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18화
자렛스키가 아버지의 허락을 받아 싱글벙글하며 떠나가는 모습을 보며 난 미지의 두려움을 느꼈다.
스스로의 위치에 대해 이제 어느 정도 확신이 있긴 한데, 갑자기 다른 사람들이 날 둘러메고는 몇 계단 위에 올려놓은 기분이었다.
옆에 있던 에르네스트는 태연자약한 얼굴로 물었다.
“그렇게 부담이야?”
“…….”
그가 자렛스키의 말에 동조하던 모습을 떠올리니 얄밉다. 물론 좋은 의도에서 그랬겠지만…… 내가 그런 부분에서 부담을 느낀다는 걸 이해해 준다면 자제해 줄 수도 있었을 텐데.
살짝 원망하는 눈초리로 바라보자 그가 킥킥 웃었다.
“저 사람은 그래도 괜찮지. 적어도 동의를 구하려 했잖아. 여기저기 이름이 오르내리다 보면 정말 말도 안 되는 소리들도 많이 나와.”
에르네스트의 말에 난 반박하지 못했다. 자렛스키는 객관적으로 보아 괜찮은 평론가였다. 내가 그저 부담스럽다고 떼를 써도 될 만한 사람이 아니다.
할 말이 없어진 나는 에르네스트를 흘겨보다가 갑자기 생각이 나서 물었다.
“에르네스트는 별명이 있나요? 들어 본 적 없어요.”
“날 소개하려는 사람들은 내가 받은 훈장을 앞세우곤 하더라고.”
난 고개를 끄덕였다. 최연소 공로 예술가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는 에르네스트에겐 특별한 호칭 같은 게 필요하지 않을 테니까.
물론 시간이 더 흐르면 그를 다양하게 부르는 사람들이 많아질지도 모르겠지만…… 일단 지금은 그보다 내게 주어진 별명이 더 많은 것 같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지금 내게 너무 과분한 것들이 많은 게 아닌가 하는데, 에르네스트는 쓸데없는 생각 말라는 듯 손가락을 까딱이며 말했다.
“혹평을 하거나 음악이 아닌 다른 이야기를 하겠단 것도 아니니까, 편하게 받아들여.”
주어진 건 받아들이고, 해냈으면 기뻐해라. 에르네스트는 이전에도 몇 번이고 그렇게 말해 주곤 했다.
경쟁이 치열한 세계에 살면서 나 역시 그런 것들을 모르지 않았지만, 스스로에게 자격을 물으면서 이빨이 많이 무뎌진 건 사실이었다.
그런 내게 에르네스트가 종종 해 주는 말들은 꽤 도움이 되곤 했다.
연주자이자 경쟁자면서 검투사인 나는 간단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모든 건 내 연주의 결과였고, 그렇다면 결과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다.
생각이 정리되자 비로소 웃을 수 있었다. 난 미소를 지으며 에르네스트에게 말했다.
“그렇게 할게요.”
“좋아.”
“그래도 용서할 수가 없어요.”
“……어?”
에르네스트가 조금 당황해한다. 순간 웃어 버릴 뻔했지만, 난 심각한 척 표정 관리를 하면서 그에게 선언했다.
“이번 같은 기회가 다음에 에르네스트에게 생긴다면…… 그땐 제가 똑같이 돌려 드리겠어요. 아시겠나요?”
언젠가 에르네스트가 다른 이름으로 불릴 날이 온다면 가만있지 않고 그가 부끄러워 죽을 만한 이름으로 불러 볼 생각이다.
그는 자신이 만들어 낸 결과는 당당하게 받아들이는 성격이었지만, 과연 끝까지 부끄러워하지 않을 수 있을지 궁금해졌다.
에르네스트는 멍하니 내 얼굴을 보더니 말했다.
“그러지 마, 제발.”
하지만 제발이라는 말과는 다르게 그의 눈은 희미하게 웃고 있었다. 내 말이 장난인지 아닌진 나중에 증명할 날이 오겠지.
자렛스키 이후로도 날 찾는 음악계 관계자분들이 몇 분 있었다.
송년 연주회 이후에 많이 들어왔던 인터뷰 문의나 출연 요청 등을 모두 거절했던 내가 갑자기 독주회를 연 것에 대해 궁금해하는 것 같긴 했지만, 그리 곤란하거나 문제될 질문은 없었다. 난 단순히 지난 반년간은 기량을 끌어 올리는 시간이었다고만 짧게 답했다.
“그럼, 앞으로는 활동을 넓혀 나가실 생각이신지?”
난 곧장 대답하지 못했다.
이번 독주회는 내가 반쪽짜리 같은 한 명이 아닌, 두 명 같은 한 명으로서 제대로 피아노 앞에 앉을 수 있다는 것에 대한 증명과도 같은 무대였다.
지금까지도 계속 걷고 있긴 했지만, 이제야 비로소 균형감 있게 첫 걸음을 내디딘 기분이다.
그런데 바로 뛸 수 있겠냐고 묻는다면 할 수 있다고 답할 수 있을 리 없었다.
하지만 차근차근 한다면 못 할 것도 없다.
“……예, 할 수 있는 것부터 해 나갈 생각이에요.”
단순히 콩쿠르나 연주회에서 그치지 않는다. 제대로 된 음악가가 할 수 있는 일들은 굉장히 많다. 난 앞으로 가능한 일들에 대해 속단하고 사양하지 않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 내 대답은 꽤 긍정적으로 들린 모양이다. 혹시 앞으로 정해지는 것이 있다면 알려 달라는 요청들이 여기저기에서 들어왔다. 난 어떤 활동을 하게 될진 모르겠지만 그렇게 하겠다고 답했다.
어른들의 질문 공세가 끝나고 난 뒤엔 친구들과 편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이 이어졌다.
앞으로 뭘 할 거냐는 내용으로 비슷한 대화들이 흘러갔지만, 이전엔 음악가로서의 활동을 묻는 것이었다면 이번엔 방학을 맞이한 학생으로서의 활동을 묻는 내용들이었다.
“아나톨리, 방학 계획은 세우셨나요?”
평소 점잖은 아나톨리였지만 방학 이야기엔 들뜨지 않을 수 없었다.
“이탈리아에 다녀올 예정이에요.”
“아, 정말요?”
해외여행이라면 들뜰 만도 했다.
게다가 이탈리아 여행은 아나톨리에게 있어서 꽤나 의미 있는 여행인 것 같았다. 그는 생각만 해도 흥분된다는 듯 말했다.
“밀라노와 크레모나를 둘러볼 계획인데요……. 크레모나는 스트라디바리우스와 과르니에리의 본고장이라고 해요.”
누가 바이올린 연주자 아니랄까 봐. 난 웃으며 덧붙였다.
“맞아요. 최초의 바이올린인 아마티 역시 크레모나에서 만들어졌죠.”
“그건 어떻게 아셨…… 아, 누나 바이올린도 하시죠.”
“가 본 적 있기도 해요.”
현악에 관심이 없으면 잘 모를 수도 있겠지만, 크레모나에 대한 기억은 아련하게 남아 있었다.
흐릿하고 혼재되어 있어서 정확하진 않지만, 난 두서없이 생각나는 것들을 꺼내어 단어로 짜 맞추었다. 크레모나 하면 생각나는 것이 있었다.
“박물관에 갈 생각인가요?”
“예. 연주도 해 볼 기회가 있으면 좋겠어요.”
“대여 연주를 신청하실 생각이신가요?”
크레모나의 바이올린 박물관museo del violino엔 바이올린들이 전시되어 있기만 한 것이 아니라 내부 콘서트홀도 갖추어져 있어서 종종 박물관의 소장품들을 대여해 주기도 한다.
물론 아무나 빌려주진 않는다. 어마어마한 고가의 바이올린들이니 미리 신청도 해야 하고 보험도 가입해야 하며 엄격한 심사도 거쳐야 했다. 쉬운 일은 아니다. 이제 열 살인 연주자가 대상이라면 더더욱.
“신청해 보려고 해요.”
그래도 아나톨리는 도전해 보려 했다.
스스로도 안다. 작년 바이올린 콩쿠르에서 우승하긴 했지만 그런 성적으로는 대여가 어려울 수도 있다는 걸. 하지만 그래도 아나톨리의 눈엔 반짝이는 열정만이 가득했다.
난 아나톨리가 이번 여름방학에 이탈리아에서 부디 좋은 경험을 하고 오길 기도했다.
류보비와 사샤도 방학 일정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개인 연습과 여행 등을 생각하고 있긴 하지만, 어디 멀리 해외로 갈 생각은 없는 것 같았다.
꼭 해외로 가야만 하는 사람도 있었다.
“난 잠깐 집에 갔다 와야겠어. 말이 많아서 원.”
유학생인 리처드가 세상 귀찮다는 투로 투덜거렸다.
이전 같았으면 조금 걱정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난 그가 지금 선택한 길을 후회하지 않고 있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에 웃으며 바라볼 수 있었다.
자기 선택으로 이곳에 와 있는 또 한 명, 한승우도 스마트폰을 보더니 말했다.
“나도. 모레 비행기야. 이 애도 모레라고 해서 아마 같이 가게 될 것 같아.”
그 옆엔 세연이 있었다.
두 사람은 만난 시간은 얼마 되지 않았지만 같은 나라 사람이라는 이유 덕분에 금방 친해져 있었다. 우연찮게 비행기 시간도 같다니 더 친해질 수도 있을 것 같다.
그에 비해 난 아직도 세연과 친하다 말하기 어려웠다. 연주회에 초대를 하고 내 친구들을 소개해 주었지만, 정작 나와 그녀 사이엔 약간의 거리감이 존재했다.
일방적으로 내 쪽에서 둔 거리감이라 미안하다.
“…….”
세연은 가만히 날 바라보고만 있었다.
이전까진 영어로도 적극적으로 잘 이야기하고 잘 웃었지만, 연주회가 끝난 다음 그녀는 오늘 연주에 대한 짤막한 평만 해 주곤 별 말이 없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들어 보고 싶지만, 내 쪽에서 물어볼 순 없었다. 그저 일전에 세연이 말했던 대로 내 연주에서 무언가 얻어갈 수 있다면…… 기쁠 것 같다. 그저 그뿐이었다.
내가 옅게 웃어 주었더니 세연도 따라 미소를 지었다. 우린 그 이상 무언가 이야기를 나누진 않았다. 그러나 어색하지 않고 편안한 시간이었다.
“…….”
그렇게 친구들과 방학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면서 든 생각이 있다.
혹시 나만 계획이 없나?
작년 이맘때도 음반 녹음만 하고는 바로 내 경호원들을 휴가 보냈었다. 개인적인 방학 계획이라곤 피아노 연습뿐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올해도 바쁘게 눈앞에 닥친 독주회에 모든 신경을 쏟아붓고 나니 막상 기나긴 방학 동안 계획이 없었다.
할 일이 없는 건 아니다. 집에 틀어박혀 피아노 연습이나 하면 되니까. 하지만 평범하게 방학 동안 무언가 하고 싶기도 했다. 그게 무엇이든지간에.
난 일단 가장 가까이에서 조언을 구할 수 있는 사람을 찾았다.
“아나스타샤는 방학 계획 있으신가요?”
그녀는 내가 멍하니 있으면 늘 방향성을 제시해 주곤 했었다. 그래서 이번에도 조금 기대를 했었는데, 생각외의 답변이 돌아왔다.
“응? 글쎄. 이번엔 그냥 집에 있으려고.”
아나스타샤의 입에서 집에 있겠다는 말이 나오는 게 왜 이렇게 어색하게 들리는지 모르겠다.
그래도 나랑 똑같은 무계획파가 한 명 늘었다는 것에 기뻐해야 하나?
난 그다음으로 에르네스트에게 물었다.
“에르네스트는요?”
“작곡 공부 말고는 별 계획 없어.”
생각해 보니 그는 원래부터 놀러 다니길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방학이라고 해서 특별할 것도 별로 없다. 그에게 있어서 학교에 가지 않는다는 건 수업 없이 혼자서 공부할 시간이 많아진다는 의미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 역시 음악에 충실히 미쳐 있는 사람이었다.
“……음.”
특별한 계획은 아무도 없는 것 같다. 그렇다면 구태여 나도 다른 무언가 할 필요가 있겠나 싶다. 그냥 언제나 해 왔던 것처럼 음악 공부를 하면서 방학을 보내도 괜찮을 것 같다. 10학년은 중요한 학년이기도 하고.
대충 그렇게 이번 방학도 음악과 함께 흘러가는 대로 보낼 생각이었는데, 아나스타샤가 문득 엉뚱한 말을 했다.
“에르네스트. 이야기는 언제 하려고?”
“무슨 이야기?”
“파티 안 할 거야?”
파티는 지금 하고 있지 않나요?
두 사람 사이에 낀 나는 순간 바보 같은 말을 할 뻔했다가 간신히 참았다. 일단 잘 모르겠으니까 듣기만 하자.
에르네스트는 무표정하게 중얼거렸다.
“무슨 파티까지…….”
“작년에도 그랬으면서 이번에도 또 어물쩍 넘어갈 생각이니?”
“뭘 어물쩍 넘어가……. 스케줄 있었잖아.”
절대 봐줄 생각 없다는 투의 아나스타샤와 조금 불편해하는 에르네스트를 보며 나는 참지 못하고 끼어들 수밖에 없었다.
“무슨 말씀이신가요?”
“……?”
아나스타샤가 날 바라보았다. 그녀의 얼굴엔 의문이 가득했다. 왜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느냐는 표정이다.
하지만 곧 장난스러운 미소가 더해졌다.
“무슨 이야기였게?”
“글쎄요…….”
주어진 단서들만 가지고는 잘 모르겠다.
내 독주회에 대한 작은 파티라면 지금 하고 있고…… 혹시 에르네스트도 작곡가로서 첫 발을 성공적으로 내디딘 것에 대해 파티를 할 생각인 걸까? 그렇다면 그런 것도 괜찮을 것 같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작년 이야기는 뭘까?
내가 헤매고 있자 아나스타샤가 살짝 힌트를 주었다.
“저번 달엔 내가 했었던 것 있잖아.”
멍하니 들으면서 저번 5월을 떠올려 보았다.
9학년 2학기 공부를 하느라, 독주회 프로그램 연습을 하느라 정말 눈 코 뜰 새 없던 한 달이었다.
때문에 책상과 피아노 앞에 앉아 있었던 것 외의 다른 기억은 거의 없었다. 딱 하나 꼽자면 아나스타샤의 생일만 기억났다.
정신없던 와중에도 그녀의 생일날만큼은 잠시 모든 신경을 풀어놓고 축하해 주며 쉴 수 있는 시간이었…….
“아……!”
기겁하며 에르네스트를 돌아보았다. 그는 어색하게 고개를 저었다.
캘린더에 기록은 해 놨었고 며칠 전까지만 해도 분명 생각하고 있었는데, 연주회에 집중하다 보니 까맣게 잊고 있었다.
난 미안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화가 나기도 했다. 어떤 얼굴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