는 충분히 준비가 된 후에, 높은 승산을 구한 뒤에야 받아들일 것이다.
그때가 언제가 될진 모르겠지만, 에르네스트는 기대하며 기다리기로 했다.
***
연주회의 완성도를 위해 앙코르는 더 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인사를 하고 다시 대기실로 돌아오면서, 난 혹시라도 커튼콜이 끊이지 않으면 어떻게 해야 하나 조금 걱정했다.
다시 나갔는데 앙코르를 연호하기라도 한다면 충동을 못 이기고 피아노에 앉아 버리게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안 나가도 될 것 같네요?”
모든 상황을 총괄하는 스테이지 매니저 엘레나가 넌지시 말했다.
내 마음을 알아주기라도 한 것처럼 박수 소리는 점점 작아지더니, 조금 더 지나자 홀을 빠져나가는 사람들의 소리로 소란스러워졌다. 난 작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 연주한 곡들로 청중들은 만족해 준 것 같다.
비로소 마지막까지 쥐고 있던 집중력까지 흩어졌다. 순간 다리가 풀릴 것 같았다. 난 간신히 옆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
아무 생각도 안 들 정도로 힘들었다.
지금까지 섰던 무대들을 전부 되돌아보아도 오늘이 정신적으로 제일 피로한 것 같았다.
물론 객관적으로 보자면 저번 송년 음악회가 규모와 출연진들의 명성을 볼 때 가장 부담감을 느낄 만했지만, 독주회라는 무게감은 생각보다 훨씬 묵직했다.
중간에 정전이 났을 때 순간적으로 당황했던 것도 지금 피로도에 한몫하는 것 같다.
“마무리까지 훌륭했습니다. 타티아나.”
그러나 베르너의 말을 듣자 막 올라오던 피로감이 씻겨 내려갔다.
정전 자체는 당황스러웠지만 그걸 잘 해결했다는 데에서 오는 만족감, 그리고 본 프로그램을 최선을 다해 연주하고 좋은 성원을 받았다는 충족감 등이 마음에 차오르며 간질거렸다.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내 웃음을 본 베르너도 따라 웃었다. 난 일어나 그에게 악수를 건넸다.
“고생 많았어요. 베르너.”
“별말씀을.”
다음은 옆에 있던 엘레나였다. 그녀는 조심스레 내 손을 잡았다. 난 웃으며 말했다.
“고마웠어요.”
엘레나는 아직도 정전 사고에 대한 책임감을 느끼는지 살짝 머뭇거렸지만, 내 손에서 느껴지는 확고한 진심은 전해진 듯했다. 그녀도 살짝 팔을 흔들며 말했다.
“저야말로 고마워요. 타티아나.”
난 그 뒤로도 무대 준비를 도와준 관계자들과 악수를 나누었다. 모두들 기쁘게 웃으며 내 악수를 받아 주었다. 그중 한 명은 사인을 요청하기도 했다.
딱히 일부러 만든 사인은 없었던지라, 난 내 이름을 필기체로 써서 건네주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베르너가 말했다.
“사인 얼마나 할 수 있겠습니까?”
“……저희 사인회는 하지 않기로 했지 않나요?”
독주회이긴 하지만 난 아직 사인회라는 것에 대해 막연한 부끄러움을 느끼고 있었다. 선배들이나 선생님들은 내가 무대 체질이라고 말하곤 했지만, 사실 난 그런 평가와 다르게 스타성은 별로 없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베르너는 그런 나를 이해하는 듯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한편으론 재미있게 생각하는 것 같았다.
“대신 기획한 리셉션 파티 자리엔 가시기로 하시지 않았습니까? 그 자리에서 사인이나 사진을 요청하시는 분들이 많을 겁니다.”
“음…… 많으실까요?”
사인회가 없는데도 사인을 요청하는 사람이 그리 많을 것 같지도 않았고. 리셉션 파티라 해 봐야 곧 저녁이라서 간단한 카나페 등을 준비한 프리한 분위기라고 했다. 사실 나보단 아버지에게 더 관심이 많이 쏠릴 거라 생각한다.
베르너는 그냥 웃기만 했다. 내가 왜 그러냐고 물으려 하자 그는 회장으로 가 보자며 앞장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