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16화
연주회 뒤엔 다양한 이벤트들이 덧붙여지는 경우가 많았다.
사인회나 음반 판매, 소장용 물품 판매, 자선모금행사, 선물 증정, 리셉션 파티 등이 그러한 이벤트 들이었다.
난 지금까지 몇 번 연주회를 하면서 사인회는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청중들과 뒤풀이처럼 파티를 한 적은 꽤 많았다.
그래서 이번에도 비슷하리라 생각했다.
어차피 시간도 많이 늦어서 400명 전부가 참석하지도 않을 터, 아마 100명 정도 참석할 것 같다. 그리고 콘서트홀에서 진행되는 리셉션 파티는 무한정 음식이 제공되는 게 아니라서 금방 끝나는 편이었다. 말 그대로 청중들과 마지막 인사를 할 시간을 갖는 이벤트 행사다.
그런데 뭔가 분위기가 이상했다.
“그쪽 줄 서세요, 줄.”
“여기 맞습니까?”
일단 인원이 상상 이상이었다.
조금 시간차를 두고 연회장에 들어서니 수백 개의 눈동자와 스마트폰 렌즈가 내 쪽으로 향했다. 일정 때문에 바로 가 봐야 하는 분들을 제외하면 거의 다 온 것 같았다. 그리고 그중 반은 줄을 서 있었다.
워낙 분위기가 들떠 있어서 아버지나 친구들과는 바로 만나 인사도 하지 못했다.
그냥 가족들 옆에 서 있다가 찾아오시는 분들을 맞아 인사를 드리거나 원하시는 것들을 해 드릴 생각이었는데, 이미 줄까지 서 있는지라 그렇게 자유롭게 뭔가 할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누가 뭐라 하지 않아도, 뭔가 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베르너를 올려다보았다. 그가 조심스레 물었다.
“계약에 없던 행사가 될 것 같으니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런 이벤트를 의무적으로 해야 하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이 많은 사람들을 두고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고 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계약이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그렇게 베르너와 빅토르의 안내에 따라 연회장 한쪽 벽으로 향하자 수많은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갑자기 긴장감이 확 올라온다.
에르네스트는 이런 팬 서비스도 중요하다고 말하곤 했었다. 내가 지금까지 너무 안이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갑자기 왜 이렇게 분위기가 바뀐 건지 잘 모르겠다. 독주회라서 그런가……?
“괜찮으십니까?”
“아…… 괜찮아요.”
잠깐 멍하니 있었나 보다. 빅토르가 소곤거리며 물었다. 내가 안 괜찮다고 하면 당장에 모두 취소시켜 버릴지도 모른다. 난 고개를 끄덕끄덕하며 자세를 다시 바로 했다.
베르너가 앉아서 하겠냐고 물었을 땐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야기는 못 했지만 저기 멀리 아버지와 루슬란 오빠가 보인다. 친구들도 근처에 모여 있었다. 마음 같아선 얼른 저쪽으로 가고 싶었지만, 내 연주회이니만큼 마무리도 내 손으로 완벽하게 끝내야 했다.
작게 심호흡을 했다. 안 해 본 것도 아니었고, 모두 날 호의적으로 봐 주시는 분들일 테니 힘들 일도 없었다.
준비되었다는 신호를 살짝 보내자 베르너가 알아서 마이크를 잡고 안내했다. 원래 기획으로 잡혀 있는 행사가 아닌데도 불구하고 베르너의 말 몇 마디로 척척 상황이 진행되었다.
맨 앞에 서 있는 건 스무 살 정도 되어 보이는 남자였다.
눈을 마주하자 조금 멈칫한다. 약간 어려워하는 것처럼 보여서 미소를 지었더니 그가 다가왔다.
“정말 감명 깊게 봤어요.”
“고마워요.”
그는 조금 주저하는 것 같았지만 그래도 똑바로 요청 사항을 전해 왔다.
“사인 받을 수 있을까요. 여기에…….”
“……이건 준비해 오신 건가요?”
“예, 물론이죠.”
불쑥 슈베르트 방랑자 환상곡 악보를 내밀길래 깜짝 놀랐다. 연주회 프로그램을 보고 미리 준비한 것 같았다. 이렇게 준비성이 좋을 줄이야.
나만 아무 준비가 없었던 것 같다. 속으로 반성하면서 물었다.
“성함이 어떻게 되시나요?”
“그냥 카를리스라고…….”
난 정성들여 사인을 했다. 특색 있는 사인은 아니었지만, 다시 악보를 받아든 카를리스 굉장히 기뻐했다.
그다음엔 나보다 조금 어려 보이는 여자애였다.
“악수해 주세요!”
“……?”
갑자기 무슨 말인가 싶었지만, 꼭 사인이나 사진만이 허가된다고 정해진 자리도 아닌데 악수라고 못 해 줄 건 없었다.
손을 맞잡자 따뜻해졌다. 그리고 난 이 애가 피아노 연주자라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손에서 느껴지는 느낌이 익숙하다.
“피아노 좋아하시나요?”
조금 바보 같은 질문이었을지도 모르겠는데, 곧바로 대답이 들려왔다.
“꽤 좋아했었는데요.”
“했었다고요……?”
“지금은 엄청 더 좋아하게 되었어요! 오늘부터 쇼팽의 안단테 스피아나토를 연습하려고요.”
“아하하하.”
밝게 웃으며 손에 힘을 주었다. 어떤 방식으로라도 도움이 될 수 있다면 좋겠다.
내 앞에 서는 사람들은 계속해서 바뀌었다. 선물을 가지고 오신 분들도 많아서 내 옆엔 꽃다발과 초콜릿 등이 쌓여 갔다.
한 명 한 명과 눈을 마주하며 이름을 듣고, 사인을 하고, 사진을 찍고, 악수를 했다. 모두 방금 전까지 내 연주를 듣던 청중들이라고 생각하니 최선을 다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중엔 먼 곳에서 오신 분도 있어서 놀랐다.
“훌륭한 연주회라 정말 만족스러웠습니다. 노보시비르스크에서 온 보람이 있군요. 타티아나 유리예브나. 사진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예……?”
중년의 남자가 왔다고 하는 노보시비르스크는 여기에서 수천 킬로미터는 떨어져 있는 곳이었다. 약간 당황스러웠다.
내 연주회 때문은 아니겠지? 그냥 모스크바에 볼일이 있어서 왔다가 우연히 내 연주회도 관람한 거겠지?
하지만 생각해 보니 더 멀리에서 온 세연도 있었다. 난 괜한 추리를 하지 않기로 하고 일단 감사부터 표했다.
“저야말로 멀리서 와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저기…….”
“글린카 국립 음악원의 그레민이라고 합니다. 혹 근처에 오실 일이 있으면 방문해 주셨으면 좋겠군요. 부탁드립니다.”
난데없이 글린카 국립 음악원의 교수님이 날 초대했다. 심지어 그 교수님이 줄까지 서서는 나와 사진을 찍겠다 하신다.
당황하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만, 달리 생각하여 행동할 이유는 없었다.
그레민 교수님은 교수로서 여기에 온 것이 아니었다. 한 명의 청중으로서 있었고, 또 연주회에 굉장히 만족하여 이 좋은 추억을 남기고 싶어 할 뿐이었다.
난 고개를 끄덕였다.
“꼭 기억할게요.”
그 대답만으로도 충분하다는 듯 그레민 교수님은 흡족한 미소를 짓고는 내 옆에 서서 사진만 한 장 찍고는 돌아갔다.
난 이 행사를 하지 않았으면 큰일 날 뻔했다고 생각했다. 조금 더 정신을 바짝 차리고 잘 해야 할 것 같다.
30분 정도 흐르자 줄이 많이 줄어들었다.
난 연주회의 피로와 계속 서 있으면서 사인을 하는 등의 피로로 굉장히 지쳐 있었지만, 그래도 꿋꿋하게 서 있었다. 힘들긴 해도 의미 있고 보람찬 일이었다.
그사이 돌아간 분들도 많아서, 연회장 안의 집중도는 이제 내 쪽에서 많이 벗어나 이곳저곳으로 분산되어 있었다. 살짝 보니 아버지 쪽에도 모르는 분들이 굉장히 많았다. 조금 뒤엔 저분들에게도 인사를 해야 할 것 같다.
그렇게 잠깐 뒤를 보고 있는데, 생각도 못 한 얼굴이 내 앞에 나타났다.
“아나스타샤?”
놀라서 이름을 불러도 아나스타샤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말없이 다가오더니, 갑자기 환하게 웃으며 손을 내밀어 왔다.
“오늘 무대 너무 좋았어요. 타티아나, 악수해 줄래요?”
“…….”
이 상황에 기억상실이냐고 묻을 정도로 눈치 없진 않다. 난 아나스타샤가 시키는 대로 악수를 했다.
갑자기 이렇게 마주하니 당황스럽긴 하지만 재미있기도 했다. 아나스타샤도 즐거운지 연신 웃었다. 그녀의 요청은 하나만이 아니었다.
“사인도 해 주세요.”
팸플릿을 받아 들었다. 친구에게 사인을 해 주다니, 뭔가 이상한 기분이었지만 저번 주에 세연이 왔을 때 우린 이미 각자 사인을 주고받은 적이 있었다.
난 이대로 당하고만 있을 생각은 없어서 팸플릿을 받아 펜으로 막 적으려다가 말고 고개를 들었다.
“성함이 어떻게 되시나요?”
“뭐……? 아하하하, 아나스타샤. 아나스타샤예요.”
이번엔 허점을 찔린 아나스타샤가 깔깔거리며 웃었다. 난 조금 더 화려하게 그녀의 이름과 내 이름을 모아 썼다. 즐거웠다.
“아나스타샤. 사진도 찍으시는 건 어떠신가요?”
“너무 좋죠.”
그녀가 흔쾌히 대답했고, 우린 나란히 섰다. 계속 옆에서 수고해 주는 베르너가 이번에도 아나스타샤의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찍어 주는 역할을 맡았다.
몇 장 정도 추억을 남기고, 난 슬그머니 고개를 기울이며 아나스타샤에게 속삭였다.
“아나스타샤.”
“응?”
“줄은 왜 섰나요?”
조금만 있으면 내가 갈 텐데. 그리고 사인이고 사진이고 원하는 대로 해 줄 텐데. 아나스타샤가 굳이 이럴 이유는 없었다.
그냥 장난이겠거니 싶었지만 그래도 한 번 물어보았다. 그런데 아나스타샤는 예상 밖의 대답을 했다.
“그야 내가 네 팬이니까.”
“…….”
장난스러운 어투이긴 했다. 하지만 발렌티나나 다른 친구들은 하지 않는 일이었다.
난 잠시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멍하니 아나스타샤를 올려다보았다. 그녀는 그저 방긋 웃기만 했다. 난 참지 못하고 그녀를 끌어안았다.
사인을 해 주거나 악수까지 하는 건 괜찮아도 이런 포옹은 베르너가 미리 사전에 금지시킨 바 있었다. 그래도 난 아랑곳하지 않았다. 내가 먼저 하는 걸 금지할 순 없겠지.
갑자기 안기게 된 아나스타샤는 내 등을 두어 번 토닥이더니 웃었다.
“이만 놔 줘.”
“……예.”
손을 놓고 물러서니 아나스타샤는 잠시 팸플릿을 내려다보고는, 입모양만으로 내게 힘내라고 말하곤 저편으로 빠져나갔다. 혹시 힘들어 보였나 싶어서 난 조금 더 자세를 바로 했다.
그 뒤로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이미 줄이 많이 줄어 있기도 했고, 계속되는 사인으로 익숙해진 것도 있었다.
난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사인 등을 주어도 되는지 계속 고민해 왔지만, 이렇게 보니 그리 어렵게 생각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꼭 유명인이어만 사람들의 추억으로 남을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지는 건 아니었다. 음악가라고 해서 반드시 음악으로만 남아야 하는 것도 아니었고.
사실 삶 전체가 오로지 음악뿐이라 생각해 왔던 내겐 강박증이 없잖아 있었고 지금 역시 그건 마찬가지였지만…… 지금은 훨씬 더 평범하게 청중들을 대하고, 연주자가 갖출 수 있는 다양한 태도를 다시 돌아볼 수 있었다. 조금 즉흥적으로 기획된 행사였지만 꽤 좋은 경험이었다.
줄을 서고 있던 모든 사람들이 각각 흩어져 리셉션을 즐기기 시작했다. 베르너가 마이크를 잡고 다시 한 번 짧게 안내했고, 내겐 비로소 시간이 생겼다.
난 곧장 가족들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걷는 것도 힘들 정도였지만 그렇다고 앉아 쉴 순 없었다.
“타티아나.”
다른 분들과 이야기를 하시던 아버지가 내 이름을 불렀다. 순식간에 또 시선들이 내게 날아와 꽂힌다. 난 크게 신경 쓰지 않고 아버지에게로 향했다.
“기다리셨나요.”
“아니다. 그 또한 네 의무이니까.”
아버지는 정확하게 그리 말씀하셨다. 난 이제 거기에 동의한다. 대신 웃으며 물었다.
“권리를 누릴 수 있을까요?”
“그럼.”
내가 뭘 말하는 건지 묻지도 않고, 아버지는 흔쾌히 대답하자마자 성큼 다가오셔선 포옹했다.
“네가 자랑스럽구나. 타티아나.”
“……감사합니다.”
정말 자연스럽고 얼핏 당연한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아버지의 칭찬은 내게 있어서 정말 큰 의미와 힘이 되어 주고 있었다.
주변에서도 갑자기 날 칭찬하는 목소리들이 가득해졌다. 심지어 몇 분은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기도 하셨다. 약간 당황스러웠지만, 2년 전 내가 막 일어났을 때 집에 찾아와 주신 분들이 계시다는 걸 알아보고는 왜 저렇게 감격스러워하시는지 이해했다.
생각보다 날 응원해 주시는 분들은 많을지도 모르겠다. 난 그 사실에 감사히 여기며 울지 않으려 애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